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05화
‘쳇, 정말로 이 길이 맞긴 맞는 거야?’
배 터지게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한참을 걸어 나무와 수풀뿐인 산속으로 들어가자 동천은 점점 의구심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해가 저물어 어둠이 깔린 산속은 한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 안력을 높이고 월광에 의지해 걸어가는 게 다라고나 할까. 오르막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올라가던 중소구는 뭔가 불만족스러웠는지 불평을 터뜨렸다.
“아니, 그 흔한 횃불조차 준비해놓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오. 이거 원 불편하기가 짝이 없구만. 이러다가 의문의 괴한들에게 습격이라도 당하면 속수무책이지 않소.”
선두에 서있던 만한상은 오직 전방만을 응시하며 중소구의 불만을 달랬다.
“본가에 도착하기 전에 뒤쫓고 있었다던 무리들을 걱정하시나 본데 그것이라면 걱정을 마시오. 조사해본 결과 단 셋에 불과했으니까.”
그 이야기에 중소구를 비롯한 동천과 도연이 흠칫거렸다. 동천은 도연에게 중얼거렸다.
“쫓아오는 인간들이 있긴 있었나 보네?”
“그렇군요.”
간단하게 대꾸한 도연은 중소구가 물어보려는 찰나 먼저 나섰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번엔 장춘이 알아서 얘기해주었다.
“추적자들로 키워졌는지 멀리서 숨어 있다가 본가의 낌새를 눈치채고 도주해버렸단다. 그 후로 본가에서 경계 방어를 배나 늘렸고 우리가 나올 때까지 아무 행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기실, 우리만 나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본가의 특수부대가 우리의 흔적을 뒤따라오며 적들의 추적로를 차단시켜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장춘의 이야기에 중소구가 코방귀를 뀌었다.
“뒤만 막으면 뭐하오? 앞쪽으로 들이닥치면 끝인걸.”
장춘은 중소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한 가지만 아시는 구료. 본가에서 그것도 예측하지 않은 줄 아시오?”
“그럼?”
“이틀 전, 전서구가 제갈세가로 날아갔으니 앞쪽에서는 제갈세가가 마중 나오고 있을 거란 말이외다. 아마도 중간 지점에서 만나겠지.”
“그렇다 해도 그 전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다는 것이 본 대인의 의견이었으니 지금의 상황만을 논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장춘은 자꾸 물고 늘어지는 중소구 덕택에 흰머리가 늘어날 것만 같아 짜증스러웠다.
“알았소. 다 내 탓이니 그 이야기는 그만 좀 하시오. 됐소이까?”
“험, 그렇다면야.”
중소구가 적어도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은 가운데 궁금한 것이 있었던 동천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저기요. 혹시, 그 전서구를 날리는 담당이 누구인지 아세요?”
방금까지 싸늘한 안색이었던 장춘은 환하게 웃어주며 말했다.
“하하, 그럼 알다마다. 총관을 맡고 있는 이세직(李世織)이란 분이란다.”
“윽! 초, 총관이요?”
동천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서구를 날린 장본인이 총관이라면 앞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발, 좆됐다.’
“표정이 안 좋구나. 어디 아프더냐?”
정신을 차린 동천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장춘을 안심시킨 뒤 도연에게 전음을 날렸다.
『야, 어떻게 하지? 우리의 행로를 그 새끼가 자기 세력에게 꼰지르지 않았을까?』
도연은 가라앉은 눈으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한 후 그도 전음을 사용했다.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뭐? 네가 뭘 믿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데?』
『생각이 아직 정돈되지 않아 지금은 좀 곤란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만은 6할이 넘는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동천은 버럭 짜증을 냈다.
『에이 씨, 10할이 아니면 다 소용없어!』
그리고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끼리 따로 행동하는 건 어떠냐? 그놈들이 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 할아범들일 게 뻔하잖아. 더군다나 싸움이 일어나면 짐만 될 게 분명하니까 저분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거야. 어때?』
말이야 그럴 듯했지만 그 내면은 저 하나 살자고 토끼자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 도연까지 끌어들였으니 둘이 살자고 한 소리인가?
『그건 좀 곤란합니다. 만일 적들이 우리까지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면 뭔가 의심을 하고 우리들을 쫓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전음을 계속 사용했더니 무리가 오고 있습니다. 잠시만 쉬는 것이…….』
안 그래도 동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허락을 내렸다. 한편, 이상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던 장춘은 두 아이가 할딱거리고 있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응? 그러고 보니, 저 아이들이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깜빡했구나.’
비록, 동천과 도연을 예사롭게 보진 않았어도 그들의 진정한 실력까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장춘은 그런 생각이 들자 만한상에게 넌지시 말했고 만한상은 뜻 모를 웃음을 지은 뒤 중소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좀 쉬다 가는 것이 어떻겠소.”
중소구가 괜찮다고 사양하려는데 동천이 나섰다.
“그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도연이 힘들어하는 것 같네요.”
