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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59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느라 움직이는 속도가 늦었지만 그만큼 주위를 살펴볼 여력이 생기자 동천은 급하게나마 숨을만한 곳들을 서너 곳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 와중에 운 좋게 성인 두 명이 숨을 수 있을 만한 곳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는 서둘러 은형포단으로 갈라진 바위 틈새의 입구를 막아 놓았다. 비록 틈새 안이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안쪽에 충분한 여유공간이 있었기에 그곳을 택한 것이었다.

“후우……. 이제 좀 쉬어도 되나요?”

바닥에 눕혀진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물어보았다. 아마도 쉴 곳이라는 장소가 그녀의 긴장을 느슨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동천은 그녀에게 흘려 보내주는 진기를 멈추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네, 물론입니다. 그럴 목적으로 왔으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여준 제갈연은 동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세상 모르게 골아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리 지속적으로 진기를 불어 넣어줬다고는 하지만 중상자의 입장에서는 짧은 거리의 이동이라 할지라도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뭐 그렇거나 말거나 동천으로서는 당장에 쉬는 문제가 급했기에 그녀의 옆에 벌렁 드러누웠고 말이다.

‘에휴! 여기까지는 운 좋게 숨어들었는데 이젠 어쩐다? 본교와의 연락이 오랫동안 끊기면 난리가 날 테고……. 참? 난리는 벌써 났지?’

문득 동굴 속에서의 일방적인 살육의 잔재가 떠올랐다.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목소리를 듣고서 금면마제가 자신의 흔적을 뒤쫓아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소수로 지키고 있었다가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지만 동천의 입장에서는 도망치기 수월하게 다 죽어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일 따름이었다.

‘역시 인간은 제때에 죽어줘야 주위 사람들도 편하고 겸사겸사 다 좋은 거라니까?’

동천은 예전에 황룡세가에서 중풍에 걸려 골골대던 노씨 할아범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일가친척도 없어서 그 할아범의 병 수발은 어처구니없게도 어린 하인들의 몫으로 전가되게 되었다.

다른 것은 둘째치고 똥과 오줌을 받아내기가 막막했던 어른들은 마침 아이들이 꽤 되었으니 돌아가면서 하루씩 병 수발을 들도록 비폭력 아동사랑을 외치며 저희들끼리 막무가내로 정해버렸던 것이었다.

그래서 동천도 13일에 한번씩은 노씨 할아범의 병 수발을 들어주는 처지가 되고야 말았다. 동천 또래의 아이들이 13명이었으니 어김없이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그 쾨쾨하고 썩은 내가 진동하는 노씨 할아범의 방으로 입장(?)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동천은 돌아오는 13일 째가 싫었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네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처음이 되었든 13일 째에 병 수발을 들어야했기에 매달 13일과 13이란 숫자를 불길하게 여기는 사고관이 확립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하튼, 딱 2번 병 수발을 든 뒤에(그것도 똥오줌을 안 받아내서 다음 차례가 되었던 친구와 대판 싸웠다. 결과적으로 그는 손 하나 까딱 않고 자리만 지키다 나왔던 것이다) 동천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 여기고 우유부단한 춘천을 꾀어서 용감하게 가출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래봤자 강진구의 집이었지만 아마 이때부터 가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잡설이 길었는데 결론으로 들어가자면, 해야할 일을 등한시했던 동천은 나이든 하인들의 노여움이 두려웠던지 자신의 가출을 춘천의 꾀임으로 몰아붙여 가출한 놈이나 꾀어낸 놈이나 똑같은 놈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쌍으로 같이 죽도록 싸대기를 맞았다.

그때 순진했던 춘천은 기어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동천보다 두 배는 더 얻어맞았던 것으로 그는 기억했다.

결과적으로 동천은 그때 자신이 맞았던 일은 노씨 할아범이 제때에 죽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동굴에서 죽은 자들과 옛 기억의 연관성이 떠올라 그런 말을 했던 것이고 말이다.

‘어쨌거나, 이 몸이 늦게 귀환하면 귀환할수록 이 몸의 책임자였던 그 늙은이만 똥줄이 탄다는 말씀이렸다? 흐응…! 그렇다면 그 영감 속 좀 썩으라고 한 2, 3개월 어디론가 은신해 있다가 다시 나타날까? 아냐. 그렇게 되면 이 몸이 없는 상태에서 인질로 잡혀간 진구 아저씨가 위험할지도 몰라. 쳇, 어쩔 수 없나?’

