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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95화


“칫, 어쩔 수 없지.”

도연이 눈을 들었다.

“뭐가 말입니까?”

동천은 서찰을 곱게 접고 나서야 말했다.

“뭐긴 뭐야. 우리 둘이 각각 한 명씩 맡아야지.”

괜찮은 생각이라고 여겼는지 도연은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그럼 전 누구를 맡을까요.”

성질이 난 동천은 버럭 화를 냈다.

“에이 씨, 너는 꼭 이 몸께서 일일이 챙겨줘야만 움직이냐? 그래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꾸지람을 듣고 잠시 침묵으로 일관하던 도연은 주군의 충고를 받아들여 스스로 한 사람을 지목했다.

“그럼 제가 총관을 맡겠습니다.”

지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라고 했으면서 정작 도연이 총관을 지목하자 동천은 재빨리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생각해보니 황룡굉 앞에서는 실수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냐, 총관 자식은 보기보다 교활해서 너에겐 벅찰 거야. 그러니까 네가 가주님을 맡아라.”

동천에 관해 믿음이 강했던 도연은 주군의 결정을 순순히 따랐다.

“알겠습니다. 떠나기 직전에 주군께서 총관을 잠시 다른 곳으로 유인해만 주신다면 제가 그사이 황룡가주님께 서찰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자.”

골치 아팠던 일차적인 문제를 해결한 동천은 앞으로 남아있는 이차적인 문제를 어떻게 잘 풀어낼까 고심하는 눈치였다. 동천은 한참 동안 방안으로 거닐었다. 그러다 창가로 다가간 그는 하나둘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 내심 소리쳤다.

‘세가는 내가 지킨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세안을 끝마친 동천은 사부가 늘 하던 대로 양 볼을 살며시 두들기며 피부를 가꾸었다. 조그마한 동경에 비친 그의 모습은 남자답고 선이 굵고 유려함까지 골고루 갖춘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남들이 자신의 모습이 멋있다고 착각하며 살듯 동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캬아! 끝내준다!”

옆에서 의복을 챙겨 입고 있던 도연은 그런 주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슨 뜻에서 그런 행동을 내비쳤는지는 그밖에 모르리라.

“여어, 도 소형제. 잘 잤는가?”

잊어먹을 만하면 잘도 나타난 중소구는 동천에게 얻어맞았던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착용하고 나타났다.

“예, 중 대인. 대인께서도 잘 주무셨는지 모르겠군요.”

도연의 인사에 중소구는 기분 좋게 웃어댔다.

“하하! 나야 언제나 잘 주무시지. 아암, 그렇고 말고.”

그런 중소구가 꼴 보기 싫었던지, 그를 못 본 척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동천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못내 반가운 척을 했다.

“헤헤, 오셨어요? 아침은 잘 드셨고요?”

동천이 본 중소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잘 드셨다. 그런데 인사가 좀 늦구나?”

아마도 억울하게 한 방을 얻어맞아 시비를 걸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눈치가 빤했던 동천은 더욱 싹싹하게 중소구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다.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중 대인께서 도연과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시라고 제가 알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겁니다.”

어제와는 딴판인 저자세로 나오자 중소구의 안면이 슬그머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으래?”

동천은 태도를 바꾸어 강하게 밀어붙였다.

“당연하죠! 제가 그런 의미로 잠시 나가있을까요? 대인께서 도연과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실컷 보내실 수 있게.”

중소구는 동천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흐음, 좋은 생각이다.”

“예?”

“뭐가 예야. 나가있겠다며. 본 대인은 도 소형제와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잠깐 나가있어.”

설마 중소구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줄 몰랐던 동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죠 뭐.”

별말 없이 밖으로 나온 그는 애꿎은 돌멩이만 걷어찼다. 그러다가 휙 돌아보고 방안의 특정인을 향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씨팔 놈, 그런다고 진짜로 내보내냐? 그러고도 지가 대인이야?’

