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41화
서장(序章).
하늘이 보고 싶다. 미치도록 그리운 중원의 하늘이 보고 싶다.
춥고 어두운 이 공간은 본좌에게 가혹한 채찍질을 가한다. 더욱더 중원을 그리워하고 중원의 모든 것 하나 하나를 미치도록 갈망해보라고…….
그래서 본좌는 갈망한다. 그래서 본좌는 기나긴 세월을 악착같이 버텨왔다.
아아, 보고 싶구나. 중원의 모든 것이여! 너로 인한 기다림은 나에게는 생명수요, 기나긴 고통을 인내하게 해준 감로수(甘露水)라!
나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에 갈망하노니! 나의 이 간절한 바람은 하늘도 막을 수 없음이리라!
후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다.
남쪽 이동.
“…….”
도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세상 모든 것이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듯, 무공 또한 배우면 배울수록 드러난 힘보다는 내재된 힘을 중요시하는 것이었기에 정신수양을 통한 집중력을 배양시키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쥐 죽은 듯 앉아 있던 도연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상대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 듯 발걸음이 무거운 느낌이었다. 조용히 눈을 뜬 그는 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40대 정도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물음에 사내가 대답했다.
“약소전주님의 서찰을 가져왔습니다.”
사내는 말하는 동시에 조심스레 품안에서 서찰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도연은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이 몸이 공사다망(公私多忙)하여 필요한 곳은 많으나
정작 몸이 따라주질 못하는구나.
내 문정의 일이 궁금하니 네가 좀 알아보고 오너라.
-동천(冬天)-
뜻은 명확했다. 장노삼이 만년오행한철(萬年五行寒鐵)로 도(刀)를 만들어 올 시기가 되었는데 알아볼 길이 없으니 도연 보고 알아오라는 이야기였다. 잠시 눈살을 찌푸린 도연은 사내에게 잘 읽었다고 말해준 뒤 장로들에게 간단한 사정을 설명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고, 옷가지와 여비를 비롯한 생필품들을 간소하게 갈무리했다.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6장로였다.
“혼자서 괜찮겠느냐?”
6장로의 물음에 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번 가본 기억이 있으니 어렵지는 않으리라고 사료되옵니다.”
고개를 끄덕인 6장로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야 있겠느냐 만은 홀로 길을 떠나게 하는 것도 나름대로 공부가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좋다. 대신에 일을 마치거든 속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인사를 마친 도연은 허름한 초옥을 벗어났다. 그의 목적지는 제갈세가였다.
“아하! 상쾌하다.”
겨울이 지나가고 해가 바뀌어 봄을 맞이한 3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세수를 하고 아침 공기를 들이마신 동천은 가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때는 매일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에 치를 떨었던 그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시간 때우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자 바로 적응하는 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예전처럼 마냥 빈둥거리는 것은 아니었고 그 나름대로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다.
남들이 그의 수련 장면을 보았더라면 본격적으로 수련할 정도에 마무리를 지었지만 동천으로서는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침마다 시간을 할애하여 운기조식을 하던 것도 그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는데, 그것과 더불어 무공까지 수련했으니 어찌 대단한 발전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가만 있자. 상쾌한 건 상쾌한 건데 언제까지 지도나 그리는 짓을 해야하는 거지? 남쪽에서는 천하의 난다긴다하는 인간들이 모여들고 있는 실정인데 본교의 인원을 이만큼이나 낭비해도 될 만큼 우리가 그렇게 인재가 넘쳐났나?”
처음에는 굵직한 문파들만이 냄새를 맡고 사천의 남쪽으로 몰려들었지만 한 손으로 두 입을 가리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시간이 흐르자 그것은 비밀이 아닌 비밀로 공공연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무림에 뜻을 둔 자들은 죽음이 바로 지척임에도 불구하고 부나방처럼 사천을 향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오는 족족 그들을 차단하거나 살인도 서슴치 않았던 정도와 마도의 문파들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무림인들로 인하여 한계를 느끼자 나중에는 아예 손을 거두게 되었다.
그런 것으로 사람들을 막느니 자파의 인명피해도 줄일 겸, 차라리 그들로 하여금 천마동의 소재지를 찾는데 조금이나마 이용하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화도 요즘 그것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것 같고……. 우씨, 괜히 옆에 있다가 피 보는 거 아냐?”
