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7화
턱주가리를 정확하게 땅에 부딪혔지만 그보다 먼저 가슴팍부터 바닥에 부딪혔다. 그렇기 때문에 동천은 한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게 이제 죽는구나..할 정도여서 턱에서 몰려오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 가슴의 고통이 물러나가자 그제서야 두 번째 부딪힌 턱이 아프기 시작했다.
“쿨럭! 으.. 살려주… 헉헉! 이빨 아퍼.. 옥수수 되겠다…”
아팠다. 진짜로 아팠다. 특히 공포에서 느끼는 아픔이 이렇게 강하게 다가올 줄은 동천 자신도 몰랐던 일이었다. 순간 동천의 눈에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洞窟)이 보였다.
“헉.. 헉.. 도.. 동국이가.. 아니고, 동굴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는 이런 으스스한 곳에 동굴이 있다면 당연히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동천의 심리상태(心理狀態)는 주위에 보이는 것이 다 괴기(怪奇)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앞뒤를 가릴 것도 없이, 우선 숨고 보자는 생각만이 앞서 있었다.
“사.. 살았다. 우선, 들어가고 봐야지.. 여긴 너무 무서워.”
동천은 자신이 숨을 곳이 생겼다고 생각하니까, 으스스하게 보이던 동굴이 한순간에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인간은 착하게 살고 볼일이야. 이런 무서운 곳에서 숨을 곳을 찾다니..”
순간적으로 마음에 안정을 찾은 동천은 아까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는 표정으로 달려갔다.
“어? 불빛이네? 여기에 웬 불빛이지?”
역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런 곳에 불빛이 있으면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주위에 널려있는 뼈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도망을 갔을 테지만 동천은 단순하게 불빛만을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안에서 착 가라앉은.. 그래서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냐..”
그 목소리에 동천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힉! 누.. 누구?”
동굴 안의 목소리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동천의 말을 무시하고는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너는 누구냐..”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던 동천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상대방이 자신이 누군지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워낙 드러내고 싶어하는 동천이 이걸 마다할 리가 없었다.
“저.. 헤헤.. 제가 누구냐 하면요.. 하늘이예요.”
동천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자 동굴 안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음.. 좋다. 그렇다면 무슨 하늘이냐..”
동천은 안에 있는 괴인(怪人)이 자신의 성까지 알려고 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마저 가르쳐 주었다.
“후훗! 무슨 하늘이냐면요. 맑디 맑고, 푸르디 푸르며,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겨울 하늘이랍니다!”
동천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줄 때 늘 말하는 형식(形式)이었으나 동굴 안의 인물은 동천의 말에 자뭇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밖에 있는 동천은 안이 어두워서 그 사람을 볼 수가 없었기에 마냥 좋아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안의 인물은 고심히 생각을 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음.. 좋다. 가운데에 이상한 말을 잔뜩 끼어 넣기는 했지만 암호(暗號)가 맞기 때문에 들어와도 좋다.”
“엥?”
동천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상대방이 암호를 운운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암호(暗號)? 암호라면 저희끼리만 아는 비밀한 신호(信號)나 부호를 가리키는 건데? 저 늙은이가 (목소리로 동굴 안의 인물이 늙었다는 것을 대충 짐작한 것임.) 나를 언제 봤다고 암호를 운운하는 거지?’
그때 동굴 안의 인물이 다시 물어왔다.
“무슨 일이냐..?”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동천은 무의식적으로 말을 했다.
“예? 아.. 아니예요! 들어가요. 헤헤..”
워낙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동천은 일이 재미있게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런 흥밋거리가 방금 전까지 무서움에 떨고 있던 동천을 원래의 동천으로 바꿔 놓았다.
‘암호를 운운하는 것을 보니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 같은데.. 히히히! 재미있겠다.’
사실 이곳에 올 때 그 사람이 그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암호를 정해놨는데 처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하늘.”이었고, 무슨 하늘이냐고 물어보면, “겨울 하늘.”이었다. 세상사(世上事)를 살다 보면 웃기는 일이 종종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암호가 동천의 이름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어쨌든 축축한 느낌을 받으며 걸어 들어가던 동천은 어느 정도 걸어들어가자 한 인물이 동물 가죽 위에 정좌(正坐)를 하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노인의 뒤편에는 거의 백여 권을 육박하는 책들이 차곡차곡 올려져 있었다. 어쨌든 그 노인의 나이는 한 오륙십 살 정도로 되어 보였고, 허름한 옷에 매서운 눈매를 가진 냉막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노인은 동천을 요리조리 뜯어보고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음.. 맞는 것 같군. 그래, 네 애비는 잘 있느냐?”
