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9화
“아우.. 졸려..”
밤새 뜬눈으로 지새다가 아침이 돼서 나돌아다니던 동천은 초저녁이 되자, 그제서야 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하인이 언제 올는지 궁금한 나머지 오후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쩔쩔매던 동천이 본 거라곤, 병신들이 끙끙거리는 모습밖에 없었다. 역천은 한심을 데리러 간다고 사라지더니, 이각(30분)도 안 돼서 쌍코피가 터져서 울먹이고 있는 한심의 뒤통수를 잡고 끌고 왔었다. 결국, 오늘은 허탕 쳤다는 생각을 한 동천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침대 위로 엎어져 버렸다.
“으응.. 내일은.. 오려나….? 졸.. 립다.”
그러고는 깊은 잠에 빠졌다.
나름대로 피곤한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했던 동천은 곤히 자고 있는데 누가 자신을 흔드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씨이.. 뭐야? 졸린데.. 음냐…”
동천이 은근한 신경질을 내자, 자신을 흔들던 손길은 멈추었다. 잠잠해지자 동천은 꿈결인 줄 알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이번에는 흔드는 대신에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 .
순간 동천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여자애는 용기를 내어 다시 불러보았다.
“저.. 주.. 인님.”
동천은 짜증이 났다.
“아이, 씨팔! 주인님이고, 지랄이고.. 누구야? 졸려 죽겠는데…… 에? 주인님?”
그제서야 동천은 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동천은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고는 얼른 눈을 비비고 자신을 부른 여자를 바라봤다.
“우와…!”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자애는 짧은 단발 머리에 귀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는 한 9살에서 11살 사이로 보였다. 그런 여자애를 바라보던 동천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첫인상이 중요한데 처음 보는 하녀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수야 없지 않으냐.. 동천아. 진정해라…’
마음을 가다듬은 동천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애에게 말을 했다.
“네. 네가.. 내 하인이.. 냐?”
여자애도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동천의 물음에 깜짝 놀랐다가 진정을 하고는 좀, 겁에 질린듯한 눈빛으로 동천의 물음에 대답했다.
“예? 예… 맞는데요…”
동천은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는 하녀를 보자, 긴장(緊張)이 어느 정도 풀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단, 긴장이 풀린 동천은 느긋한 자세로 상체를 약간 뒤로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래? 아 참, 이름하고 나이는 어떻게 되지?”
여자애는 여전히 겁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예.. 제 이름은.. 소연(小蓮).. 이고요. 나이는 열.. 열 살. 이예요.”
“열 살? 그럼, 나보다 두 살 더 많네?”
-예..
동천은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했다. 한순간의 선택이 자신을 이렇게 바꿔 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히히히히! 소연(小蓮)이라고? 히히히! 하나는 수련(睡蓮)이고, 하나는 소연(小蓮)? 히히히히! 이름 한번 진짜로 비슷한데? 나는 어떻게 이름이 이렇게 골 때리는 이름만 접하는 거지? 으헤헤헤!”
하나도 골 때리지 않았지만 동천은 골 때리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소연은 뒤로 자빠지며 웃어 제끼는 동천의 행동(行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혼자 웃었던 동천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일어나자, 소연이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동천의 눈길을 접한 소연은 얼굴을 붉히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야. 너무 겁먹지 마. 누가 잡아먹냐?”
동천이 뒤로 제쳤던 상체를 앞으로 수그리며 소연을 다독거리자, 소연은 살며시 입술을 깨물더니 용기를 내어 말했다.
“예. 다시 인사 드릴게요. 앞으로 소전주님을 모시게 된 소연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마친 소연은 어정쩡한 자세로 절을 했다. 그런 모습에 동천은 기분이 째졌다.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소연의 손을 덥석 잡고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헤헤헤.. 그래, 앞으로 내 말 잘 듣고, 우리 같이 잘 살아보자. 그리고 나 부를 때 소전주라고 부르지 말고, 아까처럼 주인님이라고 불러라. 알겠지?”
동천의 ‘내 말 잘 듣고, 우리 같이 잘 살아보자.’라는 말에 소연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 자신같이 이쁜 소녀가 하녀로 들어온다면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노리개로 쓰다가.. 아니, 평생도 아니고 조금 데리고 놀다가 지겨워지면, 언제 버릴지 모르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서러움을 느낀 소연은 눈물이 콱! 쏟아질 것만 같은 느낌에 눈시울을 붉혔다.
