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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84화


잠시 머뭇거리던 추연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곤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생각이 안 나네요. 호호호!”

“…….”

살심(殺心)이란 단어가 이럴 때 쓰인다는 것을 깨닫게 된 동천이었다.

‘뭐야…. 나 혼자 꼴값을 떤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몰라봐서 다행이라고 감사해야 할 판이건만 10년의 세월 같았던 찰나간의 절망과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자신의 얼굴도 못 알아보는 추연의 야속함이 천천히 뒤섞이며 분노를 자아내기까지 했다. 그것을 빤히 지켜보던 추연은 지체 높으신 자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얼른 사죄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추연의 사과는 수그러들던 동천의 분노에 기름을 퍼붓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죄송? 지금 네 주둥아리에서 그따위 말이 튀어나오게 생겼냐? 엉? 내가 얼마나 놀라셨는 줄 알아? 이걸 그냥, 확!”

추연은 죽을죄를 지었다고 엎드려 빌어야 마땅했건만 이상하게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뇌리에서는 어서 빌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건만 막상 행동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미천한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추연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버티듯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동천의 판단을 흐리기에 충분했다. 확실치 않지만 아무래도 추연의 잠재된 의식 속에서는 동천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더 이상 같이 있다간 큰일이 날 것만 같았던 동천은 어서 쫓아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됐다. 피곤하니 물러가거라.”

추연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에, 그럼.”

동천은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추연의 뒷모습을 아련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잘 가라 내 여인아.’

내심 같잖은 이야기를 지껄인 동천은 언제 되돌아올지 모르는 추연을 피해 재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동천은 어느 정도 까진 뛰어가다 행보를 멈춘 후 유람하듯 천천히 주위를 감상했다.

“추연을 보니까 하천하고 춘천도 보고 싶네?”

그들을 찾아볼까도 했다. 하지만 일곱 살 때 대판 싸우고 사이가 틀어진 놈들이었다. 동천은 모험을 하면서까지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에이, 관두자. 추연 하나면 됐지 뭐. 지금쯤이면 이야기가 다 마무리되었을 테니 돌아가자.”

동천은 휴룡각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 둘러보진 못했지만 이곳은 여전하구나.”

한참을 걸어가던 동천은 잠시 멈춘 뒤 피식 웃었다. 예전에 재미있었던 장면이 새삼스레 떠올랐나 보다. 다시 한참을 걸어가던 동천은 또 멈춘 뒤 아까보다 크게 웃었다. 그러기를 두어 차례 반복했을까? 한식경 가량 돌아다니던 동천은 마침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째 이런 일이…….”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7년 동안 자신이 살았던 곳에서 말이다. 동천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정녕 이것이 현실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이건 뭔가 잘못된 걸 거야.”

어떻게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끌어들이려던 동천은 결국 한심한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 내가 없는 사이에 집들을 다시 짓고 구조를 확 갈아치웠던 게 분명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히히히!”

지가 생각해놓고도 비참해졌지만 그래도 바보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아무리 좋은 쪽으로 억지를 부려도 길을 잊어 먹었다는 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씩씩하게 걸어가는 동천. 결국에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들여놓고야 말았다.

“용연각(龍淵閣)? 가만있자. 내가 언제 이곳에 들어와 본 적이…아? 생각났다. 히히, 황금세가의 금장화하고 미미년이 연애질을 했던 곳이지?”

지키는 사람이 없나 이리저리 둘러보던 동천은 단단해 보이는 장정 둘이 문 앞을 지키고 있자 내심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쳇, 그 우물가로 가서 성수(聖水)를 뿌려줘야 하는데 참아야겠다.”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다른 곳으로 신형을 비트는 순간 아주 반가운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어머? 또 만났네요? 아가씨를 뵈러 오셨어요?”

“…….”

다시 추연과 마주친 동천은 할 말을 잃었는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런 동천의 몸이 풀린 것은 흐릿해진 시야에 무언가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추연은 동천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 같자 좌우로 반복 운동을 하고 있던 손을 내렸다.

“괜찮아요?”

이 상황에서 동천이 뭐라고 하겠는가. 당연히 긍정적인 대답을 해줘야지.

“무, 물론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재빨리 본모습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금세 안정을 되찾고 같지도 않은 근엄함을 내비친 동천은 추연의 반대쪽을 감상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린 뒤 거드름을 피웠다.

