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647화


“음! 이건 무언가 음모가 있었던 것이 분명해. 고작 이틀이라니? 20년을 수련해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이 몸이었는데 사흘도 아니고 나흘도 아니고 닷새도 아니고 엿새도 아닌 고작 이틀? 쓰읍, 아무리 생각해봐도 석연치 않네 이거?”

끝까지 자신의 의지박약을 시인하지 않는 중인 동천은 이틀을 버틴 것만 해도 비약적인 발전인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최소한의 편의로 만들어진 막사에 들어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막사 바깥은 간신히 공터라고 불릴 수 있는 곳으로서 현재 10여명의 사내들이 치료를 받으며 누워있는 중이었다.

사흘 전에 벌어진 전투로 사망이 7명, 사상자가 13명이었는데 그 와중에 상처가 심각했던 2명이 죽어서 최종적으로 11명만이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다.

“소전주님, 중상자 한 명이 결국 숨을 멈출 듯 합니다.”

입구의 천을 걷어내고 침통하게 보고를 올리는 의원의 목소리에 상념에 빠져 있던 동천이 정신을 차렸다.

“뭐? 한 놈이 기어코 뒈졌어?”

의원은 말을 해도 참 싸가지 없게 씨부리는 동천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은 죽은 게 아니오라 곧 그렇게 될 듯 보입니다.”

그거나 이거나 같은 말이라고 여긴 동천은 코웃음을 쳤다.

“참나, 그래서 뭘 어쩌라고?”

‘어쩌긴 뭘 어째 이놈아. 그래도 윗분이라고 보고를 드리러 온 거지.’

의원은 내심 못마땅했다. 이곳에 파견된 약왕전의 의원이라고는 자신을 포함하여 딸랑 두 명뿐이었는데, 오늘 점심이 되서야 뒤늦게 찾아온 눈앞의 약소전주가 환자들의 치료에는 관심도 없고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때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죽음을 앞에 둔 환자에게 하는 말도 예의에 어긋났고 말이다. 하지만 동천의 더러운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참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게… 실은 이 환자가 그래도 죽기 전에 약소전주님의 치료를 한번 받아보겠다고 간청을 올리는 바람에…….”

눈을 반짝인 동천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런 뒤 살며시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흐음! 하긴, 이 몸의 의술이 하늘에 닿기는 닿았지. 좋아, 간만에 솜씨를 발휘해 볼까나?”

의원은 괜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환자가 간곡히 원해서 말을 건네긴 했는데 어째 그 환자가 편히 죽지도 못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활은 시위를 떠났고 동천 또한 밖으로 나갔다. 재빨리 약소전주를 뒤쫓아간 의원은 그가 흉부에 헝겊을 두른 채 눈을 감고있는 사내를 진찰하자 조심스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소전주님, 이자가 아닌데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후 동천이 버럭 화를 냈다.

“나도 알아! 넌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냥 이자의 몸 상태가 어떤지 잠시 살펴봤던 것일 뿐이라구!”

의원은 알려줘도 지랄인 약소전주의 행동에 분통이 터졌지만 시간이 없는 환자를 생각해서 애써 자신의 행동을 자위했다.

“소인이 소전주님의 깊으신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오나 그자가 워낙 촌각을 다투는지라 무례를 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하회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서둘러 그자의 진찰을 부탁드립니다.”

동천은 자신의 성냄에도 주눅들지 않고 하고싶은 말들을 쏟아낸 눈앞의 의원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대게 이런 자들은 굽실거리기에 바빴는데 이자는 조금 다른 듯 보였던 것이다.

“음, 자네 이름이 뭔가?”

“승낙천(陞珞千)입니다.”

“직위는?”

“활의당(活醫堂)의 조제의원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진중하게 물었다.

“그래, 숭 의원. 그 환자가 어디에 있나?”

승낙천은 말했다.

“저어……. 숭이 아니라 승입니다. 승낙천.”

그러자 동천이 언제 존중해주었냐는 듯 짜증을 냈다.

“이런 젠장! 숭이나 승이나! 아무튼 그 환자 어디에 있냐니까?”

더 이상 성질을 건드려봤자 자신만 손해임을 간파한 승낙천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30대의 사내에게 동천을 안내했다.

