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34화
“저기, 무슨 오해를 하신 듯 한데 전 아주머니의 부군을 뵌 적이 없습니다. 제 어머니의 행방과 치우도법의 이야기는 이제 물어볼 생각이 없으니 안고 계신 아가씨를 내려놓아 주십시오. 제 이름을 걸고 절대로 아주머니의 행동에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동천이 간만에 멋진 모습을 보여줬지만 자인설은 귀담아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되려 안고 있는 팔을 움직여 손으로 사정화의 목을 움켜쥐었다.
“어림없다!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릴 낌새를 보이면 이 계집을 그냥 죽일 테니 잔말말고 따라오너라!”
정말로 목을 비틀어버릴 기세이자 동천은 내심 상대를 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에 따라야했다. 그는 절대로 불상사가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듯 양손을 흔들어가며 무조건 자인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하늘이 무너져도 허튼 수작은 없을 것이니 진정하십시오! 정말입니다! 에에 또, 하지만 밖으로 나간다 해도 소용이 없을 텐데 웬만하시면 포기하시는 게…….”
“닥쳐라!”
동천을 무섭게 쏘아본 자인설은 뒤이어 하고픈 말들이 있는 듯 했지만 곧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괜히 상대를 회유하려다 안 좋은 소리만 듣게 된 동천은 큰마음 먹고 기습을 할 까도 생각했지만 상대가 바보 아닌 이상 태연하게 뒤를 보여줬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포기하고 자인설을 뒤따라간 동천은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살짝 걸쳐진 사정화의 머리가 보이자 은근히 신경질이 나는 것을 느꼈다.
‘내가 겁 대가리 없이 주둥이를 놀릴 때부터 알아봤어. 실력도 개 끗발인 게 자존심만 살아 가지고 설쳐대니 일이 잘 될 리가 있어? 이씽! 수습하는 분의 심정도 좀 생각해줘야 할 거 아냐!’
저 혼자 흥분하여 씩씩거리는데 어느새 멈춘 자인설이 동천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동천의 분노가 자신에게로 향한 줄 착각했는지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구석의 기둥 위로 뛰어올라 등잔걸이를 세게 밀치거라.”
그녀의 명령에 눈을 돌린 동천은 좌측 끝 기둥을 바라보았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등잔걸이는 보통성인이 심지에 불을 붙이려면 까치발을 서야 할 정도로 높게 박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것이 비밀통로의 열쇠인 듯했다. 그것을 본 동천은 아까 이곳에서 난리를 칠 때 어째서 저것을 그냥 지나쳤던 것인지 의아했고 말이다.
‘아무리 이 몸이 평범한 천재라지만 저것을 눈여겨보았어야 했음에도 그냥 지나쳤다니…….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나태해져 있었나보구나! 아아, 좀더 노력하는 내가 되어야겠다.’
동천에게 있어서 사정화를 구하는 것은 구하는 것이고 망상은 망상인 것 같았다. 원체 이렇게 살아온 놈이라 당장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이 아니면 금새 긴장이 풀어졌던 것이다.
“뭐 하느냐! 어서 시키는 데로 하질 않고!”
동천은 기다리다 못한 자인설이 다그쳐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좌측기둥에 다가서서는 가뿐하게 뛰어 올라 등잔걸이를 잡아 챈 뒤 약간의 힘을 주어 앞으로 밀었다.
그그긍!
“켁?”
저도 모르게 소리친 동천은 기껏해야 벽면의 통나무들이 두 세게 올라가는 것을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벽면 전체가 들어올려지자 입을 쩍 벌렸다.
‘그렇게 찾아도 비밀통로나 문이 안 보이더니만 벽면 전체가 다 문이었던 거야? 으악! 이건 사기야!’
사기고 자시고 간에 깊게 뚫린 벽의 안쪽 통로는 벽면 전체가 들어올려진 것이 무색하게 두 사람 정도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넓이였다.
