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99화
“들어와요.”
내부의 서먹함을 알 리가 없었던 숭의겸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들어왔는데, 그를 본 동천은 돌연 몸을 미세하게 떠는가 싶더니 나지막한 짧은 고음을 터트렸다.
“아!”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의아해진 강소홍과 숭의겸은 일제히 동천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동천은 웃으며 얼버무렸다.
“하하,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어서 소리를 높였습니다. 산만하게 했다면 양해를 바랍니다.”
숭의겸은 상대의 신분을 존중해주어야 했기에 가벼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어찌 그 정도까지이겠습니까.”
그때 강소홍이 그들의 대화를 잘랐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요?”
약간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숭의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소문주님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끊을 분이 아닌데 이렇게 끊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대답은 하고 보았다.
“예, 내성수호 1단주께서 시체감식까지 모두 확실히 끝마친 상태이니 상세가 어느 정도 호전이 되셨다면 그 날의 사건을 자세히 설명해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소교주가 무서워서 물어보는 것은 고사하고 감히 소운정 근처에도 다가올 생각조차 못했던 연평은 오늘 냉현이 상관은혜의 일로 자리를 비우자 재빨리 행동을 취한 듯 싶었다. 강소홍은 잘됐다 싶어서 바로 허락해주었다.
“음, 그런가요? 그런 일이라면 협조를 해줘야겠군요. 알겠다고 전하세요. 장소는 숭 당주가 알아서 잡도록 하고 이각 후에 보는 것으로 해줘요.”
숭의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늘 그렇듯이 풍향원으로 자리를 잡겠습니다.”
강소홍은 숭의겸의 결정에 동의해주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약소전주님, 오늘 즐거웠습니다.”
“…….”
“약소전주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강소홍이 불러도 대꾸가 없던 동천은 그녀가 두어 번 정도를 더 불러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조금만 더 따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눈살을 찌푸린 강소홍은 저의를 몰라 동천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외간 남자를 너무 빤히 바라보았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래도 묻는 목소리만은 당당했다.
“이유라도 있나요?”
동천은 숭의겸의 눈치를 살짝 본 후 진지하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조용히 해결하지 않으면 강 소문주님께 큰 불이 익이 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흠칫한 강소홍은 설마 이자가 아까의 기이한 경험을 미끼로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가 숭의겸을 살펴본 것은
‘네가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나 또한 생각이 있다.’
라고 위협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또 그때의 경험이 되살아나자 얼굴이 화끈거린 그녀는 치욕스러움을 느꼈는지 딱딱해진 표정으로 숭의겸에게 명했다.
“1단주와의 만남을 일각 정도 더 늦추어 잡으세요.”
어리둥절해진 숭의겸은 갑자기 심상치 않게 변한 분위기를 접하면서도 명령은 바로 접수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대화들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는 서둘러 물러났고, 그가 나가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본 동천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만일 주위에 기척이 느껴지신다면 모두 물려주십시오.”
아미를 꿈틀한 강소홍은 어처구니 없어했다.
‘아니, 보자보자 하니까 이자가?’
그녀는 마침내 분노를 드러냈다.
“무례하군요!”
“무례해도 될만한 부탁입니다!”
의지가 담긴 약소전주의 눈빛에 강소홍은 주춤했다. 아울러 그녀는 자신이 무언가 착각을 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일 착각한 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창피했기에 그녀는 쉽사리 동천과 눈길을 마주하지 못했다.
“주, 주위엔 아무도 없어요.”
바보 같이 말을 더듬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며 정신을 재무장한 그녀는 이를 악물고 동천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동천이 그녀와의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는 방금 전의 기백을 어디에다 팔아먹었는지 상당히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아, 그게. 음음! 그러니까 그게에…….”
어쩐지 이렇게 변한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종잡을 수도 없어졌다. 화를 낼 때 내더라도 이야기는 끝까지 듣고 화를 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그녀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동천을 대해주었다.