사정화는 새로운 책임자인 금요랑에게 남쪽의 상황을 설명하며 북쪽은 최소한의 인원에게 맡겨 놓고 이동하자는 건의를 수 차례 올렸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상부의 지시가 없이는 곤란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사정화로서는 그녀의 지위를 이용하면 금요랑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것은 임명권자를 무시하는 처사이고 이런 전례를 남기면 차후에 위계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는 불씨를 남기기 때문에 참는 도리 밖에 없었다. 사실 금요랑도 남쪽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차기 교주가 되실 분의 안전이 더욱 중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약소전주님, 사 아가씨께서 부르십니다요.”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있다가 퍼득 정신을 차린 동천은 심부름꾼이 된 일반무사에게 물었다.
“왜?”
사내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저 같은 것이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요.”
안 그래도 그렇게 생겼다고 생각한 동천은 고개를 끄덕인 뒤 사정화의 거처로 향했다. 두어 달 전에 제법 큰 산적 떼를 소탕한 뒤 들어선 곳이라 사정화의 거처를 찾기가 애매했지만 눈대중으로 돌아다니다가 집 앞에 호위무사가 즐비한 곳만 찾으면 되었기에 그렇게 어려운 길 찾기는 아니었다.
“헤헤, 아가씨께서 부르셨다면서요? 어? 금 누님도…, 아니 요림주님께서도 계셨네요?”
금 누님이라는 부분에서 사정화의 눈살이 찌푸려지자 동천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이유인 즉, 나이차이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누님누님 하고 다녔으니 좋게 보아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동천은 그 문제에 관하여 금요랑이 먼저 그렇게 불러달라고 부탁했다는 변명을 해보았지만 불러달라고 그렇게 부른 놈이 생각 없는 놈이라는 대답만 들었을 따름이었다.
“호호, 천 동생 왔어?”
금요랑은 동천과 달리 대놓고 동생이라고 불렀다. 사정화는 그런 그녀의 성격을 알았음인지 이번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 그런데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대답은 사정화가 해주었다.
“별거 아냐. 비무의 증인이 되면 돼.”
동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에? 비무요? 누구랑요?”
그러자 금요랑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동생. 나하고 여기 아가씨하고의 비무.”
잠시 머리를 굴린 동천은 물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평소의 비무와는 다른 은근한 기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설라무네, 왜 갑자기 비무를…….”
금요랑의 설명은 간단했다. 오늘도 그녀를 찾아와 자신만이라도 남쪽으로 내려가게 해달라는 사정화의 청을 거부했더니 다른 때와는 달리 집요하게 그 이유를 캐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냉정하게 아가씨의 실력으로는 절대 그곳에서 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해주었는데 사정화가 대뜸 금요랑에게 요림주를 이길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되겠느냐고 물어와 서로들 한 명씩 참관인을 내세워 결과에 승복하자고 말한 뒤 사정화 쪽에서는 동천을 부르고 금요랑 쪽에서는 아수전의 부전주인 귀홍마(鬼紅魔) 조찬(曺贊)을 부르기로 했기에 지금 동천이 이 자리에 오게 된 연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참나, 정화 쟤는 쓴맛을 본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를 못 참고 위험한 곳으로 가려는 거지? 하여간 온실에서 자란 것들이란……. 쯧쯧.’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던 동천은 언젠가 터질 일이 이런 상황으로 번진 것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흥미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거짓이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 거라면야 제가 오히려 영광스럽죠. 헌데, 아수부전주님은 아직 안 오셨네요?”
“호호, 기별을 보냈으니 곧 올 거야.”
금요랑의 말대로 잠시 기다리자 일반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듯한 키의 길쭉한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와 인사를 올렸다.
“제가 제일 늦은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사정화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이제 왔으니 시작하지.”
매사에 간단명료한 것을 선호했던 그녀답게 앞뒤 절차를 무시한 채 비무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금요랑의 생각은 알 수 없었지만 한 무리의 우두머리답게 짙은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호호, 급하기도 하셔라. 좋아요. 진검을 사용하는 만큼 서로 조심은 하겠지만 검에는 눈이 없음을 기억해두셔야 할 거예요.”
