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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70화


서장(序章).

그것은……, 그것은 꿈이었다.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꿈.

이루어졌을 시 파멸(破滅)을 몰고 올 꿈. 그래서 나는 그 꿈이 싫었다. 눈을 감는다. 그리고 긴 꿈을 꾼다.

절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려 한다. 꿈과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 그래서 그 꿈은 이루어지려 한다.

감았던 눈을 뜬다. 확연히 느껴지는 불안감. 현실은 정녕 파멸을 원하는가.

<천기록(天機錄) 일부 발췌>


5년 전.

동천이 그렇게 나가고 이틀이 흘렀다.

“흐음. 허리가 안 좋네?”

영광스럽게도 역천에게 직접 몸을 맡긴 사내는 상체를 벗고 등을 보이며 누워있는 상태였다. 그 사내는 아부를 섞어 감탄에 감탄을 마지하지 않았다.

“역시, 전주 님이십니다. 어제 무거운 것을 들다가 허리가……. 헤헤.”

역천은 이 분야의 특성상 녹슬지 않는 솜씨를 위해 적어도 일주일에 5번 이상 직접 환자를 맡았다. 운 좋게도 이 사내는 그 5번 안에서 전주의 눈에 띈 것이었다.

“조심하지 그러냐. 사내자식이 허리의 중요함을 모르진 않을 텐데. 그나마 이 몸에게 진찰을 받는 걸 다행인 줄 알아.”

사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만족의 웃음을 짓고 난 역천은 네치 반 정도의 원형 금통에서 총 3개의 금침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환자의 허리 부근에 서슴없이 하나를 꽂았다.

‘어이, 시원하다.’

사내는 뜨거운 욕통에 몸을 담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역천은 나머지 두 개 중 또 하나를 꽂으려 했다. 꽂았다가 아니라 꽂으려 했다고 표현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침을 꽂는 순간 누군가가 겁 대가리 없이 시술 중인 전주의 침술 방문을 열어 제낀 것이다.

“전주 님! 헉헉.”

역천은 미리 인기척을 느낀 탓에 놀라는 일은 없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의 소연을 주시했다. 다른 시녀들 같았으면 경을 쳤을 일이었으나 사랑스러운 제자의 시녀라는 점과 요 근래에 퍼진 야시시(?)한 소문 때문에 은근히 미래의 첩감으로 낙찰해 놓은 상태였는지라 그는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다.

“네가 여긴 뭔 일이냐? 이 몸의 사랑스러운 제자가 이 몸께 급히 볼일이 있어서 이 몸을 찾더냐?”

그새 다가온 소연은 떨리는 손길을 주체 못하며 작은 서찰을 내밀었다. 역천은 그것을 받아 읽었다.

“소연아. 화정이 잘 가르쳐라. 이 몸은 간다? 이게 뭐냐?”

역천은 소연이 그것을 처음 접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서찰의 내용을 두어 번 더 읽고 난 후 의아해하며 소연에게 건네주었다. 소연은 드디어 자신이 말할 때가 다가오자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어댔다.

“그, 그 내용 대로예요. 흑흑, 이곳을 떠나셨나봐요.”

역천은 대경했다.

“뭐이? 떠나?”

푸욱!

“끄아악!”

갑작스레 들린 비명 소리에 역천은 급히 정신을 차렸다. 비명의 근원지는 허리를 내맡긴 사내였다. 소연과 다른 의미로 몸을 떨어대던 사내는 두 손을 허우적대며 고통을 호소했다.

“저, 전주 님. 살려 주십쇼. 크흐흑! 아파 죽겠습니다.”

그러나 역천은 사내의 청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는 아파 죽겠다는 사내를 발로 차서 저만치 굴려버린 후 소연에게 바짝 다가갔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떠나다니? 사랑스러운 이 몸의 제자가 가출했다는 소리냐? 지금 그런 거냐?”

마침내 울음을 참지 못한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그런가봐요! 이틀 전에, 훌쩍. 이틀 전에 주인님 방에 그런 게 써 있었는데……. 흑흑, 그 뒤로는 깜깜 무소식이에요. 전주 님, 어쩌면 좋아요? 예? 엉엉엉!”

역천은 혼란스러웠다. 이틀 전만 해도 자신의 피부가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기특한 말만 골라하던 제자가 가출을 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연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에이, 아니겠지. 고작 이틀이면 잠깐 밖으로 나갔다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늦게 오는 걸지도 모르잖니.”

