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58화


소연이 늦게 따라오자 동천은 계집애가 자라탕을 끓여 먹었다고 지랄 거리며 소연의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달렸다. 하지만 아까 달려서 접견실로 온 것도 있고 해서 연속적으로 두 번씩이나 달리는 것은 소연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다.

“헉헉.. 주인.. 니임…! 힘들어서.. 더 이상은.. 헉헉! 아앗? 아야!”

꽈-당..!

결국은 소연이 넘어지자 동천은 할 수 없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소연에게 다가간 동천은 넘어진 소연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자기의 기준으로 생각할 때, 요 정도로 헥헥.. 거리다가 넘어졌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야.. 넘어졌냐?”

당연한 걸 가지고 물어보는 동천이었다. 다가오는 동천의 표정에서 지금 자신의 주인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을 한 소연은 다급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따끔! 하는 다리의 통증에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야… 앗? 힝.. 까졌네…?”

치마를 올려 무릎을 살펴본 소연은 자신의 무릎이 까져 피가 흐르는 게 보이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에 곱디고운 자신의 살결에 상처가 남을 걸 생각하니 속이 상했던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동천은 남의 고통은 자신의 행복이라 여기며 좋아했다.

“히히! 뭐가 까졌어? 네 거시기가 까진 거야?”

그 말에 소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그런 말을 하는 동천의 저의(底意)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예에? 무.. 무슨…? 거기서 왜.. 제… 그런… 저기.. 저는.. 그러니까…..”

자기 또래의 남자애들과 하던 식으로 말장난을 한 동천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는 소연의 반응에 아차 했다. 나름대로 조숙한(?) 소연에게 성(性)에 관련된 말은 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에… 그게.. 야, 장난이야. 그냥, 한 말이라고.. 하. 하. 하… 그러니까.. 에… 그만 가자.”

이럴 때는 되도록 말을 간단하게 끝맺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소연에게 그런 말을 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앞서 걸어갔다.

“예.. 그러.. 아..!!”

동천의 말에 석연치 않은 말을 애써 지우며 일어서려던 소연은 다리에 힘을 주자 심한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에는 다시 주저앉고야 말았다. 소연이 나직이 신음 소릴 내며 다시 주저앉자, 투덜대며 앞서 걸어가던 동천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어? 왜 그래?”

소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애써 괜찮다는 표정으로 다시 일어서려 했다.

“괘.. 아야..!”

“야, 너 다리가 그렇게 아프냐? 어디 봐봐!”

급히 되돌아온 동천은 앉아있는 소연의 치마를 들추었다.

“앗? 이러.. 안 돼요!”

동천이 마구잡이로 자신의 치마를 들추자 소연은 기겁을 하면서 동천을 밀쳐냈다. 당연히 중심을 못 잡은 동천은 뒤로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와앗! 이 계집애가…”

“괘..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었어요.”

도와주려다 되레 떠밀려버린 동천이 욱! 하는 마음에 윽박지르려고 했지만, 눈물이 그렁.. 거리는 소연의 눈을 보자 치솟아 올랐던 화가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내심 그러려니… 하고 참았다.

“에이! 씨발…”

소연은 또 엄마를 찾았다.

“흑흑흑…. 엄마…”

“쳇…”

‘계집애. 엄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래도 자기는 얼마간이라도 엄마하고 같이 살아봤으면서.. 하여튼, 생각 없는 계집애들이란………’

울고 있는 소연을 바라보던 동천은 이 분위기에선 소연에게 뭐라고 하는 것보다, 그냥 울게 해주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말없이 뒷머리만 박박! 긁적였다.

“흑….. 훌쩍!”

잠시 마주 앉아있던 동천은 소연이 어느 정도 운 것 같자 소연의 반대쪽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야, 업혀.”

“예?”

울고 있던 소연이 동천의 행동에 어리둥절해하자, 동천은 더 크게 소리쳤다.

“안 들려? 아프다며! 업혀! 안 업혀?”

“제가 왜.. 업혀요….. .”

다분히 꺼리는 듯한 말에 짜증이 난 동천은 자꾸만 질질 끄는 소연에게 작은 위협을 가했다.

“너, 내가 셋 셀 때 동안 안 업히면, 네 치마를 여기서 화악~! 벗겨버린다! 장난 아니야! 하나.. 두울.. 세…”

그 말에 기겁을 한 소연은 동천의 등에 얼른 업혔다.

“하.. 할게요. 업히면 되잖아요!”

역시, 소연에게는 이런 위협이 효과적이라는 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좋은 걸 알아낸 동천은 나중에 자주 종종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좀, 유치한 위협이었지만 어찌 됐건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는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소연을 업은 동천은 끄응차.. 하고 나지막한 기합음을 내며 일어섰다. 동천의 생각과는 반대로 엄청난 위협에 다급히 업혀버린 소연은 부끄러운 마음에 자신보다 약간 작은 동천의 등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다고 자신의 붉혀진 얼굴이 가려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알지만, 그렇게라도 안 하면 이 쪽팔림을 무마시킬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상황을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기어가는 듯한 소연의 말에 동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됐어..”

동천이 소연을 업고 어느 정도 걸어갈 때, 업혀있던 소연이 조심스레 물어봤다.

“저.. 그런데요.”

“뭐야?”

“무.. 무겁죠…?”

소연의 말에 동천은 피식 웃었다. 계집애가 별걸 다 가지고 물어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천은 자신이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된 것을 하늘님에게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흥! 알면서 물어보는 저의가 뭐냐?”

