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27화
반 시진 후 법당을 나온 도연이 중소구와 조용히 오가사를 떠나자 멀찍이 지켜보고 있던 분공은 자신도 그 나름대로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밤중에 처리해야만 하는 사안이었다. 섣불리 여장을 꾸리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결심이 어떠하든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며 경내를 청소하던 분공은 네 명의 사내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하면서도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일이 터지는 것은 예견된 일인데 아무래도 시기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구나. 지금은 무사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나까지 휘말릴 수도…….’
지금 분공의 의미 모를 생각들을 이해하려면 앞서의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을 수가 없으니, 부득이하지만 언급해보기로 하자. 이름 모를 지역들을 떠돌며 거지 생활로나마 겨우 목숨을 연명해야만 했던 분공은 정처 없이 세월을 보내고 그렇게 한 해를 넘겨버리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당면한 배고픔을 해결하기에도 모자랐던 것이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그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은 구걸의 능숙함도 아니고, 사람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그의 능력도 아닌, 바로 거지의 무리에 끼여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분공은 스스로 거지의 무리에 찾아갔는데 하필이면 그곳이 어중이떠중이가 모여있는 왕초 중심의 거지 무리였을 줄이야. 개방과 같이 체계가 잘 잡히고 문규를 중시하는 곳이 아니다 보니 왕초가 정한 것이 곧 법이요, 그날의 심기에 따라 이미 정해놓은 법을 뒤엎어버려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시할 수 없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마침 어떠한 일로 최악의 심경이었던 왕초는 입단식이라는 이름 하에 분공을 구타하게 되었고, 두들겨 맞던 분공은 두려운 마음에 배설을 해버렸는데 공교롭게도 그것이 큰 것이었다. 거지들에게도 더러운 것이 있을까? 아무래도 있었나 보다. 재빨리 물러난 왕초는 마침내 분공을 그들의 일원으로 합류시켜준 뒤 다음 날 분공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들어오자마자 똥을 선사했다하여 분공(糞貢)이라고 지어준 것이었다. 의외로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던 듯 분공은 아예 그 별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셈이었다.
자아, 이제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났을 무렵 거지들에게 때아닌 한파가 몰아닥쳤으니, 다름 아닌 역병(疫病)이었다. 있는 집 자식들도 걸렸다하면 죽는 것이 다반사인데 거지들의 입장에서야 오죽하겠는가. 다행히 모두들 무사했지만 언제 역병이 퍼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밤 분공은 또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헌데, 이번에는 부모님이 나란히 서있는 것이 아닌가. 분공이 기뻐하여 달려갔지만 그분들의 안색은 어두웠다. 잠시 후, 돌아가신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하시는 말씀이 ‘혈육이라고는 이제 너뿐인데 어찌 허무한 죽음을 내버려두겠느냐. 앞으로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주저 말고 따라가도록 하거라. 다만 명심할 것은 지나치게 사람을 바꾼다면 저승사자가 눈치를 챌 것이니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때를 맞춘 듯 비명소리에 깨어난 분공은 이내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우려했던 대로 밤새 늙은 거지 하나가 역병에 옮아 끙끙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지들은 내쫓아야 한다며 서로들 입을 모았고, 그들은 지체없이 늙은 거지를 소굴에서 내쫓아버렸다. 그 당시 분공이 자의로 늙은 거지를 따라 나서자 거지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역병에 걸린 늙은 거지의 얼굴을 봤을 때 기이한 느낌을 받았던 분공으로서는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마저 꿈속의 당부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죽게 될 늙은 거지를 간호해주고 열심히 보살펴주던 분공은 이틀째 되던 날 그도 역병에 옮게 되었는데 신기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분공은 일주일 후 가뿐하게 일어났고, 죽을 줄 알았던 늙은 거지 또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들은 기쁜 마음에 다시 거지들의 소굴로 돌아갔는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역병에 걸린 거지들이 떼죽음을 당해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이 떠난 뒤 밤중에 역병이 퍼져 떼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같이 역병에 걸리고도 그들은 살고 거지들은 떼죽음을 당한 이유는 뭐였을까?
그것은 바로 환경의 차이였다. 거지들은 더럽고 지저분한 소굴에서 끙끙 앓다가 면역력이 생기기도 전에 죽어버린 것이고, 분공과 늙은 거지는 그나마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 거리에서 끙끙 앓았던 차이가 생과 사를 갈라놓았던 것이었다. 이에 믿음이 생긴 분공은 늙은 거지와 한 달가량 생활을 하던 중 산길을 지나다 마주친 산적 무리에게 이끌려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졸지에
“저기, 안 계시는 것 같은데요. 지금 보니까 시, 신발이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한 명만 남고 세 명의 형제들이 선방을 들이닥쳤다.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정말로 없자 다시금 뛰쳐나왔다.
