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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96화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

“뭘 그리 긴장하는가. 그 정도의 공로를 세웠다면 응당 전리품 정도는 챙길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거늘. 하하, 나머지 것들은 보나마나 영살과 혈살의 것이겠군.”

“네에……, 에?”

무사히 넘어간 것에 내심 안도하던 동천은 깜짝 놀라 은근슬쩍 바닥을 살펴보았다. 바닥에는 두 권의 책자가 엇비슷하게 쌓여있었다. 동천은 무의식적으로 가슴 아래쪽을 더듬어보았다.

‘헉? 이, 있는데? 그럼 저건 뭐지?’

무슨 소리냐 하면, 은형포단에서 총 세 권의 책이 떨어졌는데 품속의 살예총요 후반부를 감안했을 때 정체불명의 책 한 권이 어느 순간 불어나 있었다는 이야기다. 분명히 그는 지니고 있던 작자 미상의 『누가누가 잘 사나』를 미끼로 내던져서 회수하지 않았고, 살예총요의 후반부는 은형포단과 같이 집어넣지 않았는데 전혀 모르는 책 한 권이 제일 마지막에 깔려 있으니 은근히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냉현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동천은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럴 리가요. 실은 이것들을 숨긴 죄를 물으실 줄 알았는데 너무도 관대하게 처분해주셔서 잠시 놀랐습니다.”

냉현은 재미있었던지 크게 웃었다.

“하하! 누가 이따위 저급 무공비급을 상관한다고 죄를 내린단 말인가. 자아, 주워줄 터이니 받아가게.”

‘이런 씨…….’

하마터면 대놓고 욕을 할 뻔한 동천은 자신의 가벼움을 책망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어찌 소교주님께서 허리를 숙이시려 하십니까. 제가 줍겠습니다.”

소리 없이 웃음 진 냉현은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 들고있던 책자를 동천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동천은 잽싸게 정체불명의 책자를 자신이 보이는 쪽으로 끌어당기며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제야 안도한 그는 은형포단을 냉현에게 건네주었고 약간 이색적인 눈빛으로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살펴보던 냉현은 동천이 검으로 찔렀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폭으로 날카롭게 갈라져 있는 부분이 발견되자 곧 흥미를 잃고 동천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손상된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흐음! 그건 그렇고, 몇 달 후면 나의 내자가 될 사람의 복수를 해주어서 기쁘기 그지없네. 무언가 포상을 해주었으면 하는데……, 자네는 무엇을 원하는가?”

‘씹쌔야, 니 애비 자리를 원한다. 들어줄겨?’

배알이 틀려도 단단히 뒤틀린 동천은 아무래도 자신이 욕심을 낸 무공비급을 냉현이 개나 소나 접할 수 있는 무공으로 취급해서인지 상당히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만일 기회만 주어진다면 몇날 며칠을 새워가며 냉현의 욕을 해도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알다시피 가능한 일이 아닌 고로, 그는 잠시 머리를 굴린 후에 입을 열었다.

“포상까지는 바라지 않았으나 허락해주신다면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냉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대답해주었다.

“그런가? 말해보게. 가능한 어렵더라도 들어주는 방향으로 해주겠네.”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말했다.

“은중각이란 단체를 소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냉현은 눈빛을 가늘게 만들었다. 그는 느긋하게 마시려던 차를 내려놓고 물었다.

“좀더 소상히 말해보게.”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동천은 남몰래 침을 꿀꺽 삼킨 뒤 이야기했다.

“예, 사실 은중각의 행동이 괘씸하기는 하나 잘만 구슬리면 본교의 사냥개 노릇은 충분히 해줄 수 있는 곳이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제가 죽어 가는 환살의 입을 통해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들은 은중각에서 은퇴한 것이 아니라 쫓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번 일은 은중각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의외였던지 냉현이 살짝 입 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호오, 은퇴가 아니라 쫓겨난 것이라고? 그렇다면 은중각으로서는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잡아떼면 그만일 텐데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수긍해준 동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이어 말했다.