동천은 다른 방도가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한달 이상이나 은신해있으면서도 강진구까지 무사히 빼내오는 방법이 순식간에 떠오를 리가 만무했다. 더군다나 그렇게 숨어 있다가 나중에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사정화에게 죽도록 얻어맞기까지 할지도 몰랐다.

“으으,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돌아가고 말지!”

그녀의 무자비한 손속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었던 동천은 새삼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 살 떨리는 서늘함이 전적으로 추위 탓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침착 하자. 정화가 이 몸을 때렸던 그때의 사건들은 철이 없었을 적의 일이다. 그녀가 비록 몇 달 전을 끝으로 정신을 차렸다지만 지금에 와서 이 몸을 때린다는 것은 첩의 자리를 반납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음이니 절대로 그러한 일이 재발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 쫄지 말자 동천아! 이제부터는 너의 세상이니라! 푸하하하!’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감을 찾는다면야 불쌍한 인간 하나 살려주는 셈치고 애교로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동천은 잠시 현실도피를 하느라 제갈연의 치료에 소홀했었음을 깨닫고 다시금 진기를 주입시켜 주었다.

현재 동천은 편하게 누워있는 상태였지만 이건 쉬는 것이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쉬는 것을 가장한 중노동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알다시피 동천은 누워는 있으되 계속적인 내공의 소모가 이루어지는 상태여서 정신력까지 꾸준히 환기를 시켜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가부좌를 틀고 제대로 된 자세에서 치료를 시행하는 것이 나았지만 그놈의 똥고집이 뭔지 동천은 죽으면 죽었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대충 ‘이 몸은 누워 있으니 고로 쉬는 것이다.’ 정도로 자기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몸은 하나도 안 힘들다! 고로 얼마든지 누워서 버티실 수가 있다! 이 몸은 너무 완벽하다! 고로 여자들이 가만히 놔두질 못한다! 이 몸은 하나인데 오라는 곳이 끊이지 않는다! 크윽, 부모님이 날 조금만 덜 완벽하게 낳아주셨어도…….’

동천은 역시나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샛길로 빠지는 중이었다. 원래 그의 의도가 긍정적인 생각들로 힘든 것을 무마시켜보려고 했던 것이었으니 아주 헛 짓거리는 아니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 김에 자신의 부모님을 알고 있는 듯했던 자인설이란 아줌마가 떠오르긴 했지만 딱히 조급해 한다거나 가슴을 졸인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부모님이란 존재는 그의 가슴속에서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감수성이 예민할 어린 시절에는 불행 중 다행히 ‘언제 밥이 나올까?’ 그것만 생각했던 그의 단순한 의식구조 덕분에 자신을 버렸던 부모님들을 원망해봤다거나 증오해본 적도 없었던 동천이었다.

그저 황룡미미와 자신의 밥상의 질적 수준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을 하루하루 고민하는 가운데 남들이 그에게 하인과 고아에겐 당연한 결과라고 정의를 내려줬기에 바로 납득하고 받아들였을 따름이었다. 동천에겐 가혹하게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시엔 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고아였던 자신의 신분이 자랑스러웠다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일부러 그를 고아라고 놀리는 것이 아닌 이상, 한 손에 두툼한 짱돌을 쥔다거나 그것을 던져서 상대의 머리를 피바다로 만든 다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천은 자신의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이 확실시된다고 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혹시 그의 부모님이 만석꾼이라거나 명문무가의 문주 정도라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진실은 장노삼을 직접 만난 뒤에야 밝혀질 것 같았기에 동천으로서는 미리 머리를 싸매며 고민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헉헉, 좀 우울한 쪽으로 생각을 몰아가다 보니까 거기에 집중해서 밑도 끝도 없이 진기를 흘려 보내주었네? 후우, 후! 이것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좀 쉬고 나서 본격적으로 치료를 해주어야겠다.”