노인의 말에 동천은 하마터면 “애비요? 무슨 애비요?”라고 말할 뻔했다.
“아.. 버지요? 무.. 물론, 자알 계시죠..”
노인은 동천의 더듬는 말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조금 후에 얼굴을 펴고는 말을 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암흑마교(暗黑魔敎)의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함부로 한다고 해서 열받아 하지 말아라. 사실 네가 열받는다고 해도 아무 상관도 없지만.. 음.. 그건 그렇고, 한 일주일 후에나 온다고 연락을 받았었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
열심히 말을 듣고 있던 동천은 갑자기 말의 방향이 이상한 곳으로 흐르자 등에서 식은땀이 절로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변명에는 일가견이 있는 동천은 순식간에 말을 꾸며서 노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예? 아.. 그건요. 제가 워낙에 마음이 급해서 일찍 찾아왔습니다.”
동천의 말을 들은 노인은 또 궁금한 게 있는지 동천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너 혼자 왔느냐?”
이 질문에 동천은 속으로 무지 많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동천에게는 그 질문이 왠지 간단하게 다가오질 않았던 것이다.
‘나 혼자 왔냐구? 으음.. 씨팔놈의 늙은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지랄이야! 음.. 어떻하지? 같이 오기로 되어있는 인간들이 있었나? 운이 좋게도 여기에 올 놈이 나하고 나이가 비슷했던 모양인데.. 그리고 저 늙은이가 아까 네 애비는 잘 있냐? 고 말한 다음에 나를 쳐다보고는 자신은 암흑마교(暗黑魔敎)에 속해 있는 인간도 아니고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저 늙은이가 내 아버지라고 착각하는 중간쯤 늙은 인간이 잘하면 교(敎) 내에서도 신분이 대단히 높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으스스한 곳에 어린 나 혼자 올 리가 없을 테니까..’
위의 생각은 길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순간의 일이었다. 이런 생각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동천은 생각을 마치자 곧바로 말했다.
“흠.. 혼자 오기는요. 저 아래까지는 수하들의 안내를 받았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그냥 있으라고 한 뒤에 저 혼자 올라왔습니다.”
순간 노인의 매서운 눈매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그래? 보기보다는 제법 뚝심이 있는 녀석이었군.. 좋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본론(本論)으로 넘어가자. 네가 알다시피 옛날에 나 만독노조(萬毒老祖) 항광(項洸)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네 애비가 나를 구해줬기 때문에 나는 그때 언제든지 부탁을 한다면 한가지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삼 일전에 전 암흑마교의 교도들이 우러러보는.. 큭큭큭! 그러니까 교주(敎主)나 되는 네 애비가 삼십 년 만에 나를 찾아와서 드디어 부탁을 했다.”
‘쿵!’
이게 지금 동천의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동천의 얼굴이 새파래졌지만, 동굴 안이 어두웠기 때문에 아무리 불을 켜놓았다 하더라도 동천의 새파래진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교.. 교주? 그럼.. 여기에 올 놈은 교주의 아들내미? 만약에 걸리면 나는 어.. 어떻게 되는 거지?’
당연히 죽음이었다. 죽음을 생각하자 파래진 얼굴과 더불어 다리까지 후들후들! 거렸지만, 다행히도 항광은 옛날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동천에게는 대단한 행운(幸運)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한참을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동천은 차츰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주.. 죽이기야 하겠어? 그럼! 걸리면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면 되겠지 뭐.. 그래! 그렇게 한다면 봐줄 거야.’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그런 생각을 하자 동천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를 맞춰서 항광이 눈을 뜨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 부탁은 너도 알고 있었다시피 너를 환골탈태(換骨奪胎)시켜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응?”
말을 하며 동천을 바라보던 항광은 동천의 골격을 보더니 순간적으로 눈에서 광망을 토해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한 장(3M) 정도 떨어져있던 동천을 격공섭물((隔空攝物): 내공을 이용해 손을 안 대고 물건을 취하는 걸 말함. 능공섭물(綾空攝物), 허공섭물(虛空攝物)이라고도 한다.)로 끌어들였다.
“어.. 어?”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항광의 손으로 끌려간 동천은 당황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순식간에 격공섭물로 동천을 잡아챈 항광은 차가운 눈빛으로 동천의 몸을 만졌다.
“놈! 어떻게 해서 무예(武藝)를 익힌 흔적이 없는 거냐?”
항광의 솜씨에서 놀란 탓도 있지만 무공을 모른다는 게 탄로 나자 동천은 드디어 걸렸구나 싶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교주의 아들인데 무공을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걸렸다는 게 확실시된 게 아니기 때문에 동천은 얼른 말을 둘러댔다.