소연도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말을 안 했다. 그러나 그 동안 그녀가 조사해온 바로는 가출이 틀림없었다.

“아니에요. 흑흑, 도연도 없어졌고요. 주인님 방에는 옷가지들을 챙긴 흔적도 역력하고요. 이틀 전 당시에는 약재 창고의 고등소(高等訴)님께 금 100냥을 가져가셨대요. 흑흑흑.”

도연이 같이 사라졌다는 것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수하된 도리로서 주군이 일을 보러 가는데 따라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그마치 금 100냥을 가지고 갔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천은 초조한 눈빛을 발했다.

“밖에 누구 없어?”

전주의 고함에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부복했다.

“대령했습니다.”

역천은 대뜸 소리쳤다.

“가서, 고등어인지 꼬등어인지 그 자식 데려와! 빨리!”

부복한 사내의 고개가 살짝 수그려졌다.

“알겠습니다!”

사내가 나가고 나서 정확히 일각 뒤 창고지기인 고등소가 대령했다. 그는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전주 님을 뵈옵니다.”

소연을 보내고 상석에 앉아 있었던 역천은 고등소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자신에게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고등소는 냉큼 다가가 부복했다. 그리고 역천이 말했다.

“이 몸의 사랑스러운 제자가 이틀 전에 돈을 가져갔다며?”

평범했지만 제법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고등소는 20년 전의 역천을 알고 있는 몇몇 인물들 중 하나였다. 한때는 귀영광의(鬼影狂醫)라 불리며 약왕전에서 공포의 전주로 군림했던 인물. 그때의 어눌한 어투가 지금의 목소리와 똑같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 그렇습니다. 소 전주 님께서 급히 필요하신 것 같아서 제가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못되기라도…….”

역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잘못된 거 하나도 없어. 그건 쉽게 넘어갈 수 있는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거든? 이 몸의 사랑스러운 제자가 왜 그 돈을 가져갔는지 말해 줄래?”

그냥 달라고 해서 그냥 준 거라고 하면 뭔가 미진했다. 적어도 약재 창고를 맡고 있는 자신의 신분을 고려해 볼 때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무사할 것 같았다. 아무리 그라도 소 전주가 달란다고 이유 없이 주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얘기하는 거지만 소 전주가 개떡같은 성깔만 아니었어도 선뜻 돈을 건네줬을 리 만무했다. 보복이 두려워 아무 말없이 돈을 준 고등소는 일이 커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그놈의 소악마가 내가 준 돈을 가지고 펑펑 쓰고 다녀서 이 일이 불거져 나왔나 보군. 제길, 그놈의 자식은 어떻게 된 게 도움이 안 되지?’

그때 역천이 재촉했다.

“왜 입 다물고 있냐? 지금 이 몸에게 개기냐?”

고등소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두 손을 저어댔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실은 이틀 전에 아주 급하신 얼굴로 오셔서 돈이 필요하다고 하시길래 수하 된 도리로서 먼저 드리고 본 겁니다.”

“좋아좋아.”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던 역천은 알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근데 말이야. 넌 걔가 몇 살로 보이냐?”

약왕전에 소속된 자로서 소 전주의 나이를 모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헌데 전주가 묻는 의도는 그게 아니리라. 열심히 눈치를 살피던 고등소는 전주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듯 고개를 내리깔고 말했다.

“10살이십니다.”

“그래. 10살이야. 그런데 10살의 어린애가 은자 1냥도 아니고, 금 100냥을 가졌을 때 그 어린애가 어떠한 생각을 하겠어?”

“조, 좋은 생각을……, 꾸엑? 으아악!”

역천은 고개를 숙인 고등소의 대가리를 무자비하게 밟아댔다.

“이 씹쌔끼야! 금 100냥이 애들 이름이야? 달란다고 그냥 줘? 아주 죽어버려! 죽어!”

시선을 피한다고 고개를 숙였다가 얻어맞기 딱 좋은 자세로 부복해 있었던 고등소는 반 실신 정도까지 가서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전주의 입에서 떨어진 명령은 그를 까무러치게 할 정도였다.

“이 자식아! 넌 파면이야!”

이렇게 해서 동천으로 인한 피해자가 한 사람 더 늘어난 셈이었다.