사내는 왼쪽 안면이 망가져서 대각선으로 두터운 헝겊을 싸매고 있었고, 복부와 양쪽 다리 또한 심한 상처로 인하여 헝겊이 빨갛게 절어 있었다. 사내는 동천의 등장에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말없이 진맥부터 시작한 동천은 힘이 없고 곧 끊어질 것만 같은 사내의 맥박에 아무래도 정상적으로는 살아나기가 글렀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그는 진기를 불어넣어 주며 마지막 유언 정도는 들어주고자 했다.

“아쉽게도 자네는 회복이 불가능하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지금 하시게. 어지간해서는 다 수용해줄 테니까.”

죽는다는 소릴 듣고 ‘아, 그런가요?’ 라고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고 싶은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던 사내는 어디에서 힘이 생겼는지 억센 손으로 동천의 팔을 부여잡았다.

“흐윽, 죽다니요! 전 살고 싶습니다요. 흑흑흑!”

동천은 울먹이며 자신의 팔을 잡아 챈 사내를 바라보았다. 삶의 의지가 엿보이는 사내의 일그러진 얼굴은 한동안 동천의 뇌리에서 잊혀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동천은 괜찮았다. 지가 아무리 질질 짜도 죽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또 자신이 죽는 게 아니었으니까.

헌데, 문제는 사내의 손이었다. 핏물에 뒤엉켜있는 사내의 손이 천금을 주고도 모자랄 자신의 옷을 짓이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이? 너 이 옷이 얼마짜리인줄 알아? 놔! 안 놔? 어어? 진짜 안 놔?”

사내는 매정하게 자신을 뿌리치는 약소전주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놨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곤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쳤다.

“제, 젠장! 그 따위 옷이 내 생명보다 소중하단 말이오? 흐으, 흐으! 캬악, 퉤! 피, 필요 없다! 크흐흑, 나 박심(朴心)! 더러워서 더 이상 구걸을 않겠다! 끄으으으…….”

기실, 살려달라고는 했지만 박심도 무인인 이상 자신이 회생할 가능성이 없음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동천의 행동은 꺼져 가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행위였고, 간이 커진 박심은 대드는 것을 넘어서 그의 옷에 침까지 내뱉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당연히 동천은 분노했고 말이다.

“컥? 치, 치이임? 이런 죽일 놈의 개자식을 봤나!”

멱살을 쥐어 잡은 동천이 마구 흔들어대며 박심을 몰아붙이자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승낙천이 다가와 적극적으로 동천의 행동을 말렸다.

“소전주님, 이러지 마시고 진정하십시오! 곧 죽을 사람입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누군들 제정신일 수 있겠습니까!”

다 맞는 말이었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법도 했다. 거기에다 그 당한 사람이 동천임에야 설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거 놔, 씨팔! 감히 이 몸에게 침을 뱉어? 이 개 쓰벌 잡종 놈의 새끼가……, 얼레? 이 비겁한 놈이 지 할 짓은 다했다고 바로 죽으려고 하네?”

아닌게 아니라 박심의 생명력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아까는 동천이 흘려보내 준 진기 덕분에 가까스로 힘을 뽑아낸 것이었는데 그것이 끊기자 서너 배나 빠른 속도로 악화되어 가는 중인 것이다.

“흐미! 내 생전에 이렇게 더러운 기분은 또 처음이네?”

어처구니가 없었던 동천은 순간 갈등했다. 아직 생명이 남아있을 때 한 대 후려쳐서 죽이느냐, 아니면 일단 살려놓고 죽을 때까지 뚜드려 패느냐.

이 두 가지 사안을 놓고 말이다.

이때 전자의 경우는 그거 한 대 때려서 분이 풀리지 않는 대신 힘 하나 안 들어서 좋았고, 후자의 경우는 속 시원하게 쥐어 팰 수 있어서 기분은 좋을 테지만 살려내는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동천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뒤 결국 후자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놈이 질질 짜면서 비는 모습을 보지 않는 한 두고두고 생각이 나서 자신의 생활에까지 지장을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승낙천을 바라보며 무섭게 말했다.

“야! 숭씨! 지금부터 이 새낄 치료하려고 마음먹었으니까 내가 먼저 막사를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심심해도 들어올 생각하지마. 알았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나중에 기어들어 와서는 이 씨팔놈의 상태가 어떠냐 느니, 살릴 수는 있겠냐 느니 등등. 이따위 질문들을 하기만 했다봐. 아주 그냥 확! 주둥이를 찢어서 니 눈깔에다 쑤셔 넣어줄 테니까. 알았어?”

정말 살벌한 놈이라고 생각한 승낙천은 다소 얼이 빠진 상태였지만 겨우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었다.

“예에…, 소전주님.”

