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24화
“……에 또, 그리하여 녀석의 몸에 심각한 무리가 왔음을 대번에 파악한 이 몸께서는 세상 그렇게 살면 맞아죽기 십상이라는 진리를 깨우쳐주고자, 근자에 창안해 놓았던 광풍난타(光風亂打)를 시전 했던 것이다.”
동천은 고씨의 도움으로 어깨를 싸매고 있는 도연에게 그 동안에 벌어졌던 일들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약간의 문제라면 오로지 동천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가 미화되었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도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주군다운 재치 있는 행동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송 대인과 그분의 식구들이 위험에 처해졌으니 결론적으로 옳은 행동이셨다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후우, 지금쯤 모두 살해당하셨을 지도 모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야, 재수 없으면 죽고 아니면 사는 거야! 무슨 성인군자도 아닌 놈이 남 걱정이나 하고있어? 막말로, 이 몸께서 그 자리에서 당했어야 옳다는 소리야? 엉? 이게 살려줬더니 완전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심보네?”
기분 잡치는 소리를 듣게 된 동천이 아니꼽다는 듯 눈을 흘기며 화를 냈다. 그런 동천의 눈치를 보며 도연의 응급처치를 끝마친 고씨는 ‘보따리 내놓으라는 심보’ 이야기가 나오자 조용히 생각했다.
‘그건 니 얘기잖아.’
반면, 얼굴을 굳힌 도연은 더 이상의 대화가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욱신거리는 어깨를 매만지며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동천이 ‘에이씨! 에이씨!’ 저 혼자 씨부렁댔는데, 돌연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너 잘났다, 자식아! 내 더러워서라도 가서 어떻게 되어있나 볼 테니까, 넌 여기 이 자식이나 잘 포박해 놔!”
동천이 가리킨 이는 날수혈괴였다. 일단 혈도를 봉해놓긴 했으나 고수로 사료되는 바, 언제 풀어서 위해를 가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뭐 지금 상태로 보자면 내상을 입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주군, 위험합니다. 하다 못해 화정이를 대동시키십시오.”
내심 그럴려고 생각했었던 동천은 불같이 일어난 반발심에 그 계획을 취소해버렸다.
“됐어, 임마! 이 몸이 고작 화정이의 도움 따윌 받을 성싶으냐? 나 혼자서도 충분해! 에잇!”
“주군! 주… 으윽!”
도연은 길길이 날뛰며 나가는 주군을 쫓아가고자 했으나, 어깨를 비롯한 여러 군데의 심한 타박상 때문에 다시금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고씨는 혀를 내두르며 쓰러지는 도연을 부축해주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자네 주군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나름대로 생각해둔 작전이 있을 것 아니겠나. 그보다는 자네의 상태부터 회복하는데 주력하시게. 이러고 있으면 도리어 짐만 되는 꼴을 겪는다네.”
맞는 말이자 도연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아닐세. 자네가 날 살려준 것에 비하면 이런 말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고씨가 손을 내저으며 정색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일의 발단이 자신의 주군이었기에 도연의 마음은 절대 편치가 못했다. 이렇듯, 오나가나 말썽만 일으킨 장본인은 큰소리치고 나온 것에 비해 소심할 정도로 몸을 사리며 안채로 이어지는 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안쪽이 딱히 소란스럽지 않네? 이것들이 벌써 볼일 다보고 토꼈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자신의 판단이 성급했음을 깨달았다. 싸우는 소리가 들리긴 들렸는데, 안채로 이어진 통로가 생각보다 길었던 탓에 중반 이후까지 걸어가서야 그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급히 한쪽 벽으로 달라붙은 동천은 이내 그게 그거임을 깨닫고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정 중앙으로 섰다. 아직 일직선 통로에 머물러있어서 숨는다고 숨어봤자 고수들에게는 가소롭게 비칠 뿐이었기 때문이다. 동천은 괜한 송금을 탓했다.
“이 인간은 뭐더러 통로를 이따위로 길게 만들어놨어? 혹시, 오가는 길이 짜증나게 길다는 것을 핑계로 바깥을 나돌며 계집질이나 하려고 이렇게 만든 거 아냐?”