마치, 자신은 잘 조절할 수 있지만 아가씨는 미숙하니 신경을 써달라는 대답처럼 들렸다. 그러나 사정화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여줄 따름이었다. 동천이라면 발끈했겠으나 심기가 깊었던 만큼 그런 말로는 동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챙!
사정화가 먼저 검을 뽑자 맑은 검명(劍鳴)이 흘러나왔다. 금요랑은 살짝 웃더니 허리의 금색 요대를 풀어 진기를 주입시켰다. 연검이라고 불릴 만큼 양날이 날카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한눈에 보아도 보통 재질은 아닌 듯 한 비범함이 엿보였다.
서로들 말없이 잠시 시선을 공유하던 순간 사정화의 검이 느릿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바람을 가르며 금요랑에게 밀려들었다. 슬쩍 뒤로 물러선 금요랑은 요대를 움직여 그녀의 주위로 현란한 빛의 막을 뿌려대더니 냉큼 앞쪽으로 돌진했다.
사정화의 움직임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빠르기였다. 급히 본신의 수라진결(修羅眞訣)을 9성 가까이 끌어올린 사정화는 비전신법인 수라잠연공(修羅潛然攻)을 사용하여 간발의 차이로 후퇴할 수 있었다. 약간 창백해진 안색으로 보아 급하게 내력을 끌어올리느라 무리를 한 듯 보였다.
“호호, 또 갈게요.”
얄미울 정도로 밝게 웃음을 머금은 금요랑이 움직이자 사정화는 공격을 막아내는 것 자체도 버거웠는지 연신 물러서며 어느 방향으로 휘어져 들어올지도 모르는 요대를 쳐내느라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본 동천은 즐거운 마음으로 고수들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이햐! 전주급이 되니까 역시 정화라도 버겁구나. 하긴, 정화 쟤가 좀 놀았어? 아무리 천재라 해도 노력 없이는 고수를 넘어설 수 없는 법이라구.’
촤촤촤촥!
묘한 소리로 공기를 헤집으며 요대가 사방으로 넘나들자 겨우 속도를 따라잡아 금요랑의 공세를 비스듬히 흘리는데도 충격을 완화하기가 쉽지 않은 듯 요대를 막을 때마다 검을 쥔 사정화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빛은 밀리는 상황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듯 휘어져 들어오는 요대의 곡선을 따라 무심히 움직이며 각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대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어서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연습은 실전같이, 실전은 연습같이 라는 말이 있듯 패배자는 변명할 이유를 주지 않는 법이었다. 금요랑이 자신에게 진다해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 다시 해보자고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방심은 곧 패배!’
기회라고 생각했던지 순간적으로 눈을 번뜩인 사정화가 단전을 폭발시켰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진기의 덩어리는 이내 전신에 퍼져있는 기운을 단 한줌조차 남기지 않고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충만하다 못해 터질 듯이 진기를 수용한 단전은 진정한 두 번째 폭발을 일으켰다.
꽈광!
그녀의 귓가로 희미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울러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온몸을 불태우며 휘감아 돌았다. 그녀는 수라마가 최후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는 혼원대천력(混元大天力)을 펼친 것이다.
일반적으로 잠력을 격발하여 순간적이나마 내공을 늘리는 방법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따른다. 사람의 생명유지에는 일정 분량 이상의 기운이 필요한데 여타의 무공이나 단환들은 그것들까지 모두 끌어들여 사용하게끔 만들어놓기 때문에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당사자는 느끼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오장육부와 그 외의 기능들을 모두 상실하게 되어 시간이 흘러 그 효과가 사라지게 되면 폐인이 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잠력을 격발시키는 무공들은 효과가 사라진 후의 부작용 때문에 악용되거나 알면서도 죽을 각오를 하고 배우는 방법 밖에 없었지만 그녀가 알기로 부작용 없이 내력을 2배 가까이 끌어올릴 수 있는 무공은 수라마가의 혼원대천력 밖에 없었다. 적어도 혼원대천력은 최소한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기운들은 남겨놓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주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필요한 생명력을 끌어다 쓴 만큼 보름정도는 본신 내력의 4할 이상은 사용할 수 없었다. 주위의 상황이 안전하다면 사용해도 무방한 무공이었지만 그 반대라면 순간적인 위험에서만 벗어날 수 있는 양날의 검인 셈이다.
