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11화
장춘에게 갔었던 만한상과 중소구는 끝끝내 싫다는 그를 떠밀다시피 데리고 내려왔다.
“아니, 이렇게 올 것을 안 오겠다고 뻐기는 이유가 도대체 뭐요?”
“…….”
장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죽기보다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의 고민을 안고 있는 것 같자 만한상은 참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도 입을 다물고 있다니. 도대체 어떠한 난제를 짊어졌기에 어제만 해도 팔팔했던 장춘이 저렇게 망가졌을까? 허허, 이것 참.’
한편, 중소구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기다리고 있었던 동천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그들을 반겼다.
“오셨군요! 어서들 앉으세요. 어? 추연이도 왔네? 너도 이리로 와서 앉아.”
사람들의 뒤를 없는 듯 따라오던 추연은 동천이 바로 옆자리를 권하자 멈칫하다가 앉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조심스레 앉았다. 추연을 자신의 왼쪽에 앉힌 동천은 나머지 한 자리에 중소구가 앉게 될까 봐 급히 장춘을 불렀다.
“장 어르신, 제 옆쪽에 한 자리가 비었으니 어서 앉으시지요!”
그러자 전혀 반응이 없었던 장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두려워하는 듯한 눈으로 동천을 바라보는 장춘. 그 영향 탓일까? 그의 눈에는 오직 동천의 손가락만이 보였는데, 그 손가락은 무언가를 묘하게 비트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비트는 그것이 꼭 자신의 젖꼭지로만 보이는 것이 아닌가.
‘흐윽? 화, 환각일 따름이다! 환각일 따름이야!’
이런 해괴망측한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는 심각했던 것이다. 급기야는 동천이 있는 곳을 멀찌감치 피해서 다른 식탁에 앉아버렸다.
“왜 저러시지? 장 어르신!”
중소구는 대뜸 소리쳤다.
“이놈아, 그만 입 다물어! 여기가 너만 먹는 자리더냐? 에잉, 도 소형제. 아무래도 저기 장 어른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으니 이놈은 혼자 처먹게 놔두고 우리가 가서 힘이 되어주는 것이 어떠한가?”
도연은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주군인 동천이 그것을 보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시지요. 저는 추연과 먹으면 됩니다. 또한, 중 대인의 넓은 포용력으로 장 어르신의 심기가 편해지시면 저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
중소구는 들어줄 만한 동천의 아부에 즐거워했다.
“하하, 네놈이 간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구나. 좋다, 본 대인이 꼭 장 어른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고야 말겠다. 도 소형제, 가세나.”
“그러지요.”
도연은 어쩔 수 없이 중소구를 따라 장춘의 맞은편에 앉았고 만한상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동천과 같이 먹기로 한 뒤 지나가는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 것들 중 절반을 나누어서 저쪽에 가져다주거라.”
점소이는 자신의 본분에 맞게 만한상이 시킨 것을 충실히 이행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동천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고, 아까워라. 이럴 줄 알았으면 한입씩 먹어보는 건데…….’
다른 식탁으로 이동하는 음식들이 동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떠나버린 것에 연연해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음식이 줄어든 만큼 자신이 먹을 것도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동천의 입장에서는 한입이라도 더 먹어야 하는 것이다.
“저기, 이제 먹어도 되지요?”
장춘 쪽을 주시하고 있던 만한상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아? 그렇구나. 어서들 먹자. 허허, 추연도 어려워 말고 많이 먹어라.”
원래 추연은 감히 상전과 같은 식탁에서 먹을 수 없었지만 동천이 그녀에게 앉기를 권했을 때 만한상이 묵인해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동석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였을까?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그녀가 자리에 앉은 것은, 이런 자리가 그녀에겐 평생을 두고 영광이었기에 따로 심한 질책을 받더라도 우선은 앉고 보자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좌태상 어르신.”
만한상이 조용히 먹고 동천이 품위를 지켜가며 재빠른 손놀림을 구사하고 있는 가운데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레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음식을 한 점 집어먹자 그녀의 입안으로 달콤한 향이 스며들었다.
‘아아,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황룡미미의 시중을 들어 하인으로서는 제법 맛난 것을 먹을 수 있었지만 이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인이 먹고 남은 것을 몰래 먹을 수도 있었으나 들켰다가는 천한 짓이라 하여 쫓겨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종종 미미의 음식을 훔쳐 먹었던 동천은 실로 간덩이가 큰놈이었다.) 엄두도 못 냈는데 먹지 못한 설움이 이번의 한입으로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여한이 없어진 그녀는 과한 것을 바라지도 않고 동천이 먹다 남긴 그릇들을 골라 자신의 주린 배를 채웠다. 그것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던 동천.
