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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29화


“그러시겠소? 좋소, 같이 가보기로 합시다. 어차피 우리는 문밖에서 기다려야하지만 이곳에서 혼자 기다리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외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오죽 좋겠습니까.’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분공은 착잡함을 금치 못했다.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도연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이상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도연을 위시해 괜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사람을 바꿀 때마다 자신에게도 위험이 다가온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분공으로서는 더욱 도망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도연은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친해진 뒤에 같이 떠나자고 해도 거부할 것이 분명해.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저런 소악마를 만나게 해주신 것일까? 아아, 이번을 기회로 팔자 좀 펴보려고 했는데…….’

쥐 죽은 듯 조용히 부진한을 따라가던 분공은 이들이 점점 외진 곳으로 들어가자 덜컥 겁이 나 부진한을 불렀다.

“저, 저기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

부진한의 얼굴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자 분공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직 멀었나해서요.”

부진한은 빙긋 웃어주었다.

“다 왔소이다. 길이 좀 구불거리지만 험하진 않으니 걱정 마시오. 저기 모퉁이를 돌면 바로 보일 것이오.”

“네에.”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동천은 내심 짜증이 일어났다. 자신에게 물어본 것도 아닌데 잠깐 멈춰 섰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심히 불쾌했던 것이다. 동천의 섬뜩한 눈길을 접한 분공은 재빨리 부진한에게 말했다.

“빠, 빨리 가보고 싶군요!”

부진한은 장난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하하, 급하기도 하구려. 가기 싫어도 가보게 될 터이니 너무 조급히 생각하지 마시길 바라오. 보시오. 저기 보이질 않소.”

부진한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동천의 눈치를 살펴본 분공은 그의 마음이 금세 풀어져 있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무슨 놈의 인간이 좋고 싫고가 저따위로 한순간에 뒤바뀔까? 어휴, 고생길이 훤하다.’

분공이 푸념을 하고 있을 때 한 노사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동천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분공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당연히 분공으로서는 마주볼 수밖에. 분공에게 충분히 시간을 준 그는 미소하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소?”

분공은 진땀을 흘려가며 말끝을 흐렸다.

“충분히…….”

이럴 땐 편하다고 생각한 동천이었다. 동천은 친한 척 분공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럼, 같이 들어가십시다.”

“아, 아미타불.”

그 둘을 지켜본 부진한은 뭐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그만두었다. 동천이 직접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은 상대가 들어도 무방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말은 안 했지만 부진한의 얼굴에서 은연중 서운함이 감돌았다.

‘섭섭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나이 든 나보다 같은 또래에게 마음을 쉽게 열겠지. 그러고 보니, 저 아이에게 그동안 정이 들었던 모양이군. 나도 참.’

부진한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는 사이 분공을 대동하고 들어온 동천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한 노사를 보게 되었다. 분공의 존재 때문인 것 같았다. 동천은 한 노사의 심중을 금세 간파했다.

“도연을 만나러온 문정 스님입니다. 홀로 계시게 할 수가 없어 부득이하게 모셔왔습니다. 불편하시다면…….”

“됐다.”

냉랭하게 대꾸를 하고 난 한 노사는 분공을 날카롭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편한 마음으로 앉게.”

생긴 건 무섭게 보여도 속내가 따뜻하게 느껴지자 분공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말씀 감사합니다.”

전염된 듯 한 노사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순간일 뿐이었다.

“좋아. 그건 그렇고, 철경의 해석에 관해서 말인데. 오래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자료집을 발견해서 예상외로 빨리 끝났다.”

동천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엉덩이를 들썩였다.

“우와, 정말입니까? 보여주세요! 빨리요!”

한 노사는 흥분한 동천이 다가들자 주저 없이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으엑? 왜, 왜 때려요!”

“침착하거라. 해석을 하긴 했는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욱하는 마음에 성깔을 드러내려던 동천은 확실하지 않다고 하자 금세 실실거렸다.

“헤헤, 그러세요? 정확히 어디가 확실하지 않은데요?”

한 노사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말해주었다.

“소불승강(少不昇降)의 운용결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의 내용을 확신할 수가 없어. 그것을 알자면 내 눈으로 직접 봐야만 할 것 같다.”

“소불승강?”

“그 도법의 일초식이다.”

“아하, 그렇구나. 그럼, 정확히 얼마나 걸려야 완전 해석이 가능한가요?”

한 노사는 동천을 한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놈아. 지금까지 무슨 생각으로 들었더냐. 내 눈으로 직접 봐야만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지 않느냐.”

‘이씨, 그러니까 결론으로 네가 하고픈 말이 뭐야? 네가 직접 익혀보겠다는 거야? 그런 거……. 얼레, 정말로 그거면 어떻게 하지?’

