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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48화


“야! 왜 그래?”

“저.. 저는..”

그런 소연의 낌새를 눈치 못 챌 동천이 아니었다. 동천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휴.. 아직 어리다고?”

“예? 예, 그래요. 저는요.. 아직 어려요. 흑흑…”

또 울었다.

‘아.. 쟤를 어떻게 하지? 사부님께 바꿔달라고 말할까? 으음.. 그러면 안 되지.. 다른 데로 갔다간, 쟤는 매일마다 구박받고 살 거야. 으휴, 착한 내가 저 병을 고쳐줘야지..’

동천은 자신이 정말로 마음이 넓다고 생각했다.

“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너한테 관심이 없어.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구!”

소연은 긴가민가하는 것 같았다.

“관심 없어.”

좀 믿는 눈치를 보였다.

“진짜야..”

그제서야 울음을 그쳤다. 동천은 소연이 울음을 그치자, 그만 나가보라는 듯 손을 저었다. 소연은 동천의 그런 손짓에 뭔가 확인해볼 게 있는 듯 머뭇거렸다.

“뭐야?”

동천의 뚱한 물음에 머뭇거리던 소연은 결심을 한 듯했다.

“저.. 아까. 봤어요?”

“뭐? 뭘 봐? 뭔지 몰라도 안 봤어.”

동천은 봤다고 말하려다가 소연이 또 뭐라고 징징거릴까 봐,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못 봤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도 소연은 동천의 말을 믿는 듯했다.

‘어휴.. 다행이다.’

소연은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자신의 그런 모습을 봤다면, 분명히 주인님이 자신을 어떻게 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야, 할 말 없으면 빨랑 나가. 나 지금 너하고 말장난 할 기분이 아니니까…”

“예. 푹 쉬세요.”


소연은 밖으로 나간 다음에 사람을 시켜, 동천이 먹은 그릇들을 치우게 했다. 그릇을 치우는 하인들이 모두 나가고, 혼자 남게 된 동천은 그러고 보니 자신이 며칠 동안 운기 조식을 안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침대에서 내려와 운기 조식을 시작했다. 내공을 운용하려던 동천은 자신의 내공이 전혀 모이질 않자, 의아해했다.

“어? 왜 내공이… 아아? 나참, 이 허리띠 때문이지? 그런데 어쩐다? 사부님은 이걸 며칠 동안 풀어놓지 말라고 하셨는데…”

한참 동안 고민을 하던 동천은 나중에 사부님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할 일이 없어서 침대에 누운 동천은 잔다면 또 그 꿈을 꿀 것 같아서, 잠을 청하진 않았다.

“음.. 왜 그런 꿈을 꾸는 거지? 나같이 평소에 착한 일만 하고 다니는 아이에게 하늘님이 벌을 내리시는 것은 아닐 텐데..?”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봐도 결론이 나질 않았다.

“으아아! 미치겠네? 잠만 자면 물만 쳐먹으니… 에이!”

신경질이 난 동천은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 위까지 덮어썼다. 그리고는 잠을 잤다. 꿈의 불안은 물 건너갔고, 이불을 뒤집어써 깜깜해지자, 졸음이 왔던 것이었다.


축축한 느낌.. 동천은 눈을 번쩍 떴다.

“에이.. 씨발. 또, 물이 차오르잖아? 이 개새끼를 어떻게 해야지 내 꿈에 안 나오지? 오냐! 어디 한번 또 나와봐라. 이번에는 가만히 안 둔다.. 부득!”

이까지 간 동천은 전번과 같이 문을 열면 또다시 물이 쏟아져 들어올 것 같기에 옆에 있는 창가로 다가가서 문을 살짝 열었다. 놀랍게도 방 안에는 계속 물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창가 밖에는 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때다 싶은 동천은 얼른 창문을 열고, 살짝 넘어갔다. 창문을 넘고 나서 벽을 등지며 살며시 문쪽에 다가가던 동천은 문 밑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볼 수가 있었다. 엄청난 부피로 커져있는 물은 아마도 동천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히히히.. 네가 그래봤자, 물이다.’

자신의 천재성을 새삼 확인하자,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숨을 죽인 후 다음 상황을 지켜보았다. 문틈으로 계속 물을 투입하던 커다란 물은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그대로 밀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당연히 있어야 할 동천이 없자, 들어갔던 대량의 물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

“푸아악-!”