“환영혈과의 무관함이 사실일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사실이던 아니던 대외적으로는 그들이 은퇴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제와 급해지니 발뺌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그것도 본교를 상대로 말입니다. 여하튼, 그것을 미끼로 은중각을 압박한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본교에 흡수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소신에게 맡겨주시길 간청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흐음!”

구미가 당기는지 냉현이 머리를 굴려가며 손익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암흑마교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손 안대고 코를 푼 격이었지만 한열마가(寒熱魔家)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라마가(修羅魔家)의 허리춤에 날카로운 비도(飛刀) 하나를 꼽아준 꼴이 되는 것이니 갈등이 생겼던 것이다.

‘분명 흡수를 해도 제 놈 쪽으로 흡수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한다면 저놈이 온갖 곳에 은밀히 소문을 내고 다닐 것이 뻔한데…….’

소문이라는 것을 두려워할 냉현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거칠 것 없이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다만 그가 싫어하는 소문이 한가지 있다면 바로 속이 좁다는 소문이었다. 장차 암흑마교를 자신의 것으로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는 그가 향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있어서 그런 소문을 반기겠는가? 그렇게 그는 현재가 아닌 먼 미래의 손익까지 따지고 있는 것이다.

“좋네. 그 대신 자네가 그곳에서 험한 꼴을 당한다 해도 후회는 하지 말게나. 만일, 강 소저의 청부를 맡았던 것이 사실이라면 생사를 걸고 벌인 일이었을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천은 겉으로 담담하게 대처했다.

“감사합니다. 신명을 바쳐서 좋은 성과를 얻어오겠습니다.”

이제 볼일을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냉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네의 공이 크니 실패한다 해도 추궁은 없을 걸세. 실패하면 어차피 계획대로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동천은 밝은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또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부담이 한결 가시는 듯합니다.”

“하하, 어쨌든 좋은 성과가 있기를 나 또한 진심으로 바라네. 하하하!”

크게 웃고 난 냉현은 자리를 벗어났다.

“음, 이것 좀 보게.”

“아! 상당하군요. 깨끗이 갈라졌습니다.”

“그렇지? 보통 솜씨가 아닐세.”

“네, 그렇군요.”

같은 시각, 소운정 근처의 오래된 건물에서는 세구의 시체들을 나란히 놓고 여러 사람들이 면밀하게 관찰을 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임시로 환영혈의 시체보관소를 만들어 놓은 1단주 연평은 시체감식반을 시켜 그들의 사인(死因)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지 상처들을 주의 깊게 들춰내며 살펴보는 그들의 모습에는 단 하나의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진지함이 엿보였다. 이제와 다 잡아들인 놈들의 사인을 알아본다 한들 별다를 것이 있겠느냐 만은, 연평으로서는 자신이 지키고 있다가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달랑 소교주를 찾아가서 ‘다 처리했습니다.’ 라고 밋밋하게 보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후우, 나름대로 신경은 썼음을 알아주시면 좋겠는데 그분의 성격상 기대하기가 어려우니…….’

그가 남모를 괴로움에 한숨을 푹푹 내쉬고있는데 그의 뒤에서 천성적으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특이할 만한 것이라도 나왔습니까?”

흠칫한 연평은 뒤돌아 상대를 확인한 후에야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격식을 갖춘 후 상대에게 말했다.

“때맞춰 잘 오셨습니다. 이제 곧 각각의 사인이 드러날 것이니 마라혈대주께서는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잔심마도 양위는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던지 미소하며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연평은 본인 자신이 더 이상 기다려줄 여유가 없음에 감식반을 다그치듯 물었다.

“평소보다 늦어 보이는구나. 결과는 어떻게 나왔느냐.”

그의 물음에 서너 명의 감식반원들이 손을 놓았고, 그들을 대표하여 총책임자로 보이는 사십대의 깡마른 자가 보고를 올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먼저 결과보고를 시작하자면 이자는 영살입니다. 사인은 죽기 전에 오장육부가 뒤흔들린 상태에서 1단주님께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놀랄만한 사실은 흔들린 오장육부가 여러 번의 충격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단 한 수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을 빛낸 연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영살보다 두 배에서 세 배는 강한 인물이 충격을 주었다는 소리이군. 수법은?”