“앞서라.”
“예? 제, 제가요?”
“여기에 네 녀석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이냐!”
자인설이 냉큼 다그쳤다. 그러나 그녀가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가 없었던 만큼, 동천은 불안해진 눈으로 당최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서서히 살기를 뿌리며 사정화의 목을 휘감는 자인설의 행동에는 감히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짓이 뒤치기인데 설마 그런 짓을 할라구…….’
자인설의 살기는 확실히 매서웠다. 그러나 자신을 죽일 정도의 살기는 아니라는 것쯤은 동천도 간파할 수 있었다. 아니, 생존에 관해서라면 동천만큼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사람도 드물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천이 어느 정도 안심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저기요. 앞이 잘 안 보이는데요.”
주춤거린 동천이 말하자 자인설이 대답했다.
“좀더 걸어가면 밝아질 것이다.”
잔말말고 가라는 소리에 내심 구시렁대며 벽면을 길잡이 삼아 나아가던 동천은 자인설의 말대로 곧 뿌연 빛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상대가 뒤쪽에 따라온다는 점 때문에 걸음을 빨리 한 그는 마침내 십여 장 너비의 커다란 타원형 석실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때 동천이 지나온 길의 끝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통로가 막히게끔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은근히 불안해진 동천은 일정한 간격으로 불을 밝히는 횃불들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자인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에 또…, 이제 다 왔으니 아가씨를 내려놓아 주셨으면 합니다. 헤헤.”
동천이 약간은 비굴한 모습을 보이자 눈살을 찌푸린 자인설은 뜻밖에도 순순히 사정화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사정화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다가오려는 동천을 제지시켰다.
“멈춰라. 그리고 뒤돌아 서라.”
동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인설은 대답했다.
“네 혈도를 점하려는 것이다.”
“예에?”
반보(半步) 정도 신형을 돌렸던 동천은 휘둥그레진 눈을 하며 자인설 쪽으로 몸을 원위치 시켰다. 그러자 대번에 싸늘해진 자인설은 한쪽 발로 기절한 사정화의 목에 지그시 가져다 댔다.
“네 상전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게로구나.”
‘윽! 이 아줌마가 사람 목 가지고 장난치는 게 취미인가…….’
솔직히 자신마저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된다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동천이 순진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 사정화에게 바칠 정도의 담이 큰 것도 아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대로 도망쳐서 원군이라도 청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자인설이 동천의 고민을 완화시켜주었다.
“절대로 네게 손을 쓰지 않겠다. 아까 네가 네 이름을 걸었듯, 나 또한 천지신명께 이름을 걸고 약조할 수 있다.”
그러고는 동천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천지신명께 그녀의 이름을 걸고 약조를 했다. 동천은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상황에 어지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수 차례 ‘진짜지요?’라고 물어본 뒤 뭉그적거리며 평범한 등판을 보여주었다.
‘난 내 예감을 믿는다. 난 내 예감을 믿는다. 아무도 이 몸을 해할 수 없다. 이 몸은 천하무적이다. 이 몸을 뛰어 넘을 자 누가 있으랴. 이 몸이 곧 법이고 이 몸이 곧 신이라. 이 몸의 존재는 중얼중얼…….’
지금 동천은 이것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상황이라면 분명히 예지력이 작용하여 알려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항상 그를 도와주었던 예지력은 발동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인설의 송곳 같은 점혈이 그의 등판을 시작해서 몸을 돌려 쉴 새 없이 앞쪽까지 이어졌다.
퍽퍽퍽퍽퍽!
“윽? 익? 웁! 헉? 으악!”
정말로 송곳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어서 그런 것에 약했던 동천이 짧은 비명들을 질러댔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냐면 확실한 검증을 거친 자인설조차 이렇게 방정맞은 녀석이 정말로 남편의 핏줄인가 의심을 다 했을 정도였다.