“이크, 너무 지체했다.”

물이 쏟아져 나오자, 놀란 동천은 얼른 튀었다.

철퍽-! 철퍽..

물은 동천을 금방 쫓아와 차올랐다. 바닷가에는 가본 적이 없었지만, 전에 황 아저씨의 말 중에 ‘파도가 밀려온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때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금 뒤에서 계속 밀려오는 물들을 보니, 황 아저씨의 말이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제기랄, 더럽게도 빨리 쫓아오네..”

열불나게 도망쳐 보았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물은 벌써 가슴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되자, 움직이기도 힘들어졌다.

“헉, 헉. 난.. 흙탕물은… 싫은데.. 헉.. 헉…”

또 물을 먹을 거라는 생각에 어차피 먹을 거면, 깨끗한 물을 먹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물은 어느덧 동천의 몸을 붕 뜨게 할 만큼 차올랐다. 온 사방이 물 천지였다.

“웁.. 으프.. 퉤퉤.. 으읍.”

흙탕물이 자꾸 입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든 물을 안 마시려 했지만 허사였다. 생각 같아선 그냥 물 먹고 꿈에서 깨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고집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뭐 잡을 게 없나.. 하고, 한참 주위를 둘러보던 동천은 아직 다 차오르지 않은 지붕이 보였다.

“으웩…. 퉤. 지붕이다.. 저기라도 가서, 숨 좀 돌리자.”

개헤엄으로 있는 힘껏 다가갔던 동천은 겨우겨우 지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간신히 지붕 위에 올라서 쉴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일 것 같았다. 물은 계속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그 아가리만 크고, 시커먼 놈은 왜 안 보이지?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나?”

“쿵!”

동천의 말을 들었는지, 갑자기 지붕 밑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충격이 셌는지, 집이 부르르르… 떨렸다.

“으힉! 뭐, 뭐야? 으-억!”

“쿵! 쿠웅!”

밑을 바라보니 시커먼 물체가 계속 집을 들이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에이! 개새끼. 내가 나오란다고 금방 나오냐?”

우르르르…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마침내 집이 무너지고 말았다. 동천은 집이 무너지기 전에, 얼른 물속으로 뛰어들어 집과 함께 물속에 잠기는 것은 면할 수가 있었다. 동천은 물속에 뛰어든 후 검은 물체가 자신에게 방향을 틀자, 황급히 헤엄쳐 도망가기 시작했다.

“살..려..”

아까까지는 자신만만했지만, 막상 일이 닥쳐오니 겁이 났다. 지금 동천의 머릿속엔 도망가고 보자는 생각밖엔 없었다.

“난, 할 수 있다. 난, 죽지 않는다. 난, 도망갈 수 있다. 난, 피할 수 있다. 난, 벗어날 수 있다. 난, ….. 기억이 안 난다.”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헤엄쳐 가던 동천은 어느 정도 헤엄쳐 가자, 뒤따라오던 놈을 따돌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놈을 따돌렸다는 것을 알자, 동천은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으히히히.. 어떠냐 이 자식아! 내가 이래 봬도, 세가에서 알아주는 수영 솜씨를… 가만? 나는 수영을 못했는… 으-엑!”

자신이 수영을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자, 갑자기 몸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읍! 쿨럭! 으어어어그르.. 웩! 퉤! 사.. 우으으..”

동천이 내려갔다, 올라왔다 하면서 물을 들이마시고 있을 때, 멀리서 검은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기랄! 저 새끼한테 또 먹히겠네? 먹힐 땐 먹히더라도 저 새끼가 어떤 놈인지는 확인해 보고야 말 테다..’

마음을 먹은 동천은 눈을 부릅! 뜨고는 그놈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뒤로 헤엄쳐 도망치기 시작했다. 막상 거대한 물체가 물밑에서 빠르게 다가오자, 겁이 났던 것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개헤엄이었다. 속도가 느려지자, 당연히 금방 쫓아올 수 있었다.


“어-헉!”

동천은 밑에서 다리가 물리는 느낌에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에는 땀이 흥건하게 나와 옷을 적시고 있었다. 얼른 다리를 들어 확인해보자, 다리는 무사했다.

“휘-유… 다행이다.”

일단 자신의 다리가 무사한 걸 알자, 화가 났다.