“모.. 몰라요. 아버님께서 이곳에 왔다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를 않겠다고 하셨었다고요!”
그 말을 들은 항광은 그러고 보니 그렇군.. 하고 생각을 했다. 환골탈태를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를 들 수가 있었는데 하나가 영약(靈藥)에 의존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전자가 엄청난 내공으로 시전을 받는 사람에게 불어넣어주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항광 자신은 그러한 놀라운 영약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교주의 아들인 냉현(冷玄)에게 직접 내공을 불어넣어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냉소천(冷笑天).. 네놈이 제법 머리를 굴리는구나..! 나의 내공과 맞지 않는 내공을 지니고 있으면 환골탈태가 어려우니까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내공심법을 익히지 못하게 했다 이거지? 흐흐흐.. 그러니까 나보고 내공만 죽어라고 퍼낸 뒤 내 나이가 나이니만큼 꼴깍! 하고, 죽으란 말인데.. 그렇게는 안 되지.. 물론, 네 아들내미에게 환골탈태는 시켜준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을 거다.. 네가 나에게 영약이 없는 줄 알고 있지만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마…!’
사람을 인위적으로 환골탈태를 시켜줄 때 내공을 지니고 있는 자에게 시술(施術)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자에게 시술을 하는 것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었다. 시전자가 환골탈태를 시켜줄 때 시전을 받는 사람이.. 그러니까 피 시전자가 어느 정도 내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은데, 왜 그러냐하면 시전자가 피 시전자에게 내공을 불어넣어줄 때 이미 뚫린 길에 내공을 넣어주면 힘이 굉장히 들기는 하더라도 생사(生死)의 위기까지는 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에도 조건이 있었다. 그게 뭐냐하면 피 시전자의 내공이 시전자와 성질이 비슷하거나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성질이 다른 높은 수준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다면 아예 내공이 없는 것보다도 못했다.
극과 극이 부딪힌다면 시전자와 피 시전자가 둘 다 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은 사제지간이나 부모 자식간이 아니라면 행해지지 않는 지극히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항광의 경우는 동천이 자신의 내공심법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내공이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제지간(師弟之間)이나 부모자식(父母子息) 간에나 할 수 있는 방법을 힘들지만 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방법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동천이 이론(理論) 상으로라도 무공에 관한 기초지식이 없다면, 나중에 항광이 시전을 할 때 굉장히 위험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항광은 동천이 이론상으론 상당한 지식을 쌓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냉소천이 자신의 내공을 고갈시켜서 손가락 하나 안 대고 죽이려고 한다고 해도, 자기 자식까지 죽이려고 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어쨌든 머릿속으로 길고 긴 생각을 마친 항광은 고개를 끄덕인 후 동천을 바라봤다.
“그렇군.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좋아.. 이왕에 맘을 먹었으니 해줄 건 해줘야겠지.”
항광의 말을 듣고 있던 동천은 아까는 제대로 생각을 못했는데 자신을 환골탈태 시켜준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진정을 못 할 정도였다.
‘환(換).. 골(骨).. 탈(奪).. 태(胎).. 합쳐서 환골탈태(換骨奪胎). 설마 꿈은 아니겠지? 나를 환골탈태를 시켜준다는 말이.. 그러나 교주의 부탁이라고 하니까 거짓말은 아닐 테고.. 으.. 떨려라..!’
한참 꿈인지 생시인지 오락가락하고 있던 동천을 향해 항광이 불쑥! 내미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작은 상자였다. 얼떨결에 상자를 받아 든 동천은 항광에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동천의 질문에 항광은 씨익! 하고, 웃으면서 말을 했다.
“그것은 네가 환골탈태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한 물건이다. 어서 열어보아라.”
“꿀꺽!”
우선 조용한 동굴에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침을 삼키던 동천은 살며시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상자를 열자 딸깍! 소리가 나는 동시에 향기로운 냄새도 온 동굴을 향해 퍼져 나갔다.
“흠흠.. 후아-! 향기가 죽이는데요?”
동천이 새하얀 단환을 보면서 신기해하고 있을 때 항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흐흐.. 그것은 내가 삼십 년간을 인간의 뇌수(腦髓)에서 뽑아낸 물질과 이 산(山) 주변에 존재하는 수백여 가지의 약초(藥草)들과 독초(毒草)들을 혼합(混合)해서 만든 천약뇌수단(天藥腦髓丹)이라고 한다. 어떠냐? 흐흐흐, 이것을 먹을 자신이 있느냐?”
항광은 별거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동천은 그게 아니었다.
“뇌.. 뇌수(腦髓)요? 그.. 러면… 설마..! 이 산 주위에 널려있던 해골들과 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동천의 그런 모습에 항광은 즐거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