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3화
서로의 인사가 끝나자, 역천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역천은 자신의 장삼을 풀어헤치더니, 자신의 홀쭉해진 뱃살을 보여주며, 혈귀 옹을 재촉했다.
“자.. 서로들 인사가 끝났으면, 어서 밥 먹으러 가자구. 헤헤! 배가 고파서 더 이상은 못 참겠어.”
역천의 재촉에 혈귀옹은 따라오라는 듯이 앞서 걸어갔다. 역천은 밥 먹으러 간다는 사실에 웃으며 들어갔고, 동천은 혈귀옹의 눈치를 살피면서 따라 들어갔다.
점심을 먹는 동안 동천은 불안감 때문에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나 동천의 불안과는 달리, 며칠 전의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난 역천은 배가 부르자,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혈귀 옹에게 말을 건넸다.
“야, 넌 어떻게 생각하냐? 요즘 교주(敎主) 휘하의 녀석들의 낌새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글쎄…”
“내가 알아본 바로는 녀석들이 자신의 부하들을 알게 모르게 어딘가로 빼돌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글쎄다…”
혈귀옹의 단순한 대답에 역천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됐어, 임마!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혈귀옹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헛소리 그만하고, 너 잠깐 나 좀 보자.”
“응? 왜? 그러지 뭐…”
역천은 혈귀옹이 앞서 나가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따라 나갔다. 동천은 그런 혈귀옹의 행동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떠벌이 늙은이.. 비밀로 해준다고 했으면서, 결국에는 주둥이가 근질거려서 입을 놀리려 하는구나. 아..! 하늘님… 이 불쌍한 중생을 구원해 주소서..’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동천은 둘이서 무슨 대화(對話)를 나누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래서 살짝 엿들으려고 살금살금 다가갈려다가, 혈귀옹의 전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놈.. 버르장머리 없게..!』
‘으으.. 늙은이가 귀도 밝네.. 우으응.. 궁금해! 저 늙은이가 분명히 사부님께 중요한 걸 얘기하려는 것 같은데..?’
혼자서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방 너머에서 얘기를 나누던 역천의 고함(高喊) 소리가 터졌다.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역천은 소릴 질렀지만, 혈귀옹은 차분히 얘기하는지 혈귀옹의 목소리는 동천에게 들리지 않았다. 동천은 역천의 말에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개같은 늙은이.. 씨발놈의 늙은이.. 크.. 큰일 났다..! 어쩌지? 어쩌지?’
한순간에 쫄아버린 동천은 겁먹은 눈초리로 두리번거리더니, 사부에게 혼나는 걸 두려워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난, 저 늙은이가 왠지 입 놀릴 줄 알았다구! 저 늙은이가 그때 나를 쳐다보는 눈빛을 보았을 때, 언젠가 일낼 줄 알았다구! 흑흑.. 불쌍한 내 인생(人生)… 하늘님도 무심하시지.’
동천이 도망가고 나서, 다시 역천이 소리 질렀다.
“얌마! 어떻게 내 제자를 너하고, 같이 나눠(?)써! 너, 미쳤냐?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인데, 동천. 걔는 좀 특별한 녀석이라고!”
동천이 특별한 아이란 말에, 혈귀옹은 호오? 하는 눈빛이었다.
“특별한 아이라고?”
“헤헤. 그래.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인데..? 걔, 신체 구조가 헤헤헤! 아주아주! 특별하다고.. 우헤헤헤! 걔 신체 구조가 어떤 줄 알아? 너, 놀라지 마라. 내 제자의 신체 구조는 말이야..”
혈귀옹은 역천이 뜸 들이며 말하자, 역천이 지금 자신의 물음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애 같은 성격… 어떻게 해서, 나이 구십 줄에 다다른 놈이 저러나.. 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그런 역천과 친구로 지내는 자신도 똑같은 놈이기에 아무 말 안 했다.
“그래.. 네 제자의 신체 구조가 뭐.”
“후후후! 네가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너한테만 특별히 말해주마. 내 제자의 신체는 몸속의 장기(臟器) 위치가 뒤바뀌어 있다구! 헤헤헤! 어떠냐? 놀랍지? 그치?”
확실히 놀라웠다. 그런데, 그게 어떻단 말인가..
“근데..”
“응? 근데라니? 너, 놀랍지 않냐?”
“그래, 놀랍다. 그런데 내 말은 그게, 어떠한 능력(能力) 같은 걸 발휘하냐는 말이야. 그게 무슨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난 아이.. 그런 거냐?”
“아니. 그건 아닌데?”
혈귀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둘렀다.
“그럼, 헛소리하지 말고, 얘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자. 너, 정말 안 되냐? 나는 여태껏 제자를 키워 본 일이 없었다만, 너는 세 명이나 키워봤지 않냐?”
혈귀옹의 말을 들은 역천은 버럭! 화를 냈다.
