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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63화


어깨가 으쓱해진 한심은 자신이 뭐라도 되는 양 다소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그래그래. 내가 기억하는데 자네도 나를 기억하겠지. 헌데, 자네 같은 사람이 무슨 일로 전주님을 찾았는가?”

감송은 한심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흘려버렸다.

“허허, 당주님 말씀처럼 저 같은 것이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겠습니까. 그냥 부르시기에 온 것뿐입니다.”

팔짱을 낀 한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모습을 했다.

“전주님께서 자네 같은 사람을 부른 것을 보니, 어지간히 심심하셨나 보군. 으음, 빨리 소전주님이 돌아오셔야 할 텐데…….”

별로 대화를 지속시키고 싶지 않았던 감송은 넌지시 물었다.

“안 바쁘십니까?”

“앗차차! 내 정신 좀 봐! 한시가 급한 것인데 이렇게 노닥거렸다니. 으으, 난 이만 먼저 가보겠네. 바쁘다 바빠!”

초향은 휑하니 달려 나가는 한심의 뒷모습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심 혀를 차던 그녀는 자신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사라지는 감송에게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초향을 지나친 감송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내디뎠다.

‘아내를 놔두고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여지껏 수많은 위험을 겪었어도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거늘 과연 지금의 내 선택이 옳은 것일까?’

그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덕분에 흔들리던 다짐이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잠시 멈춰선 감송은 결심을 굳히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울러 시원한 미소를 떠올렸다.

‘허허, 곧게 가면 될 뿐이리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신형을 빨리 한 감송은 올 때는 보지 못했던 화단을 보게 되었다. 여유를 갖고 사물을 바라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속속 그의 눈에 들어찼던 것이다. 화단 안의 꽃들은 파랗고 연분홍빛 물결로 이루어져 있었다. 찰나간 바람이 불어오자 일단의 꽃무리가 마치 물결이 치듯 향긋한 내음을 머금고 화단 전체를 일렬로 왕복했다. 그 모습을 접한 감송은 저도 모르게 깊은 탄성을 내질렀다.

“허어!”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것도 보는 이의 심경에 따라 사물이 달라 보이듯 감송의 눈에는 지금 그 모습이 환상적이었던 것이다. 절로 심취한 그는 화단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이제는 멈춰버린 순간의 화무(花舞)를 되새겼다.

‘찰나에 일어나 멈추어버린 꽃들의 춤사위가 마치 나의 지나온 인생을 노래하는 듯하구나…….’

“정원사가 바뀌었는가?”

뒤에서 가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감송이 고정된 그 자세로 아련한 옛일을 회상할 때였다. 흠칫한 감송은 황급히 일어나 뒤쪽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려한 인상의 사내가 바퀴 달린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동천의 사형인 공영수였다. 감송이 공영수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암한문 내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던 감송은 오늘에서야 처음 공영수를 대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공영수의 신분을 어찌 단번에 파악할 수 있겠는가. 단만 처음부터 어른인 자신에게 하대를 하는 것과 약전주인 역천의 둘째 제자가 하반신 불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대충 짐작할 따름이었다.

“허허, 저는 정원사가 아닙니다.”

감송과는 달리 진작부터 상대를 알고 있었던 공영수는 하마터면 당황한 표정을 떠올릴 뻔했다. 그러나 당황했던 것만큼 추스르는 것도 비슷했기에 그다지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으응? 정원사가 아닌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을 만나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던 공영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데 갑자기 옆구리가 쑤시는 것을 느꼈다.

‘으윽, 그때의 상처가…….’

분명히 예전에 깨끗이 아물었던 상처였다. 헌데, 그 상처의 주범을 다시 대하자 무의식적으로 신체가 반응을 한 듯싶었다. 감송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 했던 공영수의 존재를 주의 깊게 음미해보았다. 그리고 그는 공영수의 눈을 보게 되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눈매인데.’

괜히 찔리는 게 있었던 공영수는 은근슬쩍 감송의 눈길을 피했다.

“내 얼굴에 뭔가 묻었나 보군.”

감송은 상체를 약간 뒤로 젖혔다.

