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26화
쿵!
정체 모를 그것은 동천의 뒤로 육중하게 떨어졌고 그것을 살펴보자 놀랍게도 심평이었다.
“뭐, 뭐야? 댁이 왜 이곳으로 떨어져?”
깜박깜박!
심평은 대답대신 눈만 감았다 떴다. 그에 동천이 다급하게 생각했다.
‘동천아, 상황을 종합해보자! 상황을 종합해보자! 혈이 집힌 심평이 날아왔다. 나가는 쪽에 고수가 있다. 끝!’
대번에 혈이 집혔음을 깨달은 동천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 살려라 도망쳤다. 어떻게 보면 허무한 종합이었지만 동천으로서는 당장에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종합이었다.
“으적으적. 헐헐, 아이야. 너는 어찌하여 이곳에 찾아왔느냐.”
엎친대 덮친 격이라고, 벌써 눈치를 챈 고승척이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어느 쪽으로 도망쳐도 걸리는 것이기에 동천의 행동은 쓸데없는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에? 아니 그게…….”
그때 반대쪽에서 음흉하게 비웃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큭큭큭, 네 이놈 잘 만났다.”
“하하, 그래그래. 복수의 기회는 언제나 가까이 있는 법!”
동천은 의외로 그들의 정체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어? 응창삼황(鷹蒼三皇)?”
그렇다. 동천에게 호되게 당한 후 꼬리를 말고 도망쳤던 바로 그들이었다. 어떻게된 일인지 몰라도 치욕스럽게 당했던 일들을 되 갚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헌데, 더욱 기고만장할 줄 알았던 그들이 이상하게도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들 중 천소평이 급히 말했다.
“이놈아! 응창삼황이 아니라 응창삼호(鷹蒼三虎)다! 응창삼호!”
“뭐? 댁들이 응창삼황이라며.”
동천은 기껏 제대로 불러줬더니 지랄한다고 생각했다.
“이, 이놈의 자식이 그래도? 아니야! 아니라고, 자식아!”
“그래 이놈아! 아니라는데 왜 이리도 우겨?”
“이보게들, 아주 묵사발을 내자고!”
“그럽세!”
“그러자!”
흥분한 그들은 동천의 발언에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사 비밀은 없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이들의 이상하고도 꼴사나웠던 행동의 이유는 곧 백일하에 드러났다.
“어허, 아직도 이놈들을 그따위로 알고있는 어린놈이 있었구나!”
약간 거친 듯한 노인의 목소리에 다른 늙은 목소리가 반응했다.
“그러게 말이오, 형님. 허허, 이놈들이 그래도 딴엔 유명하긴 했나보오.”
천천히 걸어오는 인물들은 서로의 키 차이가 상당히 나는 인물들이었다. 동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생각했다.
‘어? 저 노친네들의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목소리만 듣고서는 긴가민가했는데 좀더 동천 쪽으로 다가오자 겨우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동천은 마치 숙달된 조교 마냥 재깍 고개를 숙였다.
“어이구, 그 위대하고 유명하신 이명호월(異名晧月) 어르신들이 아니십니까요?”
이명호월이 맞는지 순간 그들이 놀라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곧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온 그들은 매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어허허! 너 같은 아이가 어떻게 우리들을 알아볼 수 있었단 말이냐.”
“그러게 말이오, 형님. 이는 우리 형제가 잠깐 놀랐어도 절대 부끄럽지 않은 행동이었소.”
순간의 재치로 이명호월의 마음을 사로잡은 동천은 한결 여유를 가지고 대답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저 이렇게 유명하신 어르신들이 없었거늘, 강호에서 빌어먹고 사는 무림인들이라면
<한 손으로 대지를 가르고(한 손으로 땅바닥이나 긁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달을 베어내셨다는 어르신들의 위명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한 손으로는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베었으니, 오호라 통재라! 패륜아들이 여기에 있었구나!>
저 또한 명색이 강호에 몸담고 있는 처지이기에 알았던 것이고, 이렇게 어르신들을 뵙게 되어 개인적으로 무한한 영광일 따름입니다. 부디 헤아려주십시오.”
“어허, 그랬구나!”
일단 대꾸한 이명호월의 맏형 강두월(姜逗月)은 ‘그런 이야기도 있었나?’ 라며 연신 고개를 저어댔다. 그의 동생 강비월(姜飛月)은 어린놈이 그렇다는데 의심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그저 흐뭇할 따름이었다.
“좋구나! 네 의지가 가상하다!”
“아? 어르신에게 칭찬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어르신!”
동천이 가증스럽게도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짓자 응창삼황은 어처구니가 없어 복창이 터질 지경이었다. 연혜풍이 소리쳤다.
“작은 주인님! 저 간교한 놈의 주둥이에 현혹되셔서는 안됩니다! 우선은 저놈이 퍼트린 소문을 추궁하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그 말이 맞다 여겼는지 동생 강비월이 웃음을 지우고 동천에게 말했다.