그제야 정말로 마음을 굳힌 동천은 축 늘어진 박심을 안아들고 막사 쪽으로 급히 신형을 옮겼다. 그것을 본 승낙천은 아무리 그래도 곧 죽는다니까 정말로 말을 안 듣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으음!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행여나 소전주가 저자를 살리지 못한 분풀이를 애꿎은 환자들에게 쏟아 붓지는 않을까 걱정이로군.”

더불어 자신을 비롯한 의원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승낙천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것은 차후의 문제였고 지금은 환자들의 치료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초수급 문제로 잠시 외지에 나가 있는 정 의원이 돌아오면 그때 같이 상의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편, 막사 안으로 들어와 주변의 물건들을 전부 치우고 정 중앙에 박심을 내려놓은 동천은 마음이 급한 상태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아무 연관도 없는 인간이었는지라 죽던 말던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는데, 비록 좋은 쪽은 아닐지라도 일단은 살리고 봐야 하는 상황이 닥쳐오자 정말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너 임마 하여튼 살아나기만 해봐. 이 몸을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를 정말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줄 테니까.”

동천은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박심을 엎드려 눕히고 명문혈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이어 그는 순수한 귀의흡수신공을 끌어올렸고 잠시 후 동천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이런 썩을 놈 같으니라고. 외상만 입은 줄 알았더니 내상도 그에 못지 않게 심각하잖아?’

애초에 살릴 가능성이 희박하여 기본적인 침술과 약탕으로만 치료를 병행해서 그런지 박심의 내부혈도는 심하게 엉켜있는 상태였다.

몸을 보(保)하고 외상만 치료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동천은 뜻하지 않게 내상까지 떠맡게 되는 이중고를 겪게 되자 ‘지금이라도 그냥 시원하게 한 대 후려치고 끝낼까?’ 라는 갈등을 했다.

하지만 너무 자주 포기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면 앞으로 살아가는데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것쯤은 동천도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러한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다음 날 어김없이 시시콜콜한 내용의 서찰을 보게 될 것만 같아서 되려 오기가 샘솟았다.

앞서 계획표를 짜놓고 겨우 이틀 밖에 실천하지 못했던 일말의 아쉬움도 동천의 결심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무식하게 계획해서 실패한 것이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으으! 무, 무울…….”

길고 긴 미몽(迷夢) 속에서 깨어난 박심은 힘겹게 두 눈을 뜨려다 한쪽 안면이 쓰라리고 고통스럽자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잠시 통증을 인내한 후 오른쪽 눈을 살풋이 떠보자 적응이 더 필요한 것인지 모든 사물이 뿌옇게 보였다.

그 대신 피부로 느껴지는 외부의 자극은 이곳이 분명 저승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는 기뻤다. 자신은 틀림없이 죽을 줄만 알았는데 이렇듯 쌩쌩하게(?) 살아 있자 혹여 꿈은 아닌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손가락과 발가락들을 꼼지락거리는 것으로 자신의 생사여부를 확인한 박심은 기쁨의 눈물을 흘려가며 조심스럽게 내공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는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내상은커녕 진기의 흐름까지 막힘 없이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한번 안면근육의 고통을 호소한 박심은 그것보다도 예전보다 되려 정순 해진 자신의 내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치명상을 입었던 부위들도 예전과는 남달랐다.

당연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실신하기 전처럼 쉴새없이 칼로 후비는 듯한 통증도 없었고 왠지 모르게 활력이 느껴지면서 몸이 날아갈 것만 같이 가뿐해져 있었던 것이다.

부시럭!

그때 누군가 천 같은 것을 걷어내는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애써 고개를 들어 상대를 살피고자 했지만 복부의 통증과 이제는 웬만큼 보이기 시작하는 시야 때문에 사서 고생하기보다는 바로 힘을 풀고 물어보았다.

“으음, 누구십니까? 그리고 여기는 또 어디입니까?”

그러자 상대가 다가와 그의 앞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오오! 이제야 깨어났는가, 이 씹쌔끼야!”

일순간 당황한 박심. 어째 앞뒤의 단어조합이 영 아니었던 탓이다.

“예? 그게 무슨…….”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초점을 맞추며 눈을 가늘게 뜨자 박심은 그제야 서서히 뚜렷해지는 상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곤 마침내 ‘커허헉?’ 소리와 함께 바로 졸도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났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기뻐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되자 앞으로는 그것 때문에 살아있는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라는 공포감을 느꼈었던 것이다.

결국, 이래저래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박심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