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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07화


“그래? 그러면 그 인면지주 말야. 벌써 7개월이 지났으니까 지금쯤이면 죽어도 몇십 번은 죽었지 않았을까?”

“그럴 거예요. 하지만 화정이는 어느 정도 선에서 흡수를 끝낼지 몰라도, 음성만기지체인 운성현이란 강시는 음기를 계속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완전히 흡수할 때까지 고치 속의 화정이를 꺼낼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먹는 데에 정신이 팔린 것인지는 몰라도 동천은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소연은 후자 쪽인 것 같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놓지는 못했고 말이다. 도연은 잠시 이야기의 공백이 생기자 먹던 그릇을 내려놓고 말문을 열었다.

“주군, 다른 건 몰라도 민낭이 단묘 할머님의 동생이었다는 사실은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이 자극제였는지 고분고분 음식을 받아먹던 동천은 음식물을 튀겨가며 성질을 냈다.

“그러고 보니까 열 받네? 그 독살단묘 노친네들도 이 몸에게는 설설 기었는데, 그들의 장모나 에미도 아니고 처조카나 손녀도 아니고, 고작 처제와 동생의 신분이면서 감히 이 몸을 감금시켜? 오기만 해봐라! 아주 반쯤 죽여버릴 테다!”

예전의 실력을 발휘해 음식물들을 쳐낸 소연은 씩씩거리는 동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기에 장모나 어머니, 또는 처조카나 손녀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동천이 대뜸 눈알을 부라리자 소연은 알아서 설설 기었다.

“호, 호호. 맞는 말씀이세요. 주인님 말씀이 무조건 옳아요.”

‘까불고 있어.’ 라는 눈빛으로 소연을 바라본 그는 조용히 입을 벌렸다. 알아서 수저를 놀리라는 뜻이었다. 소연은 한고비 넘겼다는 표정으로 음식을 먹여주다가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사고를 변호해주었다.

“그래도 나쁘신 분은 아니세요. 이번에 나가실 때만해도 운성현이 깨어나면 그것에 맞춰 주인님과 나머지 분들을 다 풀어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거든요.”

동천은 버럭 화를 냈다.

“야! 너 같으면 3년 동안 뒷간에 빠트려놓고, 이제와 똥을 퍼내야 하니 나오라고 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할 마음이 생기겠냐? 으이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말야.”

비유는 좀 더러웠지만 의외로 이해하기는 쉬웠다.

“그, 그게 또 그런가요? 아무래도 제 생각이 짧았나봐요.”

인내심을 가지고 음식을 먹고있던 중소구는 꼭, 저 같은 비유만 한다고 속으로 씨부렁거렸다. 그는 동천이 어서 움직일 정도로 혈도를 풀어서 저 꼴을 좀 그만 보여주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여인네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웬일인지 몰라도(남들은 다 안다) 모든 여인들이 그를 슬슬 피했던 것이다.

‘아아, 나도 빨리 가정을 꾸려야할텐데.’

그가 그렇게 꿈같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모두의 식사가 끝났다. 저녁이 되고 모두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바닥을 깨끗이 청소한 소연은 정작 주인님이 취침에 들지 않자 무척 서운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지금에 와서 아무리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는 도연과 중소구는 몰라도, 시간만 있다면 혈도를 풀 수 있는 동천에게는 잠잘 시간도 활용해야하는 상황인 것을.

“그럼 전 문 열어놓고 나갈게요. 내일 뵈어요.”

지하실에서 올라온 소연은 바쁜 와중에 잠시 소홀했던 열쇠 찾기와 금제에 관련된 서적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사고인 민묘희의 방은 다른 여타의 방들에 비해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잡동사니들로 수북하고 그녀가 아무리 정리를 해놔도, 다음 날이면 전날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는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소연은 자신이 없었을 땐 어떻게 생활했을까, 그것이 다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역시나 어질러 놓으시고 가셨구나. 에휴, 뭐 어쩔 수 없지. 이런 상황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까.”

아직도 주인님을 만난 오늘이 꿈만 같았지만 사고의 방을 바라보자 이곳만은 꿈이기를 하늘님께 살짝 빌었다. 참고로 그녀는 동천과 같은 종교(?)를 믿고 있었다. 원래는 부처의 가르침을 믿었지만 신념이 미약한 어린 시절에 동천의 시녀로 지내다보니 자연히 주인 따라 종교관이 뒤바뀐 것이었다.