동천은 기운이 쏙 빠진 몸을 추스르고 가부좌를 취했다. 바닥에는 이곳이 예전에 포유류가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딱딱한 나뭇가지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고 그럭저럭 풀과 나뭇잎들이 뒤엉켜 짚더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물론 위생상태를 장담할 수 없는지라 환자에게는 크나큰 위협이 되겠지만 현재상황에서 이런저런 것을 따지고 들자면 그냥 위생적이고 사방이 탁 트인 편한 자리를 찾아서 마도의 무리들에게만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으리라.

‘으그그극! 흐아, 얘 때문에 신경 쓰여서 소주천만 간단히 끝내고 마무리 지었네? 으휴! 제갈 소저, 우리 앞에 놓여진 수많은 치료의 시간들을 생각하자니 앞길이 막막하구려. 이 울적한 소생의 마음을 시 한 수로 달래줄 수는 없겠소? 응? 뭐라고요? 니가 막막하지 소녀가 막막하겠냐구요? 하하, 역시 제갈세가의 여식다운 농이구려! 파하하하!’

잠깐 동안의 현실도피를 끝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온 동천은 제갈연의 상처 위에 손을 올려놓으려고 주위를 더듬거렸는데, 뜻하지 않게 손안 가득히 무언가 말캉거리는 것이 느껴지자 흠칫하며 손을 뗐다.

“헉? 그, 그게 그러니까 설라무네……. 흠흠! 그러고 보니 상당히 어둡군. 드디어 날이 저무는 것인가?”

동천은 혹시라도 그녀가 깨어났을 까봐 서둘러 자신의 무죄(?)를 밑밥으로 깔아 놓았다. 원래 의도했던 초점에서 빗나가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정말로 주위가 너무 어두웠다.

그는 불이라도 지펴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불빛이야 다는 아니더라도 은형포단이 막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아무리 은형포단으로 공기의 유입이 수월하게끔 모양을 바꾸어 놓는다 해도 비좁은 구덩이의 구조적인 한계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여긴 것이었다.

간단하게 그 이유를 두 가지 정도 대자면, 첫째로 양방향으로 뚫린 구덩이가 아니어서 통풍의 저효율성이 대두되었고, 둘째로 한정된 작은 공간에서는 공기가 생각보다 빨리 소모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상인이라도 이런 환경에서는 어지러움증을 호소하는 법이었는데 하물며 상대가 치명상의 환자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에휴! 이건 완전히……. 에휴우우∼!”

불을 지피는 문제와는 무관하게 동천이 깊은 시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왼손의 이 황홀한 감각! 지금 그는 이 순간만큼은 ‘절대감각!’ 으로 남아 있는 그 감각을 되새겨보며 화정이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중이었다.

“화정아! 이 주인님은 네가 너무도 보고싶구나!”

불순한 목적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던 동천은 이내 무언가 야한 생각을 했던지 헤∼, 하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곧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히자 바로 절망의 나락을 향하여 추락하였다.

그렇게 애꿎은 바닥만 박박 긁어대며 고문 아닌 고문에 몸부림을 치던 그는 이내 포기했는지 우울한 얼굴로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기특하게도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한 목적의식 덕분에 자연스럽게 치료에 몰두하기 시작한 동천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마치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무념무상의 단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치료는 어두운 하늘에 달이 떠올라 자정이 넘어 감에도 끝이 날 줄을 몰랐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도 그 기세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천은 초인이 아니었다. 그의 길고 길었던 치료는 마침내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헉헉! 일단 내부장기의 상처들은 허술하게나마 막아 놓았다. 그러니까, 헉헉……. 에구 힘들어. 내가 왜 고생스럽게 혼잣말을 늘어놓아야 하는 거지?”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미친 척을 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천은 아무래도 정신적인 피로가 극심하여 잠시 허튼 짓을 했나 보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는 바로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이 몸의 빠른 조치 덕분에 장기가 괴사(壞死)하는 일까진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남은 일과는 내일까지 내부의 장기를 완전히 고치고 겉으로 드러난 상처들을 천천히 치료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제갈연의 내부를 치료 후에 어떻게 행동해야 이 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으음! 어찌해야 했을까나?’

밤새도록 치료에 몰두했던 동천은 사실 이제까지 귀의흡수신공을 꾸준히 흘려보낸 것이 아니었다. 귀의흡수신공을 멈추지 않고 계속 사용한 것은 맞았지만 활용 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제갈연의 치료가 4할 이었고 동천 자신의 내공을 회복하는데 6할의 시간을 할애하였다.