사정화는 화정이의 강맹한 손길을 피하고 날렵하게 물러섰다. 거진 반 시진 이상을 화정이와 대련해서 그런지 사정화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화정이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분명히 끝은 있지만 보통 사람들과 비교해 무한하다 할 정도로 샘솟는 힘은 활강 시만의 자랑이라면 자랑이었다. 피곤함을 느낀 사정화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만.”

당연히 화정이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라 소연에게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연은 듣지 못했다. 그녀는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애꿎은 바닥만을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바람에 멈추어야 할 화정이의 신형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움직였다. 멈출 줄 알고 안이해져 있었던 사정화는 깜짝 놀라 급히 방어를 취했다. 곧 엄청난 충격이 그녀의 어깨를 휩쓸었다.

‘윽!’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이었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소연의 어깨를 밀쳤다.

“아야! 아? 화, 화정아 멈춰!”

소연은 그제야 자신만의 상념에서 벗어나 모든 상황을 종료시켰다. 그녀는 자신을 노려보는 아가씨의 시선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정말로 죄송합니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어깨의 통증을 몰아낸 사정화는 석실의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괜찮아.”

그녀로서는 그것만으로도 모든 의미를 함축시킨 셈이었다. 소연은 어느새 흘린 눈물을 닦고 급히 사정화를 따라 나갔다. 사정화는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었다.

“이제가도 좋아.”

“감사합니다.”

사정화는 아무리 봐도 소연의 낌새가 이상한 것 같았다.

“얼굴을 보니까 밤새 운 것 같은데 왜 울었지? 혹시, 동천이…….”

주인님 이름이 나오자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심증은 있어도 아직 확실한 단계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전주님께만 가출 소식을 전했던 그녀는 눈물을 참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주인님이 그럴 리가요.”

사정화가 눈을 번뜩였다.

“정말이지?”

“예, 정말이예요.”

끝까지 아니라고 하는데 더 이상 뭐라 할 명분이 없었다. 사정화는 수건을 내려놓고 명상에 잠기려는 듯 바닥에 앉아 눈을 감았다.

“가봐.”

고개를 숙여 아가씨께 인사를 마친 소연은 수련동을 벗어나자마자 풀밭에 주저앉았다. 화정이도 같이 주저앉았다. 소연은 살며시 화정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화정이는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흑흑…….”

소연은 맘껏 울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화정이는 그런 작은 주인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을 움직여 흘러내리는 소연의 눈물을 만지작거렸다.

“눈물. 왜.”

여전히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덕분에 소연의 울음이 그치게 되었다. 소연은 흘러내린 콧물을 훌쩍 삼키고 벌떡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냐. 화정아 가자.”

“응, 가자.”

화정이는 미소를 짓고 소연의 소매를 잡아 흔들었다. 이곳에 온 김에 언제나 그렇듯 동생을 만나러간 소연은 흥분한 얼굴로 자신을 반기는 수련을 대할 수 있었다. 수련이 흥분한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언니! 동천이 가출했다면서요?”

소연은 한순간 슬픔을 잊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뭐? 그, 그거 어디서 들었어?”

수련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

“호호, 그거 알아내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요. 벌써 소문이 쫙 퍼졌어요. 어떤 사람들은 너무도 좋아서 이 사실을 안 오늘을 기념일로 삼겠다고 할 정도예요. 웃기죠? 호호호!”

오전에 역천이 알았는데 두 시진도 채 안된 이 시점에서 벌써 수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것은 그동안 동천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증거였다. 애석하게도 그 관심이 좋은 쪽이 아니라는 게 유감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드디어 올게 왔다고 생각한 소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숨기려고 했는데…….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네 말이 맞아.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아무래도 가출하신 것 같아. 흑흑, 이게 다 내가 모자랐기 때문이야.”

수련은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매우 좋았다. 그렇지만 울고 있는 언니의 앞에서 대놓고 웃을 정도로 생각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언니……. 큭큭, 아? 미안해요. 그만 울……, 호호호! 아? 죄송해요.”

앞서 말했듯 생각 없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실행하기에는 조금 벅찬 듯싶었다.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수련은 헛기침으로 앞서 분위기를 털어 버린 후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예요. 언니 탓이라니. 내가 전부터 알아봤는데 걔가 좀 방랑끼가 있었거든요? 아마 마침내 그게 도져서 잠시 나간 걸 거예요. 두고 봐요. 밖으로 나가서 걔가 이곳처럼 떵떵거리고 살지. 그 신분이 밖에서 얼마나 통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앞일이 훤해요. 한 달! 적어도 한 달 안에 돌아올 거예요. 호호호! 약왕전에서만 히히거리며 돌아다녔던 지가 별수 있겠어요?”