파팟!
수비에 치중하던 사정화가 착시현상이라고 착각할 만큼 하나의 선이 되어 금요랑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앗?”
기겁을 한 금요랑이 검세를 바꾸어 사정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매서운 검풍이 불어닥치자 균열이 가는가 싶더니 이내 가야할 검로에서 벗어나 통제를 잃고 좌우로 튕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급해진 그녀는 피하려고 했지만 기선을 제압한 수라마가의 검법은 녹록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금요랑은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목을 타고 흐르자 내심 어처구니없어 했다. 설마하니 주군인 사비혼이 아가씨에게 혼원대천력을 전수해주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아가씨를 끔찍이 여기시는 주군께서 이렇게 위험한 혼원대천력을 벌써 전수해주셨을 줄이야. 나는 적어도 교주위를 물려받으신 다음에나 전수해 주실 줄 알았는데…….’
앞서 혼원대천력을 좋은 쪽으로만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가가 따르는 일에 만만한 것은 없는 법이다. 앞서의 설명에 틀린 점은 없었지만 이 혼원대천력의 위험성은 시전자가 자신의 최소 생명력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사람마다 지닌 생명력이 다른 법인데 무공을 창시한 자, 혹은 앞서 배운 누군가가 그 생명력을 수치로 적용해놓지 않은 다음에야 자신이 직접 실험해보고 점점 더 늘리거나 줄이지 않는다면 훗날 실전에서 사용될 때에 죽음을 전제로 도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매일 당부해도 결코 과함이 아닌 것이 혼원대천력은 무욕(無慾)을 전제로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조금만 더 생명력을 끌어다 써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흐를 수록, ‘아냐, 저번보다 조금만 더 끌어다 쓸 수 있다면 진짜 위험한 순간에 내가 살아날 확률이 더욱 높아져. 조금만 더 끌어볼까? 아니면 더?’ 라는 과욕을 부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폐인이 되었던 수라마가의 조사가 실제로 있어서 한때 대(代)가 끊길 뻔했으나 다행이 아내가 임신을 한 상태여서 가까스로 수라마가의 대를 이을 수가 있었다. 이후로 5대를 이어져오며 금기 시 되는 무공으로 잊혀졌다가 극적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어 오늘날까지 무사히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내가 이겼지?”
차가운 목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린 금요랑은 전력을 다해 승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아가씨를 안전하게 모셔야하는 입장인데 이제 어쩔 도리가 없이 위험한 전장으로 내보내야 했던 것이다.
“휴우. 네, 제가 졌어요. 하지만 제가 아가씨게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제 질문의 대답 여하에 따라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으니 깊이 생각하시고 대답해주시길 바랍니다.”
결과를 뒤집는다는 말에 사정화가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로서는 요림주가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자신을 못 가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를 뒤집어? 결과가 이렇게 뻔한데도 내가 우습게 보여?”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 몰랐던 금요랑은 급히 웃는 낯으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호호, 감히 그럴리가요. 오해는 하지말고 들어보세요. 아마도 충분히 납득하실 테니까요.”
그제야 사정화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좋아. 들어는 보겠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금요랑은 말했다.
“네, 그러니까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이거예요. 만일 방금 사용하신 무공으로도 제가 막았더라면 더 끌어다 쓰셨을 생각이셨나요?”
사정화는 상대가 금요랑이었던 만큼, 결코 그녀 스스로가 검증했던 것 이하의 잠력을 사용했을 리 만무했다. 여기에서 금요랑은 혼원대천력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과욕을 버려야 한다는 선대의 유언을 걸고넘어지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서 한가지 실수를 했다. 매사에 거짓이 없는 사정화였지만 자신의 명예를 걸거나 무언가 소중한 것을 걸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었던 만큼 그런 것쯤이야 거짓으로 대답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리고 생각보다 조금 끌어다 썼을 뿐이야. 봐, 지금쯤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해야 정상인데 이렇게 멀쩡하잖아.”
