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412화
무의식적으로 동천의 시선을 따라간 도연은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며 걸어오는 총관과 황룡굉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도연을 발견한 총관이 황룡굉에게 ‘저 아이가 중소구와 같이 온 아이들 중 한 명입니다.’라고 가르쳐주자 황룡굉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가까이 다가온 황룡굉은 스스럼없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가 중 대인과 같이 온 아이더냐?”
도연은 황룡굉의 신분을 깨닫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도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도연이 동천을 소개하기 위해 신형을 돌렸을 땐 이미 톡낀 뒤였다. 그러자 황룡굉이 소탈하게 웃었다.
“하하, 방금 전까지 같이 있던 아이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황급히 들어가더구나. 난 또 알고 있나 했더니 모르고 있었더냐?”
괜히 무안해진 도연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중 대인께서 기다리시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총관과 황룡굉은 자신들이 되려 손님인 줄 착각할 정도이자 서로 어이없이 마주보다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 하하, 어서 가자꾸나.”
그들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열심히 발을 놀려 건물 뒷편으로 숨어 들어갔던 동천은 긴 심호흡으로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고 있던 중이었다.
“헥헥, 쓸모 없는 놈 때문에 하마터면 걸릴 뻔했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옷소매로 닦아낸 동천은 지들끼리 뭐라고 지껄이던지 알 바가 아니었다. 외팔이가 가져다 달라는 것을 갖다 줬으니 그로서는 할 일을 다 한 셈인 것이다.
“쳇! 내가 그 놈의 소협 소리만 아니었어도 그 인간한테 다가가지 않았을 텐데 말야. 그랬으면 이곳에 다시 돌아오는 일도 없었잖아? 맞아, 그냥 나왔어야 했어.”
건물 뒤에서 쭈그리고 앉아 청승맞게 옛일을 들춰내고 있던 동천은 할 일 없이 가만히 있자니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는 것을 느꼈다. 동천은 그런 자신의 엉덩이를 살짝 후려쳤다.
“가만히 좀 있어. 조금만 참으면 되니까.”
그런 뒤 고개를 숙이고 아래로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뭐? 아프다고? 에이, 슬쩍 쳤는걸? 뭐라고? 이젠 안 아퍼? 이히히히!”
정말 한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간 때우기 용 농담이었다. 그런 동천의 한심함을 꾸짖는 것일까? 휴룡각의 접객실로 들어갔던 황룡굉이 경악에 물든 고함을 질러댔다.
“그게 정말이오?”
깜짝 놀란 동천은 벌떡 일어났다. 아울러 등골을 타고 기묘한 전율이 일어났다.
“흐윽?”
한 차례 몸을 떤 후 전신에 내공을 끌어올린 동천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허리띠를 풀고 전 내공을 운용했다. 그는 한참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리띠를 다시 착용했다.
“이상하네. 분명 위험하다는 신호가 왔었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잖아?”
느껴지는 것은 접객실 안의 사람들뿐이었다. 골이 띵해진 동천은 ‘예지력(豫知力)이 아닌가?’라고 중얼거린 뒤 찜찜한 마음에 살금살금 휴룡각을 벗어났다. 일단 밖으로 나오자 콕콕 쑤시던 머리가 갑자기 개운해졌다.
“나오니까 괜찮네? 뭐야, 혹시 철경에 나온 심법을 귀의 흡수 신공과 같이 익혀서 부작용이 생긴 거 아냐? 씨팔, 그러면 큰일인데?”
결함이 있는 심법이나 사악한 심법이 아니고서는 운기를 할 때 별 이상이 없으면 부작용이 아닌 것을 동천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든 동천은 철경 내의 심법을 익힐까 말까 고민하며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익혀, 말어? 흐응…. 사부님이 여러 가지 심법을 익히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 그만둬 버릴까? 아냐. 내가 보기에 굉장한 심법 같았는데 사장(死藏)해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워. 아니지? 그러다가 주화입마에 빠져들면 어떻게 해? 안 되겠다. 그만두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 건 사실인데 말야. 으윽! 머리 아파!”
동천은 조언해줄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이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인 줄 몰랐다. 한 자리를 빙빙 돌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동천은 누군가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곤 뚝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제법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2년이 넘게 흘렀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추연이었다.