“어려워하지 말고 말씀해보세요. 가능한 수용해줄 용의가 있으니까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용기를 얻었음인가? 망설임을 걷어낸 동천은 힘들게 하고자 했던 말을 꺼내들었다.
“음, 우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아? 전음으로 말씀을 드리죠.”
강소홍은 참으로 뜸을 들인다고 생각하면서도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동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방금 나간 숭 당주를 어느 정도까지 믿습니까?』
딱딱하게 안색을 굳힌 강소홍은 당장에라도 손을 쓸 듯 살기를 머금으며 차갑게 말했다.
“재미없는 이야기이군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본녀의 손이 무정타 생각하지 말아요.”
억양조차 사라진 그녀의 목소리에서 어찌나 찬바람이 쌩쌩 불던지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동천이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성질을 내는 것이 아닌가!
“에이 씨!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지금 속으로 저를 미친놈 취급을 하고 있죠? 아 진짜, 내가 이래서 말을 안 하려고 했다니까요? 에이, 이놈의 더러운 세상! 그놈의 정이 뭔지……. 아, 짜증나!!!”
강소홍은 상대가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약소전주의 행동이 갑작스레 돌변하자 두려운 마음이 앞서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났다.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도대체 어느 모습이 동천의 진실 된 모습인지를 알 길이 없자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그, 그 말투는……. 그리고 또 아까 전의 모습은 뭐죠? 약소전주는 두 얼굴을 가진 음흉한 자였던가요?”
기왕지사 본 모습을 드러낸 거 동천은 꿇릴 것 없이 밀고 나갔다.
“두 얼굴은 무슨 두 얼굴이에요. 원래가 이 모습이 정상인데, 여태까지는 누님께 잘 보이려고 그랬던 거지.”
강소홍은 입을 쩍 벌렸다.
“누, 누님?”
동천은 경악하는 그녀의 모습에 손을 내저으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누님요. 누님을 누님이라서 누님이라고 부른 건데 놀라시는 거예요? 하하, 귀여우셔라. 아참, 내가 이런 말 할 때가 아니지. 그리고 제가 할 일이 없어서 방금 그런 말을 꺼낸 줄 아십니까? 잘못하면 큰 사단이 벌어지는데? 안 그래요?”
혹시나 새로 등장한 교란작전의 하나는 아닐까 의심스러웠던 강소홍은 자신이 생각해놓고도 한심 하자 허탈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소전주, 장난은 사절하겠어요! 그리고 지금 당장 멀쩡한 사람을 이간질한 이유를 명백히 제시해주지 않는 이상 당신의 죄상을 낱낱이 소교주님께 밝히겠어요!”
무섭게 변한 그녀는 동천을 다그쳤지만 별로 위협적이지 못했던 듯 동천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아까보다 더 편한 사람에게 말하듯 입을 열었다.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다 말해줄게요. 우선 제가 생각을 바꾸어 본 모습을 보여준 건요, 천성적으로 답답한 걸 못 참는 성격이라서 그렇고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남이라고 할 수 없어서예요.”
강소홍은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다. 그러다가 퍼득, 아까 전의 일을 떠올린 그녀는 정말 상종 못할 색한이라고 생각했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감히 어디에서 그런 희롱을!”
한없이 커진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 동천은 목이 탔는지 물을 한 잔 마신 후 계속 이어나갔다.
“아따, 말 놔요. 그리고 제가 언제 누님을 희롱했다고 그러세요? 괜히 착한 동생 의심하시지 마시고요, 그것보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면 어처구니가 없지 않을 걸요? 왜냐하면 저는 감송(甘松) 형님 부부의 의제(義弟)였으니까요.”
“아? 뭐, 뭐라고요?”
완전히 헛다리를 집어서 한번 놀라고,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서 또 한 번 놀란 강소홍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수하에서 졸지에 감송을 의형으로 만들어버린 동천은 재빨리 머리를 굴린 후 체계적인 거짓말의 재조립에 들어갔다.
