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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411화


동천의 우려대로 중소구의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철?”

급하게 된 동천은 순간적으로 얼버무렸다.

“예, 본명이에요! 그치 도연아.”

무언가 기회를 포착했다고 느낀 중소구는 기다렸다는 듯 도연에게 물었다.

“소형제. 이놈의 헛소리가 맞긴 맞는 겐가?”

“…….”

혼란스러운 나머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도연은 곧이어 누가 보아도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못하다 보니 자연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맞습니다. 철(鐵)자를 싫어하셔서 이름을 바꾸신 겁니다.”

그런 도연의 모습이 아무래도 찜찜했지만 중소구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도연을 배려하는 마음에 믿어주는 척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동천에게 화살을 돌렸다.

“왜 이름은 바꿨냐? 단단한 네놈의 쇠 대가리처럼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

성질이 났지만 이번만큼은 동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고분고분해야 깨끗한 끝마무리가 되기 때문이다.

“대인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헤헤헤.”

총관은 이야기의 흐름이 다른 곳으로 빠지려하자 재빨리 그 길목을 막아섰다.

“결과적으로 본명이 동철이라는 말이구나. 그래, 동철아. 어떻게 이 황룡세가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거지?”

동천은 전혀 의외라는 듯 눈을 똥그랗게 떴다.

“예? 그게 그렇게 극비로 진행되는 일이었어요? 지금 얘기는 예전에 제가 이 근처에서 살 때 여기 아저씨들에게 손쉽게 들었던 건데?”

이야기를 듣고 난 총관은 금세 안색을 붉혔다. 정보를 유출시킨 범인이 본가의 무사들이라는데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는 전혀 허점을 찾아볼 수 없는 동천을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했다.

‘아마도 이 꼬마의 채근거림에 입이 싼 말단 무사가 스쳐지나가듯 떠벌렸던 게로군.’

진상이 밝혀진 이상 실(失)이 되는 이야기를 계속 끌고 갈 이유가 없었다. 총관은 능숙한 언변으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그들을 안내했다. 동천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휴룡각(休龍閣)이라고 쓰여진 곳으로 들어간 그들은 총관이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자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놈들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것 하나라도 경박한 느낌이 없군. 과연 황룡세가로다.”

예전에 자신이 머물던 곳을 좋게 보아준다는 것은 듣는 이에겐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미미와의 관계만 빼고 전부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있던 동천은 중소구의 중얼거림을 듣자 옳다구나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죠? 아무리 남궁세가나 황금세가, 그리고 제갈세가와 모용세가가 대단하다고 해도 황룡굉 가주님이 버티고 있는 이곳 황룡세가야말로 오대세가 중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중소구는 이놈이 왜 이렇게 흥분을 하는지 궁금했다.

“너 무슨 일 있었냐?”

“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곳 자랑을 그렇게 하냐는 거야.”

동천은 별걸 다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다고 생각했다.

“진심에서 이곳을 존경하기에 그런 것뿐인데 저는 대인께서 비꼬아 들으시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찔끔한 중소구는 도연을 흘긋 보았다. 무표정한 도연의 얼굴은 중소구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 보였다. 도연에게 만큼은 진정한 대인으로 인식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네가 진정으로 그러한 마음이었다면 본 대인이 사과를 하마. 됐냐?”

동천은 날카로운 눈으로 중소구를 요리조리 살폈다.

‘저 자식이 웬일로 사과를 다하지? 혹시, 감춰둔 꿍꿍이가 있는 거 아냐?’

중소구에게 워낙 당하고 살았기 때문에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동천이었다. 그러나 별 탈이 없다는 것을 감으로 알아차린 동천은 오랜만에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동천의 모습이 얄미웠을까? 중소구는 치사하게도 아까의 일을 들춰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갑자기 이름을 바꾸어 말했느냐?”

동천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이 참! 동철이 진짜로 제 본명이라니까요?”

중소구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그렇다면 잠시 후 총관이 돌아왔을 때 네놈이 말하는 그 가명을 언급해도 되겠느냐?”

‘윽? 치사한 자식!’

아직 자신을 잘 몰랐던 동천은 중소구가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그럴싸한 거짓말을 해야 했던 동천은 황룡굉의 자제 중 아무나 하나 골라잡았다.

“알았어요. 사실대로 다 말씀을 드릴게요. 실은 제가 황룡 가주님의 둘째 아들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일부러 이름을 숨겼던 거예요.”

중소구는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다.

“호오? 둘째 아들이라면……. 황룡창(黃龍窓)?”

‘에그, 병신아. 그건 셋째잖아!’