동천도 살아남아야 했기에 단전이 비어간다 싶어지면 어김없이 치료를 중단하고 내공을 전환시켜 제갈연과 운기를 공유했던 것이다.

이는 지속적으로 그녀의 내부에 진기를 활성화 시켜야 했기 때문에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알다시피 이 운기법은 남녀의 쾌감 적인 측면에서도 부여하는 의미가 컸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애무하는 듯한 흥분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이상, 한사람의 독단적인 결정은 일방적인 육체의 탐닉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았던 것이다. 물론 동천에게 이와 관련된 공격적인 질문을 했다면 자신의 순수한(?) 치료를 모독하지 말라며 방방 떴을 것이 분명했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자신의 회복보다 제갈연의 치료에 좀더 시간을 투자했더라면 지금쯤 상당한 진척을 일궈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만해도 실로 대단한 것이었으므로 동천은 크게 불만을 갖거나 하지는 않았다. 되려, 힘에 부칠 때면 자신의 윤리관이 허락하는 선에서 제갈연을 통해 내공을 회복하는 식으로 마음껏 즐기기까지 했으니 다른 쪽으로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결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까 눈부터 좀 부치고, 나중의 일은 마저 치료를 해주고 난 다음에 생각하지 뭐. 흐아암! 이제 쟤는 놔둔다고 죽을 단계도… 지났고……. 쿠울, 쿨.”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곤했던지 동천은 실로 꿀맛 같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미천한 종이 위대하신 교주님을 뵈옵니다!”

밀정의 우렁찬 인사가 끝나자 작은 소도(小刀)로 분재를 다듬던 붉은 사내가 잠시 후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전신을 온통 붉은 색으로 도배한 듯 강렬한 인상의 중년인은 피처럼 붉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보고하라.”

“예, 교주님! 먼저 무림맹과 오련의 충돌이 무산되었고, 부교주 파와 오련의 충돌 또한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혈사교와 오련의 충돌은 손쉽게 이루어졌습니다!”

핏! 화르르르!

운 나쁘게도 애써 가꾸어 놓은 분재가 순식간에 타올라 잿더미가 되었다. 붉은 사내. 즉, 암흑마교의 교주 냉소천이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듯 분재의 가지 끝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본좌가 설마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밀정은 무릎을 꿇고 있는 그 자세로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무림맹의 일은 성화조(聖火組)의 조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덤벼들어 무림맹의 비밀거점을 마도의 소굴로 오인하게끔 만든 뒤 오련의 정예를 협곡으로 끌어들이는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예상 밖의 인물인 개방의 전대고수 취불개가 재빠른 중재에 나서는 바람에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게 되어 별다른 피해 없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앞서 실패한 무림맹의 비밀거점으로 오련의 정예가 대거 빠져나간 사이에 금면마제님을 필두로 기습공격을 감행하기로 한 작전은 성공해도 그만 실패해도 그만인 가장 안정적인 노림 수였지만 뜻밖에도 약왕전의 소전주가 오련의 다른 두 곳에서의 지원을 눈치채고 기습조를 본진으로 물리는 바람에 오련에게 기습조가 몰살당하면 혈각주님이 전면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작전까지도 실패하고야 말았습니다!”

성화조는 몇 년 전에 만들어진 냉소천의 비밀 조직의 하나로서 조직원들 사이에서는 성스러운 불꽃을 지닌 자들의 모임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성화조이지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자살특공대라고 불려져야 하는 게 옳았다.

이런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자신은 죽더라도 상대편에게 자신의 존재를 다른 어떠한 문파나 세력으로 오인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실로 이들은 소모품에 불과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유능하지도, 딱히 모자라지도 않는 실력들을 겸비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죽어도 교주인 냉소천의 전력에는 누수가 생기지 않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으음! 윗대가리들이란 싸움이 일어나면 약간의 거드름을 피우며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서기를 좋아하는 괴짜 노개가 있었으니 애초에 성립이 될 수 없는 살육전이었던 것이로군.”

