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4화
“야.. 일어나. 소연아. 일어나 봐.”
내가 흔들어 깨우자 소연은 다소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계집애가 싸가지 없게쓰리.. 어느 면전(面前)에서 인상을 찡그려? 그러나 기절했다는 것을 감안해서 내가 참아야지…
“으음.. 누구…?”
쯧쯧.. 얘가 충격이 너무 컸나 보군. 나도 못 알아볼 정도니…
“나야. 네, 주인님.. 알아 보겠냐?”
“예에.. 주인님. 알겠어요…..”
휴.. 그래도 완전히 맛이 가진 않았구만..? 다행이다.
“내가 여기에 온 건 다름이 아니라 네가 어제부터 계속 보아온 여자 있지? 걔가 귀신이 아니라고 말해주려 온 것뿐이야.”
내가 진지하게 설명해줬는데, 소연이는 안 믿는 듯했다. 소연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어제 관속에서 일어났었다구요.. 제가 이 두 눈으로 정확히 봤다구요. 정말이에요.”
관(棺)? 호오.. 그러고 보니 그게 관이었구나… 얘가 생각 외로 아는 게 많은데? 그나저나.. 이 계집애가 어디서 두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우기는 거야? 내가 아니라면 알겠다고 하면 되는 거지.
“소연아. 내 눈을 똑바로 봐. 내가 지금 너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소연이가 나의 말에,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소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
콰과과-쾅–!!
갑자기 내 귓가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럴 수가…. 나의 초롱초롱하고 순진한 눈망울을 보고도 못 믿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소연의 말은 나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소연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릴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이년아! 다시 한번 말해봐!! 뭐? 못 믿어? 거짓말이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꺄악!! 잘못했어요.. 믿어요. 믿는다구요…”
흐흐흐… 진작에 그럴 것이지. 계집애가 이제야 수긍을 하는구만? 그래.. 좀 억지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생각하자.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린놈이 생각이 많으면 일찍 늙는다고 세가의 장 할아버지가 말했다.
참아야 하느니라…
“좋았어. 지금 말은 내가 못 들은 걸로 해줄게. 그럼 지금 당장 걔를 보러 가자. 일어나.”
“싫어요…”
“뭐? 그럼, 내 말을 아직도 못 믿겠다는 말이야?”
나의 날카로워진 말에 소연이는 다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구…”
“야. 아니면 지랄하지 말고 얼른 따라와. 걔는 진짜 귀신이 아니야.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강시일 뿐이야.”
나의 말에 소연이는 다시 두려운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다. 어? 얘가 왜 또 그러는 거지? 또, 울려고 하네?
“흑… 저도다 안다구요. 강시는… 강시는 주.. 죽은 사람을 깨워서 만든 것으로 사람의 간을 빼먹는다고 들었단 말이에요. 더군다나 저.. 저는 강시가 사람의 간(肝)을 빼먹는 것을 직접 보기까지 했었다구요.. 흑흑.. 저 안 가요. 무서워요…”
“쯧쯧쯧.. 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뭐.. 뭐가요?”
소연의 물음에 나는 소연의 주인답게 최대한으로 근엄하게 말해주었다.
“험험.. 잘 들어라. 이 어리석은 인간아.. 강시는 두 가지인데… 죽은 걸로 만드는 사강시(死 屍)와 산 사람으로 만드는 활강시(活 屍)가 있느니라.. 지금 네가 보러 가는 강시는 활강시이니라.. 그리고, 강시는 간을 빼먹지 않느니라. 또 그리고, 걔는 내 말만 듣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다. 이제, 알겠느냐..?”
나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거리며 뒤를 이을 소연의 말을 기다렸다. 헤헤.. 방광 늙은이의 책에서 읽었던 것을 여기에서 써먹게 되다니.. 이 지지배 아마, 굉장히 놀랐을걸?
“주인님…”
앗? 드디어 소연이 말을 꺼낸다. 나는 눈을 감고 다음에 나올 말을 기대하며, 최대한으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오오!! 그래. 무슨 말이냐?”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엉? 잘 나가다가 이게 무슨 소리야? 소연이 나를 보는 시선에 한심하다는 기가 다분히 드러났다. 으윽… 내가 저런 계집애한테까지도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다니.. 열 받는다.
“이씨.. 야! 내가 뭐를 잘못했다고 눈깔을 그렇게 부라려?”
내가 엄청 화가 나서 말했는데, 의외로 소연은 자기 할 말을 다했다.
“그게요. 그저께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요.. 그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게 조금도 아니고, 무지하게 안 어울려요. 생각해 보세요. 어리신 주인님께서 어른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걸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했었을 것 같아요?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안 했겠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어린놈이 꼴값을 한다고 생각했을 거라구요.”
엉? 그러고 보니… 생각하니까 그러네? 그래.. 분명히 그 자식들이 겉으로는 실실 거리면서 속으로는 어린놈이 꼴값한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꼴깝? 빗대어 말할 게 따로 있지.. 뭐? 꼴값이라고? 좋은 말 다 놔두고 꼴값이 뭐야! 호오라.. 너, 말은 안 했지만 나한테 불만이 많았던 거로구나?”
소연은 절대로 아니라는 듯이 양손을 다급히 휘저었다.