“엄살피우지 마라. 현재 너는 본녀의 독문점혈법에 당한 상태로서 하루동안은 무슨 짓을 해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니, 그렇게 알고 포기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알겠느냐?”
칼자루를 쥔 쪽이 알겠냐고 묻는데 동천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야지.
“예, 잘 알겠습니다. 꿀꺽,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동천의 긴장과 두려움은 곧 자인설의 행복. 그녀는 흡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호, 어쩔 것 같으냐.”
동천은 속으로 대답했다.
‘이 몸하고 대화를 계속 나누다가 진법에서 벗어난 호위대와 정예들이 이를 갈며 들이닥쳐 아줌마를 제압할 것만 같소이다.’
동천은 그녀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쥐들이 곧 진법을 무너트리고 흩어지리라 예상했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었다. 자인설은 진법이 발동 된 순간, 쥐들을 아예 죽여버려서 다시는 움직이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 놨던 것이다.
더군다나 진법의 내부에서는 소리조차 차단하는 기능이 있었던 만큼 밖에서 눈치채고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도 한참이 지난 후이리라.
“에에, 약속대로 아가씨를 풀어주고 조용히 떠나실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호오! 잘 맞추었다.”
‘앗싸∼!’
내심 동천이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자인설이 말했다.
“그 전에 몇 가지 물어보고 떠나마. 너와 이 계집은 어떠한 관계더냐.”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더욱이 사정화의 신분 쪽으로 생각이 미친 동천은 되려 기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제 윗분으로서 위대한 암흑마교의 차기 교주님이 되실 분이십니다.”
그 말인즉, 당신 따위가 감히 목을 밟고 위협할 상대가 아니니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자신들을 풀어주고 싹싹 빌라는 소리였다.
확실히 동천의 대답이 뜻밖이었던 듯 자인설의 안면은 심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드러난 사정화의 신분이 그녀가 계획한 복수를 포기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전설의 만수신공을 익혀서 자부심이 대단한 그녀였고, 이른 나이에 강호를 등지기까지 한 그녀였기에 암흑마교의 공포와 위세는 쉽게 다가올 성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의외로구나. 그래, 너희 둘의 관계는 철저한 상전과 수하의 관계인 것이냐?”
동천은 순진하게 되물었다.
“물론입니다. 자고로 상전과 수하의 관계란 철저한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논리인 것인데, 그 관계에 뭐가 더 있다는 겁니까?”
자인설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 남녀간의 감정이 개입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예에에? 누구 뒤뜰에 끌려서 생매장 될 일이 있습니까? 으으, 평소에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끔찍한 소리하지 마세요.”
기겁을 한 동천은 유일하게 제압되지 않은 주둥이를 놀리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인설을 아주 즐겁게 해주는 맛있는 양념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정말 첩의 자식에게 어울리는 복수가 될 듯 했기 때문이다.
“좋구나! 네가 부친의 사랑을 받았던 크기만큼 피눈물을 흘려야 했을 내 고통의 복수를 이렇듯 통쾌하게 할 수 있게 되다니 말이다! 호호호호!”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모친을 거론했는데 부친이라고 거론되지 말란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부모라는 존재를 잊고 살았던 동천은 가끔씩 ‘나도 부모님이 계셨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였기에 처음에만 충격을 받았을 뿐 이제는 약간 두근거리는 것 외에는 그저 그랬던 것이다.
다만 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미친 듯이 떠들어대는 자인설의 의미 모를 횡설수설이었다.
“제 아버지라뇨? 만난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십니까? 그리고 그게 왜 아주머니의 고통이 되어야 했고……, 복수는 또 뭡니까? 방금 전 천지신명에 대고 제 몸에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으셨나요? 예?”
그래도 일말의 양심 때문에 고심을 거듭했던 자인설은 뻔뻔한(?) 동천의 거짓말에 그것을 말끔히 털어 낼 수 있었다. 동천이 뭐라고 악을 쓰건 석실의 구석에 마련된 식기도구와 여러 가지가 구비 된 상자들로 다가간 그녀는 파란 옥함을 꺼내어 뒤적이더니 곱게 접혀진 새하얀 종이를 꺼내들었다.
