동천(冬天) – 258화
동천은 주춤했다. 폐혈서생의 예상대로 양패구상을 한 외팔이가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자신을 부르자 다가가기가 꺼림칙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춤하던 동천이 다가간 이유는 오직 ‘소협’이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무슨……일이슈?”
엽소는 꺼질 듯 말 듯한 생명의 끈을 붙잡고 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이것을, 이, 이것을 황룡세가에 부탁…….”
“뭐? 황룡세가?”
이만 세상을 뜨려던 엽소는 동천의 격렬한 반응에 혹시, 천추의 한을 남기나 싶어 마음대로 죽지도 못했다.
“그, 그곳에 원한이라도 이, 있는 것이오?”
그렇다고 말하려던 동천은 보아하니 곧 뒈질 것 같기에 편히 가라고 좋게 말해줬다.
“없어. 다만 그곳에 재수 없는 년이 있어서 꺼릴 뿐이야.”
엽소는 손에 쥐고 있는 양피지를 건네주며 다짐을 받으려 했다.
“그렇다면……이것을 황룡세가에 꼭, 꼬옥 갖다 주실……수 있겠소?”
주는 거니까 받아든 동천은 미미 년 생각에 한차례 몸서리를 친 후 건성으로 답했다.
“생각해볼게.”
그러자 엽소는 죽어 가는 사람답지 않게 동천의 손을 덥석 잡았다. 대경을 한 동천은 반사적으로 엽소의 아가리를 후려쳤다.
“켁?”
그제야 동천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앗? 이봐! 괜찮아? 이, 일부러 친 게 아니고 갑자기 잡아서 그런 거라고!”
목이 돌아간 엽소는 마지막 순간에도 편히 죽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허무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주, 죽었어?”
엽소의 죽음에 일조를 한 동천은 상대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바람에 상처가 난 옆구리에 충격이 가해졌다.
“윽! 아이고 옆구리야.”
너무도 아픈 나머지 상처 부위를 건드리기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허나 그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시체들 사이에서 놀고(?) 있는 자신이었다.
“으으, 아프고 뭐고 빠, 빨리 튀고 보자.”
동천은 태화서점에서 벗어난 후 재빨리 자신이 머물던 객점으로 뛰었다.
“도련님께서 늦으시는군.”
중소구는 걱정하는 도연의 중얼거림을 듣고 쾌활하게 말했다.
“걱정 말게. 바로 옆에 갔다 오는 것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도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지요?”
중소구는 장담하는 얼굴을 했다.
“물론이네. 그놈이 비록 생각 없이 굴기는 하지만 설마하니 책을 사러 가서까지 사고를 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놈은 몹쓸 놈일세.”
중소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천은 몹쓸 놈이 되어서 돌아왔다.
“도연아! 헉헉, 중 대인!”
동천은 자신의 처지를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 바닥을 굴렀다. 그 덕에 다친 곳을 부딪친 그는 진짜로 죽으려고 했다.
“아흑? 동천 죽네!”
도연과 중소구는 피투성이인 동천이 나동그라져 죽는 시늉을 하자 깜짝 놀라 황급히 다가갔다. 특히, 그 놀람의 정도가 더했던 도연은 재빨리 동천을 일으켜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얼굴을 일그러뜨린 동천은 혀로 입을 축였다.
“우, 우선 물 좀…….”
도연은 재빨리 물을 대령했다. 게눈 감추듯 홀랑 물을 마셔버린 동천은 그제야 살겠는지 몸을 나른하게 풀었다.
“후우, 후. 그게 말야. 이 몸께서 정신을 갈고닦기 위해 서적을 구입하러 갔는데 늙은 주인이 어색하게 맞아들이더라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핏물이 떨어지고……. 으으, 알고 보니 그놈이 염소인데 허파에 피 묻은 서생이라는 놈이 말야.”
중소구는 동천의 횡설수설을 잠시 멈추게 했다.
“이놈아! 그게 뭔 소리야?”
동천은 몸을 덜덜 떨었다. 안전한 곳에 와 있어 긴장이 풀린 덕택이었다. 더군다나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던 동천의 머릿속에 소름 끼치는 잡념까지 끼어들어 그 증상이 더했다.
“그러니까 피 묻은 놈이……, 염소야 게 섯거라 했는데…….”
이번엔 도연이 동천의 말을 막았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들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중소구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는 안 되겠습니다. 우선 안정을 취하게 하신 후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듣는 것이 낫겠습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중소구의 동의까지 받아낸 도연은 떨고 있는 동천을 침대로 이끌었다. 그때 그는 주군의 양 손에서 특이한 것들을 발견했다. 왼손에는 구겨진 양피지, 오른 손에는 너무도 낡아 세월의 흐름조차 가늠치 못할 정도의 묵 빛 철경이 들려 있는 것이었다. 도연은 당장에 불필요한 것들을 빼내려고 했다. 허나, 돌덩이처럼 굳어있는 동천의 손아귀는 펴질 줄을 몰랐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도연은 동천을 그대로 눕히고 중소구에게 신형을 돌렸다.
“도련님의 상처 때문에 의원을 불러와야겠습니다.”
중소구는 나가려는 도연의 앞을 성큼 막았다.