동천의 불신 섞인 시선이 파고들자 한 노사의 목소리가 절로 싸늘해졌다.

“네놈 눈초리의 의미가 무엇이더냐.”

동천은 눈을 똥그랗게 뜨며 시치미를 뗐다.

“예? 제 눈빛이 어땠는데요?”

“됐다.”

골치가 아파졌는지 한 노사는 귀찮다는 듯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동천은 분공에게 소리 죽여 물었다.

“저 노친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동천에게서 한 노사의 심중을 읽어보라는 명령을 받았던 분공은 과연 말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겪었다. 분공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동천이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너 말야. 거짓말을 할 생각이면 애초에 그만두는 게 좋아. 너만큼은 아니어도 눈치 하나로 오늘날까지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이 몸이니까. 내 얼굴을 보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겠지? 응?”

동천의 음흉한 미소를 접한 분공은 땀에 번들거리는 이마를 쓸어낸 후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 그러니까요. 아까 저분의 말씀은 공자님을 직접 가르치시며 해석된 곳에 틀린 부분이 발생하면 이론적으로 생각하시어 바로잡아주겠다는 말씀을…….”

분공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을 맺었다. 왜냐하면 땡 잡았다고 생각한 동천이 한 노사의 방으로 쳐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우당탕탕!’

“한 노사니이-임! 부디, 이 우매한 중생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분공은 부서졌다시피 한 방문 안쪽에서 당황해하는 한 노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소불승강인지 소강상태인지 그 운용결을 노사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십사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노사는 금세 침착해졌다.

“본 노사는 무공을 사용해본 바가 없다.”

‘윽? 괜히 부탁했나?’

동천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한 노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보는 눈은 있다. 실지로 제갈세가의 아이들에게 몇 번 가르침을 내린 적도 있지. 한때는 흥미를 좇아 제갈세가의 무각고(武閣庫)를 들어가 본 적도 있고.”

‘휴우, 마냥 병신은 아닌 모양이다.’

동천은 한 노사 몰래 한숨을 내쉰 뒤 강하게 밀어붙였다.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습니다. 노사님을 믿고 따를 것이니 내치지만 말아주십시오.”

그때 어수선한 소리를 듣고 부진한이 달려왔다.

“노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한 노사는 부진한의 질문에도 아랑곳 않고 동천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심한 그의 기세에 억눌린 동천은 자꾸만 눈이 감기려는 것을 억지로 치켜떴다. 내세울 것 없이 살았던 옛날에 유일한 자랑거리가 눈깔 치켜뜨기였던 동천으로서는 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 여기서 진다면 82전 82승의 전적이 무너진다. 절대 질 수 없다! 저, 절대로……, 크윽!’

아무래도 자신의 할 일을 잊어 먹은 듯 보였다. 그런 동천의 눈빛을 오해한 한 노사는 허락의 뜻을 내비쳤다.

“각오가 되어있군. 내일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아?”

동천은 감격스런 얼굴로 생각했다.

‘이것으로 83승…….’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어?”

이틀 뒤 제갈세가로 돌아온 도연이 터트린 목소리였다.

“어?”

그 뒤를 이어 중소구가 터트린 목소리였다.

“아미타불, 또 뵙는군요.”

분공이 그들을 반가이 맞아주자 그들은 되레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중소구는 신기했는지 물건 구경하듯 분공을 살펴보았다.

“어떻게 꼬마 중이 이곳에 있는 게지?”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에이, 본 대인의 말은 그게 아니라 이곳에 어떻게 찾아올 수 있었냐는 거야.”

중소구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분공은 부담 없이 가르쳐주었다.

“도 시주께서 가르쳐주셨답니다.”

“도 소형제가?”

가만히 듣고 있던 도연이 나섰다.

“이 방은 도련님의 방인데 안 보이시는군요.”

분공은 도연이 자신의 일보다 동천의 안부를 듣고 싶어하자 내심 감탄하면서도 어째서 그런 소악마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이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 그 시주 분은 한 노사님께 가르침을 받고 계십니다. 오늘로서 이틀째죠.”

중소구는 동천의 이야기가 나오자 저 혼자 흥분을 했다.

“그놈이 한 노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중소구의 질투 섞인 얼굴을 접한 분공은 ‘이 인간은 또 왜 이러나’ 했다.

‘참으로 복잡한 심성을 가진 자로구나. 과시욕을 비롯해 독점욕과 그에 못지않은 식탐욕까지 있으니, 실로 대인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가.’

“예, 무슨 철경의 내용을 배우고 있습니다.”

