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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70화


“언니. 언니? 언니!”

“으응, 응?”

“어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이래저래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소연은 씁쓸한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별거 아냐. 봄이고 해서 왠지 심란해서 그래.”

수련은 언니의 대답을 곱씹어 본 후 자신만의 결론을 내렸다.

“왜 심란하지? 난 안 그렇던데?”

소연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동생의 이야기에 웃다가 자신의 앞날을 떠올리게 되자 곧바로 시무룩한 모습을 했다. 수련은 그런 언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소연은 힘없이 말했다.

“무슨 일은……. 그런 것 없어.”

가만히 응시하던 수련은 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보다 더 하지는 않을 거라 단정 짓고 계속되는 물음을 중단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보다 더 하겠어요? 에휴, 그때 아가씨께 여쭈러 가니까 언니의 말씀대로 제가 가까이 있으면 위험해서 안 된다 하시더라고요.”

“그랬구나.”

언니의 대꾸가 너무도 힘이 없어 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번 언니를 바라보게 되었다.

“겨우 그거예요? 적어도 ‘어머, 그랬니? 정말 가슴 아프겠다. 너 이제 어쩌니. 수련아, 내가 뭐 위로해 줄 말이 없지만 그래도 힘내라는 말 정도는 해줘야겠구나. 너도 이젠 다 컸으니까 혼자서도 잘 생활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가씨께서 몇십 년 동안 만나지 않겠다고 하신 것도 아니잖니? 고작 몇 년뿐이니까 그동안 네가 열심히 무공에 정진하여 아가씨께 성숙한 네 모습을 보인다면 아가씨께서도 분명히 기뻐하실 거야. 그래, 넌 잘할 수 있어. 이 언니는 꼭 꿋꿋하게 버텨내리라 믿어!’ 정도는 말해줄 줄 알았는데…….”

얼마나 단련이 되었으면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숨 한번 고르지 않을까? 소연은 미안함을 느끼기 이전에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그 많은 말들을 주절거린 동생에 대해 경외감을 금치 못했다.

“미, 미안해. 하지만 방금 내가 해주려던 말을 네가 먼저 하는 바람에 더 해줄 말이 없는데 어쩌지?”

소연의 입장에서는 대충 얼버무린 것이지만 수련은 기뻐했다.

“와아! 정말이에요?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면 됐어요. 후훗, 역시 언니라니까? 언니의 그 위로를 들으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자,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무공 수련을 해야지!”

뭔가 골이 띵했던 소연은 같이 있고 싶어야 하는데 왜 동생에게서 벗어나고 싶은지 이해가 안 갔다. 그나마 무공 수련을 한다고 목검으로 휘젓고 있을 때만은 조용하기 그지없어 슬픈 분위기를 잡기에는 한결 편했다. 소연은 반 시진 가량 동생의 검무를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날 따라 걸어 나오는 길목 양쪽에 자리한 나무들은 왜 그리도 푸른지.

‘수련아 미안해. 내일 떠나기 전에 한번 들렸는데 차마 네게 말도 못하고 떠나는 이 언니를 용서해 줘. 흑흑.’

오늘은 감송이 떠난 지 열흘이 되는 날이었다. 이제나저제나 떠날 날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오늘 아침에 내일 떠난다는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이곳으로 온 뒤, 사정화와 수련을 차례로 방문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무사히 떠날 수는 있는 걸까. 정말로 나중에 주인님을 뵐 수는 있는 걸까?’

뒤로 갈수록 강한 의문을 던지며 걸어가던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 약왕전으로 돌아왔다. 민소희는 의례적으로 남편이 지키고 있던 마루에 나와 앉아있었는데 소연이 돌아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생에게 갔다 온 모양이로구나.”

“예.”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소연은 눈물이 복받쳐 올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다만 표시는 해야겠기에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오늘은 푹 쉬거라.”

내심 한숨을 내쉰 민소희는 방안으로 신형을 돌려 들어갔다. 들어가는 사부에게 인사를 올린 소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소연은 두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다 제정신을 차렸다.

“그래. 오늘이 떠날 날인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후우, 사부님께서 모두 챙겨놓으신다고 하셨지만 나도 나름대로 준비해야겠다.”