“없습니다, 형님.”
송근일은 냉큼 분공의 멱살을 쥐었다.
“이봐, 꼬마 중. 어떻게 된 거야.”
‘제길, 아까는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해놓고서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분공은 숨이 막히는 듯 얼굴을 붉혔다.
“케, 케켁! 우선 이 손 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분공은 한숨을 돌린 후 자신을 죽일 것 같이 쳐다보고 있는 사내들에게 말했다.
“이곳에 안 계신 것을 보니 버, 법당 쪽에 계신 것 같습니다.”
분공의 말에 잠시 의견을 교환하던 그들은 갑자기 눈빛을 발했다. 둘째인 송근단이 구석의 후미진 곳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게 누구냐?”
사내가 끄집어낸 사람은 뚱뚱한 노승이었다. 개 끌려오듯……. 아니, 돼지 끌려오듯 끌려온 노승은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연신 불호를 외웠다.
“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본 승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미타불, 정말입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송근단은 뚱뚱한 노승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죽기 싫으면 네놈들의 예각이라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아, 아닙니다. 본인은 그저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놈이 끝까지 거짓말을!”
이번엔 송근일이 나섰다. 뚱뚱한 노승은 정말로 모르쇠로 일관했다.
“왜 거짓말을 하시오! 아까 그 꼬마 중이 법당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 그런 말은 안 했는데요. 그저, 법당에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법당에 있다는 거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송근일은 화를 참지 못하고 뚱뚱한 노승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송근단이 말했다.
“형님, 아무리 봐도 이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나 다른 곳에 숨어있을 수도 있으니 다른 놈을 잡으러 갑시다.”
그 말에 송근일은 일단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머지 노승들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갔다. 분공이 미리 도연에게 돈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방에 모여있던 노승들은 그들이 쳐들어오자 당황한 표정으로 쩔쩔맸다. 송씨 형제들은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 중에 예각이라는 놈이 누구냐?”
그러자 나머지 네 노승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을 본 송근일이 갑자기 눈빛을 번뜩였다.
“이놈들! 내가 예각이 누구인지 모를 줄 알고!”
모든 노승들이 갑자기 공포에 질려 떨었다. 송근일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다 죽였어야 했어.”
그의 말에 노승들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뭐, 뭐라고요!”
“이놈들이! 대체 어떤 놈들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우, 우리가 살인자들과 같이 있다니!”
송근일은 자신들의 살인 행각을 깨달은 그들을 보며 낮게 웃었다.
“하하하, 늦었군.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인가. 그래, 너희들은 우리가 3년 전 이 절에 들이닥쳐 스님들을 죽여 없앤 살인자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틀렸어. 3년 전 이 절의 스님들은 우리에게 살해당한 게 아니야.”
그의 말에 노승들이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그럼 누, 누가…….”
“누가 죽였는지 우리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그 스님들의 시체를 발견했을 뿐이지. 아마 스님들을 죽인 놈들이 우리가 찾는 놈들일 테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그놈들이 누군지는 몰라.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놈들이 너희들의 금불상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노승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금불상! 혹시, 그때 우리가 죽어갈 때 무슨 단서 같은 것을 남겼을 여유도 없었을 텐데 말이죠.”
넷째의 물음에 송근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3년 전 우리가 금불상을 탈취할 당시에 다 죽였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문득 생각해보니까 아니었어.”
셋째는 흠칫했다.
“그럴 리가요. 거기에 있던 놈들은 그때 다 죽였잖아요.”
“그래, 다 죽였지. 발견한 놈들만…….”
“예에? 살아있는 놈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확실하다. 그때는 오로지 금불상에만 정신을 쏟았기 때문에 죽어가는 중놈이 지껄인 이야기를 미처 되씹을 여유가 없었어.”
“뭐라고 했는데요?”
“그 중놈이 헐떡거리며 그랬지. ‘예, 예각은 피했구나.’라고 말야. 금불상을 탈취하고 멀리 도망친 후에야 그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때는 우리가 멀리 도망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관할 필요성을 못 느꼈었어.”
넷째가 바로 이어서 말했다.
“이 마을에 다시 돌아올 생각은 안 했으니까요.”
