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87화
환영혈(幻影血)
“살펴 가십시오.”
암한문 앞까지 배웅 나온 동천이 예의를 갖추고 말하자 냉현으로서도 답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네. 앞으로 자네의 성취가 나날이 빛나길 바라네.”
동천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대답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의 인사를 끝으로 마차에 오른 냉현은 바로 출발했고 동천은 떠나가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 가∼. 다신 오지마∼.”
키득거리며 계속 손을 흔들어주던 그는 주위에 몇몇 하인들이 눈치를 보며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곤 언제 키득거렸냐는 듯 갑자기 두 눈을 부라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니들… 들었어?”
자신이 소교주가 가는 뒤에서 잘 가 어쩌구 했던 것을 들었냐는 뜻이다. 하인들은 당연히 들었지만 살고 싶었기에 기겁을 하며 두 손 두 발을 다 흔들어댔다.
“어이구, 저희 같은 천한 것들이 어찌 소전주님의 말씀을 엿듣겠습니까요. 안 그런가, 자네?”
옆에 나란히 서있던 다른 하인은 손을 귀에 대고 말했다.
“뭐라고? 요새 내가 가는귀가 먹었는지 잘 안 들리네.”
‘이런 미친놈! 그런 말에 누가 속는다고!’
친구에게 보조를 부탁한 하인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뻔한 거짓말이자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그, 그래?”
이는 동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하는 짓이 하도 갸륵하여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때리기도 귀찮아서 넘어간 거였다.
“음, 너희들이 못 들었다니 심히 안타깝구나. 내 소교주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했거늘.”
눈치 좋은 하인은 덮어준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허리를 숙여 조아렸다.
“소인들이 미천하여 그 말씀을 듣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입니다요. 네네.”
흡족한 동천은 계속 폼을 잡고 말했다.
“허어!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이렇게 유능한 하인이 암한문에 있으니 본교의 미래는 밝도다. 하하하!”
그는 하인들이 개소리 한다고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껄껄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오자 화정이와 함께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소연이 반기며 물었다.
“그 분은 돌아가셨어요? 무슨 일로 오셨대요?”
못들을 걸 들었는지 동천의 눈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분?”
듣고 보니 약간 어감이 이상하자 소연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정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소교주님이요.”
급히 호칭을 바꾸긴 했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그 분이라는 말이 쉽사리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동천은 심사가 뒤틀렸는지 말 없이 소연을 노려보다가 의자에 주저앉으며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네가 앞날을 내다보는 재주가 있기는 하구나.”
소연은 무슨 말인지 몰라 물어보았다.
“앞날을 내다보다뇨?”
동천은 표정을 풀지 않고 말했다.
“너 아까 그 소교주가 음흉스러운 눈빛으로 네 몸을 훑어보는 거 봤지?”
감히 소교주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던 소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라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듣게 되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그, 그랬어요?”
동천은 소연이 징그러운 벌레가 몸에 닿은 듯한 몸짓을 보이자 뒤틀렸던 심사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아무나 그 분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관계로 확실한 교육을 시켜놓기로 작정했다.
“그래, 그랬어.”
그는 간단하게 대답해준 뒤 침묵했고 은근히 불안해진 소연은 참지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으…래서요?”
동천은 굳어있는 표정 그대로 화정을 내보낸 다음 슬쩍 소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소교주가 너를 무척이나 탐을 냈던지 자신에게 넘겨주면 어떻겠냐고 묻더구나.”
“아!”
대번에 창백해진 소연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다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것을 본 동천은 살색이 순간적으로 흰색으로 변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는 박수를 쳐주려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손을 내렸다.
‘버릇을 고쳐주는 건 좋은데 너무 심한 주제로 나갔나? 아냐, 여기에서 어물쩍 넘어가면 나중에 아무 새끼나 다 그 분이라고 주절댈 것이 틀림없어. 까짓 꺼 쓰러지면 눕혀 재우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한 동천은 마음 단단히 먹고 이어 말했다.
“물론 나는 내가 아끼는 아이라서 다른 아이는 어떻겠냐고 말을 했지만……. 큭!”
“으으음!”
