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86화
한림서원(漢林書院).
난초를 손질하고 있던 아수마황(阿修魔皇) 유혼(幽魂)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웃음 진 얼굴로 수하의 보고를 받기 시작했다.
“그래, 갔던 일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부복해 있던 사내는 오른팔에 붕대를 감고 얼굴에 피멍이 든 것으로 보아 유혼이 명했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듯싶었다. 그 증거로 사내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유혼은 여전히 웃으며 눈매를 가늘게 모았다. 언뜻 보면 웃는 듯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싸늘함이 숨어있는 죽음의 눈웃음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본좌가 어떻게 알겠나. 자세히 설명을 해줘야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던 사내는 무언가 결심한 듯,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간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저, 저희는 부전주님의 통솔 하에 그자를 추적한 지 닷새만에 마침내 따라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헌데…허, 헌데, 그자는 상상 밖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혼은 뭔가 이상했던지 잠시 끼어들었다.
“부전주가 분명히 초혼강시 세 구를 대동하고 갔을 터인데?”
“그, 그렇사옵니다.”
“방심을 한 나머지 상대에게 각개격파를 당했는가?”
죽음을 각오한 사내는 고개를 번쩍 들어 공포감에 물든 눈동자로 유혼을 응시했다. 사내의 눈동자는 분명 눈앞의 유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일들이 생생히 떠올랐을까? 사내의 몸은 심하게 떨렸다.
“아닙니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그자는, 그자는 부전주님과 초, 초혼강시 세 구가 동시에 공격을 했어도 단 한 번의 손놀림으로……, 죽여주십시오!”
유혼은 이마가 깨지도록 바닥을 찧어대는 사내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의 안색은 보기 드물게 굳어 있었다.
‘초혼강시 두 구와 부전주만 있어도 본좌와 천여 초는 겨룰 수 있고, 초혼강시가 세 구라면 본좌와 양패구상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들의 연합 공격을 단일수(一手)에 물리쳤다는 말인가? 믿을 수가 없다!’
유혼은 굳어진 자신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피투성이 얼굴로 아직까지 바닥을 찧고 있는 사내에게 등을 돌리며 명했다.
“그만 물러가거라.”
죽음을 예상하고 있던 사내는 전주의 믿을 수 없는 명령에 멈칫했지만 천금 같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명에 따랐다.
“존명!”
사내가 물러나자 혼자 남게 된 유혼은 마침내 감추고 있던 본색을 드러내며 분노한 맹수처럼 안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단강수(斷剛手)! 전설의 삼대수! 본좌가 직접 확인해 보리라!”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정적만이 남게 된 방 안에는 희미한 혈향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쉬익!
파공음 소리와 함께 피를 머금고 이죽거리는 폐혈서생이 동천을 향해 다가왔다.
“크크크, 잘 지내셨나?”
동천은 두려움에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러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갔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 동천은 도망치는 속력에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흐윽, 왜 따라오고 지랄이야!”
“크하하하! 죽어라!”
어느새 바로 뒤까지 따라온 폐혈서생이 핏빛 섭선으로 동천의 머리를 내려쳤다. 기겁을 한 동천은 최후의 발악으로 폐혈서생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어이쿠! 아이고, 중소구 죽네!”
나자빠진 폐혈서생은 희한하게도 자기의 이름을 중소구라고 했다. 동천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나뒹굴어져 떼굴떼굴 구르고 있는 폐혈서생에게 마음껏 비웃어주었다.
“히히히! 이 몸에게 까불면 이렇게 되는 거야. 알겠냐? 이히히히!”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동천은 그렇게 웃다가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고 다음 날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나게 되었다.
“아함! 잘 주무셨다.”
졸린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본 동천은 아무도 없자 두 눈을 번뜩였다.
“뭐야, 이 몸을 놔두고 지들끼리 처먹으러 간 거야? 이런 의리도 없는 새끼들을 봤나!”
중소구는 그렇다 쳐도 도연까지 쫄래쫄래 따라갔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동천이었다. 좌우로 갈라진 앞머리를 손질해 잘 정돈한 그는 지 혼자 단호한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대로는 안되겠어. 소구새끼 때문에 도연의 충성심이 흐려질지도 몰라. 으음, 아무래도 조속한 시일 내에 소구새끼를 처리해야겠군.”