그때 순찰을 돌던 두 무사들은 동천의 용모를 자세히 살펴보다 뒤늦게야 깨닫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동 공자. 오늘은 신수가 훤하시군요.”

추켜세워준다는데 아니라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동천이 아니었다.

“후후, 자네 뭘 좀 아는군.”

무사는 어린놈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제멋에 산다는 말도 있기에 그냥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을 왜일까.

‘이상하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내가 이 녀석을 어디에서 보았을까?’

너무 쳐다보는 것도 결례였다. 그것을 깨달은 그는 인사를 마치고 지정된 곳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동천은 자신의 잘생긴 얼굴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사람은 잘나고 봐야 해. 히히!’

그러나 여러 사람들과 마주치면서 동천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멀리서 흘낏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대놓고 의심에 찬 눈길로 살펴보다가 눈째림을 당하고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욱 기분이 나쁜 것은 지들끼리 소곤소곤 거리며 사라지는 경우였다.

‘뭐야? 이놈저놈 할 것 없이 왜 그렇게 유심히 보는 건데?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아앗? 그러고 보니!’

무언가 깨달은 그는 기겁을 했다. 다름이 아니라 앞머리를 까 올리고 다녔던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을 이해하게 된 동천. 그는 재빨리 머리카락을 밑으로 내렸다.

‘으으, 나 같은 천재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휴룡각 내부를 돌고 돌아 겨우 자신의 방을 찾아 돌아온 동천은 한 컵의 물로 목마른 갈증을 씻겨 내린 후 피식 웃었다.

‘괜찮아. 때론 천재도 실수를 할 수가 있는 법이니까. 후후, 아픈 만큼 성숙한다더니 딱이지 않은가?’

동천 스스로 잘도 위로를 하고 있을 때 혼자 남아있던 도연이 물었다.

“급하게 뛰어오신 듯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정신을 차린 동천은 주위를 둘러보며 대꾸했다.

“별것 아냐. 그보다 갔냐?”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분 말씀이 저희에 대한 조사가 끝났답니다. 그래서 이제 이곳을 떠나도 된다고 합니다.”

동천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려졌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잠시 주군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있던 도연은 추가로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저희는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중 대인께 듣자하니 황룡가주님께서 저희와 같이 점심을 드셨으면 하셨다는 데 아무래도 주군께서 기피하시는 것 같아 제가 사양하겠다고 중 대인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괜찮으시면 지금이라도 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동천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냐, 잘했어. 거기에 가봤자 불편하기만 하고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더군다나 총관 자식도 뭐 주워 먹을 거 없나 기웃거릴 텐데 뭐 하러 가냐?”

양 주먹을 단단하게 말아 쥔 동천은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점심을 기다렸다. 점심 식사를 기다리는 건지, 총관의 일을 기다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야, 챙길 건 다 챙겼어?”

점심을 먹은 직후, 떠나기 위해 간소한 옷가지들과 생필품들을 챙기고 있던 도연은 어딘가에 벗어두었던 바지를 찾아가며 말했다.

“거의 다 되어갑니다.”

“이씨, 이 몸도 다 챙겼는데 아직까지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빨리빨리 챙겨!”

빈 몸이다시피 한 동천이 챙길 게 뭐 있겠냐마는 혼자 손놓고 있기 심심하니까 괜히 도연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있던 것을 찾아낸 도연은 봇짐을 싸서 양 어깨에 멨다.

“이제 다 되었고, 떠날 때 서찰을 건네주는 일만 남았을 뿐입니다.”

동천은 살짝 눈웃음을 쳤다.

“히히, 걱정하지 마. 잘 될 거니까 넌 그저 맡은 일만 잘 수행하는 되는 것이야.”

걱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모습이었다. 하긴,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황룡세가의 일이라 해도 동천 성격에 걱정이라는 단어가 들어차 있을 리 만무했다.

“자! 이제 가 볼까나?”