이유를 갖다 붙이자면 뭔들 갖다 붙이지 못할까 만은, 사실 송금이 통로를 길게 지어놓은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주위에서 다 알아주는 비만이었는데 그로 인해 누워서 잠자는 것까지 헐떡이게되자 중대한 결심을 내리게 되었다. 짐작했겠지만 바로 살 빼기인 것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의 살빼기를 실패했던 송금은 그때의 경험을 발판삼아 처음부터 무리하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단단히 결심하고 계획을 세운 그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살 빼기 운동을 시작했고, 이 비정상에 가까운 긴 통로도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것들 중에 하나였다. 거처를 왔다갔다하는 부분에서라도 좀 걸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뭐, 오늘날의 그가 통통하다 할 정도로 살이 빠져있는 것을 보면 마냥 엉뚱한 짓은 아니었나보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어이구! 어이구! 살려주십시오!”
동천이 통로에서 벗어날 때 즈음 송금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동천은 송금이 고문이나 그와 비슷한 지경에 처해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두세 명의 무림인들이 뒤섞여 싸우자 그 와중에 칼부림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질겁하여 저 혼자 빌고 또 비는 것이었다. 그런 송금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본 동천은 지체 없이 무림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야, 여기도 만만치 않은 자식들이 설치네?’
이곳 주점은 ‘ㄱ’ 자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그 중에서 ‘ㄱ’ 자의 안쪽 공백 부분이 송금의 거처였다. 그 안에 앞마당도 만들어놓고 화단과 나무들, 심지어는 작은 연못까지 구비해 놓은 것으로 보아 생색낼 것은 다 생색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자못 안타까운 사실은 지금 그것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상태라는 것이지만 말이다.
“헐헐, 그만 물러서라. 으적, 내 그리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으적으적.”
상당히 비대한 사내가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아내며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협공으로 일관하던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제와 물러설 이유가 없다!”
“그렇다, 네놈이야말로 물러서는 것이 어떠냐? 평소 소문으로만 듣던 하마기공(蝦氣功)도 별거 없어 보이니 네 주제를 안다면 이쯤에서 꼬리를 말아라!”
기공(氣功)이란 기로써 몸을 보호하는 외문무공의 상승경지로서, 일반 외문무공들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내장까지 기로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을 당해도 견뎌낼 수 있는 신공이었다. 소림사의 나한기공(羅漢氣功)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무공이다.
“으적으적…….”
눈빛이 차가워진 비대한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입안의 무언가를 씹기만 했다. 한눈에 보아도 화가 났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스르르 몸을 움직인 사내는 돌연 일장을 내질렀다. 강한 경풍(勁風)이 몰아치자 두 사내가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비대한 사내는 그것을 노린 듯 한 사람만을 골라 신형을 날렸다.
‘우와! 저 몸뚱이로 저만큼의 속도가 나오다니!’
동천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만일 지금의 장면을 보지 못했더라면 자신의 경우 방심하고 있다가 당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엇? 이놈이?”
당황한 좌측의 사내가 현란함으로 무장한 검세를 뿌렸다. 피식 웃은 비대한 사내는 곧 잔인한 미소로 바꾸며 소리쳤다.
“헐헐, 진정한 하마기공을 보여주마!”
슈슈슈―슉!
비대한 사내의 양손이 수비를 도외시한 공격일변도로 펼쳐졌다. 그의 양손은 어쩐지 더욱 부풀어 있는 듯 보였다. 좌측의 사내는 자신의 검이 베려는 족족 튕겨나가자 아연실색을 했다.
“제기럴! 도와주게 심평(沁平)!”
안 그래도 심평이라 불린 사내가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었다.
“고승척(高昇斥), 이것을 받아보거라!”
“응?”
다가오는 심평의 검을 발견한 고승척은 은근히 놀람을 내비쳤다. 그의 검이 한 점으로 모인 힘을 바탕으로 지극히 정순한 기세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감히 경시할 수 없었던 그는 크게 소리쳤다.
“으적, 네놈이 진짜배기로구나!”
심평으로 공격목표를 수정한 고승척은 양손을 안쪽으로 갈무리한 뒤, 둥근 공을 만지듯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동천은 저 인간이 뭐 하는 짓인가 생각했고 말이다.
“어리석은 놈! 죽어라!”
심평은 찌르는 속도를 높여 무정하게 파고들었다. 상대의 검을 지척까지 허용하며 둥글둥글 손을 휘돌리던 고승척은 양손 사이로 심평의 검을 지나치게 놓아둔 뒤 지체 없이 그것을 타고 올라갔다.
뚜―두두둑!