감식반원은 재빨리 말했다.

“특별한 격식을 갖추고 충격을 준 것은 아닌 듯 보입니다. 격중(擊中)된 아랫배를 살펴보니 투박함이 엿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만독문의 소문주님이나 숭 당주님은 아닌 듯 보이고 그 주변에 관련된 누구인가로 추정되옵니다.”

사건이 터지고 살수에 실패한 환영혈들이 도주를 할 때서야 비로소 낌새를 차렸던 연평은 뒤늦게 도착한 터라 종결된 상황만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아직 조사가 미흡했던 그는 누가 영살을 궁지로 몰아넣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딱히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거슬리기도 했지만 좀더 상세히 알아보면 될 것이라 여기고 다음으로 넘어가게 했다. 감식반원은 다음으로 혈살을 가리켰다.

“이자는 당시의 현장상황을 소상히 들어본 뒤 그것을 토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단 한군데를 빼고는 암흑연환낙뢰진(暗黑連環落雷陣)에 의해 피해를 입은 상처들이 맞습니다. 그리고 다른 자에 의하여 관통된 곳이 방금 언급한 그곳인데 바로 심장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 또한 기교는 없으나 우연인지는 몰라도 놀랄 만한 정확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상대에게는 다행히도 고통을 느낄 사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인은 심장 관통입니다.”

약왕전은 대대로 무기를 사용한 적이 드문 만큼 연평은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것을 다음 순서로 넘어가라는 지시로 받아들인 감식반원은 마지막인 환살의 옆에 섰다.

“이자의 사인 문제를 놓고 저희들이 상당히 고심하였는데 직접적인 사인의 원인은 진기고갈입니다.”

“진기고갈?”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잔심마도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듯 물어보았다. 그러자 감식반원은 1단주 연평과 양위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 예에, 그렇습니다. 이자는 공격을 당한 것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 영향은 있었겠지만 심한 탈수증상과 하단전의 공백상태로 보건데, 지쳐 쓰러질 때까지 무리한 진기를 순환시키다가 한계에 다다른 진기의 역류로 내장이 심하게 상하여 피를 토하는 등 천천히 고통을 느끼며 죽어간 듯 보입니다.”

연평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 직접적인 사인이 그것이란 말이냐?”

감식반원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담당하고있는 이 부서는 그 특성상 상관이 믿어주지 않는다면 한직(限職)으로 밀려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여기 이 상처들을 보십시오. 혈살과 마찬가지로 암흑연환낙뢰진의 연속공격에 당한 상처들뿐이지 않습니까. 그 외에 간간이 1단주님의 독문검법에 의한 상처들만이 보일 뿐, 나머지 부분들에 관해서는 전혀 탈이 없는 상태입니다. 혈살과 더불어 이자 또한 약소전주님께서 처치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분의 특기인 경공을 발휘하셔서 도망 다니시기만 하다가 환살이 제풀에 꺾여 진기역류로 죽음을 당한 것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그분께서 환살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서 그를 최대한 괴롭히며 고통스럽게 하다가 진기역류로 죽여버린 것입니다.”

듣고있던 연평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북당주 위지천에게 동천의 화후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던 그로서는 혈살의 은신을 찾아내어 죽인 것도 있고 해서 후자 쪽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 잔인한 놈! 그 상황에서 인간사냥의 묘미를 즐기다니…….’

반면 양위는 도연에게서 그가 쫓겨서 도망쳤다고 이미 들은 터라 전자 쪽을 생각했다. 그는 연평이 어떠한 판단을 내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평소 오만한 내성수호단주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그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때 그의 수하가 전음으로 무언가 소곤거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연평에게 양해를 구했다.

“부각주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연평은 차라리 조용히 혼자 생각하는 쪽이 낫겠다 싶어 내심 반기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겠습니다. 멀리 배웅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주십시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럼.”