안색이 약간 창백하긴 했지만 모습을 보건대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금요랑은 여자의 직감 상 무언가 꺼림직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가씨를 잡을 만한 명분이 완전히 사라진 셈이자 난감함을 느꼈다. 이때 사정화가 대답을 종용했다.
“피곤하군. 이제 됐어?”
금요랑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아가씨. 당장은 어렵겠으나 상부에 보고를 드리고 20일 이후에는 확실히 떠나실 차비를 갖추어 놓겠습니다.”
사정화는 너무 늦는 것 같자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듯 금요랑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살짝 열렸던 입술을 다물었다. 그런 뒤 그저 고개만 끄덕여준 그녀는 시선을 다른 이에게로 돌렸다.
“동천. 따라와.”
“예? 저, 저요? 왜요?”
놀라서 대꾸한 그를 사정화가 쏘아보았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동천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하하, 제가 뭐라고 했나요? 그냥 뜻밖이어서 그랬던 거예요. 진짜예요.”
동천은 나름대로 열심히 변명을 했지만 사정화는 이번에도 대답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화가 난 동천은 내심 욕을 하며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닫고 들어간 동천은 하던 욕을 중단해야만 했다. 사정화가 난데없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욱욱!’ 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헉? 저년이 이 몸을 배신하고 딴 놈과 눈이 맞았구나!’
일견 입덧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배신을 하고 당할 관계도 아니었을 뿐더러 사정화가 느닷없이 애정에 엮일 성격도 아니었기에 망상은 망상으로 끝마쳐야 했다. 중요한 것은 입을 가린 그녀의 손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엇, 아가씨!”
“들려. 조용히 해.”
얼굴은 물론 드러난 피부 곳곳이 새하얗게 물들어버린 사정화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데 억지로 버티고 서 있었으니 자연히 눈에 힘이 들어갔던 것이다.
“예? 예에. 그보다 내상을 입으신 겁니까? 아까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는데? 아니, 그보다 빨리 운기조식을 취하셔야죠.”
혼원대천력의 존재여부와 비밀은 전주급 이상에서만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기에 동천은 그저 일반적인 내상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기운을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는 운기조식으로서는 혼원대천력의 후유증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내공의 소모와는 궤를 달리하는 무공의 폐해이거늘, 북돋아줄 기운이 존재해야 하는 시늉이라도 보여줄 것이 아니겠는가.
“운기조식으로는…… 소, 소용없어.”
어지간해서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정화가 안면근육을 파들파들 떨며 쥐어짜듯 말했다. 그녀의 이마에서는 굵게 맺혀 있던 땀방울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들어 왔다가 당황한 동천은 서둘러 말했다.
“그럼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후딱 부전주님을 모셔올 테니까!”
사정화는 실로 기민하게 동천의 팔 소매를 잡았다. 하지만 휘돌리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천에게 말했다.
“아, 아까 요림주와의, 이야기에서 대충 느꼈을……. 후우, 후.”
동천은 눈치의 제왕답게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하! 그러니까 부전주를 데려오면 심각하게 다친 것을 금 누님이 알 수 있을 테고, 그것을 빌미로 발이 묶이게 되니 데려오지 말라는 것이로구나. 근데, 그러면 치료는 누가 해주라고 이 지랄이지?’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뜻이 통한다는 것으로서 동천이 자신이 말린 의도를 간파했다고 생각한 사정화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역천에게, 허, 헛배운 것은 아니겠지?”
동천은 기겁했다.
“예에? 제가 아가씨를 치료하라고요?”
침대 아래에서 주저앉아 겨우 몸을 기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은 몰랐지만 사정화는 애초에 이런 일을 예상하고 그를 참관인 자격으로 불렀던 것이었다. 그녀가 이런 일이 아니었으면 할 일없이 동천은 왜 불렀겠는가.
“그래. 고쳐.”
‘차라리 나보고 한끼 굶으라고 해, 이년아.’
그 순간에도 두끼라고 말하려다 한끼로 줄인 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 못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언 뜻 보아도 심각한 상태인 듯 보이는데 자신이 고친다고 나섰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신의 화려했던 부귀영화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고민을 감지했는지 사정화가 미끼를 건네주었다.