“어? 왜 다 먹은 것만 먹지? 뭐라 하는 사람 없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먹어. 안 그렇습니까, 만 어르신?”
직접 만한상의 대답을 들려주어 추연을 안심시키려는 동천의 작은 배려였다. 동천의 생각을 눈치챈 만한상은 그렇다고 말해준 뒤 약간의 농을 걸어왔다.
“허허, 네가 추연이를 꽤나 아끼는구나. 관심이 있느냐?”
“큽! 켁켁켁! 예에?”
사래가 걸려버린 동천은 얼른 물을 들이키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한상은 자신의 턱수염을 은근히 쓰다듬었다.
“본가에 귀한 것을 가져다준 공로도 있고, 추연을 보는 네 시선도 예사롭지 않아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몸종으로 데려가도 무방하다는 말이었다.”
추연은 어쩔 줄을 몰라하다 급기야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만한상에게 애원했다.
“어르신, 저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사옵니다. 흑흑.”
한순간 마음이 흔들렸던 동천이었지만 자신과는 다르게 추연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두 손을 내저었다.
“장난이 너무 심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순진한 애 진짜로 알아들어요.”
동천이 거부 의사를 완곡하게 표현해주자 만한상도 순리에 따라주었다.
“하핫, 그렇구나. 내가 생각해도 농이 좀 심했어.”
이렇게 되자 추연만 어리둥절해질 뿐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사태를 주시하다가 그제야 놀림을 받았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인지 감히 젓가락을 놀릴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무의미한 손가락 놀이를 할 따름이었다.
“뭐해, 어서 먹어. 설마 방금 전 그것 때문에 못 먹고 있는 거야? 에이, 그거 농담이었다고.”
동천의 이야기에 추연은 겨우 말을 꺼냈다.
“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뭐?”
“다만…….”
추연은 그 뒷말이 이어지지가 않아 식은땀을 흘렸다.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해줘야 하는데 그녀가 동천이 아닌 이상, 둘러대는 것에 나약했던 것이다.
“뭐냐니까?”
동천이 재촉하고 있는 가운데 전혀 음식에 입을 대지 않고 있던 장춘은 맞은편에서 끊임없이 먹어보라는 중소구의 권유에도 꿈쩍을 안 하고 있었다. 그러니 중소구의 입장에서는 장춘이 마치 ‘너는 짖어라. 나는 안 먹는다.’라는 심보로 이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으으, 정녕 안 드실 작정이시오?”
“…….”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니 중소구가 방방 뜨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소구만의 생각일 따름이었다. 이제 예전의 중소구가 아니라 대인 중소구로 거듭 태어났는데 언제까지 철부지 어린애처럼 행동하겠는가. 그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핀 다음, 화를 가라앉히고 사근사근하게 권유했다.
“본 대인이 이 정도까지 했으면 드시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니오. 자자, 이게 국물이 아주 시원하니 한 수저 들어보시구료.”
중소구의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지금의 장춘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비유가 심할지 몰라도 지금의 장춘은 강간을 당한 여인과 똑같은 심정인 것이다. 더군다나 여인도 아니고 불알 달린 어린놈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죽어버리고만 싶은 장춘이었다.
“에이, 싫으면 마시오! 도 소형제, 우리끼리나 먹으세!”
드디어 포기를 해버린 중소구는 옆자리의 도연에게 먹자고 한 뒤 마구 퍼먹었다. 그러나 도연으로서는 아픈 사람을 놔두고 먹는다는 것이 꺼림직했던지 장춘의 곁으로 다가가 중소구의 뒤를 이어받았다.
“어르신, 그러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드시지요. 이 고기가 상당히 맛이 있습니다. 드셔보시겠습니까?”
도연이 고기 한 점을 들이밀자 처음으로 장춘의 심경에 변화가 일었다. 조용히 고개를 돌린 그는 고기를 권하는 도연의 모습을 보고 의심에 가득 찬 눈빛을 보냈다. 그는 ‘이놈도 같은 부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인의 그 하인이라고, 장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할만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쪽으로 생각을 굳히자 도연까지 무서워진 장춘은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 으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