“으으.. 또 실패했네? 씨발, 이번에는 꼭 알아내려고 했는데..”

침대에서 일어난 동천은 땀에 젖어 얼굴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물을 마셨다. 한 잔으로도 모자랐는지, 잠시 숨을 돌린 후 다시 한 잔을 들이켰다.

“어.. 시원하다. 휘유… 꿈에서 좀 무리했더니 몸이 피곤하네? 이럴 때 운기 조식을 하면, 사부님이 좋다고 했는데..”

동천은 완전히 녹초가 되자, 이거저거 따질 것 없이 허리띠를 풀고 운기 조식에 들어갔다. 십이주천을 마친 동천은 몸이 가뿐해지자, 놀라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단 한 번의 운기 조식이 이렇게 몸을 충만하게 만들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와, 운기 조식이 이렇게 좋다니.. 히히. 이제부터는 심심할 때마다 해야지! 우히히히.. 좋다.”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허리띠를 다시 차다가 픽! 하고, 쓰러졌다.

“이… 씨발.. 이건 찰 때마다 이러는 건가.. 아..?”

허리띠 때문에 근반각 동안 빌빌 거리던 동천은 겨우겨우 힘을 짜내어 일어섰다. 그때, 밖에서 소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들어가도 됩니까?”

“응? 으응.. 들어와라.”

동천의 허락에 들어온 소연은 동천이 몸을 휘청거리고 있자, 놀라며 달려와 동천을 부축했다. 소연이 부축해주자 아직 힘이 모자랐던 동천은 마침 잘됐다 싶어, 온몸의 힘을 쭉 뺐다.

그 덕분에 둘은 바닥에 같이 쓰러졌다.

“아앗?”

“어.. 어.. 야, 조심… 으앗!”

쿠-웅..

“저.. 저기, 이러시면..!”

밑에 깔려있던 소연은 놀랍고도 당황한 마음에 얼른 동천을 밀쳐버렸다. 그러나 힘이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동천을 밀치는 것도 꽤 힘들었다. 한순간에 그렇고 그런 놈으로 몰려버린 동천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옆으로 떼굴떼굴 굴렀다.

“야! 이 씨..”

눈시울이 붉어진 소연은 동천의 말도 다 듣지 않고, 얼른 일어나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도망쳤다.

“흑.. 너무해요…”

“이 씨발아! 네가 더 너무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동천은 소연이 나간 후 돌아오질 않자, 할 수 없이 기어가서 의자를 잡은 후, 그걸 버팀목 삼아서 일어나 앉았다.

“에구, 힘들어.. 나중에 사부님이 이걸 풀으라고 하면 그때 풀어야지, 이거야 원.. 이럴 거면, 힘들어도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더 낫겠다.”

의자에 앉아서 움직이는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을 때까지 휴식을 취했던 동천은 다시 원기(元氣)가 회복되자, 일어나서 성질이 난 표정으로 소연의 방으로 걸어갔다.

“씩.. 씩.. 이게 열받게 나를 그런 놈으로 몰아? 내가 그토록, 제 한테 관심이 없다고 말했건만 뭐? 이러지 마세요? 너무해요? 으으으.. 넌, 죽었다.”

소연의 문 앞까지 다가간 동천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아..?”

동천이 들어가자, 울고 있다가 깜짝 놀라 하는 소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도 여태까지 화가 났던 것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소연이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 것을 보자, 다시 화가 치밀었다.

“야! 넌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응?”

소연은 동천이 다가오며 말을 하자, 겁먹은 얼굴로 식탁 뒤로 가서 숨더니 고개만 빼꼼히 내놓은 채, 울먹이며 말했다.

“잘못했어요.. 흑, 하지만.. 하지만 아까는 어쩔 수 없었다고요..”

“뭐가 어쩔 수 없었어!”

동천이 화난 얼굴로 밀어붙이자, 소연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으앙!”

동천은 머리가 찌끈했다.

‘으으윽! 미치겠다! 으악! 여기에 더 있다가는 내가 다 돌아버리겠다!’

“미.. 미치겠다!”

더 이상 소연과 얘기를 한다면 자신이 돌아버릴 것 같기에 동천은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참 울던 소연은 동천이 머리를 잡고 뛰쳐나가자, 겨우 울음을 그치더니, 안도의 표정으로 말했다.

“사.. 살았다…!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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