동천도 이제는 어느 정도 중소구를 다루는 방법을 체득해 도연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도연을 언급하자 중소구도 별말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잠시 자리를 잡게 되었고 너무 오랫동안 전음을 사용한 탓에 진기가 고갈되어 있었던 도연은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 운기조식 장면을 본 장춘은 그제야 예사롭지 않은 도연의 기도를 느껴 감탄했고, 동천은 허리띠를 풀고 띵가띵가 하다가 다시 차는 것만으로 운기조식을 대체했다. 허리띠의 제약이 잠시 사라져 갑작스레 내공이 불어난 것만으로도 피로를 날려버린 효과를 본 것이다. 동천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아아, 잘 쉬었다. 응? 얘는 아직도 헤매고 있네?”
장춘은 동천이 모르고 있는 줄 알고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그것이 아니라 심신이 지친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란다.”
동천은 장춘을 향한 비웃음이 일어났지만 자신이 안다고 나선다면 그가 무안해할까 봐 잘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에, 그렇군요.”
모처럼 뜻 있는 동지를 얻었는데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동천의 예상대로 장춘은 한 가지 가르쳐줬다는 데에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도연의 운기조식은 꽤나 길어지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진기를 몇 번 돌리다가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십이주천을 전부 끝마치려는 듯싶었다.
‘에이 씨, 밖에서 찬 공기를 오래 들이마시면 몸에 해롭다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별걸 다 기분 나빠하던 동천이었지만 상대가 도연인 만큼 째려보거나 주먹을 쥐는 행동 따윈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등골이 시원해진 것도 그때였다.
“어?”
동천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예지력이 발동되지 않아 긴가민가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아본 것이다. 하지만 어둠뿐인 숲속에서 동천이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런 동천의 행동을 보게 된 만한상은 어린아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느냐. 뭐가 보였느냐?”
동천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보였다기보다는 뭔가 느껴졌는데 자그마한 동물이었나 봐요.”
내공을 끌어올려 주위를 살펴 본 만한상은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자 아이의 말을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허허, 그랬니? 아, 이제 저 아이도 볼일을 마친 것 같구나.”
그 소리를 듣고 동천이 고개를 돌리자 과연 운기조식을 끝마친 도연이 가뿐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도연은 자신이 너무 시간을 잡아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제일 연장자인 만한상에게 사과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다른 분들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자청하여 사과하자 만한상으로서는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전혀 죄송해할 것이 없다. 우리도 마침 쉬고 싶었던 차에 충분히 쉬었으니까.”
만한상이 웃으며 넘겨버리자 도연도 조용히 동천의 곁에 섰다. 동천은 곁에 선 도연에게 뭐라고 꾸짖으려 했으나 중소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살펴보는 것을 눈치채곤 어깨를 슬쩍 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제 거뜬하냐?”
“예, 도련님.”
“그래? 그럼 가지 뭐.”
그 말을 끝으로 사람들은 다시 산행에 올랐고 중소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동천은 마침내 그가 시선을 돌리자, 내심 말복을 외치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우느라 애를 먹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달님이 정점에 설 즈음, 전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만한상이 반가운 소리를 꺼냈다.
“십여 장 밖을 기점으로 산이 갈리는 것으로 보아 거의 다 왔군.”
중소구는 여지껏 말은 안 했어도 내심 무언가 있었던지, 다 왔다는 소리를 듣자 기쁜 낯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것 참 기쁜 소식이외다!”
동천도 기뻤지만 중소구가 즐거워하자 왠지 기분이 잡쳤다.
‘쳇, 개새끼. 기쁘기도 하겠다. 기쁜 김에 발라당 뒤집어져서 꼬리나 흔들지 그러냐?’
동천은 홧김에 돌멩이를 걷어찼고, 멀찍이 날아가던 돌멩이는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상한 것이 있었다. 돌멩이가 떨어졌는데 들리는 소리는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앞쪽이 아닌 뒤쪽에서 말이다. 원체 생각이 없었던 동천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고 흠칫한 사람들은 저마다 고함을 내질렀다.
“누구이신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어느 종자냐! 썩 나와라!”
만한상, 장춘, 중소구를 차례로 나열된 위의 말들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의 성격이 어떠하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한상은 연륜이 느껴지는 고요함, 나이에 비해 아직까지 기운이 넘쳐나는 장춘, 그리고 홀로 무림의 길을 걸어온 자답게 약간의 험한 소리가 입에 배어있는 중소구. 어쨌든 잡설은 피하고, 그들 셋은 실력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소리가 감지된 곳으로 신속하게 뛰쳐나갔다. 그러자 멀리서 부스럭대며 도망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의아해하는 만한상. 그는 도망가는 사람이 무공을 모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거기다 동천이나 도연 또래의 어린아이. 만한상과 약간의 차이지만 장춘과 중소구도 뒤이어 그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그렇다하여 지금의 상황에서 놓아줄 수는 없는 일. 제일 앞서나갔던 만한상은 부드럽게 아이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히익?”
아이는 몸서리를 쳤고, 그 아이의 목소리에 만한상은 눈을 반짝였다.
‘여아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