돈이 될 만한 장신구와 아끼던 옷 한 벌을 여벌로 준비한 그녀는 더 가지고 갈 것이 없나 살펴보다 그동안 화정이를 돌보느라 참고를 했던 용독경을 보게 되자 고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저건 주인님께서 아끼시던 건데 가져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중에 돌아오신 주인님께서 찾으셨다가 없어지면 내가 훔쳐간 줄 오해하실 게 분명하지만, 내가 떠난 뒤 누군가 이것을 찾게 되면 큰일이 날 텐데 어쩌지?”

이것저것 생각하며 머리가 빠개지도록 갈등을 겪던 소연은 비록 오해를 받더라도 가져가는 편이 좋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역시, 내가 가져가는 게 좋겠어.”

품속에 두툼한 용독경을 집어넣은 탓에 왼쪽 가슴 부위가 불룩 튀어나왔다. 소연은 괜스레 얼굴이 붉어져 급히 다른 생각에 몰두했다.

“가서 화정이를 깨워야겠다.”

그녀가 동천의 방으로 건너갔을 때 화정이는 이미 깨어있는 상태였다. 창가에 비춰 드는 햇살을 받아들이려는 듯 화정이는 창가에 상체를 기대고 있었다. 언제나 이 시간에 자고 있던 화정이가 이렇게 일어나 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정아, 너 거기서 뭐하니?”

화정이의 신형이 천천히 소연 쪽으로 돌려졌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꿈꿨어.”

뭔 소린가 했지만 이내 알아들었다.

“아아, 꿈?”

이해를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소연의 눈이 갑자기 더 이상 커질 수 없이 커졌다.

“뭐어? 꾸우움?”

그도 그럴 것이 강시는 꿈을 꿀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지난날의 과거나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강시에게 그런 권한은 애초에 박탈이 된다. 만일 강시가 꿈을 꾼다면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고, 심지어는 대법이 깨지기 때문이다. 심히 불안해진 소연은 급히 물어보았다.

“무, 무슨 꿈을 꿨는데? 응?”

생각을 떠올리듯 두 눈을 위로 향하게 하고 요리조리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정이는 마침내 기억을 한 듯 기뻐하며 말했다.

“동천 꿈. 자고 있는데 나타나서 화정이 가슴을 만져주었어.”

소연은 얼굴을 붉히기 이전에 다행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시의 꿈에는 망각의 꿈과 현실의 꿈이 있었는데 지금 화정이가 꾼 꿈은 현실의 꿈이었던 것이다. 즉, 강시 이전의 자신을 꿈에서 보았다면 그것은 망각의 꿈이 되는 것이고, 강시 이후의 자신을 보았다면 현실의 꿈이 되는 것인데 현실의 꿈은 강시인 자신을 인정하지만 망각의 꿈을 꾸게 되면 그 반대가 되어 대법이 깨지기 때문에 소연이 안도한 것이었다. 소연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하려는 듯 상의를 풀어헤쳐 자신의 가슴을 조물락거리는 화정이의 팔을 재빨리 내렸다. 그런 소연의 얼굴은 달아오르다 못해 익을 정도였다.

“화, 화정아. 그렇게 안 해도 다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

화정이는 천진난만하게 대꾸했다.

“알았어. 응, 알았어.”

진이 다 빠진 소연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른 주의를 줘야 하는 것이다.

“화정아 잘 들어. 너 다시는 꿈을 꾸면 안돼. 알았지?”

그러자 드물게 화정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왜 꾸면 안 되는데. 화정이는 동천 보고 싶은데.”

마음이 약했던 소연은 슬퍼지려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다. 한 번 꿈을 꾸게 되면 자꾸 꾸게 되고 나중에 가서는 큰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안돼! 이건 명령이니까 다시는 꿈을 꾸지 마! 알겠니?”

찔끔한 화정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어 몇 번 더 주의를 준 그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헌데, 화정이가 이미 망각의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는 것을 알면 소연이 어떠한 표정을 지을지 심히 궁금할 따름이었다. 떠나기에 앞서 화정이에게 새 옷을 입혀준 소연은 그녀를 데리고 사부의 방으로 찾아갔다.

“사부님.”

이미 기다리고 있던 민소희는 조용히 말했다.

“들어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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