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48화
벌써 12년.
아침식사 시간이 되었다. 동천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함께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중소구가 보이질 않았다. 이런 현상은 장노삼에게 패했던 일주일 전부터였는데, 이유인즉 제 세상이 된 동천이 중소구의 속을 박박 긁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노름으로 흥한 인생, 끝에 가서 좋았다는 사람 별로 없듯 내기로 모험을 걸었던 중소구도 그 대가를 톡톡히 받고있는 셈이었다.
절대로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약조 때문에 입심으로나마 맞서 보았지만, 동천에게 말발로 이길 인물이 어디 흔하겠는가? 그래서 중소구는 내심 분루를 삼키고 동천을 회피하고있는 중이었다.
“중 대인은 오늘도 다른 곳에서 먹는데?”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만간 거처도 옮겨 부 당주님께 신세를 진답니다.”
“큭큭, 그렇게 되면 그곳은 할아버지가 쓰면 되겠네. 안 그래요?”
그 동안 옆 건물에서 지냈던 장노삼이 그 제안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문정은 그 방을 자신이 쓰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하려다 입을 쏙 다물었다. 때마침 그런 그에게 동천이 물었다.
“제자야.”
“예? 아, 예…. 말씀하십시오.”
문정은 지은 죄도 없으면서 화들짝 놀랐다. 동천은 문정의 행동이 뭔가 미심쩍었지만 추궁할 생각이 없어 애초에 생각했던 명령을 내렸다.
“이틀 전에 갖다준 물건이 잘 만들어졌는지 오늘 확인하고 오너라.”
동천이 말하는 물건은 치우철경이었고 그것을 맡겨둔 곳은 노씨의 대장간이었다. 그는 쓸모가 없어진 치우철경을 녹여, 작달만하지만 도를 만들어 쓰려고 했던 것이었다. 금새 알아들은 문정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아침나절에 나가서 정오가 되기 반 시진 전에 돌아왔다. 헌데, 돌아올 때는 쉬지도 않고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도 제재하는 사람이 없어 띵가띵가 거리며 간간이 장노삼과 말장난을 하고 있었던 동천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똥개한테라도 쫓겼냐? 왜 그리 죽을상이야?”
문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게 아니라…. 헉헉,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서 가능한 빨리 전해드리려고 달려온 거예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
“예, 헉헉. 제 백 마디 말보다 직접 그곳으로 가보시는 게 더 수월할 거예요.”
흥미가 동한 장노삼은 동천에게 말했다.
“철아, 이 할애비가 같이 가도 되겠느냐?”
이제와 숨길 생각이 없어진 동천은 가뿐하게 허락했다.
“물론이죠. 할아버지가 같이 가면 저야 언제나 환영이잖아요.”
이어 그는 문정에게 말했다.
“참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빨리 앞장서봐.”
문정은 사부가 아직도 할딱거리는 상황에서 명령을 내리자 참으로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욕하며 그를 안내했다. 한참을 걸어 그간에 안정을 되찾은 문정은 굴뚝에서 희미한 연기를 뿜어내는 건물을 발견하곤 손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저기입니다.”
동천은 그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이 몸도 알아 임마. 흐음, 대장간 하면 동천. 동천하면 대장간이라고나 할까? 으히히히!”
문정은 간혹, 사부가 자신의 이름을 동천이라고 했다가 동철이라고 했다가하면서 오락가락 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 바가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근자에 와서 장 어르신이 그렇게 왔다갔다 부르는 것을 듣기도 했었다. 예전 같으면 능력을 사용해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이유로 숨기고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말야. 나한테도 숨기고있는 것을 물어봤다 간 괜히 얻어맞을 것 같아 묻기도 뭐하고, 도연 형은 저 인간이 가르쳐줄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하니……. 어휴, 답답해!’
내심 짜증을 내보자 그 동안 쌓여있던 부분이 어느 정도 해소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혼자 중얼거리는 그의 사부에게 말했다.
“사부님,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문정이 재촉 아닌 재촉을 해서야 정신을 차린 동천은 낮게 헛기침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화끈거리는 열기가 생각보다 시들시들하게 다가왔다.
‘어? 왜 이리 안이 밋밋하지?’
의아함에 주위를 둘러본 그는 몇몇의 사람들이 손을 놓고 곰방대만 뻐끔뻐끔 피워대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들 중 가장 나이든 늙은 노인은 문정을 발견하더니 재빨리 다가왔다.
“네 옆에 계신 이분들이 바로 그것의 주인이시냐?”
문정은 정확히 집어 동천을 가리켰다.
“그것의 주인은 이분이십니다.”
노인의 얼굴이 동천에게로 획 돌아갔다.
“오오, 그렇소?”
그는 귀한 분 모시듯 그를 옆 건물에 안내하고 구수한 차를 내왔다.
“맛있게 드시구랴. 내 그놈을 곧 가져올 테니.”
기다리는걸 제일 싫어하는 동천은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투덜거렸다.
‘쳇, 차를 가져올 때 같이 가져올 것이지. 하여튼 머리회전이 저 모양이니, 이 집도 곧 망할 날이 오겠구만.’