“아..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믿어 주세요.”
어휴.. 아픈 계집애를 때릴 수도 없고….
“됐어! 이년아! 보든지 말든지 나 갈 거야!”
나는 나를 부르는 소연을 뒤로한 채로 열 받아서 밖으로 나왔다. 에이.. 열 받아. 화도 식힐 겸, 연회 준비도 볼 겸, 사부님도 보러 갈 겸, 겸사겸사해서 연회장에 가봐야겠다. 나는 절대로 연회 준비를 보러 가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화를 식히러 가는 게 주 목적일 뿐이다.
“우와~! 끝내주는데? 이게 다 먹을 거야?”
진짜로 끝내준다..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성대하게 차린 음식들은 처음 봤다. 입이 찢어져라 벌리고 있던 나는 음식을 준비하는 하인들이 나를 쳐다보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런 데서 촌티를 내비칠 수야 없지.. 암. 그렇고말고..
나는 지나가는 하인에게 말을 걸었다.
“잘 돼 가냐?”
소연이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근엄한 목소리가 어색해졌다. 걔 말이 은근히 신경 쓰이네? 그래, 생각해보니 평소대로 사는 게 좋겠다. 어쨌든 나의 말에 음식을 바쁘게 나르던 한 하인이 다급히 대답했다.
“예. 잘되어가고 있습니다.”
웃기고 있네…
“네가 뭘 알아?”
“예?”
“이 새끼야. 네가 뭘 아냐구! 고작, 음식이나 나르는 주제에.. 가 아니라… 열심히 해라.”
생각해보니 나도 얼마 전까지 음식을 날랐기 때문에 소리를 치려다 그만두었다. 내 말에 잠시 쫄았던 하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는 다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지나가다가 맛있게 보이는 것들을 낼름.. 낼름.. 집어먹던 나는 한 늙은이가 곰방대를 물면서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얼른 달아났다. 다행히도 그 늙은이는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헥헥.. 다행이다. 저 씨발놈의 늙은이.. 결국은 왔구나. 큭윽!! 그때 저 늙은이 말을 믿고, 안심하던 내가 병신이었지… 그새 꼬발을 줄 알았으면 내가 다 알아서 조치를 취했을 텐데…”
이름이… 혈.. 혈.. 아이고, 그 늙은이 이름이 입안에서만 맴도네? 동천아.. 네 천재적인 머리로 생각해봐라….
“혈루(血淚)? 혈뇨(血尿)? 혈.. 혈변(血便)? 그것도 아니고… 혈색(血色)이었나? 혈서(血書)? 아참! 세 글자였지? 혈.. 혈…”
그때, 내 뒤에서 내 어깨를 짚는 사람이 있었다.
“흐흐흐… 잘 있었느냐?”
히익!! 그.. 그 늙은이 목소리다. 제발 아니기를..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끄악! 그 늙은이다..
“헤헤.. 안녕하셨어요?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되니 무지하게 반갑기 그지없네요. 언제 오셨어요?”
으으.. 내가 저 늙은이에게 이렇게 비굴하게 굴어야 하다니… 사나이 가슴이 찢어지누나…
“네가 보기엔 언제 왔을 것 같냐?”
“글쎄요.. 저는 지금 왔으니까, 잘 모르겠고…. 헤헤! 알아서 오셨겠…. 아코!”
재수 없는 늙은이.. 내가 왜 안 때리나 했다. 그리고, 저놈의 곰방대.. 뭘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아프지? 쓰-읍.. 내가 언젠가는 똑! 소리 나게 부러뜨리고야 말겠다…
“이놈아. 그새 내 이름을 까먹었냐? 네 사부의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 혈귀옹이라고 말해줬는데?”
“아하? 그렇군요? 히히.. 이제야 생각이 나네요.”
휴우.. 다행이다. 지 욕한 건 못 들었구나.. 내가 지 욕한 걸 다 들었으면 이렇게 한대 때리고 말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니까, 아마도 저 늙은이는 지 이름을 몰랐다고 한대 때린 게 분명해…
“아하는 무슨 놈의 아하야? 이놈아. 나를 봤으면 어서 네 사부한테 안내해야지 지금 멍하니 서서 뭐하는 거냐?”
나는 귀옹이 늙은이의 다리를 쳐다봤다. 지 다리가 성하면 지가 알아서 걸어갈 것이지 왜 나보고 안내하라는 거야? 나의 시선에 귀옹이 할아범도 자신의 다리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곧 어이없어하더니 나의 머리를 곰방대로 다시 내려쳤다.
따-악!!
“으그그극…. 아파요! 왜 때려요!!”
이 늙은이는 진짜 열 받게 때리는 데만 골라서 다시 때린다.
“이놈아. 어서 안내하지 않고 뭐해?”
“가요. 가면 되잖아요..”
딱!
“어서 가..”
“끄아악~! 아퍼요!!”
따-딱!
“안 가?”
“흑흑.. 가요… 진짜로 아프다구요….”
내가 맞고 있을 때, 지나가던 몇몇 하인들이 고소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웃었다. 이 새끼들… 내가 모를 줄 알고? 네 쌍판들을 다 기억하고 있을 테니.. 나중에 두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