듣고 보니 그랬다. 주인님의 신분은 이곳에서나 통하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암흑마교의 분타나 암흑마교에게 잘 보이려는 무리들 외에는 별 소용이 없는 신분이었다. 더군다나 주인님의 신분이 알려지면 곧바로 이곳으로 송환될 것이 아닌가? 주인님의 성격상 힘들고 지치면 분명히 이 생활이 그리워 돌아올 것이 뻔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마음이 가뿐해졌다. 그녀는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던 마음에서 곧 세상의 어려움을 겪고 성숙해져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수련아. 네 말이 맞아. 호호! 내가 괜히 걱정했나봐.”

“그렇죠? 그렇죠? 호호호!”

수련의 정확한 설명으로 인해 침울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활발한 분위기로 뒤바뀌었다.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동생과 재미있는 잡담을 나누던 그녀는 끝맛이 개운한 차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네 덕분에 이젠 아무 걱정도 없을 것 같아.”

수련은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호호,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요. 참? 그럼 도연 오빠는 그동안 혼자겠네?”

소연은 식탁에 의자를 밀어넣고 말했다.

“너 아직 거기까지는 모르나보구나? 도연이 왜 혼자 있어. 당연히 주인님을 따라갔지.”

“예? 오빠가요?”

소연은 방울만해진 동생의 눈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호호! 놀라기는. 수하가 주군을 따라가는 건 당연한 거잖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래도 걔가 같이 따라가서 너무 안심이 되는 거 있지?”

순간 수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럴 수가! 오빠가 동천을 따라가다니. 오빠까지 따라가면 안 되는데……. 히잉, 그 사이 같이 놀기 위해 계획표까지 짰는데.’

수련의 원대한(?)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가출한 동천이 가능한 오랫동안 안 돌아오길 손꼽아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 그 기도를 전면 수정해야 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수련아, 왜 그래.”

수련은 언니가 자신의 몸을 흔드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동천이 빨리 돌아왔으면 하고요. 그래야……(오빠도 오죠).”

소연은 눈시울을 붉혔다.

“고마워. 넌 역시 내 동생이야.”

“뭘요.”

가만히 서 있었던 화정이는 두 손을 맞잡은 자매를 보며 천진한 미소를 띠었다.


쏴아아아.

비가 내렸다. 그리고 그 빗속을 뚫고 마차 한 대가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달렸는가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마차를 몰고 가는 말들의 상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도연은 빗줄기로 인해 뿌연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게 삿갓을 쓰고 있었다. 그는 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마차를 멈추었다.

“워, 워!”

신나게 퍼질러 자고 있었던 동천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뭐야.”

빗줄기가 마차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중얼거리는 듯한 동천의 목소리는 쉽게 흩어져버렸다. 동천은 그것도 모르고 도연이 반항한다고 생각했다. 재빨리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창틀을 열어 제낀 동천은 빽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아! 이 몸이 뭐냐고 물었잖아!”

도연은 힐끔 돌아보았다.

“말들이 너무 지쳐서 잠시 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동천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러나 아직 미진한 듯싶었는지 계속 다그쳤다.

“그러면 그렇다고 할 것이지 왜 이 몸의 말을 씹어! 너 죽을래?”

“안 들렸습니다.”

너무도 담담한 도연의 대답은 동천의 속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마차 안에서 방방 뜬 동천은 삿대질을 해가며 소릴 질렀다.

“이게 죽으려고 용을 쓰네? 너 이리 들어와! 아주 죽었어.”

도연은 별말 없이 마부석에서 내렸다. 동천은 이를 갈면서 주먹을 다부지게 쥐었다. 곧이어 마차 문이 열렸다. 그리고 도연이 마차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였다.

“잠깐!”

도연은 멈칫하고는 삿갓 너머로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동천은 빗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도연의 몰골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이내 손사래를 쳤다.

“됐어. 그만 네 자리로 돌아가. 네가 들어왔다가는 이 깨끗한 마차 안이 물바다가 되겠다. 훠이, 물러가라.”