내심 욕지꺼리가 튀어나왔지만 표면적으로는 중소구의 오류를 상냥하게 바로잡아주었다.

“뭔가 잘못 아시고 있네요? 황룡창은 셋째고요. 둘째는 번(繁)자를 쓰고 있어요.”

중소구는 동천의 내심을 아는지 다소 짜증을 냈다.

“알았으니까 어째서 사이가 안 좋은지, 그거나 빨리 얘기해봐.”

모처럼의 성의가 무시되었다고 생각한 동천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제시킨 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제가 몇 년 전 개울물을 지나가다가 수욕을 하고 있던 황룡번을 보게 되었는데 그 녀석의 거기가 아주 쪼그맣더라고요. 그래서 좀 놀려댔더니 그걸 가지고 삐쳤는지 비무를 요청하지 뭐예요? 어쩌겠어요. 한바탕 붙었지. 결국에는 제가 이겼지만, 아뿔싸! 그놈이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는 것을 까먹었던 거예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만 보면 덤비는데 당해낼 재간이 있어야죠. 끝내는 골치가 아파져서 이곳을 떠나게 됐고 그 다음은 보시는 바와 같아요. 이제 왜 제가 본명을 밝히길 꺼려하는지 아시겠죠?”

중소구는 동천의 그럴듯한 거짓말을 듣고 나서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 있어봐. 그때가 언제 적 이야기더냐?”

동천은 중소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건 왜요?”

“좀 믿기가 힘들어서 하는 소리다. 지금의 네 나이를 아무리 많이 쳐준다고 해도 열 살에서 열두 살 미만인데 몇 년 전 이야기라면 고작 일곱에서 아홉 살 적의 이야기라는…….”

중소구의 추리는 가다 말고 잠깐 휴식을 취했다. 문이 열리며 동천 또래의 소녀가 차를 준비해온 것이다. 소녀는 연장자부터 차례차례 찻잔을 내려놓고 다소곳이 말했다.

“입맛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가주님께서 곧 당도하신다고 전갈이 왔으니 이 설향차(雪香茶)를 드시며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차라면 광적으로 좋아했던 중소구는 향기만으로도 심신을 맑게 해주는 설향차를 대하곤 동천에 대해 일체의 관심을 끊었다.

“설향차라면 사천 분지에서만 자란다는 희귀한 차가 아닌가? 이것은 이렇게 고마울 데가. 하하하!”

도연은 귀한 차라는 것을 듣자 간단히 인사말을 건넸다.

“잘 먹겠습니다.”

소녀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예에…….”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오직 혼자만 입을 다물고 있던 동천은 소녀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기에 추연이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다. 동천은 곧이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추연인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거시기 보고 놀란다더니 그 말이 딱 이잖아?’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미미와 추연. 그리고 하천과 춘천만은 위험했다. 아무리 머리카락으로 눈가를 가렸다 해도 가까이에서 대면하면 들킬 확률이 지극히 높았던 것이다. 그리고 굳이 언급하긴 그렇지만 위의 자라 어쩌구 거시기 저쩌구 하는 말은 강진구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흐음! 역시 설향차로다. 폐부를 시원하게 뚫어주는군.”

중소구는 맛있어서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동천은 예의상 꿀꺽꿀꺽 마셔버린 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나가있을게요.”

“그러던지.”

차 맛에 빠져버린 중소구는 상관 않는 눈치였다. 괜히 얄미워진 동천은 중소구가 마시고 있는 차를 확 뒤엎어 버리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지만 조금만 있으면 황룡굉이 당도한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나중을 기약했다.

‘아우, 열 받아! 가주님만 아니었으면 맞짱 한 번 뜨는 건데.’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온 동천은 이내 도연이 뒤따라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냐?”

안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쫓아왔냐는 소리였다.

“소구님이 불편하게 대하시더라도 인정이 많으신 도련님께서 참으시지요.”

이때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자신을 위로해주는 도연의 마음가짐에 진한 우정이나 감동을 느꼈겠지만 동천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 황룡굉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도연과의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게 되자 도리어 화를 냈다.

“네가 더 불편해 임마! 에이 씨, 시간도 없어 죽겠는데 괜히 말을 걸고 지랄이야. 빨리 들어가!”

도연은 동천이 갑작스레 화를 내어 주춤했지만 그가 거침없이 휴룡각을 나서자 얼른 막아섰다.

“적어도 이곳 내에서 머물러 계십시오. 그러다가 길을 잃어버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자신은 이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헤맬 염려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떳떳이 밝힐 수가 없었던 동천은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허나, 그보다 더욱 답답한 것은 언제 황룡굉과 부딪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비켜! 안 비켜? 이게 죽을……. 헉? 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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