마지막에 “큭!” 이라는 부분이 결정적이었던지 부들부들 떨던 소연은 눈을 허옇게 까뒤집더니 그대로 실신해버렸다. 놀란 동천은 뒤로 넘어가는 소연을 재빨리 껴안았다.
“어어? 야! 정신차려!”
철썩철썩!
두어대 뺨을 갈겼어도 소연은 깨어날 줄을 몰랐다. 그냥 기절한 거였으면 그런가보다 하는데, 눈까지 까뒤집고 기절하자 동천으로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급해진 그는 재빨리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힌 후 그녀의 몸에 진기를 불어 넣어줬고 귀의흡수신공을 그녀의 전신에 골고루 퍼트리고 흡수하기를 반복했다. 헌데, 한번씩 퍼트렸다가 흡수할 때마다 어쩐지 자신의 내공이 불어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가! 이에 동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레? 혹시나 역심무극결의 진기가 그새 귀의흡수신공에 조금 흡수되었나 해서 살짝 운용해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네? 그럼, 혹시?’
집히는 바가 있어서 새로이 생성된 순수한 귀의흡수신공을 운용해본 동천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순수한 귀의흡수신공이 절반 가량 사라진 것이다. 놀란 그는 소연에게서 손을 뗀 뒤에 만독혼원공이 섞인 귀의흡수신공을 운용했고 이어 순수한 귀의흡수신공이 절반 가량 사라진 원인을 밝혀낼 수 있었다.
“뭐야. 변종 귀의흡수신공이 흡수한 거잖아!”
그는 몰랐지만 소연의 몸에 진기를 흘려보낼 때 기본 성질이 같자 아주 미세하게 같이 딸려 들어갔다가 회수할 때 흡수가 되어 갈무리된 것이었다.
“으아, 이거 진짜 열 받네? 가까스로 역심무극결을 귀의흡수신공과 맞먹게 따라 붙여놨는데 다시 격차가 벌어지게 됐잖아? 아, 씨팔. 아, 개팔. 아, 똥팔.”
말이 맞먹게이지. 내공 40년 정도면 반 갑자 이상이니 헛소리에 가까웠다. 반 갑자가 돈만 주면 사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고 끊임없는 인내와 고통을 감내하고 나서야만 얻을 수 있는 심법수련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아쉽긴 했으나 어차피 남은 절반의 순수 귀의흡수신공을 역심무극결 쪽으로 흡수해버리면 원점이나 다름없는 것이어서 그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흑흑흑!”
그 사이 깨어났는지 소연이 울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여자 우는 것을 제일 싫어했던 동천은(특히 소연) 화가 나서 교육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기왕지사 여기까지 온 거 끝은 맺어야했기에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깨어났느냐? 중요한 말이 있으니 울음을 멈추거라.”
그러나 소연은 더욱 크게 울었다.
“흑흑, 엉엉엉!”
‘아, 진짜. 얘는 꼭 울어도 콧물을 흘리네?’
더러운 건 직접 닦아주는 것도 아니니 그렇다 쳐도 귀가 따가워진 동천은 한 대 쥐어박으려다 겨우 참아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짜증나는 미소를 띄운 뒤 흐르는 그녀의 눈물까지 닦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울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소연은 평소 자신을 막 대해주던 주인님이 죽기보다 싫은 상황에서 부드럽게 대해주자 더욱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어찌 계속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엉엉, 그렇지만. 그렇지만……. 엉엉엉!”
동천은 너무도 처량하게 우는 소연의 모습에 순간 너무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의 끝마무리가 되어 가는 상황이어서 그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허, 네가 계속 이리도 운다면 진짜로 너를 데려가라고 해야겠구나.”
“흑흑흑! 이미 가게 되었는데 진짜는 무슨……. 네에?”
거짓말처럼 뚝 그친 그녀의 울음소리에 찰나간 방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동천은 그제야 징징거리는 소리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말이다.
“네에는 개뿔. 사람이 말야, 무슨 말씀을 하시면 끝까지 듣는 법 좀 배워봐.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괜히 앞서가는 것만 배워 가지고 실신이나 하고 말야. 어디 그래서야 사람 구실 제대로나 하겠어?”