“휴우, 놀라시기도 하겠죠. 아마 그러실 거예요. 나 같아도 그랬을 테니까. 그리고 아실런가 모르겠는데요, 감송 형님 부부는 7년 전까지 본 약왕전에서 머물렀거든요? 형식적으로는 덜 익은 고기요리를 잘해서 구 장로님을 위하여 특별히 데려온 것이었지만 영수산이란 곳에서 감 형님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저는 그분을 형님으로 모시고 본 전에서 숨어 계시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어요. 예? 거짓말처럼 느껴져요? 그럼 확인해 보시던가요. 대놓고 아무에게나 드러낼 수 없는 의형제 이야기만 빼놓고 한치의 다른 점도 없을 테니까.”
“으음……!”
이걸 도대체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강소홍은 갈등하는 눈으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저리도 당당한 것을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이렇게 되자 약소전주는 간교하고 사악하다는 소문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좀 더 확실한 물증을 요구했다.
“좋아요. 일정부분은 믿겠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리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겠죠? 확실히 본녀가 믿을 수 있을만한 증거가 없다면 아마도 당신의 오늘 운세는 길보다 흉이 더 클 거예요.”
어려운 요구에 눈살을 찌푸린 동천은 고민하는 얼굴로 한참을 끌다가 뒤늦게 강소홍이 만족할만한 대답을 떠올렸는지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하하, 소연 아시죠? 왜 그때 오셔서 본 시녀요.”
그녀를 떠올린 강소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는군요.”
“그렇다면 이야기 쉬워져요. 걔가 바로 민 형수님의 제자거든요. 하하하!”
“네에?”
오늘 참 많이 놀란다고 생각한 강소홍은 민묘희의 성명절기까지는 조작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녀를 불러 사실만 확인된다면 믿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애써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동천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요, 이제와 밝히지만 그때 서찰을 보내서 환영혈의 살수를 미리 알려준 것도 저예요. 말이 나와서 말이지 제가 그동안 누님의 뒤를 봐드리느라고 얼마나 위험을 감수했는지 알아요? 아마 감 형님과 의형제를 맺지만 않았어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거예요. 아 진짜,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놈의 정이 뭔지……. 에휴!”
한숨을 내쉬는 동천을 바라본 강소홍은 그가 여기까지 말해줬는데 믿어주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상대가 진심이었을 때 큰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당장에 드러날 거짓말을 약소전주나 되는 자가 떠들어댈 리가 없을 거라는 부분도 크게 작용했다.
“아, 그랬군요! 좋아요, 그러다면…….”
그때 동천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아, 잠깐잠깐! 언제까지 제게 존댓말을 하실 거예요? 저는 누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남다르게 생각되지 않아 누님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누님은 저를 당최 동생으로 봐주실 생각이 없으신가 보죠?”
당황한 강소홍은 변명하듯 말했다.
“하,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또 익숙하지 않은 일에는 서툴러서 잘…….”
동천은 바로 토라진 얼굴을 했다. 아마도 이런 그를 누군가가 보았다면 저게 또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렇다는 말이죠? 쳇, 그럼 저도 몰라요. 없었던 일로 하고 그냥 갈래요.”
그가 진짜로 나갈 듯 행동하자 이제와 가게 놔둘 수 없었던 강소홍은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벌게진 얼굴로 급히 동천을 잡았다.
“알았어! 아, 알았다고! 천 동생! 됐어?”
그제야 씨익 미소한 동천은 제자리로 돌아와 강소홍의 양손을 꼭 잡았다.
“하하! 고맙습니다, 누님. 비록 우리끼리 있을 때에만 누님 동생하며 지내야겠지만 감 형님을 봐서라도 앞으로 음이야 양이야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고, 고마워. 호호…….”