냉소천이 나름대로 무림맹 쪽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자 밀정이 빠른 반응을 보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바로 보셨습니다! 무림맹의 수뇌진이 약간만 늦게 도착했어도 본교에서 흘린 정보에 눈이 먼 오련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터인데, 하필이면 그 노개가 나서는 바람에 그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뿌득, 그 거지 발싸개 같은 늙은이가 감히 훼방을 놓다니!”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이를 꽉 깨문 냉소천은 그러고 보니 귀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놈의 밀정이 처음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랬는데, 뭘 믿고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인지 당최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허, 이것 참! 알아서 제 무덤을 파는 놈은 또 이놈이 처음이로군.’

3가지의 중요한 대사(大事) 중 실패한 2가지를 보고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당당하다는 어찌 보면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낱 밀정의 신분으로서 오래 살고자 한다면 적어도 때와 장소는 가려야만 했다.

그가 중요한 보직에 종사하는 인물이 아닌 이상 교주인 냉소천의 입장에서 보자면 파리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냉소천은 당장에 손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현재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러한 질 낮은 수준의 문제 따위가 아니라 마저 남은 궁금증의 해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약소전주가 어떻게 오련의 지원군을 눈치채고 기습조를 뒤로 물린 것이지?”

밀정은 대답했다.

“그것은 자세한 조사중에……!”

“아! 그전에 할 말이 있다. 너는 너무 시끄럽구나. 신경에 거슬리니 알아서 목소리를 낮추거라.”

“예? 예, 예에! 감히 교주님께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닫게 된 밀정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 그는 감히 냉소천과 마주하여 보고를 올릴만한 지위가 아니었는데 갑작스런 상관의 명령으로 이러한 자리에 떠넘겨진 상황이었다.

그의 상관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보고를 올리자니 자신의 생명이 바람 앞의 등불인지라 희생양으로서 그를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우직했던 이 밀정은 믿고 시킬만한(죽어도 괜찮은)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상관의 격려에 흥분했고 더불어 자신이 맡아야할 임무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위대하신 교주님께 직접 보고를 올려야만 하는 임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보고서의 내용이 눈앞에서 가물거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영광된 마음으로 냉소천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렁찬 목소리로 흥분을 감춘다는, 지극히 그의 상관이 믿고 사지(死地)로 보낼 만한 단순함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이 밀정이 냉소천의 눈에 요상한 놈으로 비추어졌던 것이었고, 바로 그 어수룩함 덕분에 냉소천이 잠시 헷갈려서 목숨을 부지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각설하고, 밀정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서둘러 보고를 시작했다.

“그것은 자세한 조사중에 있으나 가장 믿을 수 있는 정보에 따르면, 기습에 당황하여 도망치던 모용세가와 제갈세가의 자제들을 뜻밖에도 약소전주가 독단적으로 구출해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다 계획적이었다고 합니다. 즉, 같은 정파의 인물로 가장하여 그들을 구출해준 뒤 그들이 안도하는 틈을 타 방심을 이끌어 냈던 것입니다. 그러자 순진한 세가의 자제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중요한 정보들을 하나 둘씩 제공해주었던 것이고 말입니다.”

“허어! 그 어린놈이 그런 약은 수를?”

깜짝 놀란 냉소천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방법은 발상의 전환이 트여야 했고, 대게 그런 생각이 가능한 자들은 천재가 아니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혁명가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악마, 소악마라고 해서 생각 없이 힘없는 아랫것들을 괴롭히는 망나니로 알았건만 그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허허, 영악한 놈이로고. 때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뭐 이런 부류의 음흉한 놈이었단 말이렸다?”

즉흥적으로 저지른 짓이 와전되어 한순간 망나니에서 고급인재로 뒤바뀐 동천은 냉소천의 뇌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이 적대적인 상황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의 아들이 항광의 사건을 동천의 짓으로 의심하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면 지금의 상황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테지만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던 냉현은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진상을 밝혀내고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태였다. 이래서 사람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법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어쨌든 힘들게 진행해왔던 일들이 실패하게 되어 기분이 안 좋군. 그 외에 또 본좌가 들어줘야 할 보고가 있느냐?”

밀정은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 기가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실패한 작전에 관해서는 더 이상 없사옵고, 혈교의 공격이 성공한 작전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자면…….”

“되었다. 성공한 작전은 성공했다는 그 보고 자체로도 충분하다. 쓸데없이 떠벌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예, 교주님!”