거칠 것 없는 동천의 말에 소연의 얼굴은 더욱더 새빨개졌다. 소연은 적어도 동천이 ‘괜찮아..’ 라든지, ‘아니, 너무 가벼워서 업고 있다는 느낌도 안 난다야..’ 라든지, ‘어? 너 언제 거기 있었냐?’ 정도의 말이 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동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소연이었다. 하여튼 쪽팔려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가운데 소연은 겨우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말했다.

“그.. 그냥요…”

“잔말 말고, 약이나 바르러 가자.”

“예에….”

그 말을 끝으로 소연은 입을 다물었다. 약전(藥傳)에서 약초를 다룬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동천은 업혀있는 소연의 안내를 받아서 약전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간 동천이 소연을 내려주고 자초지정을 말해주자, 한 의원이 소연의 다리에 여러 약초를 배합한 연고를 발라주고 나서 얇은 천을 감아주었다.

“자.. 이제 됐습니다. 잠깐의 충격으로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것뿐이니까 걷는 것은 지금이라도 가능할 겁니다. 아? 그리고.. 상처는 안 남을 겁니다.”

그 말에 소연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만약에 상처가 남게 된다면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소연이 무슨 생각을 하든, 이제는 혼자 걸어도 된다는 말에 동천은 얼른 일어섰다.

“그래? 뭐.. 다 나았다니까.. 소연아, 이만 가자.”

“예.”

동천의 말에 소연이 기뻐하며 따라 일어서자 같이 앉아있던 의원도 따라 일어서서 배웅을 해줬다.

“안녕히 가십시오. 소전주님.”

“응. 그래.”

“의원님.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소연의 인사에 문 앞까지 마중 나온 의원은 곧바로 회답해주었다.

“그래.. 잘 가거라.”

자신의 집에 돌아가면 선물들이 있을 거란 생각에 신이 난 동천은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생각 같아서는 혼자서 쌩.. 하니 먼저 달려가고 싶었지만 소연의 다리가 다친 게 자기 탓도 있고 해서 평소의 동천답지 않게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우르르-릉… 우르릉…..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낀 게 머지않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에이씨.. 이렇게 뜻깊은 날에 하늘이 뭐 저따위야? 으이그..”

남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 짜증을 내던 동천은 소연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러니까, 내 방하고 네 방에 줄을 연결해서 내가 부르고 싶을 때, 줄만 당기면 되는 거라고?”

빨리 가고 싶어하는 동천을 따라잡느라고 힘이 들었던 소연은 다리에 은은한 통증이 퍼지는 가운데서도 억지로 웃으면서 겨우겨우 따라잡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보여주면서 소연이 따라올 수 있게 배려를 해준 동천의 행동은 별 효험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예에.. 휴… 그게요. 안에 구멍이 뚫린 긴 나무 대롱을 이어서요. 그 안에다 밧줄을 넣으면, 저를 부를 때 아주 간편하실 거예요.”

동천은 좀 의외라는 듯이 잠깐 멈춰 서서 소연을 쳐다봤다. 그 덕분에 소연은 나직이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으~래? 흐음… 너, 그거 어디서 알았냐? 누가 가르쳐주대?”

소연은 동천의 질문에 좀 멋쩍게 웃었다.

“호호. 사실은 오늘 수련이한테 가보니까, 사 아가씨가 수련을 부를 때 그런 방법으로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알 수 있었던 거예요.”

사정화에 대한 말이 나오자 동천의 눈이 잠깐 날카로워졌다.

“그년이?”

“예? 그년…이라니요?”

소연의 물음에 사정화를 욕한 동천은 속으로 뜨끔! 했지만 자신이 콕, 집어서 사정화를 욕한 티가 안 났기 때문에 별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히 말했다.

“응? 아냐.. 수련보고 한 말이었어.”

“어머? 주인님. 그런 표현은 못써요. 그년이라뇨. 너무 하셨어요.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주인님의 친구잖아요.”

소연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동천은 나직이 콧방귀를 뀌었다. 사부나 다른 높은 분이 타이르는 말이 아닌 소연이 타이르는 말은 별 감응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높은 분이 타일러도 마찬가지였을 게 분명했지만…

“흥.. 말 같은 소릴 해라. 어떻게 남자하고 여자하고 친구 사이가 되냐? 그건 말이야. 턱도 없는 소리야..”

평소에 강표두와 친하게 지냈던 동천은 강 아저씨에게 들었던 말을 여기에서 써먹게 된 것에 대해 역시, 어른하고 놀면 알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소연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야.. 왜 그래? 빨리 안 와?”

선물을 보러 가는 신나는 순간에 갑자기 소연이 멈춰 서자 신경질이 난 동천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지만, 지금 소연의 귓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녀 사이에는 친구가 성립(成立)이 안 된다고…? 그렇다면… 설마? 주인님께서 수련이를?? 어머? 맙소사…!!’

상상은 자유라지만….

“야! 안 와?”

소연은 갑작스레 들려온 고함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예? 예… 갈게요. 가요..”

소연은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이제 소연이 할 일이라곤, 수련에게 달려가서 쫑알거리는 일밖에 없었다. 어저께 자신이 주인님을 좋아한다고 의심했던 수련에게 반격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호호호! 계집애.. 나중에 보자. 호호호-호!!!’

나중에 일어날 생각을 하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