떨떠름하게 마주 웃어준 강소홍은 슬그머니 손을 빼고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도옹…생, 그것보다 처음에 말했던 이야기가 뭐지?”
무언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신 동천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해주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본문의 심법을 익히게 되면 가끔 예지력을 지닌 사람이 나타난다고 하는데요. 예지력 아시죠? 앞날이 잠시 보인다던가 하는 거요. 뭐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런 예지력 보다는 사람을 선별해낼 줄 아는 예지력이 가끔씩 발동하거든요? 예를 들어 이 사람은 내 편이다, 아니다. 그런 거요. 그런데 제가 누님을 제 편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그자를 처음 본 순간 바로 그 예지력이 발동한 거예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가능한 제 속내를 숨기면서 누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누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감 형님의 일까지 들춰내면서 그자의 문제를 누님께 언급했던 거예요. 에에, 잘 안 믿기시죠?”
이런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속이는 일이 없어야 손쉽게 달성하는 것이어서 동천은 굳이 숨기는 일 없이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곱씹어준 강소홍은 침음하며 확인 차 물어보았다.
“으음, 그래서 숭 당주가 만독문에 등을 돌린 상태인 것 같다는 말인가요?”
어깨를 으쓱한 동천은 대답했다.
“자세한 내막이야 저도 잘 모르죠. 하지만 현재 누님의 일과 관련되어서 적어도 도움을 주지는 못할 거예요. 또 방해가 되는 것만큼은 확실하죠. 그리고 누님. 왜 또 말을 높이세요?”
강소홍은 깜빡했다는 얼굴을 했다.
“아, 미안. 너무도 충격이 커서 그만 잊어버렸어.”
“괜찮아요.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죠, 뭐. 그보다 이렇게 누님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니까 속이 다 후련한 거 있죠? 하하하!”
그의 웃음에 강소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남은 심각해죽겠는데 저 웃음은 또 뭐란 말인가.’
동천이 다소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자 강소홍은 어느 정도 믿었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이래저래 머리가 지끈거렸던 그녀는 그저 쉬고만 싶을 따름이었다.
쏴아아아아!
그녀가 닷새 전의 기억을 모두 끝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말없이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를 감상하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날 저녁, 소연이란 아이에게서 단묘(短猫) 전(前) 대당주의 무공이 전수되었음을 확인했다. 또한 대당주 부부가 약왕전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확인했다. 후우, 천 동생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
정말 그녀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배반이란 없을 것이라 여겼던 숭의겸 때문이기도 했고, 그저 모르는 척 가만히만 있어도 그녀가 맡았던 임무는 성공하게끔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법. 어차피 썩은 뿌리라면 만독문을 위해서라도 이른 시일 내에 잘라야 하는 것이다.
“소문주님, 숭의겸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그녀는 차분하게 심호흡을 가다듬은 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숭의겸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평소보다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던 소홍은 신형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요. 비도 오고 울적한데 차나 한 잔 마시자고 불렀어요.”
숭의겸은 이 우울한 분위기가 여인들에게 흔히 찾아오는 감정의 기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한결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말상대를 원하신다면 미천하나마 도움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보일 듯 말 듯 부드러운 미소로 회답한 강소홍은 탁자에 앉으며 손을 뻗어 마주한 의자를 권했다.
“곧 차를 가져올 거예요. 앉아요.”
“알겠습니다.”
명을 받든 숭의겸이 앉자마자 때맞춰 시비가 차를 내왔다. 일단 차를 한 모금씩 마시고 음미한 그들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 문을 떠난지도 3개월이 넘어가는군요.”
숭의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닌데 벌써 3개월이 지났다니……. 훗, 가능한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강소홍은 심연을 빨아들일 듯한 눈으로 숭의겸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는군요. 어렸을 적에 본문에 들어와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저를 숭 당주께서 투박하나 따듯한 말솜씨로 위로를 해주었었지요.”
멋쩍은 이야기에 낯간지러워진 숭의겸은 반사적으로 크게 웃었다.