원래의 목적은 이랬다. 냉소천은 다른 어느 세력들 보다 잠정적으로 손을 잡고 있는 신기(神奇) 제갈여휘(諸葛呂揮)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제갈여휘는 천마동을 찾아서 개조를 시작한 것과 암흑마교와 손을 잡은 것에 관하여 전적으로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당시의 상황에서 제갈여휘가 벌여 놓은 진척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당시의 제갈여휘에겐 수많은 정예들과 함정해체에 능수 능란한 자들이 수두룩했으며, 진법과 건축기술자들까지 대거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냉소천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군가는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차후 제갈여휘에 의해서 전면으로 드러나게 될 오련의 약화 작전이었다.

그 작전의 첫 번째는 오련의 세 군데 거점 중에 하나인 협산(峽山)의 진영지에 거짓정보를 유포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소록산이란 내부 협곡에 마공을 사용하는 불순한 무리들이 군집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또 다른 천마지가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은근슬쩍 그들에게 건네주었던 것이다.

당연히 조작된 내용은 정보와 출처가 신빙성이 있었기에 협산의 책임자였던 남궁세가의 수석당주 만악승(萬岳乘)은 지체 없이 고수들을 이끌고 무림맹의 비밀거점인 소록산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전과 연계된 것이 동천이 머물고 있던 석낙 고개에서의 기습작전이었다.

이 때 금면마제의 기습을 알고 있었던 협산 내의 내통자는 고수가 빠지면 그만큼 위험하니 오련의 다른 두 거점인 세평능선과 예곡 쪽에서 지원을 부탁하고 떠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하게 된다.

당연히 그 의견은 통과되었고, 내심 쾌재를 부른 냉소천은 비슷한 시기에 예곡과 가장 근접해있던 혈사교를 자극하여 협산 쪽으로 지원군이 빠져나간 예곡을 공격하게끔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작전으로서 유일하게 그 작전만이 성공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인 마지막 작전은 소록산의 무림맹과 그곳을 불순한 자들의 소굴로 오인하여 떠났던 협산의 주력부대와의 충돌이었다. 허나 아쉽게도 앞서 밀정이 보고한 것처럼 취불개의 개입으로 실패를 하고야 말았다.

‘제기랄, 잘 맞물려가던 톱니바퀴들 중에서 고작 한 두 개가 빠져 버린 것이었는데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어 그나마 체면치레로 겨우 하나의 작전만 성공했을 따름이라니!’

냉소천은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특히, 금면마제를 위시한 기습조는 그곳에서 필히 전멸을 했어야만 했다.

10장로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은 분명했지만 거기에서 그의 동생인 금면마제가 죽었다면 여론을 형성하여 사정화의 무능함을 대두시킬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무능설(無能說)을 일축시키고자 혈각주가 나설 것이 분명했고 그때 혈각주 또한 제거한다는 계획이 이미 추진 중에 있었었다.

하지만 냉소천은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매달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보고가 끝났으면 물러가라.”

“조, 존명!”

밀정은 자신이 죽을 운명이었었다는 것도 모른 채, 그저 위대하신 교주님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는 감격을 누리며 서둘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깐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타버린 분재로 다가간 냉소천은 손가락으로 재를 비비며 운 좋게 살아남은 금면마제를 떠올렸다.

“이렇게 되었으니 잘 써먹는 쪽으로 계획을 변경하는 게 좋겠군.”

금면마제는 버리는 패였다. 하지만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패이기도 했다. 그래서 냉소천은 그 패를 버리는 패 대신에 10장로를 위로해주는 척하며 확실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데 밑거름이 되어주는 패로 생각하고 있었다.

뭐 이제와 틀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금면마제라는 패가 나쁘진 않았으니 사용할 곳은 충분히 넘쳐나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냉소천은 문득 한숨이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후우! 필살의 계책이었거늘, 하늘이 본좌를 도와주지 않았던 모양이로군. 이것은 마치……. 후후, 그래. 마치 사람이 계획한 일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음을 말해주려는 것 같기도 하군.”

준비한 일들이 대부분 실패했지만 그다지 큰 누수는 아니었다. 다만 계획이 조금 미루어진 것일 뿐이었다.

더불어 이제 오련의 문제에는 더 이상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 한번 이상의 재탕은 신기 제갈여휘의 능력을 너무 과소 평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들일 필요는 없지!”

이미 한번 건드려놓고 하는 소리치고는 조금은 뻔뻔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으으음!”