“흑. 저.. 저기.”
동천은 소연이 갑자기 울듯한 표정을 짓자, 순간 당황했다. 얘가 왜 이러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야. 주인님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그러는 거야? 에.. 그러면 아까처럼 그냥 소전주님이라고 불러.. 그것도 들을 만하니까.”
“아..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주인님이라 부를게요.”
“그래? 그럼, 네 마음대로 하고… 그런데 왜 울려고 했지?”
소연은 차마, 얘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한다는 말인가? 소연은 부끄러운 마음에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저.. 그게. 그게.. 제 입으론…”
“참나, 아직도 떨려서 그러는 거야?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서 제대로 말해봐. 어서.”
동천은 소연이 말을 끌자, 아직도 두려운 마음에 제대로 말을 못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좀 위로도 해줄 겸 해서 소연의 손을 잡아끌고는 침대에 앉혔다. 그러나 그런 동천의 행동이 소연의 오해를 더욱더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동천이 소연을 잡아끌어 침대에 앉히자, 소연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을 줄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엉엉! 주인님… 저는.. 흑흑.. 저는.. 아직 어려요… 으흑! 제발요..”
동천은 도대체 이 계집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뭐? 뭐가 어려. 그리고, 뭘 제발이라는 말이야? 에구, 답답해. 자세히 좀 말해봐!”
소연은 동천이 화내는 듯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찔끔! 하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흑흑흑.. 그러니까요… 저는 아직 어려서.. 그.. 그것을 하기에는.. 엉엉! 한 번만 봐주세요.. 저는 아직.. 어리다고요. 흑흑!”
이제는 침대에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빌기까지하는 소연을 바라보며, 동천은 어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얼마나 기가 막힌지, 실소(失笑)도 나오지 않았다. 동천은 왼손을 이마에 턱! 하니 올려놓고, 지금 상황을 분석해 갔다.
“그러니까.. 내가 너하고, 그렇고 그런 짓을 할게 두려워서… 지금 네가 빌고 있다…? 이거야?”
소연은 눈물 찍, 콧물 찍.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소연을 보고, 다시 생각에 잠긴 동천은 생각을 마치자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생각보다 조숙하구나?”
-예?
-……. .
어이가 없었다. 계집애가 생각하는 게 너무 조숙했다. 아니, 혹시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육체적인 학대를 받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지금 여덟 살인 자신이 해봤자 뭘 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동천은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계집애야! 못 들었어? 네가 너무 조숙한 거 아니냐고 했다! 한번 생각해봐,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너하고 그 지랄을 해! 너, 혹시 내가 반환노동의 전대 늙은이로 알고 있는 거 아냐? 응? 그래!”
소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동천이 화난 얼굴로 자신을 닦달하자 자신도 모르게 다시 눈물이 글썽거렸다.
“흑.. 죄송해요… 저는.. 여자 하인들은 모두.. 밤시중을 드는 줄 알았어요.. 정말이에요. 한 번만 봐주세요.”
동천은 소연의 말에 이 계집애는 참 별종(別種)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소연의 과거지사(過去之事)가 궁금해졌다.
“휴.. 그래, 알았어. 그러면 네 옛날 얘기 좀 해봐. 얘기해주면 내가 다 용서해줄게.”
“옛날일을 전부 다요..?”
“왜? 꽤 길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면 빨리 말해봐. 안 그러면, 혼내준다!”
동천이 짐짓 무서운 눈초리로 말을 하자, 소연은 다시 겁에 질린듯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요.. 우리 집안은 귀주성(貴州省)에 자리한 조그마한 문파였어요. 원래, 우리 어머니는 재혼하신 건데.. 들은 말로는 제가 세 살 때 선비셨던, 아버지를 여의시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대요. 그런데요. 어느 날 엄청난 가뭄이 닥쳐왔었대요. 사람들이 삼년재해라고 하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으시죠? 어머니는 어떻게든 저를 먹여 살리시려고 고생고생하다가 호색(好色)가인… 두 번째 아버지에게 눈에 띄어 첩으로 들어가게 되셨어요. 저는요.. 흑흑.. 그때 배불리 먹게 돼서 엄청 좋아했었어요. 엉엉! 엄마.. 흑흑흑..”