생각만 하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일어선 동천은 배가 고팠기에 식사를 하러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말끔히 먼지까지 털어낸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손님의 식사는 시비들이 직접 가져온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후후, 내 잠시 싸가지 없는 자식들 때문에 이성을 잃었군. 식사는 지들이 알아서 가져올 테니 이 몸은 아무도 없는 사이에 무공이나 연마해야겠다.”
자신의 짐 속에서 철경을 꺼내든 동천은 침대 위에 앉아 아직까지 헤매고 있는 심법 편을 익혀나갔다. 한 가지를 깨달으면 두 가지의 의문이 생기고 두 가지를 깨달으면 네 가지의 의문이 생기는 요상한 심법. 역심무극결(逆心無極缺) 내의 운기 행로와 복잡한 구결들을 단 3일만에 해결한 동천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퇴보에 퇴보를 거듭해 삼분지 일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스승 없이 하나의 무공을 이해한다는 게, 어디 밥 한 그릇 뚝딱하듯 그렇게 쉬운 문제이겠는가? 갈수록 꼬이고 어려워지는 심법을 보다 못해 침대의 이불보를 쥐어뜯는 동천이었다.
“으으, 어렵다. 뭐가 이따위로 어려운 거지? 혹시 이거 짝퉁 아냐?”
동천은 심한 불신의 눈으로 철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용이 오묘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허접한 무공이라고 인정해버린다면 그동안의 천금 같은 시간들이 아까웠던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래, 행여나 그런 재수 없는 생각은 하질 말자.”
불신을 뒤로하고 다시 철경 속으로 빠져든 동천은 ‘처음에서 이렇게 오래 걸리면 뒤에 것들은 언제 익히지?’ 하고 한탄을 하다가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참? 뒤의 도법을 참고해서 본다면 이해가 더욱 빠를지도 몰라! 히히,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새로운 것을 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셋째 장에서 제법 큼지막하게 쓰여져 있는 글씨를 보게 되었다. 고문자(古文字)로 파여진 글이라 당연히 동천의 머리로는 해석 불가능. 그래서 그는 바로 옆에 흐릿해진 주석을 읽어야만 했다.
“능도제검(能刀制劍)? 도가 검을 이긴다고? 히히, 첫머리부터 마음에 드는데?”
동천은 보일 듯 말듯 희미해진 주석들을 읽어 내려갔다.
-대저 도란 무엇이고 검이란 무엇인가. 맨손의 한계를 통감한 선인들이 길이의 차이를 극복하고자 만들어낸 위대한 유산들이 아닌가. 용도는 같다. 허나, 도는 힘을 중시할 뿐이고 검은 기교를 중시할 뿐이다. 도는 베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고 검은 찌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칼날이 한쪽뿐이면 도요, 양날이면 검이라. 대체로 도는 무겁고 검은 가볍다. 무거운 도가 불편하면 가볍게 만들면 그만이고, 베는 것이 마땅치 않다면 도 폭을 좁히면 되는 것. 내 자식들아, 삶의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지금 새로운 눈을 뜨고 낡은 생각을 베어라. 여기 이 아비의 삼절초를 남기니 아비의 이름을 따 치(蚩)…….
읽어 내려가던 것이 거기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천의 경악 성!
“흐윽? 이, 이런 개 같은 일이! 지워졌잖아?”
그렇다. 대단한 무공을 대하고 경악한 것이 아니라 그 뒤의 주석들이 희미해지다 못해, 뭉그러지고 이지러져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허탈해진 동천은 세상을 다 산 인간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난 여태까지 뭘 한 거지……. 고작 골 때리는 심법 하나 익히려고 이 눈치 저 눈치 봐가며 그 수많은 밤들을 지새웠단 말야?”
동천의 성격에 밤을 지새웠다는 것은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 몰래 익혔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때만큼은 꿈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다. 중소구를 종복으로 부려 심심하면 패주는 꿈을 꾸었고, 천하제일의 미녀를 아내로 맞이해 중원천하를 누비고 다니는 낭만에 빠졌었다. 얼마나 기대했던가. 동천이 그것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으아아아악! 나와! 다 나와! 소구? 덤벼! 다 덤벼 새끼들아!”
육중한 침대를 뒤집어엎고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방안을 휘젓고 다닌 동천은 눈에 보이는 족족 부숴놓고 보았다. 그렇게 난리를 피웠으니 그 누군들 달려오지 않겠는가. 주위를 지키고 서 있던 세가의 무사들은 득달같이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