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29화
<동천(冬天) 3부 2권 – 기로의 남자 편>
서장(序章).
회복이 불가능했다.
당사자인 나조차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때, 나의 수하가 말했다.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비록 그 완치의 시기가 헤아릴 수 없는 낮 밤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야 하는 것일지라도 불가능
만은 아니라고 그랬다.
나는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나는 잠이 들었고, 곧 부활의 시기가
가까워 옴을 피부로 느낀다.
세상은… 이제 나의 노래를 들어야 할 것이다.
추억의 그림자.
제갈일위는 따사로운 봄날을 맞아 습관적으로 섭선을 부치며 살랑이는 바람을 음미했다.
“흐음! 그래, 이런 묘수가 있었군.”
바둑묘수 3부 2권이라는 책을 펼쳐놓고 책과 바둑판 사이를 왔다갔다 살피던 그는 나중에 한번 써먹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 묘수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좀처럼 다음 부분으로 넘어갈 생각을 안 했다.
“좋아좋아. 하하! 이제 바둑상대를 찾는 일만 남았는가?”
그로서는 드물게 무려 한 식경 가량이나 몰두하다 책장을 덮어버린 제갈일위는 뒷짐을 지고 섭선을 맞잡으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때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하녀가 있었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때아닌 손님 소리에 제갈일위가 물었다.
“음? 손님?”
“예, 동철(冬鐵)이라고 하면 아신다고 합니다.”
그 소리에 제갈일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머리 좋은 그라고 할지라도 느닷없이 동철이면 알 것이라 말하자 순간적으로 주춤하게 된 것이다.
‘동철? 그게 누구였더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그가 한번도 모자라 두 번 세 번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녀는 괜히 뜨내기들의 문제로 도련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은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슬그머니 상전의 눈치를 살피었다.
“저어, 그런 사람은 모르니 물러가라고 할까요?”
“동철, 동철이라…….”
너무도 생각날 듯 말 듯 한지라 하녀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씹혔다고 생각한 하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안 그래도 왜소한 몸을 더욱 움츠렸다. 잠시 침묵이 일었고, 그 침묵은 하녀의 열 손가락을 두어 번 왕복했어도 모자랄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곤란한데. 이거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걸? 한번 얼굴이라도 봐봐야 알겠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린 제갈일위는 또 한 명의 하녀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하녀는 공손하게 인사부터 올린 후 말했다.
“도련님, 그 동철이라는 분께서…….”
“그래 알겠다. 지금 보러 가겠다고 전하거라.”
제갈일위가 말을 끊고 들어가자 그 하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필요 없다면서 가셨습니다.”
제갈세가의 근처에서 식사를 마친 동천은 자신을 말리고 있는 소연의 팔을 뿌리쳤다.
“놓아라! 그 자식이 이렇게 바깥에서 기다리게 하는데 이 몸께서 뭐가 아쉬워 그 자식을 계속 기다려 주느냐? 이 몸은 가실 터이니 너는 말리지 말거라!”
그때 궁금해진 화정이가 물었다.
“동천, 그러면서도 안 가는 이유가 뭐야?”
“뭐? 이런 씨이!”
화정이는 주인이 눈알을 부라리자 곧 궁금증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소연이 동천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주인님, 정작 중요한 볼일은 그분이 아니라 한 노사님이라면서요. 이렇게 가시면 그 분을 만나는 일은 어떻게 해요.”
“엉?”
듣고 보니 그랬다. 한 노사를 만나는 것이 꺼림직 해서 대신에 제갈일위를 만나 장 할아버지와 문정이가 왔었는지, 아니면 와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그 문제에 관해 제쳐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에 관해 대놓고 인정하기 싫었는지 이리저리 일행의 눈치를 보던 동천이 슬그머니 제갈세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하아, 세상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구나.”
상관도 없는 말을 늘어트린 후 천천히 걸어가던 동천은 무심코 살펴본 좌측의 장사치들 사이에서 어디에선가 낯이 익은 듯한 인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 보려고 해도 유난히 잘생긴 얼굴이었기에 눈에 뜨였던 것인데, 그와 눈이 마주친 상대는 흠칫 하는 듯 하더니 재빨리 제갈세가와 반대쪽 방향으로 움직였다.
“저 인간 혹시…….”
동천은 일행을 잠시 대기시켜 놓고 재빨리 상대를 쫓아갔다. 상대는 경공을 사용한 것이 아니어서 금방 따라 잡을 수 있었는데 동천이 바로 뒤까지 쫓아오자 낌새를 차렸는지 속력을 높였다. 그런다고 놓칠 동천이겠는가? 그가 상대를 따라잡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바로 뒤쫓을 수 있었다.
“저기 말이죠. 혹시 저와 일면식이 있지 않으신지?”
동천이 묻자 상대는 그와 정 반대로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 얼렁뚱땅 대답했다.
“모, 모르오. 내가 어찌 댁을 알겠소.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그는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속력을 배가했다. 아울러 그제야 경공을 사용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래도 미심쩍어 보이자 동천은 그와 보조를 맞춰가며 또다시 물었다.
“저기요. 정말 저를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전 어디에선가 본 듯 한데요?”
“어허,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상대는 여전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는데 언성을 높이는 상대의 말투에서는 난처함이 물씬 배어 나왔다. 그에 동천은 생각했다.
‘이게 왜 성질은 내고 지랄이지?’
기분이 나빠진 동천이었지만 참고 말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성질은 내고 그러슈? 그러지 말고 잠시 멈추어 서서……, 어?”
말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번쩍! 하더니 상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얼떨결에 상대를 놓친 동천은 그대로 멈추어 서서 중얼거렸다.
“히야, 저 자식 저거 진짜 빠르네?”
혀를 내두르며 돌아선 동천은 생각했다.
“근데 여기가 어디지?”
북적대는 거리를 빠져나온 제갈일위는 약간 거칠어진 숨결을 추스르고 이마에 흐르는 한줄기 땀방울을 닦아낸 뒤에야 어느 정도 안도할 수 있었다.
“후우, 하마터면 만나기 싫은 인간을 만날 뻔했구나.”
도대체 어떤 인간이 만나자고 청한 뒤 그냥 갔나 싶어 위사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살펴보러 갔었던 제갈일위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살펴본 뒤에야 뒤늦게 동철이라는 인간이 어떠한 인간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은밀히 사라지려는 찰나에 서로의 눈이 마주칠 것은 또 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잘 따돌렸다는 것이지만.
“그 녀석과 관계되는 일은 다 재수가 없으니 이 기회에 잠시 바람이나 쐬러 나가봐야겠다.”
그는 미리 살펴보았던 자신의 행동을 내심 탁월하게 생각하며 근처에 잘 아는 친구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편, 일행들을 남겨두고 왔던 탓에 졸지에 혼자만 남게 된 동천은 자신의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을 바탕으로 더더욱 이상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아 씨팔……. 이 새끼는 갈 거면 돌아가는 길이나 알려주고 갈 것이지 말야. 이 몸보고 도대체 어쩌란 거야?”
어디를 어떻게 걸어갔는지 주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껄렁껄렁한 인간들이 지나쳐가며 동천을 가끔씩 노려보았다. 한마디로 동네 뒷골목에 들어간 듯 싶다. 동천은 그네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당당히 마주 노려보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그가 시정잡배들에게 당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사람 기분 나쁘게 자꾸만 훔쳐보고 지나치네? 확, 용삼처럼 만들어버릴 까보다.”
용삼은 그 옛날 동천으로 인해 앞니가 나간 창원제일루의 점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