동천은 잘 나가다가 계집애가 울어버리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까처럼, 이상한 생각을 하다가 우는 거라면 성질을 내볼 만했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성질의 울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단치기가 뭐했던 것이었다. 어디 소연의 눈물을 닦아줄 게 없나.. 했던 동천은 자신이 항상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사정화의 수건이 생각났다.
“야.. 울지 말고. 이걸로 눈물 좀 닦아라.”
수건을 건네받은 소연은 동천이 건네준 수건을 조심스레 받더니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동천은 소연이 자신의 수건을 받아서 눈물을 닦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소연이 눈물을 닦던, 수건을 코 쪽으로 내리는 것을 보았다. 순간, “안 돼!” 하고, 소리를 치려던 동천은 소연이 낸 소리에 이미 글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패-앵! 훌쩍. 팽-!”
시원하게 코를 푼 소연은 수건을 곱게(?) 사각형으로 접더니, 고맙다는 표정으로 동천에게 건네줬다. 입안에서 안 돼라는 소리가 맴돌고 있던 동천은 소연이 건네주는 수건을 미묘한 표정으로 건네받았다.
-……. .
동천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연은 자신이 또 다른 잘못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 왜 그러세요?”
“응? 휴.. 이거 가지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확실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건네준 수건이니 상대가 코를 풀든, 눈물을 닦든, 수건을 씹든,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코까지는 풀지 말라는 얘길 못한 자신에게 있었다.
“예?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냐.. 그보다 이거…”
소연은 동천이 자신에게 수건을 다시 건네주자, 씽긋! 웃더니 정중히 거절했다.
“아니에요. 저, 이제 울음 다 그쳤어요.”
동천은 소연이 자신의 행동에 오해를 하자, 동천도 씽긋! 웃더니 자신에게 도로 건네준 수건을 소연의 앞에다 던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네가 코를 풀었으면, 깨끗이 빨아서 갖다 줘야지! 내가 이걸 빨리? 어서 가서 깨끗이 빨아와! 이 계집애야!”
“예? 아, 예.. 죄송합니다. 얼른, 빨아서 갖다 드릴게요…”
동천의 고함에 그제서야 자신이 잘못 이해했음을 깨달은 소연은 어찌나 무안했던지 얼굴을 홍시처럼 붉히고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서 황급히 방을 나왔다. 소연이 사라지자, 열이 뻗쳐있던 동천은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에이. 내 앞날이 훤하다. 뭐, 저렇게 콱! 막힌 게 들어와 가지고.. 이거! 열 받아. 그게 어떤 수건인데 코를 풀어? 그게… 쳇! 뭐, 별거 아닌 수건이긴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은 못하고, 한참 열을 내던 동천은 그제서야 자신이 수건 하나 가지고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왜 이러지? 음.. 참자. 별것도 아닌데 뭐…”
그러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래도, 애는 예쁘니까 다행이네…. 그나저나, 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생각이 안 나네?”
한참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하던, 동천은 뒤척이며 소연을 기다리다가 소연이 좀 늦자, 다시 잠이 들었다.
한편, 동천에게 꾸지람을 받은 소연은 주워온 수건을 얼굴에 묻은 채 울고 있는 얼굴을 가리며, 달려 나갔다. 행여 누가 볼까 싶어 한 행동이었지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흑흑흑…”
서러웠다. 비록, 의붓아버지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 다가 나쁜 아저씨들한테 걸려 하녀로 팔려왔지만, 석 달 전만 해도 이런 구박은 받아본 적이 없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왜 저 먼저 두고 가셨어요.. 흑흑..”
소연은 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자,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참았던 눈물이 다시 나오자 소연은 아예, 속이 시원하게 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다.
“흑.. 흑흑.. 훌쩍, 팽! 흑, 어서 빨아야겠다..”
콧물이 흘러, 다시 코를 풀던 소연은 그제서야 수건을 빨아오라던 동천의 명령이 생각났다. 여기에 오기 전에 간단한 내부도를 보았던 소연은 어렵지 않게 빨래터를 찾을 수 있었다. 소연은 얼른 자리에 앉더니 재빨리 수건을 빨았다.
“큰일났네.. 주인님께서 기다리실 텐데.. 또 혼나는 건 아닐까?”
지금, 동천은 엎어져 자고 있었지만 알 리 없는 소연은 수건을 빨면서 걱정에 빠졌다. 세 번 정도 빨자, 수건은 원래의 상태를 찾았다.
“빨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