“하하, 따듯한 말이야 초혼(草魂)이 잘해주었지 않습니까. 왜 그때 소문주님께서 문주님의 후계자로 선포되었을 때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방안에서 한없이 울고 계시는 것을 소신이 달래어 보았으나 꿈쩍도 않고 계시다가 초혼이 오자 울음을 그치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강소홍은 추억에 잠겼는지 전혀 가식이 없는 미소로 숭의겸을 대했다. 그녀는 잘 몰랐지만 그 순간 숭의겸은 그녀의 눈부신 미소에 숨이 턱 막힐 듯한 충격을 받았다.
“기억나요. 그때 제가 왜 울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아도 숭 당주께서 하셨던 말씀은 아직도 생생하네요. 혹,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고 계시나요?”
잠시 얼이 빠져있었던 숭의겸은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대화에 임했다.
“물론입니다.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문주님은 인내심이 많지 않으시고 어린아이의 울음에는 특히 그러하니 계속 눈물을 흘리신다면 큰 곤욕을 당하실 지도 모른다고 했었지요, 아마? 하하, 그 당시에 제 딴에는 생각해서 해드린 말씀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울음을 그치시지 않았던 이유를 알만 하겠더군요.”
강소홍은 미안해하지 말라는 듯 활기차게 말했다.
“아니에요. 그 당시 숭 당주의 배려하는 마음은 어린 제게도 확실하게 와닿았었어요. 그때의 일은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죠.”
그녀는 고마움의 인사를 하는 동시에 남몰래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당신의 변절이 진실이라면 제 가슴은 한군데를 오려놓은 듯이 아플 거예요…….’
그 당시의 대화내용까지 소상하게 알고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와 바꿔치기가 되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인면피구를 착용한 다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정교하다 할지라도 거의 본능에 가까운 문영이가 있었기 때문에 바로 들켰으리라.
그녀는 눈앞의 사내가 자신이 예전부터 알고 지낸 숭 당주가 확실하자 새삼 안도하면서도 그것에 비례하여 점점 조여오는 불안감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만일 이런 숭 당주가 변심을 한 것이라면 본문이 위험해. 숭 당주처럼 충성심을 보인 자는 드물었는데 이런 그가 포섭을 당했다는 것은 본문에 얼마나 더 많은 변절자들이 가세를 했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이야.’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를 꽉 쥔 그녀는 내심 고개를 흔들며 불안감을 털어내고자 했다.
‘하아, 무서운 생각은 그만두자. 내가 너무 천 동생……. 아니, 약소전주 그자의 말만 듣고 그쪽에 무게를 기울인 것은 잘하는 짓이 아니야. 또 나답지도 않고. 그러나, 그러나…….’
갈등은 있었으나 미룸은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공정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미 계획의 발판을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이제 그녀는 그것을 실행하고자 했다.
“사흘 전, 사부님께 믿을 만한 인편(人便)으로 안부를 전하러 보냈던 것을 기억하실 거예요.”
알고 있었던 숭의겸은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는지 의아하면서도 일단 대꾸는 해주었다.
“그것이라면 송구스럽게도 소신이 바로 옆에서 서찰의 내용을 본의 아니게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치욕스럽지만 암흑마교 측에서도 확인을 하였고 말입니다. 헌데 그 이야기는 왜…….”
소홍은 고민하는 얼굴로 머뭇거리는 척하다가 긴 한숨을 내쉰 뒤 무언가 후회하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후우, 사실 그 서찰의 본바탕에는 본문의 비전수법으로 다른 내용이 쓰여져 있어요.”
흠칫!
놀란 표정의 숭의겸은 일의 중요성을 인식했는지 소리를 죽여 물었다.