“동천. 완전히… 내상을 다스리라는 것이 아냐. 헉헉, 그저 운신만 하게끔 고치면 돼. 그, 그 정도만 고쳐도 훗날 1가지 정도의 잘못은 눈감아 주겠어…….”
눈을 번뜩인 동천은 ‘진짜요?’ 라고, 되물어보고 싶었지만 사정화의 눈꺼풀이 감겨들며 숨소리조차 미약해져가자 그제야 상황의 급박함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진맥부터 시작한 동천은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맥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씨팔!”
급해진 동천은 사정화의 코끝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보았다. 다행이 미약하나마 숨은 쉬고 있었다. 사실 맥이 끊긴 것은 아니었는데 급하게 진맥하려고 하다보니 너무도 미약하여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었다.
‘흐아, 이년이 아주 멀쩡한 분 빨리 늙게 하려고 용을 쓰는구나.’
사정화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긴장이 풀려 기운이 쏙 빠져버린 동천은 느슨해진 긴장을 다시 곧추세울 필요성을 느꼈다. 안도만 하고 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진맥을 시도했다.
“젠장할. 이러니 이 몸이 맥을 놓쳤지……. 그런데 내상은 내상인데 누가 흡성대법이라도 펼쳤나? 겉은 멀쩡한데 내부는 죽은 송장 저리 가라네?”
급한 대로 팔목을 통해 진기를 흘려보내 준 동천은 사정화의 단전으로 보낸 자신의 귀의흡수신공이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덧없이 흘러 들어가서 흐지부지 사라지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껏 귀의흡수신공을 응용하면서 이랬던 적은 단연코 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뭐가 잘못된 거지?”
동천은 땀이 흥건해진 얼굴로 진기를 유도하며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이어 그는 확실하진 않지만 의심이 될만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들어온 진기는 손님일 뿐이어서 주인(단전)이 반갑게 맞이하지 않는다면 머쓱하게 집을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편했는데, 현재 사정화는 생명력의 고갈로 손님을 맞이해 줄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지라 애꿎은 동천만 내공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이 몸의 내공이 단전으로 흘러 들어가는 와중에 신체 내부 곳곳에 영향을 줘서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역시 정화의 단전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이 몸이 화경에 도달하지 않는 한 어려워. 으으, 어쩌지?’
많은 것도 아니고 조금이면 되었다. 사정화의 단전에 티끌 만한 불씨라도 지펴준다면 어떻게든 화력을 올려 볼 수 있겠는데 아쉽게도 그 매개체가 없었다. 인위적이긴 하지만 영약 같은 것에 의존하여 빌려다 쓰지 않는 한 동천 혼자서 사정화의 전신에 진기를 골고루 불어넣어 준 뒤, 죽어 가는 기관들을 활성화시켜서 그 생명력들을 약간씩 나누어 단전에 분배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 고갈된 그녀의 단전을 다시 채워주기까지 해야했으니 혼자서 다 하려면 죽어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야 쉽지. 그저 다친 것이었으면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이건 송장에다 진기를 흘려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거기까지 주절거리던 동천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혹시나 그녀가 영약 같은 것을 소지하고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빨리 간단한(?) 몸수색을 시작한 동천은 곧 실망하고야 말았다. 나오는 것은 없고 그저 애꿎은 손만 호강했던 것이다. 물론,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휴, 너 거지냐? 곧 교주위(敎主位)에 오를 애가 이런 위험지역에 나오면서 영약 같은 것도 챙겨오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 이런 씨…, 아흐∼. 밖에까지 들릴까봐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어쨌거나 그런 건 이 몸도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시는데……. 잉? 내가 있었지, 참!”
동천은 일전에 은중각에서 암흑마교로 돌아오다가 혈사교와 시비가 붙었을 때 선물(?)로 받았던 호심혈왕단(護心血王丹)의 존재가 떠올랐다. 서둘러 품속을 뒤지자 간식 겸 비상식량 주머니를 비롯하여 읽다만 책들 외에도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주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그 많은 부피가 들어가고도 가슴팍에 티가 나지 않았는지는 몰랐지만 그것들을 헤집기 시작하자 곧 하얀색 작은 약병이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그것을 집어든 동천은 서둘러 마개를 땄다.
뿅!