다시 되돌아온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겠지? 하긴, 나조차 이런 더러운 물건을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거늘.”
갑자기 조용해진 동천은 꿀꺽 침을 삼킨 뒤에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도 하지만 분명 천지신명에 대고…….”
“걱정 말거라. 약속은 지킨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이 물건은 네가 아닌 이 계집에게 사용될 것이니라. 호호호!”
그제야 다행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일단 자신이 안전해지자 여유가 생겨 평온해진 목소리로 물어 볼 수 있었다.
“휴우∼. 아, 예에. 그런데 그게 뭡니까? 설마 독은 아니겠지요?”
자인설은 자신의 상전이 위험에 처할 지경인데 저리도 태연하게 묻자 어처구니가 없는 한편, 자신만 안전하면 그만 이라는 동천의 모습에 참으로 더러운 핏줄답다고 생각했다.
‘이런 녀석이라면 그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 멀쩡히 살아남을 확률이 더욱 적어지는 것이니 그 누굴 탓하랴. 그저, 어리석은 네 성정(性情)을 탓하거라.’
그녀는 자신이 이런 험지(險地)에 처박혀 십 수년을 홀로 지내왔던 것에는 다 이런 복수의 기회를 내려 준 하늘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절대 주어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독이라? 흐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구나. 왜냐하면 이건 합환산(合歡散)이기 때문이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동천은 곧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커헉? 으, 음약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음약을 높여 부르는 말이 합환산이었던 것이다. 눈동자를 굴려 사정화와 음약을 번갈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어진 동천은 하늘이 노래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는, 뒤뜰에서 조용히 생매장 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평생을 고문만 당하다가 들개의 먹이로 내던져 져도 전혀 부당하다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으, 으악! 미쳤습니까? 같은 여자로서 그런 짓을 해도 되요? 그, 그러니까 아줌마도, 아니 부인께서도 여자이신데 어떻게 같은 여자에게 평생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실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건 아니에요. 차라리 그냥 죽여요. 예? 그냥 독을 쓰라구요!”
모르는 누가 들으면 순전히 사정화의 안위를 걱정하여 애걸복걸하는 형국이었지만 이미 볼 것을 다 보았던 자인설은 충분히 가슴에 와 닿는 동천의 만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차피 마도의 세력은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들은 모두 인간 쓰레기지. 그런 쓰레기들 중 몇몇을 미리 치우자는 것인데, 네가 감히 나에게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냐? 고작 더러운 핏줄인 네놈이?”
얼굴을 딱딱히 굳힌 그녀는 접힌 종이를 조용히 펼치기 시작했다. 미치고 팔딱 뛰게 된 동천은 설마 이렇게까지 악독한 여인이었을 줄은 몰랐다며 발악을 하는 한편, 입안이 바싹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울러 자신이 여기에서 풀려나기만 한다면 다시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예지력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짓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으아악! 풀어 줘, 이 여자야! 난 그렇다 치고 이런 짓하고 당신이 무사할 줄 알아? 우, 읍!”
시끄러워서 손가락을 튕긴 자인설은 동천의 아혈까지 막아 놓자 그제야 소음에서 해방 된 기분을 만끽했다.
스르르륵!
마침내 분홍빛 가루가 떨어지며 정확하게 사정화의 얼굴과 콧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녀의 피부에 가루가 닿자마자 놀랍게도 눈 녹듯 물처럼 퍼지더니 이내 그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시원하기도 하고 마음이 무겁기도 한 복잡한 신색으로 모든 일을 끝마친 자인설은 석실의 한 곳을 쓰윽 밀었다.
그그긍!
또 다른 비밀통로였다.
‘안 돼!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해!’