“아이야. 소문이라는 것이 흉흉하여 난데없이 우리가 불벼락을 맞았구나. 듣자하니 그 소문의 근원이 너라던데 이 어찌된 일이더냐?”
됐다고 생각한 응창삼황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동천의 말솜씨로 일이 틀어지나 했는데, 다행이 제때에 끼여든 연혜풍 덕분에 애초에 목적했던 방향으로 흘러 가고있는 것이다.
‘흐흐흐! 이제 네놈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느니라! 어디, 재간이 있다면 빠져나가 보시지?’
동천의 피해자 중 최대의 피해자였던 진창남이 고소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동천이 너무도 당당한 표정이자 어쩐지 슬슬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그 소문의 근원지라 저라고 그따위 유언비어를 퍼드렸습니까?”
강두월은 말했다.
“누구이겠느냐. 바로 저 하인 놈들이지.”
동천은 기겁하는 척했다.
“예엣? 하인이라니요? 저놈들은 어르신들을 욕하고 비하한 놈들인데 어떻게 하인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천소평을 비롯한 응창삼황들은 진짜로 기겁했다.
‘헉? 저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허어, 허어! 이대로 놔두었다간 무고한 우리들을 줄초상 낼 놈이로다!’
천소평이 대뜸 소리쳤다.
“고, 고얀 놈! 네놈이 이제는 거짓말까지 나불대는구나!”
“어라? 지금 발뺌하는 것이오? 그리고 말까지 더듬는 것으로 보아 찔리긴 찔리나 보구려?”
“이놈아! 그건 당황해서 더듬은 것이다!”
멀쩡한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설전(舌戰)이 오고가자 눈살을 찌푸린 강두월이 나섰다.
“내 살아오면서 변론의 기회를 주지 않은 적이 없다. 먼저 문제의 발단인 어린놈 네가 말해보거라.”
씩씩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척, 손가락을 들고 천소평을 가리켰다.
“제가 어제 오후 난데없이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과 마주쳤는데, 이 마을에 어르신들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불필요한 소란스러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감히 어르신들의 외호를 언급했습니다. 아, 그랬더니 저자가 하는 말이!
”그따위 들어본 적도 없는 늙은이들이 대수일까! 흥! 그 늙은이들이 그렇게 대단한 네놈의 방패막이라면 어디 데려와 보거라!”
라고 무례하게 외쳐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너무도 기가 막히고 분개한 제가 저들을 손봐주었는데 그랬던 놈들이 어르신들의 하인들이었다고 말씀하시니, 저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어 머리가 아프고 현실인지 지옥인지 분간을 못할 따름입니다.”
짐짓 어지러운 듯 행동하는 동천을 뒤이어 천소평이 흥분하며 나섰다.
“저! 저!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짜 맞추는구나! 네놈이 언제 주인님들을 거론했단 말이냐! 네놈은 그저 이월(異月) 어르신들이라고만……. 아?”
말하는 와중에야 무언가 깨달은 천소평이 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 동천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으히히! 으히……. 아참? 이렇게 웃으면 안되지? 하하, 천가야. 네놈이 이 몸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했다 만은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내 이제부터 이 몸께 대들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가르쳐주도록 하마!’
“흥! 드디어 깨달았나 보구려? 바로 이명호월 어르신들의 외호를 줄인 것이외다. 자아, 이래도 내가 거짓말을 했단 말이오?”
천소평은 이명호월의 두 눈이 싸늘해지자 다급히 변명했다.
“하, 하지만 네놈이 감히 저분들의 멀쩡한 외호를 놔두고 줄여서 부르지 않았더냐! 그 상황에서 이월만 듣고 어찌 저분들임을 알아낼 수 있을까!”
동천은 버럭 화를 냈다. 다름 아닌 천소평의 끈질김에 짜증이 난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요? 좋소, 끝까지 해봅시다. 나는 이월 어르신들을 존경하고 우러러 보기에 보잘것없는 댁들이라도 줄여서 부르면 눈치챌 줄 알았소! 그랬기에 감히 저분들의 외호를 줄여서 말했던 것이오!”
응창삼황 일동은 ‘너만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데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은 이명호월의 분노에 도화선이 될 소지가 다분했다. 그 말인즉, 자신들은 전혀 존경하고 우러러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억지다!”
눈치 없는 진창남이 동천의 언변에 고개를 끄덕이고있는 이명호월의 앞에서 그렇게 소리쳤다. 강두월과 강비월은 대뜸 눈알을 부라렸다.
“뭣이라? 이렇게 듣고 저렇게 들어도 지당한 말이거늘, 네놈이 감히 억지라고 했느냐?”
진창남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하, 하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저희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었어도 똑같은 결과였을 겁니다. 지금 저희들의 충성심에는 티클 만큼의 부정함도 없으니, 부디 올바른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마냥 억지만은 아니자 다른 응창삼황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안되겠다고 생각한 동천은 이명호월이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쳤다.
