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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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시 한번 치를 떨어야만 했고, 소연은 그런 분위기를 일소시키고자 조용히 나섰다.
“누가 착하신 주인님을 욕한다고 그러세요. 그건 아닐 거구요. 그간 좀 예민해지시다 보니까 순간적으로 그렇게 느끼신 것일 뿐일 거예요.”
하인들은 되바라진 소전주에게 착하다는 말을 건네야 하는 소연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아, 불쌍한 소녀로세. 속으로는 역겨워서 토하고 싶겠지? 쯧쯧…….>
정작 소연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런 하인들의 생각에는 한치의 부동심도 없었다. 그들에겐 다행이 소연의 말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던 동천은 느끼는 바가 있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네 말이 옳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관계로 그동안 이곳에 적응을 좀 하느라 이 몸이 예민해져 있었던 게야. 하하, 그랬던 것이지!”
가볍게 웃고 난 동천은 하인들을 둘러보며 이어 말했다.
“내 그런 기념으로 시를 한 수 읊겠으니 너희들은 잘 듣길 바란다. 제목, 내 임은 어디로 갔나.”
돌아와서 바라보니 그 임은 그 임이 아니더라…….
확인하고 확인해도 그 임이 그 임은 아니더라…….
억지라고 생각해도 그 임은 그 임이 아니더라…….
틀림없다 단언해도 그 임이 그 임은 아니더라…….
돌아가서 생각해도 그 임은 그 임이 아니더라…….
“캬아! 끝내준다!”
동천은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잘 지었다고 생각했는지 절로 감탄사를 터트렸으나 하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저게 뭐냐?”
멋모르는 하인의 중얼거림에 한껏 굳은 바로 옆의 하인이 비장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살고싶다면 박수를 치게.”
와아아! 짝짝짝짝!
살고 싶었던 하인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쳐주었고 지극히 만족한 동천은 때가 되면 지들이 알아서 그만둘 것이기에 그들의 행동을 제지시키지 않았다. 덕분에 하인들은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라는 눈치들을 주고받다가 어느 정도 선에서 은근슬쩍 박수소리를 줄였다. 동천도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다음 차례로 넘어가려는데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도연이 보였다. 좋았던 기분이 단번에 잡쳐버리는 순간이었다.
“아, 씨팔.”
뒤쪽의 도연을 감지할 리 없던 하인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컥? 서, 설마 박수가 모자라서 성질을?>
그들은 반자동으로 다시금 환호를 해댔다.
와아아아! 짝짝짝짝짝!
그러나 동천은 이것들이 뭐 하는 짓인가 했다.
“뭐야, 니들. 지금 이 몸의 심기가 불편한 게 안 보여?”
“아니 그게 아니라 저희들은 그저…….”
개떡같은 동천의 비위를 맞추자니 죽어나가는 것은 힘없는 하인들뿐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소전주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주군, 늦게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 사이 당도한 도연이 인사를 올리자 동천은 중얼거렸다.
“쳇, 계속 늦어도 됐는데…….”
“예?”
동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못 들었으면 됐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설마 심심해서 바쁘신 이 몸을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도연은 가볍게 읍을 한 뒤에 말문을 열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장로님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그간 찾아뵙지 못했던 부분도 있지만 다름이 아니라 이 공자께서 장로님들께 오셨다가 주군을 한번 뵙고 싶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공자라면 동천의 사형인 공영수(共永素)였다. 그에 대하여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동천은 달갑지 않은 표정을 내비쳤다.
“그래? 헌데, 뭐 하러 장로님들은 뵈러 오셨던 거지?”
도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당사자 분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셨는지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동천은 도연의 대답보다 대답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그것도 몰라? 참나, 니가 아는 게 도대체 뭐냐?”
“죄송합니다.”
“알면 됐고, 사형께서는 언제쯤 이 몸을 보시자고 말씀하시든?”
도연은 입을 열었다.
“가능한 오늘 뵈었으면 하셨습니다.”
움직이기 귀찮았던 동천은 공영수를 씹었다.
<쳇, 그 새끼 바라는 것도 많네.>
그는 넌지시 물었다.
“헌데… 이 몸이 찾아뵈어야 하는 거냐?”
도연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눈치를 보였다.