“험, 네가 용연각에는 어쩐 일이더냐. 네 아가씨의 거처는 이곳이 아닐 터인데?”

추연은 뜻 모를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후훗, 무슨 말씀이세요. 누구에게 들으셨는지 몰라도 예전의 일들만 알고 계시는군요. 아가씨께선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1년하고도 6개월이 넘으셨어요.”

동천은 미미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보려 했던 자신을 상기시키곤 끔찍했는지 부르르 떨었다.

‘으으, 큰일 날 뻔했잖아? 역시 안 들어간 것은 잘한 일이었어. 후후후. 이 얼마나 정확한 판단력인가.’

새삼 자신의 판단력을 높게 평가한 동천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추연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본 공자가 모르고 있었던 것을 가르쳐주어 고맙구나.”

추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근엄한 척하는 동천을 대했다면 속으로 재수 없는 놈이라고 욕할게 분명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동천의 행동이 정겹게만 느껴졌다.

“전 또 아가씨를 만나 뵈러 오신 줄 착각했어요. 아, 그러지 마시고 저랑 같이 들어가셔서 한 번 뵙는 게 어때요?”

쪼잔한 동천은 방금 전까지 고마워하던 마음을 단칼에 회수해버렸다. 그만큼 미미와 마주치기가 두렵고 싫었던 것이다.

“돼, 됐다. 본 공자는 바빠서 가야겠구나.”

동천이 당황하자 재미있어진 추연은 얼른 동천의 팔을 붙잡고 용연각으로 이끌었다.

“아이, 괜찮으니까 들어가세요.”

설마 끌고 갈 줄은 상상도 못했던 동천은 너무도 당황해 내공을 사용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힘없이 끌려 들어갔다.

“뭐 하는 짓이야. 어어?”

용연각 안으로 들어와 중간까지 끌려온 동천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후 재빨리 추연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반면, 자신이 남정네의 팔을 스스럼없이 잡았다는 사실에 뒤늦게 놀란 추연은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있는 힘껏 황룡미미를 불렀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헉?’

동천이 기겁하는 사이에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손님이라고?”

당당한 보폭으로 방문을 벗어난 황룡미미는 오만에 가득 찬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동천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입가에 작은 비웃음이 걸렸다.

‘흥! 얼어 있는 폼을 보니 별것도 아닌 애송이로군.’

그녀의 비웃음이 너무 미미한지라 미처 간파해내지 못한 동천. 그는 2년이란 세월 동안 몰라보게 아름다워진 황룡미미를 보게 되자 저도 모르게 아까 추연이 했던 말을 긍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아무리 황룡미미가 아름다워졌다고 해도 사정화보다는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소연과 화정이보다 떨어질 정도였다. 미미와 비교해 새삼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 동천은 미미도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까 저년도 별거 없잖아? 괜히 쫄았네.’

효과가 있는지 긴장이 풀리고 근육의 이완도 자유로워졌다. 잠시 후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은 동천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일이 있어 이곳에 잠시 들렀다가 소저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는데, 도리어 그 명성이 초라할 지경이군요.”

동천의 아부에 황룡미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요것 봐라?’ 하는 것만 같았다. 맹탕인 줄 알고 싸늘히 내쫓으려던 그녀는 일단 격식을 차렸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헌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자신이 아부를 해놓고도 너무도 매끄러워 놀라고 있던 동천은 이름이 거론되자 잠깐 동안 고민에 휩싸였다.

‘어떻게 하지? 동철이란 가명은 성씨가 동(冬)이라서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은데 아까 동철이라고 했으니……. 씨팔, 외간 남자의 이름은 알아서 뭐 하려는 거야?’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던 동천은 총관에게 동철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또 다른 가명을 사용하면 의심을 받게 될까 봐 결국 동철로 결론을 내렸다.

“동철이라고 합니다.”

황룡미미는 웃긴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동 공자님 이셨군요.”

그때 다소곳이 서 있던 추연의 고개가 확 치켜들어졌다.

“동(冬)? 동 씨?”

갑작스러운 추연의 외침에 눈살을 찌푸리던 황룡미미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미심쩍은 눈길로 동천의 얼굴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가만, 동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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