눈을 부릅뜬 동천은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를 꽥꽥 내질렀다. 대충 표정에서 하고픈 말을 유추해 낸 자인설은 무표정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본녀를 탓할 생각은 말거라. 차후, 운이 닿아 네 어미를 만나거든……. 본녀가 말하길, 뿌린 대로 거둔 것이었다고 전하거라. 그래도 내 너와 아주 남이 아닌 만큼, 이 비밀통로는 폐쇄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마.”
‘놔두고 지랄이고 다 필요 없으니까 해독약이나 내놔! 아니면 내 혈도를 풀어주던가―! 으으, 뭐? 남이 아냐? 남이 아닌데 이럴 수 있어? 내가 돈을 달랬어? 아니면 쌀? 씨팔, 폐쇄해! 더러워서 그쪽으로는 안 나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만 싶었다.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평소에 그렇게 잘 되던 현실도피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자 나 몰라라 찾아올 생각을 안 했다.
그그긍!
‘흐미…! 갔네, 저 아줌마. 으으, 이제 나 어쩌지? 하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예? 그동안 잘 믿어서 하늘님 좋고, 저 좋고, 서로 상부상조하며 교세(敎勢)까지 널리 퍼트려준 저에게 하늘님이 이러시면 안 된다구요.’
동천의 하늘님을 믿는 사람들은 소연과 수련.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믿는 화정이가 다였다. 그나마 수련은 동천과는 다른 순수한 하늘님을 믿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그가 확장시킨 교세의 영향력은 고작해야 2명이 다였다. 만일 진짜로 하늘님이 계시다면 천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헥헥, 진짜 말하는 것도 아닌데 지치네? 에고, 쉬어야겠다.’
한동안 저 혼자 지껄이느라 진이 빠진 그는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덕분에 주위를 살펴볼 수 있게 된 동천은 사정화가 아직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하여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문이 닫힌 내부는 횃불들이 불타오르고 있지만 어두운 분위기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다. 차츰 분위기에 이끌려 몽롱해지려고 하던 동천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한시가 급한데 자신이 이래서는 안 되었다. 자인설이 실수로 사정화의 혈도를 점하고 나가기라도 했다면 그녀는 저렇게 누워만 있다가 혈맥이 터져서 죽게 되는 것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혈도를 뚫어야 하는 것이다.
‘으득! 이놈의 썩을 아줌마! 내가 민낭에게 고생하면서 얻은 별명이 뭔 줄 알아? 뚫어 뻥이야. 뚫어 뻥!’
뚫어 뻥 이야기는 우스개 소리였지만 그가 민낭에게 잡혀 지냈던 시간동안 혈도를 뚫는데 도가 텄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동천과 도연. 그리고 중소구의 내공을 모두 점했었는데 오로지 동천만이 시간이 걸려도 점혈을 풀었고, 나중에는 익숙해지자 점혈(點穴)의 민낭과 해혈(解穴)의 동천이 대결을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을 벌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의 시작은 별 짓을 다 해도 혈도가 요지부동이자 역심무극결을 바탕으로 진기를 거꾸로 돌렸다가 우연히 방법을 알게 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툭. 투툭!
정신을 집중하고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지 반각(7분)에 가까워지자 드디어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막혀있던 혈도들이 하나 둘씩 뚫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크큭, 됐다! 그럼 그렇지. 이 몸의 실력은 아직도 녹슬지 않았다구! 으하하! 이놈의 하급 점혈법! 일사천리로 뚫어주마!’
아주 신이 난 동천은 오랜만에 한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현재 그는 정신을 집중하려고 눈을 감은 상태였는데, 음약에 당하고 쓰러진 사정화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그런지 정신집중에 약간이나마 효력을 보는 것 같았다.
스륵!
‘응? 무슨 소리가…….’
하나의 혈도를 막 풀려고 하는데 환청인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동천은 어째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려왔다.
스르륵!
‘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