“하는 수 없지. 청소를 해가며 하나하나 뒤져보는 수밖에.”

두 팔을 걷어붙인 그녀는 어질러진 수백 종의 서적들을 하나하나 들춰가며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겉장에 제목이 없는 책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서적은 한참을 읽어봐야만 분류가 가능했다. 어쩔 땐 책 내용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말이다. 대충 골라낸 책들을 한아름 탁자 위에 올려놓은 그녀는 다음으로 열쇠를 찾기 위해 그 동안 손 대본 적이 없던 사고의 소유물들을 뒤져보았다. 그곳에서 열쇠 비슷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애석하게도 건진 것은 없었다. 대신 그녀가 건진 것은 어느새 손에 들려있는 사고의 빨랫감들이었다.

“…….”

이래서 습관은 무서운 것이었다.

“후우, 아무리 찾아도 없네? 그래, 다 하늘의 뜻이니까 정 필요할 때 그때 찾자. 안 그래도 도둑질하러 들어온 것 같아 꺼림직 했는데 잘됐지 뭐.”

스스로를 정당화한 소연은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주인님이야 암흑마교를 내세우지 않고 만독문을 내세우겠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고는 절대로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예전에 사고 스스로 만독문과의 인연을 끊은 지 벌써 40여 년이 넘었다는 소리까지 했었으니 만독문의 권위를 내세웠다간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만일 그러한 상황이 닥쳐온다면 그녀로서는 참으로 곤란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든 내 입장이 말이 아니겠구나.”

물론 최후에 가서는 주인님을 따를 테지만 그 중간의 갈등과 심리적인 부담감이 너무도 컸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위로서 우위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 대화로서 원만히 풀어나가야만 했다. 동천이 퍽도 들어먹겠지만 그것이 그녀가 생각해낸 최고의 해결방안이었다. 그녀는 내일 찾아뵐 때 그 이야기를 꼭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가만, 내가 뭘 빠트린 것 같은데? 뭘 빠트렸지?”

뭔가 허전했다. 방금 전까지 고민하고있던 것 외에도 주인님에게 가르쳐드려야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머리만 긁적이다가 결국 다음날까지 고민거리를 떠 안아야했던 그녀는 사람수대로 식사를 준비하는 와중에야 역마대원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뭐이? 사 호실의 녀석들이 정화년…이 아니라 아가씨의 마장대(魔壯隊)가 아니고 사부님의 역마대원들이었단 말야?”

이번엔 국물을 마시고있던 찰나여서 여과 없이 안면으로 받아낸 소연은 마침 씻겨드리러 가져온 양동이 물로 얼굴을 씻은 뒤 대답해주었다.

“예, 주인님의 뒤를 지켜드리는 형식으로 전주님과 소식을 주고받으며 이곳까지 왔다가 그만 조그마한 부주의로 독충에 물리게 되셨대요. 결국 뒤이어 나타나신 민낭에게 잡혀 들어온 거고요.”

동천은 지 생각은 못하고 나직이 혀를 찼다.

“에그, 병신들. 무슨 생각을 하고 다녔기에 그따위 것들에 물려?”

소연은 순진하게도 물었다.

“가서 물어보고 올까요?”

“…….”

동천은 이걸 때려야하나 말아야하나 잠깐 고민을 하다가, 아직 팔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을 접었다.

“됐어. 그건 그렇고, 그놈들이 사부님의 역마대라면 아가씨의 마장대는?”

소연은 묻는 저의를 몰라 되려 물어보았다.

“예? 아가씨의 마장대는 왜 찾아요?”

말하기 좀 그랬던 동천은 우회해서 물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차출되거나 그런 인원은 없었냐는 말이야.”

잠시 기억을 떠올리느라 눈살을 찌푸린 소연은 고개를 절래 내둘렀다.

“마장대는 총 열둘인데 적어도 제가 나올 때까지는 없어진 분들이 없었어요. 제가 화정이를 데리고 매일 찾아 뵙다시피 해서 그건 잘 알거든요.”