제멋대로 남의 장사 망하는 것까지 예견하고있던 동천은 마침내 노인이 철경을 들고 오자 뭐가 그렇게 문제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 이게 뭐야?”
노인이 대답했다.
“뭐 긴 뭐겠소. 공자가 맡겨놓은 그 물건이지.”
동천의 눈앞에 놓인 것은 철경은 철경이되 색달라진 철경이었다. 그는 칠흑 같은 검은색에 반질반질 윤기가 감도는 철경을 대하곤 마냥 신기해했다.
“우와, 이게 그 철경이에요? 전혀 달라서 한눈에 못 알아 봤어요.”
노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처음에는 이렇게 변한 만년현철(萬年玄鐵)을 대하고 놀랐소이다.”
동천은 그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예? 만년 뭐요?”
“만년현철이라고 했소이다. 보아하니 이것의 가치도 모르고 있었나보구료. 무림인들에겐 보물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지.”
동천은 철경 내의 무공들만 적혀있지 않았다면, 엿 바꿔 먹어도 이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보물 급으로 급상승하자 역시 자신은 복도 많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약간의 거짓말을 양념해서 노인에게 말했다.
“호오, 그래요? 현철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만년현철까지는 생각 치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귀한 물건이기에 보자고 한 것입니까?”
노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로 아니라오. 내가 보고자했던 이유는 이 만년현철이 좀 특이해서라오.”
처음 철경을 접했을 때부터 굳은 얼굴이었던 장노삼은 반들반들한 철경 위에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치우라고 파여 있는 부분을 응시하며 싸늘히 말했다.
“특이했다함은 분명 이 철경이 화기를 빨아들였다는 이야기겠지.”
노인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아니? 손님이 그것을 어찌 아셨소?”
동천은 무슨 소리들을 하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장노삼은 이례적으로 침중한 안색을 띠었다. 이것은 동천이 생전 처음 접해보는 장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동천아.”
장노삼의 목소리가 너무도 가라앉아 있자 동천은 감히 허튼소리를 못했다.
“예, 할아버지. 말씀하세요.”
장노삼은 철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너는 이것이 무엇인줄 알고서나 이곳에 맡긴 것이더냐.”
무슨 질문이기에 온갖 무게를 잡나 의아해했던 동천은 피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할아버지도 참. 제가 방금 말했잖아요. 현철인줄 알고 맡겼다고.”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 치우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서나 맡겼냐는 것이다.”
동천은 화들짝 놀랬다. 그도 그럴 것이 겉칠해놓은 주석 부분이 녹아버려, 아무리 한 노사라고 한들 당장에는 해석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귀신을 보듯 장노삼을 바라보았다.
“하, 할아버지가 어떻게 이걸 해석하셨어요?”
“으음…!”
질끈 눈을 감은 장노삼은 아픈 기억을 회상하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차분해진 마음으로 눈을 뜬 뒤 동천에게 말했다.
“자세한 것은 돌아가서 말하자꾸나.”
“예, 그러세요.”
동천이 대답하자 기다리다 애간장이 다 녹아버린 노인은 재빨리 장노삼에게 물었다.
“두분 사이에 끼여들어 죄송하지만, 손님께서는 아직도 이 늙은이의 질문에 아무 말씀이 없으셨소이다. 지금이라도 말씀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장노삼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어렵지 않지만 그전에 우선 확인부터 해봐야할 것이 있소.”
그는 마시다 남은 차를 철경 위에 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쩌적, 소리와 함께 찻물이 얼어붙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헛? 이럴 수가!”
비단 놀란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장노삼을 제외한 동천과 문정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장노삼은 얼어붙은 찻물을 가벼이 털어 낸 뒤에야 입을 열었다.
“확실하군. 이것은 만년현철이 아니라, 바로 만년오행한철(萬年五行寒鐵)이야. 그렇다면 이것의 내용도 확실하다는 뜻이거늘…….”
노인은 장노삼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려고 하자 다급히 물어 그것을 방지했다.
“이 늙은이의 칠십 평생에 그러한 이야기는 처음 듣소이다. 도대체 만년오행한철이 무엇입니까?”
장노삼은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리 평생을 대장장이로 살았다해도 들어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오. 이 만년오행한철은 전설상에서나 가끔 등장하는, 아니 그 전설상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러한 것이니까. 흔히들 만년현철 만년현철하지만 그것이 꼭 만년동안 생성된 것을 가리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노인장도 잘 알고있을 것이오.”
“물론이외다.”
노인은 장노삼의 단 한마디라도 소홀히 넘겨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의 초점을 흐리지 않았다. 장노삼은 내심 감탄해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년오행한철 또한, 만년을 지나며 생성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지. 이 만년오행한철은 현철이 특수한 환경에서 생성되어 천년 이상 오행의 기운을 흡수하게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오.”
“허면, 이것은 얼마나 오래 전에 생성된 것입니까?”