듣기에도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심신을 맑게 해주는 청아한 향기가 약병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을 기울이자 손가락 마디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검은색 단환이 한 알 흘러나왔다. 그것을 본 동천은 잠시 아까운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단환 하나 아끼자고 파멸의 길로 접어들 수는 없었기에 결단의 시기는 의외로 빨랐다.
“그래,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자. 그래도 한 알은 남잖아? 하하! 동천아, 역시 넌 가슴 따듯한 남아다!”
그런 놈이 미친개를 운운하는 것은 모순이었지만 그렇게 라도 자위하지 않으면 속이 무척 쓰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먹이지?”
잘 녹는 것인가 보려고 혀로 살짝 단환의 끝을 핥아보자 달콤한 맛과 함께 절반 이상이 스르르 녹아버렸다.
‘헉? 끝만 조금 핥았을 뿐인데 뭐가 이렇게 다 녹아?’
놀란 그는 이미 침으로 화(化)해버린 절반 가량의 호심혈왕단과 손안의 단환을 복잡한 심경으로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곧 남은 단환을 마저 입안에 집어넣었다. 이어 그는 혀로 끈적거려진 침을 가만히 훑어본 후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실신한 사정화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그래. 이 몸이 조금 밑지긴 하지만 직접 먹여주자. 입맞춤정도는 그때 질리도록 다 해봤는데 여기에서 또 한다고 정화의 입이 닳겠어? 하아, 난 역시 너무 착해.’
환자를 우선시하는 자신의 행동에 만족해하며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한 동천은 꿈꾸는 듯한 사정화의 고운 얼굴과 살짝 미소마저 걸려있는 그녀의 입술을 보게 되자 한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진짜 아픈 여자의 실신한 표정이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진짜로 요물이 따로 없구나. 거참, 부교 주님의 얼굴에 어떻게 이런 애가 태어난 걸까?’
동천은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뒤이어 그는 그녀의 볼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짝 넘겨주었다. 진땀을 흘려 젖은 머릿결이 뽀얀 그녀의 볼 살에 달라붙어 있자 묘한 색기가 흐르는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기 때문이다.
“휴우! 이제야 좀 낫네.”
동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달콤한 목 넘김을 음미하며 입맛을 다셨다. 자신도 모르게 갈증이 일어났던 것이다.
“가만, 그런데 왜 내 입에 침이 없……, 컥?”
거기까지 생각한 동천은 갑자기 파랗게 질려버리기 시작했다. 바로 사정화의 입으로 들어가야 할 호심혈왕단이 아까 자신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흐미, 좆됐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동천은 갑자기 자신의 목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먹은 걸 다시 쏟아보겠다는 추잡한 생각의 발로였다.
“안 돼! 토해야 해! 욱, 우욱!”
입안에 손가락까지 넣어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헛구역질뿐이었다. 아울러 뱃속이 뜨듯해지기 시작하자 동천은 당황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영약 1개를 허무하게 날리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천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내 생에 쥐꼬리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년 같으니라고! 지금 먹으면 몸에는 좋긴 하겠지만 정작 비상시에는 어떻게 버티라고 날 유혹해서 꿀꺽 삼키게 만든 거지? 어휴, 상전만 아니었으면 그냥 콱!’
머릿속에서는 쉴새 없이 사정화를 구박했지만 그의 행동은 상당히 기민했다. 마지막 단환을 꺼내어 입에 넣은 뒤 사정화와 입맞춤을 하며 혀를 이용해 닫힌 입술을 열고 녹아든 단환을 흘려보내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것저것 느낄 사이도 없었던 동천은 약간 비릿한 피비린내만이 혀끝을 자극하자 뒤늦게 사정화가 피를 토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는 쩝쩝거리며 말했다.
“쳇, 졸지에 흡혈박쥐가 됐잖아?”
한차례 투덜거린 동천은 사정화의 신형을 돌려 등을 보이게 한 뒤 양손을 명문혈로 지긋이 가져다 댔다. 원래는 양손을 마주 대고 내공을 순환시켜야 힘이 덜 들었지만 사정화가 실신하여 그것이 어려웠던 만큼 무리가 없고 안전한 방법을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우우웅!
