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10화
순간, 동천의 두 눈은 부릅떠졌고 다시는 없을 아름답고 순수한 용모의 여자아이는 어딘지 모르게 요사스러운 기운을 흘리며 동천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고운 눈매가 살짝 뜨여졌다. 동천 또래의 여아는 곧장 다가와 화사한 목소리로 물었다.
“앉아도 될까?”
동천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응? 아, 그게…….”
여자아이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신의 자리인 양 동천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동천과 도연을 비롯한 주위의 시선들을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다들 왜 이쪽을 바라보는지 모르겠어. 너는 아니?”
홀린 듯 멍청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건 네가 너무 예뻐서일 거야.”
그제야 여아는 자못 부끄러운 듯 양손으로 복사꽃 같은 볼을 감싸 안았다.
“어머? 그래서 그런 거야?”
그녀가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면 동천은 아마도 ‘뻔뻔한 년, 알면서도 뒷북치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신비한 미소는 동천의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래,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 그런데 이름이 뭐니?”
싱긋 웃은 여아는 검지 손가락으로 동천의 콧잔등을 살짝 내리눌렀다.
“바보. 가르쳐주었잖아.”
우스운 이야기지만 동천은 잠깐 닿았던 여아의 손가락이 참으로 부드럽다고 느꼈다. 하지만 부드러운 것은 부드러운 것이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었다.
“무, 무슨 소리야. 난 들은 적이 없어.”
갑자기 여자아이가 턱을 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아, 너무해. 난 너를 잊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가 한숨을 내쉬자 동천을 비롯한 모든 장내의 사람들이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는 도연까지도 말이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동천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어느 정도 추스를 수가 있었다.
“그, 그런데 네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게 무슨 소리니?”
여아는 턱을 괸 상태에서 앙증맞게 고개를 돌렸다.
“잘 기억해봐. 후훗, 물론 네가 기억을 못하는 것이 다 내 탓이긴 하지만 말야.”
동천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기억할 건덕지가 있어야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왠지 눈앞의 아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으윽, 모르겠는걸?”
그러자 그녀가 나이에 걸맞게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으래? 그럼 이렇게 하면 생각이 나려나?”
과연 그것이 어떠한 것이기에 생각이 난다는 것일까, 궁금해하던 동천은 자신의 무릎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뒤, 자신을 살며시 끌어안는 여아의 행동에 한순간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뭐, 뭐 하는…….”
뭐 하는 짓이냐고 끝까지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천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안온한 기분에 사로잡힌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였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련히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기 때문이었다.
‘이 냄새, 어디선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곤 더욱 깊숙이 들이마시기 위해 여아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화정이 때의 버릇 탓인지 얼굴을 묻으며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가슴을 만졌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무엇이었을까? 이 달콤한 향내는?’
알 수 없는 고리가 끊어질 듯 말 듯, 동천의 기억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동천은 그 고리를 따라 유영해 들어갔고, 마지막에 가서는 산처럼 거대한 자물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히 열리지 않는 자물쇠. 물러설까도 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난다면 너무도 소중했던 기억을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동천은 상단전을 끌어올려 정신을 집중시켰고 차근차근 자물쇠의 열쇠구멍을 맞추어나갔다. 그에 따라 점점 되살아나는 기억들.
‘이 향기는, 이 향기는…….’
-너 이름이 뭐니?
-이름, 미호(尾狐).
-미호? 여우의 꼬리?
-히히, 난 올해로 여섯 살이야.
-나, 여섯 살.
-어? 너도 여섯 살이니? 이거 뭔가가 있는걸?
잠시 흐르던 기억이 멈추어버렸다. 기억이 사라지려고 했다. 이렇게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더욱 정신을 집중했고 멈추어버렸던 기억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의 동천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찰나에 그 당시 여섯 살이었던 지금의 여아에게 안겨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 향기가 무얼까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살며시 입을 여는 여자아이.
-달맞이 꽃…….
드디어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 속의 아이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달맞이 꽃이라고. 동천은 지금의 기억을 잊어먹게 될까 봐 얼른 말했다.
“달맞이 꽃? 미호?”
동천은 미호라 불린 여자아이가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뒤이어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떨었던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와아! 드디어 기억해줬네? 호호, 기뻐라. 다 기억나니?”
“히히, 물론 다 기억이……, 에, 그러니까.”
다시 한번 상단전을 끌어올려 나머지 부분까지도 기억해보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거대한 힘에 막힌 듯 그 이상은 전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한번 기억나기 시작한 것은 노력만 하면 차차 알아낼 수 있다고 들었기에 (역천에게) 우선은 지금의 생각만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헤헤.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지만 차차 떠오르겠지 뭐.”