“알겠습니다.”

도연은 알아서 앞장을 섰다. 비록 안내는 시비가 하는 것이지만 습관이 된 탓에 언제나 앞장을 서는 것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비의 안내를 받고 황룡세가의 정문 앞으로 도착한 동천은 황룡굉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천은 제일 먼저 황룡굉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동안 잘 묵었습니다.”

그러자 여러 장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황룡굉이 인자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랬다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제갈세가로 가서 네가 원하던 것을 성취하기 바란다.”

동천은 황룡굉에게 격려를 받자 왠지 가슴이 뿌듯해지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황룡가주님.”

동천과 이야기를 끝낸 황룡굉은 고개를 돌려 도연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된다면 또 놀러 오너라.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도연은 대답 없이 그저 살짝 목례를 취했을 뿐이었다. 이미 와 있던 중소구는 도연에게 다가와 등 뒤의 봇짐을 보며 말했다.

“저걸 자네가 다 드는 것인가?”

중소구가 어떻게 나올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도연은 주군에게 향할 화살을 은근슬쩍 바꿔놓았다.

“무겁지도 않으니까요.”

안 무겁다는데 중소구가 뭐라고 하겠는가. 기회를 벼르고 있다가 머쓱해진 그는 아쉽다는 눈초리로 동천을 주시했다. 중소구의 시선을 눈치챈 동천은 재빨리 고개를 돌린 뒤 어딘가에 처박혀있을 총관을 찾았다.

‘이상하네? 그 새끼가 안 나올 리 없는데?’

그의 예상대로 안 나올 리 없었던 총관이 바쁘게 달려왔다.

“하하, 죄송합니다. 빨리 온다고 온다는 게 일이 좀 있어서 늦었습니다.”

동천은 그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 일이 좀 있긴 있었겠지. 자기편에게 비밀 정보를 건네주는 일 말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떠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깜짝 놀란 동천은 은밀히 총관에게 다가가 슬쩍 말을 건넸다.

“저기요. 그때의 일로 말씀을 드릴 게 있는데요.”

총관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응? 그때의 일이란 게 뭔가?”

동천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 좀 더 소리 죽여 말했다.

“아이 참, 왜 있잖아요. 제 방을 침투했던 자.”

순간 총관의 눈동자가 희미한 빛을 발했다.

“그렇단 말인가?”

총관의 목소리가 너무 커 주위의 이목을 끌자 동천은 재빨리 주의를 요했다.

“쉬잇, 여기에서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으니 좀 조용한 곳으로…….”

동천의 의도를 눈치챈 총관은 짐짓 다른 화제로 동천을 이끄는 척했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단 말인가? 하하, 그렇다면 내 구경을 시켜주지. 따라오게나.”

이제 떠날 마당인데 총관이 동천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가려하자 황룡굉은 눈살을 찌푸렸다. 총관이 그렇게 생각 없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보게, 총관. 그 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구경시켜주겠다는 것인가. 곧 있으면 떠나는 마당이거늘.”

총관은 정도껏 둘러댔다.

“다름이 아니라 이곳의 변소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마렵다는 것이지요.”

그 소리를 듣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그들 중 누가 제일 크게 웃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중소구는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웃어대며 동천을 놀렸다.

“푸하하! 큰 거냐? 으하하하!”

동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뇨, 작은 거요.”

중소구는 거의 기다시피 상체를 기울인 상태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 갔다 와. 크하하하! 하이고 배야. 푸하하!”

동천은 총관 때문에 중소구한테 비웃음을 당하자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야 하는 법.

‘빌어먹을 새끼. 지가 감히 이 몸을 놀려대? 두고 봐라. 때는 반드시 오니까.’

복수의 날을 다짐한 동천은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아울러 은근히 총관을 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말 한마디로 중소구가 저렇게 나올 줄 몰랐던 총관은 무안해하는 동천의 심정을 십분 이해해 재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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