손바닥과 접촉부위의 공명으로 미세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신속하게 끝내기 위하여 귀의흡수신공을 전면 개방한 동천은 사정화의 등을 통해 끊임없이 흘려 보냈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흩어지려는 호심혈왕단의 기운을 그녀의 단전으로 이끌었다.
동천으로서는 오로지 자신의 내공만으로 그것들을 다스리려니 상당히 힘들었지만 일단 물길을 터 주자 그 다음부터는 죽어가던 사정화의 신체가 반응하기 시작하여 차츰 씩 관리하기가 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동천의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윽? 내 몸 쪽에 호심혈왕단의 기운을 다스릴 내공이 없어서 약 기운이 제멋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잖아?’
그랬다. 역심무극결을 일으키면 쉬웠지만 그렇게 하면 성격이 바뀌게 되므로 곤란했다. 더군다나 갑작스레 생각난 것이 현재 자신의 귀의흡수신공이 거의 사정화의 몸으로 들어간 상태인데, 여기에서 역의 성격이 딴 마음을 품고 손을 뗀다면 영원히 자신의 성격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던 것이다.
‘어라?’
바로 그때 사정화의 단전에 모여든 단환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필요한 곳을 찾아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녀의 단전은 다시 비워지게 되었지만 동천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극심한 생명력의 소모 때문에 어지간한 기운으로는 단전이 활성화 될 수 없었던 거였어. 애초에 단전을 노려서는 안 되었고, 처음부터 전신을 안정시킨 후 단전이 제일 나중이었던 거야! 하하,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잖아?’
무언가를 깨닫는 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동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쉽게 접할 수 없는 현상을 해결하게 되었을 때 그 쾌감이란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동천이 깨달은 것은 일견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그렇지가 않다. 무림인의 전신에 생명력이 고갈되었을 때 단전을 활성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신을 먼저 안정화시켜야 한다는 것의 차이는 생사를 가를 정도로 대단히 중요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아무리 단전의 활성화에 안간힘을 써도 결국에는 생체기능이 정지되는 것이니, 이는 죽은 자를 붙잡고 용을 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과 같다고나 할까? 만일 동천이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면 사정화는 죽었을 것이 분명했으니 그가 어찌 안도하고 기뻐하지 않겠는가. 각설하고, 생각을 굳힌 그는 자신의 몸 안에서 통제가 안 되고 있는 단환의 기운들을 사정화에게 밀어 넣기 시작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그녀의 단전으로 흘러간 기운들은 잠시 그곳에서 머무는가 싶더니 곧 골고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몸이 가뿐해진 동천은 사정화의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기운들과 어울려 귀의흡수신공을 운용했다. 수없이 흐르고 흐르게 만들어 그녀의 몸을 안정시키자 단환의 기운들이 거의 소모되고 없어졌다.
하지만 동천은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감내하며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사정화에게 2개의 단환을 모두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능력으로는 감당해내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휴우! 정말로 운이 좋았다. 아까 정화가 이 몸을 유혹해서 침을 삼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역심무극결을 끌어다 쓰고도 주화입마에 걸려서……. 으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아직도 사정화가 자신을 유혹한 거라고 우기는 중인 동천은 한차례 부르르 떨고 난 뒤에 그녀의 단전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앞서 그녀의 전신을 안정시켜 놓아서 그런지 조금씩 기운들을 끌어 모아 단전으로 몰아넣었음에도 별다른 거부반응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되려 물 흐르듯 진기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슬쩍 미소한 동천은 이제 본격적으로 내공을 순환시키며 하나의 고리를 연결하듯 사정화와 자신의 단전을 일치시켰다. 곧 서로 공유하기 시작한 내공의 흐름은 회전에 회전을 거듭할수록 전신을 상쾌하고 짜릿한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흐흐, 이거 저번에도 느꼈던 거지만 진짜 기분 좋다. 서로 어루만져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이상의 즐거움도 있고 말이지. 으흐흐.’
시작단계부터 이것을 노리고 있었던 동천이니 만큼 그 즐거움은 더욱 배가되었다. 더군다나 치료 효과도 뛰어났고 그 중에서 내상치유 전문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는 수법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에게도 떳떳했다. 또한, 사정화가 미처 흡수하지 못한 단환의 기운을 그가 흡수하기까지 했으니 아깝게 날린 것을 어느 정도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