“그래? 그거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거린 동천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사정화의 성격상 내부의 다른 기관에 시켰을 리는 만무했다. 평소에 대놓고 마장대를 귀찮아하는 그녀였기에 옳다구나 명령을 내려 잠시나마 마장대의 수를 줄이려고 했을 것이 분명했다. 분명히 그러할 텐데, 아무 명령도 없었다는 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시 말야. 이 몸께서 나가신 후에 아가씨께서 화를 내시거나 그러는 기미는 없으시데?”

“글쎄요. 생각 좀 해볼게요.”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본 그녀는 이내 대답해주었다.

“아뇨, 평소와 다른 점은 없으셨어요. 다만 조금 쓸쓸해 보이시는 것 같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윽? 내가 깬 도자기 때문에 슬퍼했던 거구나!’

저 혼자 북 치고 장구까지 치고 난 동천은 자못 심각해진 표정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그 당시에 아가씨의 방에서 도자기 하나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있냐?”

“아아, 그거요?”

그 일만은 기억이 강렬했는지 금세 아는 척을 했다. 그녀는 이어 말했다.

“알고있죠. 수련이가 다음날 불평을 하면서 제게 말해줬거든요. 도자기 하나가 감쪽같이 없어져버려서 조금 찾다가 말았다고요. 그런데 마당 근처에서 깨진 도자기 파편을 찾았다지 뭐예요? 호호, 그걸 다른 곳에다 치우다가 손을 베였다고 하면서 무척이나 엄살을 피웠는데 지금도 잘 있는지 가끔 궁금해요.”

“그따위 지지배는 나중에 궁금해하고, 또 없어?”

“더 이상은 없는…, 아? 별거 아니지만 이런 말도 했어요. 그래도 아가씨와 주인마님의 추억이 담긴 도자기는 무사해서 다행이라고요. 보셨는지 모르지만 왜 있잖아요, 조금 엉성하게 만들어진 그 도자기 말예요. 푸훗, 조금이 아니라 많이 엉성……. 왜, 왜 그러세요?”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있던 동천은 숨이 턱 막히고 뒷골이 땅기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컥? 혀, 혈압이!’

대충 다섯까지 숫자를 셀 동안 심장박동을 멈추었던 동천의 신체는 이렇게 죽기에는 억울했던지, 급히 혈액을 순환시키고 공기를 받아들이며 산소결핍증세를 완화시켜갔다. 이어 정신을 차린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길길이 날뛰었다.

“크아악, 이런 개 같은 년을 봤나? 추억에 잠기고싶으면 그거 하나만 달랑 놓고 한밤에 질질 짜던가! 무슨 심보로 별 상관도 없는 걸 그 옆에 놔 가지고 인간 헷갈리게 만들어놓은 거지? 그래, 그렇다고 쳐! 그럼 이 몸이 도자기를 칭찬했을 때 ‘그 두 개중에 개같이 만들어 놓은 것이 어머니의 작품이야.’ 라고 가르쳐는 줬어야 했잖아! 안 그래?”

무서워진 소연은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그러니까 지, 진정부터 하세요. 화내시면 몸에 해롭잖아요.”

몸에 해롭다는 이야기가 주효했는지 동천은 이를 악물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옆에서 놀란 눈으로 주군의 발광을 지켜보았던 도연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그렇게 화나셔야할 일입니까?”

“모르는 너는 아가리나 닥쳐! 어이구, 내 청춘 돌리도. 꽃다운 5년의 세월이 그년의 그 말 한마디로 인해 날아갔구나!”

뭔가 알지 못하는 비사가 있다고 생각한 소연은 죽을상을 하고있는 주인님에게 눈치껏 물었다.

“저어, 그만 음식을 치울까요?”

동천은 눈알을 부라렸다.

“미쳤어? 그건 그거고 먹을 건 먹어야지.”

“예에…. 아, 하고 드세요.”

“아, 쩝쩝. 아이고, 하늘님 저를 굽어살펴 주소서!”

동천이 하는 짓거리에 중소구는 정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저놈 말고 차라리 이 몸을 굽어살펴 좀 주쇼. 저거 어떻게 조용조용 만들어줄 수 없겠소? 아주 배알이 꼬여 죽겠소이다.’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이 기회에 그 자신도 종교 하나 가져볼까 생각하기까지 한 중소구였다. 그러나 평생 무교로 살아온 것 때문인지 그리 내키지 않아 그만두기로 했다.