도연은 왔던 것처럼 말없이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도연은 머리 부분만 빼고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초여름의 비라서 그런지 봄에 내리는 빗줄기보다는 따스했다. 암흑마교에서 나온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이제 그는 이 마차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주군의 가출 소식이 접해졌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쯤이면 추적대가 편성되어 쫓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차의 흔적을 찾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한 가지 도연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빗속에서 주군을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인가?’였다. 이대로 주군이 잡혀도 도연이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어차피 돌아갈 시간을 좀 더 당기는 거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미래의 실전에 대비해 어설프지만 도망가는 경험을 이렇게나마 겪어보고픈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주군께 죄송하지만 나중에 주군도 어떠한 상황에 놓일지 모르는 관계로 이 기회에 연습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도연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곧 뒤쪽 창문을 열고 말했다.

“주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짖어봐.”

“…….”

도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을 꺼내면 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에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한 동천은 실실거리며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히히, 자식이 그런 것 가지고 삐지냐? 알았어 제대로 말해줄게. 어서 말해봐. 이렇게 말하면 됐지?”

마침내 도연이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본교에서 주군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쫓아오고 있을 겁니다.”

동천은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에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디밀었다.

“뭐? 애새끼들이 쫓아와? 그게 무슨 소리야?”

아마 동천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끝인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도연은 그런 동천에게 일침을 놓아주었다.

“약왕전의 소 전주가 없어졌는데 전주님을 위시해 다른 분들께서 가만히 손 놓고 계실 줄 알았습니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동천은 갑자기 안면을 몰수했다.

“흐응…….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을 줄 아냐? 천재의 피가 흐르는 나의 원대한 계획 속에는 당연히 그런 것까지 모두 대비돼 있어.”

도연이 곧바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동천은 당황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살며시 앉았다.

“도연아, 이 몸이 계획한 것이 있지만 먼저 네 생각부터 들어보련다. 그러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부터 말해보거라.”

보아하니 쥐뿔도 생각해 놓은 게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도연은 수하 된 도리로서 모른 척 넘어갔다.

“우선 제일 처음에 생각해야 할 것은 마차의 효용가치입니다.”

이해하기 약간(?) 어려운 말에 동천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즉, 이 마차가 추적대에게 어느 정도까지 도망쳐줄 수 있냐는 겁니다. 제가 보기로는 지금 시점까지입니다. 이미 본교에서 무사들이 급파되었을 것이고 못해도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길의 반 이상을 좁혀왔을 겁니다.”

동천은 다급함을 느꼈다.

‘으으! 정화 년의 추격대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제길, 어떻게 하지?’

반 이상 좁혀왔다는 도연의 말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동천도 일년 전 우연히 알았던 거지만 사비혼에게 사혼대라는 직속 호위대가 있듯 사정화에게도 마장대(魔壯隊)라는 호위대가 있었다. 마장이라는 장원에서 차출된 부대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그들의 인원까지는 몰랐고 다만 그들이 사혼대만은 못해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장대는 충분히 빛을 볼 수 있는 자들이었다. 허나 아쉽게도 사정화의 성격 탓에 호위대이면서도 사정화의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는 비운의 부대였다. 추격대라면 당연히 사정화의 추격대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꼭꼭 심어져 있었던 동천은 울 듯 말 듯한 어색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용케 목소리만은 변화 없이 낮게 깔았다.

“그럴 듯해. 그래서?”

도연은 동천의 표정에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 마차를 주인 없이 이 길 그대로 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주군과 저는 산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거죠.”

갑자기 동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오, 이 몸이 생각하고 있던 바와 이렇게 똑같다니! 역시, 내 수하로다!”

동천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짐을 챙겨들었다. 가슴에는 금 100냥의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고 그의 양쪽 어깨에는 생필품이 들어간 간소한 보따리와 혈천도가 각각 걸쳐져 있었다. 올 때 워낙 간소하게 왔는지라 챙길 게 그다지 없었다. 그 사이 마부석에서 내려온 도연은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뭐 잊어먹은 게 없나 재차 살펴보던 동천은 밖으로 나가려다 뚝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동천은 대뜸 얼굴부터 구겼다.

“이 몸께서 꼭 저따위 비를 맞으며 가셔야겠냐?”

도연은 고개를 약간 들었다. 삿갓 너머로 무심한 한쪽 눈이 드러났다.

“다른 고견이 있으십니까?”

“없는데.”

“나오시지요.”

예의상 뻐팅겨 보았던 동천은 불평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곧이어 차가운 빗방울이 동천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에이, 찝찝해.”