송근일이 대견스러운 눈으로 넷째를 바라보았다.
“네 말이 맞다.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만일 그놈이 되돌아와 오가사를 재기시킨 거라면 골치가 아플 수 있어.”
“왜요?”
“만일 그놈이 우리가 금불상을 훔쳐간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그놈이 힘이 있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우리가 무슨 위험에 빠질 수도 있으니 확인차 들린 것이다. 그 꼬마 중이 예각이 법당에 있다고 알려준 거라면 그놈은 분명 이 사찰의 높은 승려겠지. 예각이라는 놈을 봐야겠어.”
송씨 형제들은 노승들이 있는 곳을 이리저리 뒤졌다.
“아니외다. 본 노승은 예현(豫顯)이라오.”
다른 노승이 오자 셋째인 송근우가 발끈했다.
“뭐라고? 분명 예각을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더냐!”
예현은 감히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 그렇게 들었소이다. 그러나 예각 승이 오랜만의 손님이라 법당으로 안내해달라기에…….”
사내들은 구태여 따라갈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아직 자신들의 정체가 밝혀진 것도 아니고 힘없는 늙은이들이 무슨 속셈이야 있을까 싶어 마음 놓고 예현을 따라갔다. 그들이 법당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불상이 보였고, 그 앞에 놓인 작은 향로에서는 네다섯 개의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뒤따라온 예송을 합쳐 다섯 중들이 나란히 앉게 되자 건들거리며 마주 앉은 송씨 형제들 중 둘째가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어느 분이 예각이시오.”
정 가운데의 예각이 조용히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바로 본인이 예각이외다. 시주들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찾으시는지요.”
“당신이오?”
“그렇습니다.”
잠시 예각을 살펴보던 송근일이 넌지시 물었다.
“듣자하니 당신을 포함해 다른 분들은 3년 전 새로 들어오신 분들이라던데요.”
노승들 사이에 약간의 동요가 일어났다. 눈짓으로 그들을 진정시킨 예각은 차분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있는지요. 죄송하지만 지금 하고 계신 일이…….”
캐물을 자격이 있는가 물어보는 것이었다. 넷째가 위협적으로 잠깐 칼을 빼들었다가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충분히 인식할 만한 신분이나 아직 드러낼 단계는 아니오.”
서늘한 칼날을 접한 노승들은 오들오들 떠는 척했다. 그들 중 진짜로 떠는 자들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간이 컸던 예각과 예송만은 내심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예각은 골치가 아팠던지 미간에 진한 주름을 접었다.
‘제길, 그때 촌장 놈에게 법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었는데.’
처음 사이비 승려 노릇을 하려던 그들은 무공 해석에 도움을 준 촌장에게 약속된 돈 외에 웃돈을 얹어주었다. 법명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 당시 촌장은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자 의문사를 당한 승려들 중 생각나는 승려들의 법명을 골라 지어주었는데 하필이면 그 법명들 중 예각이라는 법명 끼어있을 줄이야……. 그러한 내막은 영원한 비밀로 묻혀질 테지만, 예각이 내심 씹어댈 상대를 촌장으로 골랐다면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듣고 있는 것이오?”
넷째가 신경질적인 어투로 묻자 예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미타불……. 충분히 알아들었소이다.”
처음부터 예각만을 주시하고 있던 첫째는 상대의 깊은 곳에서 만만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예각을 위시해 모두들 쓸어버리기로 마음을 정했다. 3년 전에도 한 번 쓸어버렸는데 지금에 와선 못하리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그는 동생들과 약속된 명령어를 읊조렸다.
“난 송근일이라 하오.”
“그렇습니까, 아미타불.”
예각의 불호를 끝으로 사내들의 얼굴에서 서서히 살기가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노승들은 ‘역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중간에 죽일 거라던 분공의 말 그대로구나. 어서 분공이 와야 할 텐데…….’ 하는 생각들을 했다. 바로 그때 분공이 차를 가지고 허겁지겁 걸어 들어왔다. 자연히 그로 인해 송씨 형제들이 주춤거렸다.
“시주님들. 차, 차 좀 드시고 나서…, 앗? 아이쿠!”
발이 엇갈린 듯 분공이 넘어지며 차를 뒤엎었다. 헌데, 공교롭게도 엎어진 찻물은 사내들의 온몸을 적셔놨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자 그들은 대번에 화를 냈다. 셋째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칼을 빼들었다.
“앗 뜨거! 이놈이 무슨 짓이냐!”
“이게 죽으려……, ‘커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