“허허, 아닙니다. 제가 뭘 잘못 보았나 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감송의 시선은 여전히 공영수의 눈매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공영수라고 그것을 못 느낄 리 없었다.

“내가 자네를 정원사로 잘못 본 듯하구만. 험, 볼일이 없어졌으니 이만 가보겠네.”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쫓기는 듯한 양면성을 보였다. 감송은 스쳐 지나가는 공영수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괜히 건드려볼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영수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신형을 움직였다.

‘언젠가 지나치거나 본적이 있는 것 같은데 쉬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흐음, 내가 그것을 기억하기에 너무 늙어버린 것일까?’

암한문으로 돌아온 감송은 자신의 방에서 소연이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마루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앞으로 가야 할 일에 대한 걱정과 그에 따른 대처방안을 떠올려야 정상이건만 어찌된 일인지 한 가지 석연치 않은 문제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눈빛……. 분명히 어디선가 보았는데 말야.”

그의 고심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의 부인이 보았다면 역천과의 일이 틀어진 줄 착각할 정도였다. 이 생각도 해보고 저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어디에서 보았을까? 어디에서?”

감송은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어떻게든 기억해 보려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전혀 엉뚱한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사공님, 사부님께서 부르십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감송은 언제 고심했냐는 듯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 그러냐? 알겠다.”

소연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인사를 받고 난 감송은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눈을 감고 남편을 기다리던 민소희가 스르르 눈꺼풀을 올렸다.

“어떻게 되었지요?”

감송은 그리 밝은 얼굴은 아니지만 대답만큼은 활기찼다.

“잘 되었소. 허허, 아마도 빨리 떠나게 될 것 같소이다.”

그제야 민소희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그어졌다.

“천만다행이군요.”

그녀의 말에 동조라도 하듯 감송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지.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지. 그렇고 말고…….”

감송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보였다가 아니라 실지로 자기 자신에게 대답하고 있었다. 무슨 낌새를 느꼈음인가? 민소희는 남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일이 잘 되었다는 말과는 달리, 정 반대의 표정인데 무슨 다른 문제가 있나요?”

감송은 급히 그런 기색을 감추었다.

“허허, 내가 그렇게 보였소? 아마도 잘못 보았을 게요.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을 문제라고 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것이 아닌 바에야 문제될 것이 또 뭐가 있겠소.”

민소희는 뭔가가 더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음에도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에 믿는 척하고 넘어갔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제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되는 거군요.”

“그렇소.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오.”

“호호, 막힘이 없어 다행이네요.”

감송은 부인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행이라…….”

공영수의 눈매가 잊히지 않는 감송이었다.

“이제 화정이를 데려올 필요 없어.”

사정화의 담담한 목소리에 소연은 깜짝 놀랐다.

“예? 왜요?”

사정화는 소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대답해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그 추측이 맞다면 사정화는 전자 쪽을 택했다.

“한 가지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야.”

대답을 듣고 난 소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무공은 지금도 익히고 계시는데 또 어떠한 무공을 익히시려고…….”

사정화는 방금 전과 똑같은 시선을 소연에게 보냈다. 그녀는 소연이 슬며시 눈을 내리까는 순간에 입을 열었다.

“내가 여태껏 이곳에서 생활을 한 것이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였다고만 알아두면 돼.”

만족할 만한 대답은 아니지만 소연은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네에, 그렇군요.”

소연은 수긍하는 척하면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화정이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화정이가 즐거워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 아가씨와 비무를 그만두게 되어서 섭섭해할 것 같네요.”

“너는?”

“예?”

사정화는 별 표정 없이 되물었다.

“너는 어떠냐고.”

당황한 소연은 말을 더듬었다.

“그, 그야 당연히 저는 아니죠. 호호, 수련이하고 자주 찾아뵐 수 있잖아요.”

사정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적어도 3년 동안은 나에게 찾아올 수 없어. 그건 수련도 마찬가지야.”

소연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이라면 몰라도 수련까지 못 오게 한다는 소리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수련까지요?”

처음으로 사정화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

확답이 나왔지만 다시 물어봐야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문제의 중간을 생략하고 그대로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에 쉽사리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소연은 아가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는 것을 상기시키고는 이번엔 조용조용 물었다.

“수련까지도 그 무공의 존재를 알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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