찝찝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찝찝한 게 잡혀서 맞아 죽는 것보다 몇백 배 나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수하 된 입장에서 주군이 우두커니 비를 맞게 할 순 없는 법. 채찍을 들고 있었던 도연은 말들의 엉덩이에 가차없이 채찍질을 가했다.

쫘자작!

“이히히힝!”

두 마리의 말들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 외의 고통을 느끼곤 있는 힘을 다해 전력 질주를 감행했다. 마차는 금세 그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난 도연은 조심조심 걸어가며 동천에게 말했다.

“산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길에 흔적이 남지 않게 조심해주십시오.”

생각 없이 물컹한 땅을 밟아대던 동천은 곧이어 도연과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래도 입은 살아 있었다. 그런 동천의 입은 이틀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동천은 비가 그친지도 모르고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보따리를 그대로 놔둔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섯 고개. 여섯 고개.”

옆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도연은 그의 주군이 왜 중얼거리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정확히 아홉 고개입니다.”

동천의 고개가 살며시 도연 쪽으로 돌아갔다.

“그래?”

도연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은근히 짜증 나 있었던 동천은 도연에게 걸고넘어지려 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아홉 고개나 넘었는데 어째서 인가가 안 나오지?”

“저도 모릅니다.”

깔끔한 대답이었다. 어딘지도 모르고 산부터 오르는 중인데 도연이 무슨 재주로 인가를 찾아낸다는 말인가.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동천은 따로 화풀이할 데가 없어 괜히 애꿎은 나무를 걷어차기만 했다.

“아우, 열받아! 익! 익!”

일부러 만만한 나무들을 골라서 그런지 잘도 꺾여 넘어갔다. 서너 개의 나무를 분질러 먹은 동천은 깊은 숨을 들이 내쉬고 안정을 취했다.

‘아서라 동천. 네가 이러면 도연 저 자식이 얼마나 불안해하겠느냐. 그래. 많이 배운 네가 참아라.’

동천은 혼자 발광하다 마무리까지 혼자 끝마쳤다. 그리고 그는 하늘이 우중충하기는 했지만 이제 비가 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따리는 아직까지 동천의 머리 위에서 호강하고 있었다. 발차기와 이단 옆차기까지 병행했음에도 말이다. 용감하게 인력의 법칙을 무시하던 보따리는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도연은 그 보따리를 받아들고 말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산세를 보아하니 곧 사람이 사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자칭 평범한 천재라 생각하는 동천은 자신도 알고 있는 걸 가지고 더럽게 잘난 체를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결과적으로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곳으로 간다는 소리에 험한 욕을 잠재웠다.

“좋아, 좋아. 앞장서.”

언제나 그렇듯 도연이 길을 텄다. 길을 찾는데 수하가 앞서 나가는 것은 결코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서길 좋아하는 동천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싸가지 없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천은 가만히 있었다. 이유는 무슨 일을 당해도 도연이 먼저 당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뱀새끼라도 튀어나와서 콱 물어버려라. 히히!’

치기 어린 생각인지 정말로 사악한 생각인지 알 수 없지만 동천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후자 쪽으로 생각하리라. 동천에게는 아쉽겠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나 동천은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자신에게 득 될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

갑작스러운 도연의 의문성에 천천히 뒤따라오던 동천은 신속하게 달려왔다.

“뭐야, 뭐가 보여?”

도연은 급히 달려온 동천에게 다소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소매가 나뭇가지에 걸린 것뿐입니다.”

“윽! 소매?”

동천의 신형이 절로 휘청거렸다.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동천은 자세를 바로잡고 도연에게 고함을 질렀다.

“앞장서기나 해!”

앞서 사과를 했기 때문에 도연은 추가로 사과하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군을 위해 얼른 인가를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주군이라는 애새끼는 알아주지도 않지만 말이다.

“주군, 보입니다.”

마차를 버린 지 사흘째 되던 날 오후, 도연은 마침내 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촌민 부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씻지도 못해 더벅머리를 하고 있었던 동천은 머리의 비듬을 털어내다가 희열에 찬 도연의 목소릴 듣고 재빨리 퉁겨나갔다.

“뭐? 어디, 어디야!”

도연이 따로 가리킬 것도 없었다. 도연 쪽으로만 오면 자연히 눈앞의 전경이 보였으니까. 해질 무렵이라 그런지 열에 아홉 가구의 굴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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