상체를 약간 수그린 잔심마도는 장내를 벗어났다.

“헥헥, 이 몸이 그놈하고 전생에 무슨 원한을 졌기에 매번 이러는 거지? 흐미, 기운 빠지는 거!”

소교주를 상대하느라 진이 다 빠진 동천은 의자에 앉아 잠시 한숨을 돌렸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지 정신을 맑게 한 그는 품속을 뒤적거리며 문제의 그 책자를 꺼내들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살예총요의 앞부분이었다.

“어? 앞쪽, 그러니까 전반부잖아? 이것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이게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것이지?”

그는 몰랐지만 살예총요의 전반부는 처음부터 은형포단의 내부에 고정이 되어 있었다. 혈살은 은형포단의 뒤편에 전반부를 밀착시킨 후 은형포단을 약간 안쪽으로 접어서 살예총요를 덮게끔 고정시킨 것이었는데, 알다시피 진기가 거두어지거나 새로운 진기가 흘러들었을 시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리는 특성상 도연이 둘둘 말았을 때에는 우연찮게 떨어지지 않았다가 평범한 상태로 되돌아간 그것을 냉현에게 건네주려던 찰나에 책들의 무게에 못 이겨 같이 떨어진 것이었다.

이를 알 턱이 없었던 동천은 은형포단의 안쪽에 원래부터 있지 않았을까, 의심을 하면서도 확신이 없자 다 인연이 있어서 자신의 손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단정을 지어버렸다. 이미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것인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부각주가 오면 같이 건네줘야 하나? 후반부야 거의 머릿속에 새겨 넣었으니 줘도 상관없지만 전반부는 아직 한 장도 넘겨보지 않은 상태인데……?’

지금이라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재빨리 손을 움직여 첫 장을 넘겼다. 헌데, 어째 기분이 이상하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품안에 집어넣었다. 풍향원은 온통 꽃밭인 중앙에 사방이 트인 작은 전각이 세워진 형태여서 비밀스런 행동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허허, 자네가 그 약소전주인가?”

동천의 예감이 맞기라도 한 듯 살예총요의 전반부를 품안에 넣자마자 육십 대로 보이는 청수한 용모의 노인이 크게 웃으며 등장했다. 풍향원의 입구 쪽에서는 잔심마도 양위와 몇몇 대원들이 보였는데 신분상 뒤따르지 못한 듯 보였다. 어쨌든 동천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인사를 올렸다.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약왕전의 소전주 동천이라고 합니다. 오다가다 멀리에서만 두어 번 뵌 적은 있었는데 정식 인사는 이번이 처음 같군요.”

파천살왕(破天殺王) 귀풍형(鬼風形)은 외호에 걸맞지 않게 푸근한 웃음을 잃지 않고 대꾸해주었다.

“호오, 그랬던가? 멀리에서라도 보았다면 부담 없이 찾아와 인사를 나누지 그랬나.”

동천은 벌써부터 부담이 오는데 그때라고 다를쏘냐 생각했다. 그는 귀풍형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살예총요의 전반부를 생각했는데 그 때문인지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는 어렸을 적이라 철이 없어서 나서지 못한 듯 싶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겠으니 모른 척은 말아주십시오.”

농담이라고 생각한 귀풍형은 껄껄 웃었다.

“허허! 그러지, 그러지. 참 재미있는 친구로군.”

동천은 속으로 그의 말투를 따라하며 비꼬았다.

‘쳇, 그러지, 그러지. 두 번 재미있으면 아주 숨 넘어가겠군.’

그렇게 내심 씨부렁거린 동천은 닭살이 돋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어여삐 봐주시어 황공합니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귀풍형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시비가 가져온 차를 한 모금 음미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나를 보자 했다고?”

동천은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오늘 환살을 쫓다가 본의 아니게 살각의 물건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순간 동천은 귀풍형의 두 눈에서 광채가 흘러나옴을 목격했다. 그는 밤에 보면 무섭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 사이 귀풍형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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