‘히익? 지, 진짜 추연이잖아?’
긴가 민가 요리조리 살펴보던 동천은 보고 싶기는 했지만 막상 기피 대상 2호인 추연이 다가오자 재빨리 신형을 돌렸다. 그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추연은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서있는 동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못 보던 분 같은데 누구세요?”
움찔한 동천은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지나가는 과객이오.”
“예?”
추연의 어이없어 하는 반응에 동천은 자신의 주둥이를 마구 후려쳤다.
‘요놈의 주둥이야 고작 그따위 말밖에 못 하겠냐? 에잇! 에잇!’
동천이 돌아서 있어 좀더 걸어와 마주 선 추연은 뭐 하는 짓인가 했다.
“왜에…… 그러세요?”
이제 와서 또 등을 돌리면 더욱 이상하게 보일까 봐 동천은 약간 고개만 돌리고 점잖게 대꾸했다.
“네가 알 필요는 없다. 헌데, 어디를 가는 길이냐?”
대놓고 하대를 하자 지레 앞서간 추연은 신분이 높으신 자제가 이곳을 찾아왔나 싶어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미미 아가씨의 심부름으로 셋째 공자님께 가는 중입니다.”
동천은 미미라는 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미미?”
추연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세요?”
어디선가 그 이름을 주워들었냐는 뜻이 아니라, 잘 알고 지내는 사이냐고 묻는 것이리라. 물론, 잘 알고 지내긴 지냈었다. 나쁜 쪽으로 말이다. 그러나 안다고 말했다가 괜히 일이 커질 염려가 있어 동천은 딱 잡아뗐다.
“험,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출중한 미모를 갖추고 계시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
왠지 낯익은 모습에 동천을 주시하고 있던 추연은 곧이어 자신의 신분을 깨닫고 얼른 대꾸해주었다.
“맞는 말씀이세요. 아가씨께선 점점 아름다워지고 계셔서 조금만 더 크시면 안휘성 일대에서 제일 가는 미녀가 될 거라고 모두들 입을 모으고 있어요. 정말 여자인 제가 봐도 빠져들 정도라니까요? 호호.”
동천은 속이 미식거리는 것을 애써 참아가며 억지로 웃음 지었다.
“하하, 참으로 지당한 말이로구나. 헌데 미미 아가씨의 심부름을 왜 네가 하느냐. 내가 듣기론 남자 하인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소린지 갈피를 못 잡던 추연은 곧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동천을 응시했다.
“그건 2년 전 일인데……. 죄송하지만 그 머리카락을 좀 올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당황한 동천은 말을 더듬었다.
“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추연은 왜인지 몰랐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이 눈가를 가리고 있는 저 머리카락만 들어 올리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머리카락을 올려봐 주세요.”
뭔가 애절함이 담긴 요구였지만 하녀치고는 당돌한 요구였다. 그러나 추연의 분위기에 눌려 뒤로 주춤한 동천은 점점 백지화되어가는 머리를 바로잡을 여유가 없었다.
‘으으, 왜 하필이면 쟤를 만나 가지고……. 하늘이시여! 이 불쌍한 동천에게 번뜩이는 재치를 부여하소서!’
하늘님의 도움인지 그렇게 동천이 원하던 번뜩이는 재치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허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무슨 소리냐 하면 동천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통에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들이 좌우로 흘러내리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비록, 고개를 원상복구 시켜 잠깐 동안 보았을 뿐이지만 추연이 동천의 용모를 확인한 것은 틀림이 없었다. 놀람이 극에 달한 추연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그 얼굴은?”
“흐윽?”
덩달아 놀란 동천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여기에서 들킨다면 다시 비참한 옛날의 그로 돌아가는 줄 알고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럴 순 없어. 여기에서 다시 미미년에게 구속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런 것인가? 정녕 그런 것이란 말인가?’
눈앞이 노랗게 물들어갔다. 아울러 음산하게 웃고 있는 미미의 얼굴이 동천의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분명히 그 얼굴은…….”
포기한 동천은 질끈 눈을 감았다.
‘아아, 모두 내 불찰이로다. 이곳에는 오는 게 아니었는데.’
침묵이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도는 가운데 그 균형을 먼저 깬 것은 추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