“다 드셨어요?”

소연이 물어오자 중소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을 건네주었다. 도연 것까지 챙기고 난 그녀는 사 호실의 역마대원들에게도 식사를 챙겨준 뒤 끝 방의 화정이에게로 찾아갔다. 투명한 관 뚜껑의 내부로 비치는 것은 고작해야 차가운 느낌의 푸른색 액체뿐이었지만, 그 너머로 화정이가 살아 숨쉬고있다고 생각하자 왠지 화정이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소연은 관 뚜껑에 고개를 파묻고 보듬어 안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화정아, 주인님께서 너를 보고싶어하셔. 너도 보고싶지? 그러니까 되도록 빨리 깨어나. 민낭께서는 운성현이 음기를 모두 흡수해야 너를 꺼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너라면 그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깨어날 수 있을 거야…. 나도 참, 갑자기 눈물이 나네. 그만 말하라는 뜻인가 봐.”

부그르르!

생각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관속에서 기포가 일어났다.

“뭐, 뭐지? 깨어나려는 건가?”

강시의 행동사항에만 지식이 있었던 그녀는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관 뚜껑을 열어 확인할 용기조차 없었다. 다만 이제껏 이곳을 지키면서 처음 보게된 장면이라 잘못 본 게 아닌가싶어 눈을 비벼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숨죽여 지켜보아도 같은 현상이 반복되지 않자 별거 아닌 것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호호, 둘 중 하나가 방귀를 뀌었나보지 뭐.”

농담 삼아 웃어가며 빠이빠이 손을 흔들어준 그녀는 들어올 사람도 없지만 문단속을 확실히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부그르, 부그르르.

다시금 거품이 일기 시작한 관의 내부는 간헐적으로 흔들렸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이내 잠잠해진 관은 산만하게 만들었던 작은 요동을 완전히 멈추었다. 그리고 그 요동의 주범은 운성현이었다.

사흘이 지나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된 동천은 소연의 강압에 못 이겨 목욕을 하고 난 뒤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쇠고랑 때문에 옷을 벗을 수 없었던 그는 욕통 안에서 옷까지 함께 빨아버린 상태였다.

“아아, 역시 사람은 깨끗하게 살고 봐야 해.”

사람이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행동이 틀리듯 동천이 바로 그 꼴이었다. 그는 중소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태연하게 물었다.

“뭘 보슈? 너무 잘생겨서 떫어요?”

말싸움하기 싫었던 중소구는 근질거리는 입술을 다물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동천은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바로 앞에 있는 욕통을 발로 멀찌감치 밀어냈다. 마치, 구정물로 변하다시피 한 욕통의 때가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듯 말이다. 그런데 생각 외로 버티는 무게가 있자 금세 포기해버렸다.

“이제 한 사나흘만 고생하면 전부 뚫을 수 있는데 문제는 화정이와 민낭이란 말야? 흐음, 한번 맞짱 떠봐? 아냐, 지 입으로 만독문과는 인연을 끊었다는데 괜히 도발시켜봤자 손해야. 그럼 화정이만 데리고 빠져나가야 할까? 것도 아냐. 비전문가가 함부로 건드렸다간 망가져 버릴 수도 있어. 에이 씨, 그거 되게 고민되네?”

공격적 성향이 강한 중소구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끼여들었다.

“네놈은 이제까지 당했던 것이 분하고 억울하지도 않느냐?”

귀에 거슬렸는지 동천의 눈 꼬리가 약간 치켜올려졌다.

“물론 분하고 억울하죠. 하지만 상대가 웬만큼 만만해야지. 후일을 기약할 수가 있는데 굳이 벌집을 쑤셔놔서 뭐 좋을 게 있겠어요?”

중소구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동천을 도발시켰다.

“아하, 그래서 포기하겠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붙어보기도 전에 꼬랑지를 내린다는데 별 수 있겠느냐.”

중소구의 속셈을 꿰뚫어버린 동천은 짖던지 말던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군자는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하는 법. 그렇게 분하고 억울해요? 그럼 혼자 남아서 상대하면 되겠네. 히히, 혼자 잘 해보셔.”