“아니, 본문의 비전수법이라면 일정량의 독공을 서찰에 주입시켰을 시 글자가 떠오르는 방법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이라면 시일이 조금 걸리다 뿐이지 독전의 광예 정도라면 주입시킬 독공의 양을 찾아내어 서찰의 기밀을 밝혀낼 것이 뻔한데 어찌 그렇게 위험한 일을 소신에게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처리를 하셨단 말씀입니까.”
강소홍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숭의겸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건 한 단계 진보된 방법이에요. 독공의 양을 조절한다 해도 그 방법만 사용한다면 서찰은 바로 녹아버리고 말죠.”
숭의겸은 감탄했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아! 다른 제약을 걸어놓으셨군요. 역시, 소문주이십니다!”
그러자 강소홍이 굳어진 표정으로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쉬잇.”
너무 소리가 크다는 뜻이다. 무안해진 숭의겸은 바로 소리를 죽여 물었다.
“죄송합니다. 허면, 무슨 방법을 쓰셨는지요.”
“궁금 한가요?”
어쩐지 차가운 듯한 목소리였다. 숭의겸은 뜨끔했는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하하, 제가 주제넘게 나선 듯하여 송구스럽습니다.”
강소홍은 미안했던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본문에 그렇게 충성한 숭 당주라면 충분히 물어볼 자격이 있다고 봐요. 음, 그러니까 독공의 양을 조절하여 주입하는 것까지는 맞는 데, 제가 한가지 더 첨부한 약재는 독성을 더욱 격발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모르는 누군가 무턱대고 독공의 양만 조절한다면 그 약재로 인하여 독공의 양이 삽시간에 초과해버리게 되죠.
그래서 서찰이 녹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그 순간에 삼매진화를 사용해야해요. 즉, 초과되는 만큼의 독기를 순전히 감각만으로 태워야 서찰이 녹아 내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동천에게도 서찰을 보냈음을 알려준 그녀였지만 이 방법만큼은 그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확실하게 믿을 수 없는 동천이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서찰의 일은 강소홍 그녀가 동천과 숭의겸을 동시에 시험하는 일이기도 했기에 더더욱 그랬던 것이고 말이다.
각설하고, 듣는 내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숭의겸은 그녀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그 입을 다물 수 있었다.
“허어, 대단하십니다. 더군다나 그런 비전이 있다는 것은 수십 년 동안 본문에서 종사한 저 또한 모르고 있었으니 아마도 충분히 성공하시리라 봅니다.”
긍정적인 대답을 들어 만족했는지 강소홍은 살짝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야지요. 그 내용에는 사부님께서 비밀리에 명하신 것에 관하여 기재가 되어있으니까요.”
뜻밖의 말에 안색을 굳힌 숭의겸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누가 듣는다면 어쩌시려고 이렇게 크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강소홍은 돌연 크게 웃었다.
“호호, 문영이에게 이 방의 음파를 차단하라 일렀어요. 아시다시피 그녀의 내공은 가히 일절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
그제야 이해한 숭의겸은 문득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는지 주저 않고 물어보았다.
“허면, 아까는 왜 조용히 하시라고…….”
강소홍은 소리 없이 짓궂은 미소를 띄웠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것뿐이에요. 놀라하는 숭 당주의 모습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러고 싶어졌거든요. 호호호!”
소문주가 이런 장난을 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마주 웃어준 숭의겸은 돌연 진지해진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헌데 왜 이런 중대한 사항을 소신에게 들려주시는 겁니까?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한 것인데 말입니다.”
덩달아 안색을 굳힌 강소홍은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숭의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부담이 되어서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일부분이라도 알려주고자 했던 거예요. 그러니 이젠 잊어버리세요. 그냥 해본 소리니까. 그냥 해본 소리…….”
“으음!”
일순 안색이 무거워진 숭의겸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창가 앞에서 멈춰 선 강소홍은 멈출 줄 모르고 내리는 세찬 빗줄기를 바라보며 슬픈 눈빛을 내비쳤다.
‘제발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래요…….’
쏴아아아아!
빗줄기는 무정하게도 그렇게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