잠에서 깨어난 제갈연은 힘겹게 눈을 떴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 시야가 흐렸고 무엇보다 심한 갈증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고는 먼저 자신의 상처부터 살피고자 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쩐지 가슴이 묵직한 것을 느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 이유를 확인하고자 오른 팔을 들어올렸는데 중간에 무언가에 턱, 막히게 되었다. 아직도 상처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맑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유로운 반대쪽 팔을 들어 올려서 가슴이 묵직한 이유를 확인하고자 했다.

‘으응, 손이네.’

말 그대로 손이었다. 다시 한번 더듬어서 확인한 그녀는 어쩐지 가뿐하게 느껴지는 상처부위로 자신의 손을 내려보냈다. 그러다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곧 눈을 번쩍 떴다. 손은 손이었는데 자신의 손이 아니었던 것이다.

“꺄아아아아아아!”

벌떡!

“뭐, 뭐야! 적이야? 어디야, 어디!”

갑작스런 비명소리에 기겁을 하고 일어선 동천은 하마터면 낮은 천장에 머리를 부딪힐 뻔했다. 하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기에 급히 내력을 끌어 모으며 의문의 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에 있지도 않은 적이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아니, 있다면 동천 자신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흑흑! 엄마아아! 으아앙!”

정말 서럽게 울기 시작한 제갈연은 쪼그리고 앉아서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상태였다. 저런 자세를 하자면 통증이 만만치 않을 터인데 정신적인 충격이 상처의 통증을 이겨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니, 왜 우십니까? 적이 와서 소리친 것이 아니었습니까?”

당황한 동천이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다.

“으흐윽! 흑흑흑흑!”

자그마치 18년 동안 사랑하는 미래의 남편에게만 보여주고 의지하려고 고이고이 가꿔왔던 청백지신의 몸이었다. 행여나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날까봐 이성과의 행동 하나 하나에 조심하고 또 조심까지 했던 그녀였다.

그랬는데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의 가슴속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외간남자의 손길이라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그래서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정조가 깨어졌다고 생각한 그녀로서는 그저 우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의 비명소리에 깨어난 동 공자가 연유를 물어보았지만 너무도 큰 충격과 슬픔에 대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건 좀 극단적인 비교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겁간을 당한 여자가 범인과의 대화를 꺼려하는 심정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쉬웠다.

하지만 그녀가 슬펐던 진짜 이유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알고 있어야할 동 공자가 잠결에 저지른 일이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과년한 처자의 신분으로서 이 억울함을 어디에다 호소해야 한다는 말이던가.

“제갈 소저, 왜 우십니까. 하아, 답답합니다. 이유를 알아야 해결을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흑흑흑, 으흑흑흑!”

그녀는 너무도 부끄러웠다. 동 공자가 이유를 알고자 할 때마다 자신의 한쪽 가슴을 유린하던 따스한(?) 손길이 떠올라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쥐구멍에라도 들어만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그녀의 성격상 책임지라고 매달리기엔 너무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동천으로서는 잘 때 누군가 옆에만 있으면 본능적으로 가슴을 더듬었던 것이기에 하필이면 그 누군가가 제갈연이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순진한 그녀만이 된서리를 맞게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이 계집애도 참 짜증나는 부류네? 지가 소연이야? 왜 질질 짜고 지랄인 건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천상 여자의 눈물에 약한 동천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여자나 다 운다고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예쁘고 연약해 보여야 했으며 일면식이 있는 여자일수록 우는 여자에 약해지는 정도가 달랐다.

소연 정도는 아니었지만 위의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제갈연이었으므로 동천은 상당히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되어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항복하는 심정이 되어버린 그는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아, 알았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에에, 그러니까 그만 눈물을 그치시고 제발 그 아름다운 웃음을 제게 보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동천의 뜻밖의 행동에 순간 움찔한 제갈연은 우는 것도 잊고 동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풋, 하고 정말로 웃어버렸다.

무릎을 꿇고 비는 행동과 아름다운 웃음을 보여달라며 애를 쓰는 모양새가 묘하게도 그녀의 웃음보를 자극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그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이었던 관계로 제갈연은 황급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한번 터진 웃음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리가 없었다.

동천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어깨만 들썩이는 제갈연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고비는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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