“그렇다면 다른 제 삼자에게 물어보기로 하지요. 저어, 고 대협. 대협께서는 이월이라는 말을 듣고 여기 이명호월 어르신들을 떠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묻는데 고승척이 뭐라고 답하겠는가.
“으적으적, 물론이니라. 헐헐, 이명호월 선배님들이야 그 명성이 자자하니 척하면 척으로 알아들을 수 있지.”
동천이 귀여워서가 아니라, 상황을 놓고 볼 때 동천의 편을 들어주게 되어있었다. 그만큼 이명호월들의 존재는 심기를 건드려 놓고싶지 않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었던 응창삼황이 바로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어르신들, 이는 공정성이 없습니다! 바로 곁에서 들은 상황인데, 고 대협께서 감히 아니라고 어르신들의 비위를 건드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강씨 형제 이명호월은 고승척의 대답에 흡족해하면서도 그들답지 않게 분명한 사리판단을 내리고자 했다.
“그렇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자고로 모든 일에 공정해야 뒤에서 오고 가는 말이 없는 법이니라.”
‘쳇, 우유부단한 노친네들!’
이명호월을 가볍게 씹어준 동천은 다된 밥에 코 빠트릴 수 없는 법인지라 곧 지당하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제가 감히 존경하시는 분들께 토를 달 수 있을까 만은, 정말 공정한 처리를 위해서는 여기 이분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동천이 두 눈만 말똥말똥 뜨고있는 심평을 가리키자 기다렸다는 듯 응창삼황이 들고일어났다.
“이자에게 묻는 것이 어찌 공정한 처리란 말이냐?”
“그렇다! 대답은 들어보나마나 고 대협과 같을 것이다!”
그에 동천이 거칠 것 없이 소리쳤다.
“그렇지가 않소, 그렇지가! 이분이 이월 어르신들의 줄인 외호를 몰랐을 거라 말해도, 이해심과 자상함이 풍부하신 이월 어르신들께서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약조를 해주신다면 분명 이분은 정직하게 대답해주실 것이오!”
천소평이 끝까지 거부하려했다.
“어림도 없다, 이놈아! 이자가 정직한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믿고 맡긴단 말이냐!”
“쳇, 댁들보다는 정직할 것이오.”
“뭐, 뭐시라? 이놈이 감히…….”
그때 강두월이 싸늘히 말했다.
“이제부터 그 누구를 막론하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그 즉시 목이 날아갈 것이다. 도무지 귀가 따가워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겠구나.”
“예, 예에.”
제일 찔렸던 천소평이 찔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도 계속 씹기만 반복하던 고승척이 은근슬쩍 끼여들었다.
“헐헐, 이 자의 정직함은 내 인정하는 바이지. 응창삼황, 이 내가 보장할 터이니 시간 끌지 말고 너희들이 물어보도록 해라. 으적으적, 어찌 보면 이것도 하나의 운이다. 네놈들의 운이 이 아이보다 높다면 승리할 것이오, 그 반대라면 이 아이가 승리할 것이다. 으적, 그렇지 않더냐?”
천소평은 마지못해 수긍하면서도 할말을 했다.
“으, 응창삼황이 아니라 응창삼호요.”
아마도 강씨 형제가 무슨 놈의 외호가 그리도 거창하냐며 눈알을 부라렸나보다. 여하튼 고승척이 대꾸했다.
“응? 내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주도록 하지. 헐헐헐!”
강비월은 고승척의 웃음소리가 끝나기 전에 말했다.
“결정이 된 것 같구나. 그렇다면 물어볼 수 있도록 해줘야겠지?”
탁, 타탁!
강비월이 심평의 아혈을 풀어주자 천소평이 대표로 다가가 재빨리 물었다.
“다 들었을 것이오.”
“……그렇다.”
“허면, 정직하게 대답해주기 바라오. 만일 속마음과 다른 대답이 나올 시에는 당신의 어머니가 기녀원 경력 40년이 되는 것이니 한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것이오.”
치욕스런 전제조건이자 심평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네, 네놈이 어디에서 감히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
“허어, 왜 그리 과민한 반응이시오. 진실대로만 말하시면 아무 탈이 없지 않소이까.”
역시 나름대로 계략에 능했던 천소평다웠다. 섣불리 반박을 못한 심평은 일그러진 얼굴을 도통 펴낼 생각을 못했고, 그것을 본 동천은 안달과 조급함이 밀려와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이고, 저놈이 생긴 건 촌놈 잡부처럼 생겼으면서 대가리는 좀 굴릴 줄 아는구나! 큰일났다! 큰일났어! 이렇게 된 이상 저 심가가 제 에미에게 불효 막심한 놈이어야 할텐데…….’
동천과는 반대로 신이 난 천소평이 주저하는 심평을 다그쳤다.
“어서 대답하시오. 여기 이명호월 어르신들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소.”
“으음!”
깊게 침음한 심평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모두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