“얌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네가 여태까지, 단 한 명도 제자를 못 키운 게 네 탓이지 내 탓이냐? 그리고, 네 아들내미한테 네 기술을 전수해주면 되지, 왜 안 가르쳐주고 나한테 보낸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네 아들놈한테나 가르쳐줘!”
혈귀옹은 역천의 격렬한 반응에 말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해서, 설득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천아.. 너, 술 마시고픈 생각 없냐?”
“응? 술(酒)? 어디 좋은 술 있냐?”
워낙, 술을 즐겨했던 역천은 술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나한테.. 삼백 년이나 묵은 청로향화주(晴露香火酒)가 있는데…”
역천은 군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청.. 청로향화주? 그것도.. 삼.. 삼백 년 묵은? 너, 그게 정말이냐? 꿀꺽! 쩝, 생각만 해도… 으으.. 어디 있냐? 응? 어디 있냐구?”
생각 외로 반응을 보이는 역천의 행동에 혈귀옹은 밖의 시녀에게 준비된 물건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잠시 후에, 한 시녀가 다소곳하게 문을 열고는 쟁반 위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주전자를 올려놓고 들어왔다.
“자… 우리, 느긋하게 대화를 해볼까?”
역천은 혈귀옹이 옆에서 말하든 말든, 오직 시녀가 들고 있는 주전자에만 관심을 가졌다. 향기만 맡아도 주전자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우.. 우선, 마시고 보자… 꾸울꺽!”
“어서 오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소연은 뭔가에 쫓기는 듯한 인상으로 들어오는 동천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물어보았다. 그러나 표정은 그렇다 쳐도,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동천이 아니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냐. 네 볼일이나 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불안감(不安感)과 초조함.. 그게 지금 동천의 모습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동천은 소연이 자꾸 물어보자, 짜증이 났다.
“이씨..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너, 안 가? 맞을래?”
“예? 아.. 그게.. 쉬세요!”
동천의 호통에 깜짝 놀란 소연은 인사를 하고, 얼른 돌아갔다.
“그나저나.. 어떡하지?”
동천은 잠이 들 때까지 사부가 자신을 부르지 않을까 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동천의 예상과는 달리, 역천이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때 역천은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동천이 먼저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삼일 동안 방 안에 죽치고 앉아 밥 먹고, 자빠져 자고, 심심하면 소연하고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던 동천은 역천의 부름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예감했다. 내심 긴장하며 역천에게 갔던 동천은 사부가 종가진과 같이 있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종가진을 앞에 두고, 뭐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가진과 담소(談笑)를 나누던 역천은 제자가 들어오자 웃으며 반겼다.
“어서 오너라.”
“예.”
그래도 긴장이 덜 풀렸는지, 딱딱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동천은 종가진이 옆에서 간단히 목례를 하자, 동천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내가 얘기를 들어보니, 신성님과는 서로 안면이 있다고 해서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생략하겠다. 그리고.. 이틀 후에 너를 위해 연회(宴會)를 벌이는 날이라는 걸 알지?”
사부의 말에 동천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예, 알고 있어요…”
역천은 제자가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해서 좀 의아해했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 원래 신성께서 그때까지 계셔 주시기로 했는데, 개인적으로 급한 일이 생기셔서, 먼저 가시게 되었다.”
역천의 말이 끝나자, 종가진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하하하. 만나자마자, 헤어져서 섭섭하군요. 언제 기회가 있다면, 이 종모에게 놀러 오시지요. 후한 대접(待接)을 해드릴 테니.. 아참?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품속을 뒤지던 종가진은 작은 수건으로 돌돌 말은 물건을 동천에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물건을 건네받은 동천은 종가진이 펴보라는 시늉에 수건을 풀어헤쳤다.
“어? 이게 웬 도라지?”
“응? 하하하! 역시, 말을 재미나게 하시는군요. 그건 몇 달 전에 캔 건데, 원래는 네 뿌리였지만, 한 뿌리는 제 개인적으로 썼기 때문에 세 뿌리만 남은 것입니다.”
종가진의 말에 동천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이게….. 저도, 산삼인 줄 알았습니다.”
놀라서 소리치던 동천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말꼬리를 바꿨다. 동천이 놀라고 있을 때, 역천이 제자 대신 종가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거.. 이렇게 귀한 것을.. 흐음.. 한 육십 년 정도 묵은 것이군요.”
“하하! 역시, 역전주님 이시군요. 제 개인적으로 쓴 게 한 백 년 정도 되는 거였는데, 희귀한 병을 고치는 데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걸로 소전주님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요..”
동천은 종가진이 자신에게 주는 게 찌꺼기 같다는 생각에 내심 불쾌했지만, 역천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황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제 제자 녀석도 무척이나 만족할 겁니다. 그렇지 않냐?”
동천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무척… 마음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