“오냐, 내 혼자서라도 기다렸다가 상대할 것이니라!”

기분이 상한 중소구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실 동천도 민묘희를 때려죽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의 분노와는 달리, 그녀가 독살단묘 부부와 혈연지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 분노가 급속도로 수그러들었다. 아마도 동천의 내면에는 독살단묘 부부를 윗사람으로 여기고 그들을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 인정했던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간의 일들이 그렇게 나빴다고는 여겨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들도 많았고 그녀의 덕택으로 이렇게 소연까지 만나게되었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소연이 걔도 제법 컸단 말야? 히히, 나중에 귀여워(?) 해줘야지.’

때를 맞춰 안으로 들어온 소연은 수십 가지나 되는 조막 만한 약병들을 한아름 들고 와서 동천의 앞에 쏟아내다시피 했다. 동천은 싱글거리며 반겼다.

“오오, 이게 바로 그 할망구가 사용하던 것들이야?”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민낭께서는 약병에 표기를 하지 않으시고 그 모양과 뚜껑의 색깔, 그 외에 약상자에 놓여져 있는 순서에 따라 그 내용물을 확인해보지도 않으시고 그게 무슨 약인지 감별해내시는 것 같은데, 몇 개는 사용하지 않은 곳에 보관되어있었고 나머지들은 약상자 안에 보관되어있던 것들이에요.”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소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했다.

“잘했어. 그런데 그 사용하지 않던 약병은 어느 거냐? 아무래도 그게 중요한 것 같은데.”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있던 소연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 그게요. 수십 가지를 품에 안고 오다보니 도중에 섞였는데요. 호호, 그럴 수도 있죠.”

같이 웃고 난 동천은 그녀의 양 볼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겼다.

“호호, 그럴 수도 있죠? 에라 이 기집애야.”

“아야야야. 자, 잘못했어요.”

소연이 눈물을 찔끔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자 마음이 약해진 동천은 그쯤에서 그만두었다.

“됐으니까 이 욕통이나 치우고 지켜보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해.”

고통에서 해방된 소연은 우선 구석에다 욕통을 밀어놓은 후 새끼강아지 마냥 쪼르르 달려와 바로 앞에 앉았다. 그 사이 근엄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동천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신기가 아니까 눈들 크게 뜨고 주목하는 게 좋을 거야. 이제 이 몸께서 이것들 중 격발단(激發丹)을 골라낼 테니까 잘 보라고.”

목욕하기 전에 소연에게 격발단을 가져오라고 시킨 동천은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그녀의 대답에 꿀밤한대를 먹인 후 약병에 들어있는 단환이란 단환은 몽땅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나머지는 자신이 다 알아서할 테니까 말이다.

“주인님, 그런데 꼭 그것을 사용하셔야겠어요? 나중에 민낭이 아시면 큰일난단 말예요.”

동천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민낭이고 지랄이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여기에서 눌러 살기라도 할거야?”

소연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그럼 됐네. 넌 그렇게 걱정할 일이 없니? 그거 걱정할 여유가 있으면 이 몸의 걱정이나 더해. 알겠냐?”

소연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상황이 언뜻 무모해 보이자 도연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정말 상단전의 능력으로 감별해내실 수 있겠습니까? 격발단을 찾아낸다면 혈도를 뚫는 데 더할 나위 없이 도움이 되겠지만, 혹여 잘못 고르시는 날엔 큰 화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동천은 자신 있게 말했다.

“걱정을 말거라. 만일 잘못 골라냈다고 해도 막상 잘못된 것을 먹게 된다면 몸이 다 알아서 반응을 해줄 테니까. 넌 이 주군을 못 믿겠냐?”

도연은 차분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수하 된 도리로서 확실하지 않은 일에는 내키지 않을 뿐입니다.”

동천은 별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여기에서의 격발단은 특정 단환의 명칭이 아니라 그러한 단환들을 통 털어 격발단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됐어됐어. 이건 확실한 거니까 서론은 이쯤에서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자아….”

제각각의 크기와 색깔의 약병들 중 바로 앞에 보이는 것 하나를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그는 눈을 감고 상단전의 힘을 끌어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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