중소구는 흥분한 것에 비례해 식는 것도 금방이었다.

“뭐야, 그거였어? 까짓 거 배우라고 하게. 본 대인은 마음이 너그러우니까. 하하하!”

분공은 중소구의 영양가 없는 웃음소리를 들어가며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자가 그 소악마를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견제용은 될 수 있겠어. 앞으로 비위를 잘 맞춰줘야겠다.’

“그렇다면 지금 한림서원에 계시다는 말씀이시군요.”

도연의 물음에 분공의 상념은 거기에서 깨어졌다.

“예? 예, 그렇습니다. 아침 나절에 가셨다가 늦은 저녁에야 돌아오시니 보시고 싶으면 직접 가셔야 할 겁니다.”

“저런?”

도연이 놀람을 표하자 가만히 있을 중소구가 아니었다.

“왜 그리 놀라는가?”

‘참나, 그 도련님이란 작자가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놀랐답니다. 아무래도 노력이라는 단어하고는 물과 기름의 관계니까요.’

분공이 마음속으로 대신 대답해주는 사이, 도연이 고개를 저어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 도련님께 다녀올 터이니 여기 동자스님과 잠시 쉬고 계십시오.”

굳이 동천을 보러갈 생각이 없었던 중소구는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하도록 하겠네. 자네도 피곤할 테니 보기만 하고 돌아와 쉬게나.”

“알겠습니다.”

방을 빠져 나온 도연은 걸음을 재촉해 한림서원에 당도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역시나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아 하는 주군의 모습이었다. 오른손을 등허리에 고정시키고 왼손만을 이리저리 놀리고 있던 동천은 무언가 낌새를 느꼈는지 도연 쪽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가 기쁨에 물든 이유는 말 안 해도 알리라.

“이게 누구야? 도연이 아니더냐!”

“예, 돌아와 보니 한 노사님의 밑에서 수련을 하신다고 하더군요.”

한 노사의 방문을 힐끔 쳐다본 동천은 소리 죽여 대답했다.

“그렇게 하기는 한데 가르치는 게 너무 강압적이야. 더군다나 해석도 불완전하고. 완전히 개판이야.”

도연도 따라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다면 그만두시지요.”

돌연 동천이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미소했다.

“훗,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 몸의 현란한 움직임과 번뜩이는 천재성이 필요하다는구나. 후후, 너도 알지? 이 몸이 인정에 약하다는 걸.”

도연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입을 열었다.

“……잘하셨습니다.”

동천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물론, 잘하셨지. 히히, 언제 이 몸께서 못하신 일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래그래. 역시, 너는 뭘 아는구나. 헌데, 그놈은 만나봤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자 도연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놈…이라니요?”

동천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왜 있잖아. 나한테는 분공이라더니 다른 인간들한테는 문정이라면서 사람 눈치만 살피는 중대가리 말야.”

그제야 이해한 눈치를 보였다.

“분공이니 문정이니 하는 소리는 모르겠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습니다. 방금 보고 오는 길이죠.”

동천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뭐? 그럼, 여태껏 그 중대가리의 법명도 몰랐단 말야?”

도연이 차분히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점이라도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놈이 너를 만나러 왔다고 하니까 난 또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저를요?”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누가 또 있냐?”

도연은 잠시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의외여서 그랬습니다. 별로 대화를 나누어 본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냐는 물음에 이곳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는 말을 해준 것뿐이라서요.”

순간 동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호오, 그 정도로 모르는 사이란 말야? 그렇다면 그 녀석의 능력도 모른다는 말인데……. 히히, 비밀로 해두자.’

“그래? 뭐 괜찮아. 그놈도 살자고 이곳에 왔는데 무정하게 내칠 수야 없지. 앞으로 우리하고 같이 다닐 테니까 잘 대해줘라.”

주군의 말씀이 너무 억지라고 생각되었는지 도연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 동자스님은 머물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동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제 말로는 이제부터 같이 있고 싶다고 그러던데?”

“설마요.”

동천이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헹, 설마가 설마 라서 설마 했는데 설마로 되었다면?”

“예?”

“가서 네 입으로 직접 물어보라고.”

도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헌데, 제가 올 때 무엇을 연습하고 계셨던 겁니까? 좀 특이하게 연습을 하시던데.”

“히히, 그건 말이지…….”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본 노사가 말해주마.”

“본 노사가 말해주마…가 아니고 어떤 새끼가……. 헤헤, 나오셨어요?”

정신을 차린 동천이 재빨리 인사를 올리자 못마땅한 듯 그를 바라보고 있던 한 노사가 마지못해 인사를 받고 난 뒤 말문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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