소연은 주인님 특유의 중요한 말 조금, 헛소리 대부분의 말을 들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
“그, 그럼 저는 여기에 계속 머물러도 된다는 말씀이세요?”
동천은 매정하리 만치 바로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당연히 그건 아니지. 그 색마자식이 너처럼 예쁜 애를 쉽게 포기할 성 싶냐?”
소연은 색마라는 소리에 다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원래는 기절하는 거였는데 주인님이 자신을 예쁘다고 인정해주자 찰나간 그걸 생각하느라 기절할 순간을 잃어버린 것일 뿐이었다.
“흑흑, 주인님……. 전 가기 싫어요. 제발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흑흑흑!”
그녀는 다시금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렸고, 이만하면 그 동안 슬슬 기어오르던 기세를 완전히 꺾었으리라 생각한 동천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음, 이번 일은 실로 불가항력의 일이다. 왜냐하면 상대는 본교의 최고위층인 소교주이기 때문이다. 후우, 그가 너를 찍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이라고 하는 수밖에 없구나……. 허나!”
강한 여운을 남기고 잠시 침묵한 동천은 훌쩍이는 소연에게 강한 눈빛을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내 어찌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너를 다른 자에게 보낼 수 있겠느냐! 이것은 실로 인생 최대의 고비이긴 하지만 내 당장에 소교주를 찾아가 네 문제를 담판 짓고 오겠느니라!”
“……!”
뜻밖의 대답에 한순간 정신이 멍하게 된 소연은 이내 정신을 차린 후 감격한 얼굴로 동천의 품에 뛰어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흑흑!”
미소지으며 그녀의 등을 다독여준 동천은 내심 자신의 옷에 소연의 콧물이 묻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다행히도 그러한 일은 없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소연의 성숙한 몸을 꼬옥 한 번 안아준 뒤에 떼어놓으며 말했다.
“지금 바로 찾아가 해결을 보고 올 터이니 너는 그동안 심신을 안정시킬 겸 가볍게 몸을 씻던가 심법을 운용하던가 마음대로 하거라. 그리고 천박한 여자처럼 아무에게나 그 분이라고 하지말고.”
원래 그 분이라고 하는 호칭은 천박함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지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어쨌든 이제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소연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훌쩍. 네, 주인님. 헤헤.”
동천은 언제 실신하고 엉엉거렸냐는 듯 환하게 웃음 짓는 소연의 대답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형식적이긴 해도 담판을 지으러 간다고 했으니 나가는 봐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약간(?) 불안하긴 해도 주인님의 굳은 의지를 접했던 소연은 심하게 우느라 말이 아닌 얼굴을 단장하기 위해 조그마한 동경을 앞에 갖다놓았다.
“주인님이 저렇게 박력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던 만큼 잘해내 주실 거야. 그래, 믿자. 내가 주인님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 호호, 주인님이 앞으로 아무에게나 그 분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하고 또 떨리는 마음을 안정시키라고 가벼운 수욕(水浴)을 명하셨으니 그렇게 해야겠다.”
마침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 몸에 진땀이 흐르고 고단하기까지 했으므로 그녀의 목욕은 자연스러웠다. 욕실에 들어가 찬물을 끼얹으며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자신의 몸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아, 나도 이제 성숙한 티가 나는구나. 여자가 사랑을 받으려면 얼굴보다는 몸매가 예뻐야 한다고 들었는데. 에이, 이상한 생각하니까 나 혼자라도 쑥스럽네? 어서 주인님의 시키신 대로 씻고 나가야……, 아! 호, 혹시, 몸을 씻고 기다리라는 것은 주인님께서 소교주님과 무사히 담판을 짓고 돌아오신 다음에 수청을 들라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얼굴을 붉힌 그녀는 달아오른 볼을 양손으로 감싸안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이, 난 몰라! 만일 사실이면 나 어떻게 해!”
이런 그녀의 상상은 멈출 줄을 몰랐지만 계속 들어봤자 귀만 간지러울 뿐이므로 이 정도쯤에서 생략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