“의원을 부르는 것은 본 대인이 처리할 것이니 도 소형제는 그사이 저놈 간병이나 하게.”
도연은 기쁜 신색을 띠웠다.
“그래주시겠습니까?”
“험, 맡겨두게.”
중소구는 자신 있게 장담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객점 주인에게 동전 10냥을 건네주고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의원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돈을 받아 챙긴 주인은 당연히 그리하겠다고 말한 뒤 점원을 시켰고, 그것을 확인한 중소구는 문제의 그 태화서점을 향해 신형을 옮겼다. 서점 주변은 벌써부터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중소구는 짐짓 아무것도 모른 채 하며 중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뭔 일이오?”
때마침 내부를 보고 나온 사내는 넘어오려는 것을 참아가며 손사래만 쳐댔다. 사내는 정 궁금하면 댁이 들어가 보라는 시늉을 한 후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들어가기 전 예의상 물어보았던 중소구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하기도 하고 고리타분하기도 한 서향(書香)이 흘러야 할 내부에는 비릿하고 역겨운 피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킁킁, 에이 간만에 맡아보는 거지만 못 맡을 냄새라는 것은 여전하군.”
아직 관아의 사람들이 출동하지 않아서인지 내부에는 여러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중소구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가 끈적끈적한 그 무언가를 밟았다.
“응? 이런, 재수 없게!”
그가 밟은 것은 토사물이었다. 중소구의 근처에 토사물들이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초입에 들어온 구경꾼들이 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도망 나간 흔적이리라. 그는 시체들 때문이 아닌 토사물들 때문에 방금 먹었던 것들이 올라오려고 했다.
“우웁, 안 보는 게 몸에 이롭다.”
그는 자신의 말을 재빨리 실천했다. 안으로 들어간 그가 제일 먼저 발견한 시체는 폐혈서생의 시체였다. 동천에게 맞아 실신을 할 때만 해도 살아있기는 했지만 그 후 조치가 없어 생을 마감한 것이다.
“쯧쯧, 태양혈이 불끈 솟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고수인 듯한데 등뼈가 결정적이었구나. 헌데 무엇으로 내려친 거지? 권장(拳掌)법은 아닌 듯한데.”
그가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른 곳을 살펴보는 사이,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실례하겠소.”
중소구는 고개를 약간 쳐들고 자신에게 용무가 있는 듯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고개가 들리지 않아 띠꺼운 듯한 인상을 풍겼다.
“무슨 일이오?”
다소 못마땅한 눈으로 중소구를 내려다보던 사내는 곧 그런 표정을 지우고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관계가 없는 분이시면 물러가 주시기 바라오.”
중소구는 천천히 일어났다.
“있으면?”
상대는 정해진 수순을 밟듯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련이 되었으며, 당신의 신분을 밝히시오.”
너무 억지라고 생각한 중소구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뭐? 네가 뭔데 감히 본 대인에게 그 따위를 말하라는 것이냐!”
중소구와 마주선 사내는 싸늘하게 답했다.
“이 일은 본교와 관련이 된 것이다. 이 일과 관련이 없다면 물러가는 것이 좋다.”
그제야 중소구가 약간 누그러졌다.
‘교(敎)? 교라면 마교 아니면 혈사교란 말인데.’
중소구는 상대의 옷차림을 살폈다. 그는 곧 혈사교는 제외했다. 혈사교 무리들은 대외 활동을 할 때 기본적으로 붉은색 계열의 허리띠를 착용했던 것이다. 말단들은 당연히 밋밋한 붉은색이었고 신분이 높아갈수록 제 취향에 맞게 붉은색에 무늬를 첨가할 수 있었다. 결론을 내린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 발 물러선 후 말을 건넸다.
“어느 마교인가?”
사내는 당당히 말했다.
“암흑마교.”
“소속은?”
“그것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다.”
사내의 싸늘한 일축을 뒤이어 다른 자가 끼어들었다.
“우리는 약왕전 소속 역마대요. 본인은 미천하나마 대주를 맡고 있고 이 사람은 부대주의 신분을 가지고 있소. 이제 되었소?”
중소구는 잔잔한 인상을 주는 중년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턱수염이 매력적인 자였다. 상대의 신분을 알게 된 중소구는 그제야 형식을 갖추었다.
“이제 보니 암흑마교 약전주 휘하의 역마대구려. 본인은 예전에 협객 중소구라 불렸으나 지금은 대인으로 그 호를 바꾼 중소구라 하외다.”
중소구의 신분이 밝혀지자 모두들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큼 그의 신분이 놀라웠나보다. 역마대 대주는 원래의 침착성을 되찾고 희미하게 웃었다.
“호를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려운 결정을 하셨군요.”
중소구는 다소 침울한 모습을 보였다.
“예전의 꿈은 버린 지 오래오.”
그 소릴 듣고 모두 어이없어할 때 대주 휘하의 마지막 사내가 다가와 귓속말로 보고를 올렸다.
“놀랍게도 이곳에서 소전주님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대주는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큰 소리를 친 그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중소구에게 양해를 표했다.
“이곳에 벌어진 일은 본교와 관련된 것이니 이만 나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게 된 중소구는 입맛을 다셨다.
“쩝, 그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