“웃어른의 도리를 생각하신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씨이! 누가 뭐래? 이 몸은 혹시라도 사형께서 이리로 오실 까봐 노파심에 물어봤던 거야, 짜식아!”
도연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잘못했다고 하는데 그가 더 뭐라고 하겠는가. 그는 마음이 넓은 자신이 이해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알았으니까 점심 식사에 맞춰서 찾아뵙겠다고 가서 말씀을 드려.”
“예, 주군.”
동천은 유유히 걸어나가는 도연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퉤 침을 내뱉었다.
“자식이 봐주니까 바로 기어오르고 지랄이네? 에이, 내 더러워서! 해산!”
하인들을 해산시킨 뒤 기분이 상한 채로 자신의 거처에 돌아온 동천은 방문을 부수듯 걷어차는 동시에 뒤따라온 소연에게 소리쳤다.
“야! 가서 물 좀 떠와!”
소연은 가능한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예예, 좀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소연이 떠다 준 물을 벌컥벌컥 마신 동천은 비워진 컵을 나 몰라라 바닥에 내던졌다. 그가 치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짜증나! 아 씨팍! 그 병신 새끼는 왜 바쁘신 이 몸 더러 오라 마라야? 막말로, 아쉬운 사람이 손 벌리는 거지 이 몸처럼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분께서 다리 내밀게 생겼어 지금?”
그 나름대로 분통이 터진 동천은 할 말 못할 말들을 마구 지껄여댔다. 헌데, 신나게 떠들어대던 그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헛바람을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헉? 설마, 지금 이 몸이 하신 말을 누군가 엿들은 것은 아니겠지?”
급히 주위를 살피던 동천은 바닥에 떨어진 컵을 줍고 있는 소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연은 주인님께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멀뚱멀뚱 같이 쳐다보다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요?”
동천은 인상을 험악하게 썼다.
“그럼 너지 누구야! 이 방에 너말고 또 누가 있디?”
소연은 손을 내저어가며 말했다.
“듣긴 들었는데요, 아무에게도 발설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
동천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똥을 싸고 자빠졌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냐?”
소연은 주인님이 믿지 못하는 표정이자 대뜸 울먹였다.
“너무해요. 제가 언제 주인님께 해가 되는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고……. 흑!”
그녀의 울먹임에 동천은 속으로 뜨끔했다.
<얼레, 내가 좀 지나쳤나?>
마땅히 분풀이 할 곳을 찾지 못해 소연을 잠시 물고늘어졌던 것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동천으로서는 그녀를 달래주는 수밖에 없었다. 알다시피 그는 여자들이 우는 것 중에서 소연이 우는 것을 제일 보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짜식, 울기는?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그걸 가지고 울려고 하면 어떻게 해. 하하, 너는 웃어야 예쁜데 계속 그런 표정 지을 거야?”
소연은 나오려는 눈물을 쏙 집어넣었다.
“아, 아뇨. 울려고 하기는 요. 저 안 울어요.”
그녀가 행여나 싶어 눈 주위까지 닦아내자 동천이 내심 실소했다.
<그래도 여자라고 예쁜 건 찾네.>
시치미를 뚝 뗀 동천은 분위기 전환 차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으음, 점심이 되려면 조금 있어야 하니 오랜만에 독서다운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때워야겠구나. 어디 보자. 무엇을 읽어야 잘 읽었다는 소문이 날까나?”
그는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개인적으로 모아둔 도서들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중 갑자기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책을 고르는 손길을 빨리 했다.
“어라? 어라?”
연신 의아해하는 주인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궁금해진 소연이 물었다.
“왜요? 뭐가 잘못 됐어요?”
동천은 계속 무언가를 찾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너 말야. 혹시 여기에 꽂아둔 용독경(用毒經) 못 봤어?”
“헉?”
소연이 기겁하자 눈살을 찌푸린 동천이 의문을 표시했다.
“헉 이라고? 웬 헉?”
정신을 차린 소연은 급히 변명했다.
“그, 그게요. 아? 그 귀중한 것이 없어졌으니 큰일이기에 놀라했던 거예요! 네, 맞아요!”
동천은 빤히 보이는 소연의 허술함에 의심을 눈길을 보내며 그녀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너 말야. 뭔가 숨기는 거 있지. 그지.”
소연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에 절대로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수, 숨기다니요! 만일 그렇다면 제가 천벌을 받아요!”