장노삼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찻물이 얼어버리는 정도로 보아, 적어도 오 천년은 지난 듯 하구려. 칠 천년정도가 얼자마자 한기에 못 이겨 깨어진다고 하니까.”
여태 가만히 앉아있던 동천은 궁금한 것이 있어 재빨리 물었다.
“할아버지, 이 만년오행한철의 이름말인데요. 생성된 것은 현철인데 왜 오행현철이라고 하지 않는 거죠?”
동천의 질문에 노인도 흥미가 동한 눈치를 보였다. 장노삼은 정말로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있는데 자꾸만 지체되자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천이가 그것이 궁금했구나. 이 만년오행한철은 가치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보물이다. 이것은 아무리 억 만금을 준다 하여도 무림인으로서는 절대로 바꾸지 못할 정도이지. 그 무림인이 생에 집착을 가지고있는 이상 말이다.”
이야기 중간에 잠시 입을 다문 장노삼은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따듯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
“만년오행한철을 처음 발견한 이는 기록 속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하나의 설화(說話)처럼 구전(口傳)되어 이어져왔을 뿐이지. 지금으로부터 이천여 년 전, 어느 섬에서 한 청년이 중원에 들어왔단다. 그 청년은 도주(島主)의 명으로 만년현철을 구하고자 중원에 들어선 것이었지. 천신만고 끝에 만년현철 덩어리를 구한 청년은 대장간에 가져가 운반하기 쉽게 정사각형으로 녹여달라고 말했지. 헌데 놀랍게도 녹기는커녕, 화기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청년은 신기한 마음에 그곳의 대장장이와 함께 몇 달을 씨름했지. 녹여보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신비한 물건은 반드시 피를 몰고 오는 법. 어느새 소문이 퍼졌는지 탐욕에 물든 무림인들이 들이닥쳤단다. 무공이 뛰어났던 청년은 재빨리 그곳을 탈출했고, 기나긴 도주가 시작되었지. 다행이 추적자들을 따돌려 산 속으로 숨어든 청년은 더러워진 듯한 만년현철을 물에 씻다가 그 물이 얼어버리는 현상을 목격했고, 그날부터 또 다른 효용가치가 없나 실험에 들어갔지. 그렇게 해서 오행의 기운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청년은 그것을 만년오행현철이라 지었단다.
나중에 무기가 만들어지고 섬으로 되돌아간 청년은 도주에게 그것을 선사했지만, 웃기는 것은 십 수년 후에 반역자로 몰려 자신이 선사한 무기에게 심장을 관통 당하게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게된단다. 바로 여기에서 초기의 만년오행현철이 만년오행한철로 바뀌게 되는데 그 청년이 죽어가며 했던 말 때문이었단다. ‘내 몸의 피를 이리도 얼어붙게 만드니, 오행현철이 아니라 한철이로구나.’ 라고 말이다. 이제 궁금함이 풀렸느냐?”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또다시 궁금증이 일어난 동천은 당연하게도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또 궁금한 것이 있어요.”
장노삼은 빨리 되돌아가기를 포기한 듯 여유를 가지고 말했다.
“허허, 한번 터지면 밑도 끝도 없는 네 궁금증이 다시 유발된 모양이로구나. 그래, 이번에 궁금한 것은 무엇이더냐.”
“다름이 아니라요. 그 무기라는 것은 어떻게 만들었어요? 여기 이 대장간에서의 경우가 그러하듯 보통의 방법으로는 어림없을 것 같고, 무슨 특별한 방법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데.”
동천의 질문에 대장간의 노인도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쳐다보았지만 장노삼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예리한 질문을 하긴 했는데 아쉽게도 구전된 부분에서 그 이야기는 빠져있었단다. 그래서 알 수가 없지.”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시던 동천은 별안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가만, 그렇다면 이것도 녹일 수가 없다는 말이잖아요!”
“그렇게 되었단다. 하지만 세상사 녹일 수 없는 물건이 어디 있겠느냐. 찾아보면 방도가 생길 것이니 이만하고 돌아가자꾸나.”
동천은 마지못해 ‘예.’ 라고 대답한 뒤 철경을 집어들었다. 장노삼은 노인이 아쉬운 듯 철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아이들을 내보내고 노인에게 다소 위협적으로 말했다.
“오늘 벌어진 일은 당신이 죽기 전까지 발설해서는 곤란하오. 만일 소문이라도 퍼지면 방금 그 아이가 곤경에 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외다. 저 아이는 제갈세가는 물론, 황룡세가와도 연줄이 닿은 아이이니 어떻게 처신해야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있을 거라 믿겠소.”
때마침 근질거리는 입을 어디에다 놀리나 고민하고있었던 노인은 장노삼의 말에 파랗게 질려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이오. 내 절대로 오늘의 일을 발설하지 않겠소이다. 자식들에게도 그 철경을 접한 상황을 입 조심하라고 일러두겠소. 정말이오!”
장노삼은 믿겠다고 말한 뒤, 밖에서 기다리고있을 아이들에게로 갔다. 그후에 그는 여전히 시무룩해있는 동천을 이끌고 거처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