고승척의 손이 지나치자 심평의 검이 십여 조각으로 동강나는 소리였다.
“어헛?”
헛바람을 들이킨 심평은 절망하는 한편 어처구니가 없었다. 공격할 당시의 그는 고승척이 자신의 검을 잡아챈다고 해도 회피할 방법이 있었고, 잡아채려는 그 속도보다 더 빨리 찔러 넣을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잡는 것이 아닌 검을 타고 올라오며 강기(剛氣)로서 부수어 버릴 줄이야…….
‘큭, 끝인가?’
달리 대처할 사이도 없었다. 고승척의 통통한 손은 어울리지 않게 살기를 머금고 심평의 가슴께로 밀려들었다. 죽음을 각오한 심평은 탄식의 눈을 감았고, 바로 그때 낯익은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이쪽은 물로 보이더냐?”
심평의 단짝이라 할 수 있는 한태수(漢太守)였다.
푸욱!
한태수의 검은 때맞춰 무방비가 된 고승척의 등짝에 파고들었으며 그의 검 삼분지 일 가량은 고승척의 살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크억―!”
고승척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자 기습에 성공한 한태수가 희열에 찬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어떠냐? 어떠냐, 이 돼지 놈아!”
승리에 도취된 한태수는 깨끗한 죽음을 내려주기 위해 한발 앞으로 내딛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피를 토하고 쓰러질 줄 알았던 고승척이 차분하게 숨을 들이 내쉰 후 ‘하압!’ 하고 기합을 터트리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한태수의 검은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뿅!’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왔다. 아울러 튕겨져 나온 검신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감각이 확실했거늘!”
경악에 물든 한태수가 주춤 물러섰다.
“아이고, 아이고! 살려주십시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옆에서 눈치 없는 송금이 주둥이를 놀렸다.
“으적으적, 그따위 조잡한 솜씨로 이섬합주(二閃合奏)라는 명성을 쌓았었다니. 헐헐, 기가 찰 노릇이구나.”
상대방이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인 심평의 실력까지 싸잡아 비웃자 한태수도 무인인지라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닥쳐라! 네놈 같이 요사한 술수를 쓰는 놈에게 그따위 소리나 들을 내가 아니다!”
한태수의 발언에 고승척이 잠시 씹기를 중단했다. 이것은 고승척 특유의 버릇으로서 무언가에 놀랐다거나 기가 찼을 때, 혹은 진정으로 분노했을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물론, 지금의 의미는 분노했을 때였다.
“네놈이 감히……. 우으으으! 카아―압!”
별안간 몸을 구부린 고승척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안간힘을 썼다. 영문을 모르는 동천과는 달리, 심평과 한태수는 어렴풋이 깨닫고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승척의 안면 여기저기에서 시퍼런 심줄이 튀어나왔고, 눈 한번 깜박일 적마다 그의 몸 곳곳들이 주체를 못할 정도로 부풀어올라갔다. 동천은 내심 ‘저러다 터지면 볼만하겠다…….’ 라고 중얼거렸는데 그것을 듣기라도 한 듯 고승척의 행동이 뚝 멈추었다. 대신에 그는 거친 숨소리를 뿜어냈다.
“흐으, 흐으…….”
“혀, 혈전강 하마투(血戰鋼 蝦鬪)?”
반신반의한 심평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것에 반응했는지, 산처럼 거대해진 고승척이 지면을 박차고 한태수에게로 밀려들었다. 거대한 잠력에 숨이 콱콱 막힌 한태수는 감히 막아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헉? 대단하구나! 하마전공(蝦專攻) 고승척의 하마기공이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허겁지겁 피했다. 그러나 고승척의 몸이 어찌나 가볍고 재빠르던지 피한 보람도 없이 어깨에 들이 받히고야 말았다.
퍽!
“크아악!”
한태수의 몸은 풍랑을 만난 가랑잎처럼 휩쓸리듯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황망한 와중에 친구를 도와주지 못한 심평은 얼어버린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태, 태수…….”
그의 잘못만도 아닌 것이 반대쪽으로 피했던 탓에 도와주러 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진기를 거두어들여 평소의 몸으로 되돌아온 고승척은 다시 무언가를 씹으며 아직 숨이 붙어있는 한태수에게 말했다.
“으적으적. 요사한 소리든, 요사한 술수든. 힘없는 자에겐 그따위 혀를 놀릴 자격이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