“정말이야?”
“예에.”
“진짜로?”
“예에.”
“개 뻥치는 거 아니지?”
“그렇다니까요.”
“흐음……!”
동천은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자 계속적인 의심의 눈길로 소연을 노려보았다. 당연히 소연으로서는 죽어날 맛이었고 말이다.
<히잉, 어떻게 해.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씀을 드릴 수도 없고…….>
그녀는 죽어도 자신이 가지고 갔다가 무용지물로 만들었다고 이실직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랬다간 주인님의 뭐 같은 성격에 약왕전에서 쫓겨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위를 하자면 용독경을 소지했던 덕분에 죽음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지만 동천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냥 죽고 말지 뭐 하러 그걸 가져갔다가 쓰레기로 만들었냐고 방방 뛸 일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말할 수 없음이고.
“진짜로 너 아니야?”
이제와 또 물어본다고 소연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예, 진짜로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끄응, 그렇다면 누가 감히 내 방에서 그것만 쏙! 빼갔다는 말이지? 아무리 이 몸이 몇 년간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지만 내 물건을 건드릴 만큼 간 큰 아랫것들은 없을 텐데? 있다면 오직…….”
말끝을 흐리는 동천의 눈길은 여전히 소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소연은 울먹이며 손을 내저었다.
“저, 전 아니라니까요.”
“누가 뭐래?”
똑똑!
그때 극적으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획 돌린 동천은 감지력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별 반응 없이 소리쳤다.
“이씨, 뭐야!”
밖에서 문을 두드린 시녀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야, 야, 약왕전주님께서… 찾으, 시임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숨넘어가는 소리이자 동천이 손수 문을 열고 상대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누구길래 숨이 넘어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바라본 상대는 앳된 용모의 소녀였다.
“너 뭐야?”
“헉? 소, 소녀는! 소녀는!”
극도로 긴장한 시녀는 숨이 막히는지 심하게 헐떡거렸고, 그런 그녀와 마주한 동천은 화를 내기보단 다소 어이없어 했다.
<얘 뭘까…….>
동천으로서는 뭐 이런 게 전달을 한답시고 찾아왔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용독경 문제만 해도 골치가 아팠기에 길게 끌고 갈 것 없이 바로 끝맺음을 보려 했다.
“아아, 됐으니까 헐떡거리는 건 니 집에 가서나 계속 하고, 사부님께서 왜 이 몸을 찾으시는지 그것만 말해. 그럼 후딱 가게 해줄 테니까.”
후딱 가게 해준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용기를 얻은 시녀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예에… 소전주님께서 돌아오신 기념으로. 여, 여러 윗분들을 모시고 자리를 마련한다고 하십니다. 그럼 소녀는 이만…….”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물었다.
“그럼 이 몸은 언제 사부님을 찾아뵈어야 하는 거지?”
“아? 전주님께서는 오늘 오후쯤에 오셨으면… 하셨습니다. 그, 그럼 소녀는 이만…….”
동천은 가겠다는 사람 붙잡을 생각이 없었다.
“가던지 말던지.”
시녀는 감격해했다.
“가, 감사합니다, 소전주님! 감사합니다! 그, 그럼 소녀는 이만…….”
기뻐하며 사라지는 시녀의 뒷모습을 잠시동안 바라본 동천은 자못 심각해진 표정으로 소연에게 물었다.
“야, 내가 그렇게 무섭냐?”
소연은 어떻게 대답할까 하다가 일단 부정해주었다.
“아니요, 그렇지는 않고요. 조금 엄하시기는(싸가지 없기는) 하죠.”
동천은 소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조금 엄하다고?”
소연은 마지못해 대답해주었다.
“네에, 쪼∼오금이요.”
긍정적인 대답이자 동천은 환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지? 헌데 방금 왔던 그 계집애는 왜 그따위라니?”
소연은 무난하게 대답해주었다.
“성격이 조금 특이한가 보죠.”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소연의 볼을 살짝 잡고 흔들어주었다.
“짜식! 말하는 것도 귀엽게 하네? 역시 너는 내 보물단지라니까? 하하!”
방금 전까지 소연을 의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잘 된 일이고 또한 한숨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동천은 내심 안도하는 소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야. 용독경은 대체 어느 계집이 건드린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