무릎 위에서 내려온 미호는 동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구.”
동천은 부드러운 동체가 내려가자 내심 쩝쩝거리다가 그녀의 말을 듣곤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응? 뭐가 다행이고 뭐가 서운하니?”
미호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으음, 굳이 말한다면 너를 다시 만나서 다행이고, 네가 그것밖에 기억을 못해서 서운하다고 할까? 호호!”
동천은 진실한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황룡산 너머에 산다는 그녀의 이름과 나이뿐이었다. 그때 당시 자신과 같은 나이였으니 지금의 나이는 10살.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알아서 말해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왔어?”
미호는 동천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었다.
“당연히 너를 만나보러 왔지. 너니까 내가 이렇게 찾아온 거야. 그리고 지금의 너를 다시 보니까 역시나 마음이 착한 동천은 아직도 그대로라는 것도 알았어. 미호는 그것이 가장 기뻐.”
동천은 약간 상기된 모습으로 미호의 치켜세움에 우쭐댔다.
“히히! 그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난, 백년 이백 년이 지나도 한결같이 순수(?)할 걸?”
미호는 귀엽게 눈을 치켜뜨며 가볍게 칭얼댔다.
“흐응, 미호는 늙은 모습의 동천은 싫어.”
그러자 동천이 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다 싶으면 반로환동이란 수법으로 다시 젊어지면 되니까 말야.”
미호는 눈을 반짝였다.
“정말?”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이지!”
“호호, 그럼 동천이 이곳에 올 때마다 꼭 찾아와줄게. 네가 언제 다시 이곳을 지나갈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왠지 이상했다. 동천은 그녀가 이대로 가버릴 것만 같았다.
“어? 버, 벌써 가는 거야?”
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봐야지. 조금 있으면 귀찮은 사람들이 내려오기 때문에 내 한계치의 사람들만이 있을 때, 얼른 가봐야 해.”
동천은 그녀를 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알았어. 네가 간다는데 그렇게 해줘야지 뭐.”
가만히 그런 동천을 바라보던 미호는 그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난 뒤 선홍빛 입술을 열었다.
“만나서 즐거웠어. 하지만 미호 때문에 무공 수련에 지장을 받으면 안 되니까 예전처럼 지금의 기억만을 지워줄게. 그리고 추연과 장춘에 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까지도. 호호, 네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잖아. 물론, 네가 너무 강해져서 한 번에 지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해도 기억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을 거야.”
“무슨 소리야?”
“훗, 내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순간 동천은, 그녀의 눈에서 밝은 광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객점 내의 구석구석에 퍼져나갔다. 그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가 금세 떴다. 그리고는 마주 앉아있는 도연에게 말했다.
“뭐야, 불이라도 났어?”
엉뚱한 주군의 질문에 도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이라뇨? 어디에서 불이 났습니까?”
도연의 반문에 얼떨떨해진 동천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왜 불이 났다고 생각한 거지?”
그런 주군의 대답에 도연은 그러려니 넘어갔다. 늘 저런 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식사는 시키셨습니까?”
“당연한 거 아냐?”
동천은 어이가 없었던지 상체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옆자리의 의자에 한 손을 집었다. 그리고 그 의자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어?”
아울러 누가 앉아있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눈부시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였던 것 같았다.
‘그 얼굴이…….’
그 사이 젊은 점소이 둘이 음식들을 한가득 들고 왔다. 그 바람에 동천의 생각은 여지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에이, 알게 뭐냐! 먹자, 먹어!”
도연의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주군 혼자만의 이야기인지라 고개를 절레 내두를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이 오시면 그때 같이 먹겠습니다.”
“뭐? 아차차. 그러고 보니 소구 새끼가 이 몸 먼저 드셨다고 괜히 시비 거는 거 아냐?”
“그럴 리가요.”
“씨팔, 뭐가 그럴 리가야? 그 새끼는 당연히 그러고도 남지!”
“진정하시지요.”
“지금 이 몸께서 진정하게 생겼어? 엉?”
불같은 동천과 얼음 같은 도연. 멀리서 지켜보던 미호는 그 둘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흐응, 동천이 나중에 올 때는 얼마나 멋있어져서 올까? 그거 은근히 기대되는걸? 호호호.”
그녀는 그렇게 웃다가 인파에 파묻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는 달맞이꽃 향기만이 그윽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