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01화
초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리고는 부복해있는 정탐 조에게 명했다.
“확보해 놓은 진로로 앞장서라.”
“존명!”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나아갔다. 이때를 위해 키워진 자들인 만큼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적들은 한심하게도 매복자들조차 임무에 소홀히 하며 술을 진탕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초혼을 비롯한 독랑 대원들은 이런 자들에게 만독문이 세 차례나 당했다는 사실에 심한 모멸감과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인지 발견되자마자 족족 죽어 나자빠지는 매복자들은 아혈이 잡힌 상태에서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소홍은 보고도 못 본 체 시선을 돌리고 그저 앞만 보며 달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부는 울렁거리고 넘어올 것만 같았다.
‘으읍, 꼭 저렇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꼭 저렇게 해야만…….’
그녀가 채 진정하기도 전에 적들의 진영 앞에 도달했다. 그러자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초혼이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이제 사태를 주시하고 결단을 내리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알았는지 힘없이 걸음을 옮기는 강소홍. 그리고 그녀는 환히 켜진 공터를 중심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흥겹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그녀답지 않게 내심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지금 적들의 상황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전 연습감도 안 되는 지경에 놓여 있었고, 만독문의 신입 무사들이 왔어도 이길 수 있는 상황인데 그녀가 어찌 좀 더 두고보자 말할 수 있겠는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소홍은 마침내 마음에도 없는 명령을 내리고야 말았다.
“지금……, 시작하겠어요.”
그녀의 결단을 듣고 난 초혼이 수하들을 주욱 둘러보자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곁으로 다가선 초혼은 그녀를 대신해 명령을 내렸다.
“바람이 불지 않아 독은 퍼뜨릴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나태해져있는 적들을 단번에 쓰러뜨려라.”
모두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소리를 낼 수가 없어 행동으로만 보여준 것이다. 그들의 굳은 결의를 재차 확인한 초혼은 눈을 감고 냉랭해진 얼굴의 아가씨에게 입을 열었다.
“이번 임무의 선두는 아가씨께서 서야 한다고 문주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순간, 번쩍 뜨여지는 소홍의 눈.
“뭐, 뭐라고요?”
초혼은 재차 대답해주었다.
“아가씨께서 선두에 서야 한다고 문주님께서 명하셨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필히 선두에 서셔야 합니다.”
“…….”
소홍은 초혼의 강압적인 태도에서 자신을 염려하는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선두에 서야 하는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듣는 것은 쉬워도 직접 행하기 어려운 살인. 지금 자신이 그것을 회피한다면 이후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 자신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나는…….”
초혼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마치, 결단을 내려달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그런 그들의 눈빛들 중 오직 한 줄기만이 따스하고 천진한 미소를 흘려주었다.
‘문영아.’
왠지 그녀를 바라보는 문영의 눈빛이 ‘괜찮아. 내가 있잖아.’ 하고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음을 자각했다.
‘현실, 그래 지금은 현실이야.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현실…….’
그 생각을 끝으로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이 비정하게 열렸다.
“앞장서겠어요.”
소리 없이 진행되던 일방적인 살인이 잠시 후 아수라장처럼 소란스러워지며 더디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살인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보였다.
“으악!”
“저, 적! 크아악!”
술에 취한 자들은 검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스러졌다. 그나마 덜 취한 자들이나 아예 마시지 않은 자들이 있어 버티고는 있지만 그들의 수가 워낙 적어 몰살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우두머리가 나타날 만도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소면살귀 붕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산마루 위에서 4단장과 6단장을 동행한 채 느긋하게 구경을 하고 있었다.
“호오? 일방적인 도살이란 것이, 바로 저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군.”
아무리 상부의 명이었다고는 하지만 수하들을 사지에 몰아놓고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4단장과 6단장은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던 6단장 고민구는 아쉽다는 얼굴로 지나치듯 말했다.
“쩝, 괜찮은 수하 몇 놈이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들었는지 붕걸이 사이한 웃음을 띄워주었다.
“후후, 그놈들을 건지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뛰어들게.”
기겁한 고민구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그런 놈들은 널리고 널렸는데 아까울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런가? 난 또 자네가 가고 싶어하는 줄 알았지.”
“그럴 리가요. 헤헤.”
고민구가 한발 물러설 때 붕걸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한 얼굴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누구 하나쯤은 저곳으로 내려가 봐야 하는 것을 잊고 있었군.”
4단장 훈보(暈寶)와 고민구는 경직된 얼굴로 붕걸을 바라보았다.
“그 무슨…….”
이제 와서 그따위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냐는 뜻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눈치챈 붕걸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하하, 다름이 아니라 저기 죽어 나자빠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힘없이 당해버리면 만독문에서 의심을 할 거라는 소리일세. 그러니 좀 버텨주는 맛이 있어야 의심을 안 할 것이 아닌가.”
훈보와 고민구는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분명 둘 중 하나가 내려가 봐야 하는데 그들은 추호도 그럴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붕걸은 그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네들 벌써부터 으르렁거리면 어떻게 하는가. 쯧쯧,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니 한 가지 방법을 써서 싸움에 참가하되 공평하게 나도 참가하겠네. 어떤가. 이의 있나?”
부단주도 참여한다고 하자 그들은 저 인간이 웬일인가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나쁜 놈만은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붕걸은 웃음을 머금고 품속에서 동전 한 개를 꺼내들었다.
“자아, 이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훈보 자네가 내려가는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고민구 자네가 내려가는 것일세. 그리고 이 동전이 서게 된다면 내가 내려가지. 어떤가?”
“…….”
이 어처구니없는 방법에 그들은 아까 했던 생각을 얼른 취소시켰다.
‘개새끼! 그게 상관이 할 짓이냐?’
‘시발, 네놈 밑으로 들어간 것이 벌써부터 후회가 된다!’
이렇게 속으로 욕이 퍼부어지는 가운데 스스로 결론을 내린 붕걸은 훈보와 고민구가 뭐라 할 새도 없이 하늘 위로 동전을 던져버렸다.
휘리리릭!
동전의 회전 소리가 고민구와 훈보의 가슴을 졸이는 가운데 정점으로 치솟았던 동전은 서서히 그 힘을 잃다 마침내 급강하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힘없는 자들의 눈동자도 동전을 따라 내려갔다.
깡! 떼구르르.
작은 돌덩이에 부딪힌 뒤, 잘도 굴러가던 동전은 어느 순간 뚝 멈추어 버렸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은 붕걸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서, 섰다!”
“오오, 저렇게 서는 것도 가능하구나!”
바위와 바위 사이로 굴러간 동전이 세워져 박혀 버린 것이다. 희비가 교차되는 가운데 모두들 웃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붕걸이 원체 웃는 얼굴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 동전을 꺼내든 붕걸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