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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63화


스치듯 만남.

“후우, 이제 절반 정도 남았지요?”

간간이 쉬면서 치료를 한번 해주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지나있었다. 원래는 이제 동천이 아니더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서 치료를 해줄 생각이 없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자의 생명은 티 없이 맑고 매끄러운 피부라는 생각이 들어서 흉터를 없애주고자 잠깐 짬을 내어 치료를 해주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지만 사실 그도 처음 시도해 보는 것이어서 자신이 없었기에 치료의 목적을 밝히진 않았었다. 그렇다고 외상이 다 나은 것은 아니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지만 살갗만 말끔히 이어준 것이어서 무리를 해서는 안 되었다.

“네, 공자님. 조금만 더 가시면 되요.”

다소곳이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동천이 익히 알던 예전의 그 모습이었다. 천만 다행히 어느 정도 격해졌던 감정이 수그러들자 다른 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의 수줍은 많던 그녀로 되돌아 온 것이었다.

‘젠장! 장장 하루동안을 죽어라 뛰셨는데도 아직 절반이나 남았단 말야? 헥헥, 힘들어 죽겠는데 확 그냥 내동댕이 쳐놓고 혼자 돌아갈 까보다!’

“힘들죠?”

동천의 속마음을 옆에서 들었는지 그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물어보았다. 순간 동천은

‘속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냥 내뱉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어쨌든 동천은 진심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에 언제 화가 났냐는 듯 한순간에 풀어졌다.

“하하, 좀 힘들긴 하네요. 그런데 연 소저의 격려 어린 말씀을 듣고 나니까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걸요?”

동천의 아부 아닌 아부에 제갈연의 얼굴이 홍시처럼 되어버렸다.

“고, 공자님도 참! 몰라요!”

그녀는 요 며칠 간 동천과 같이 지내다 보니, 이 사내가 의외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흔히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는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냉정하게 평가했던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이대로 헤어지자니 상당히 불안했다. 그녀가 평가하는 동천은 솔직히 외양적으로는 별 볼일이 없었지만(찰나간 머릿결은 여자인 자신보다 매끄럽고 눈부시다고는 생각했다) 며칠만 같이 지내다 보면 그 얼굴이 되려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기남아(奇男兒)였다.

수수한 얼굴에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여자를 위해(?)주는 마음이 감동적이어서 만일 자신과 헤어진 뒤에 다른 여자들이 그의 진가를 발견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휴우, 나처럼 이기적인 여자는 없을 거야. 본련을 위하여 죽어간 정령(貞靈)들이 수백일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 놀음에 빠져 있다니…….’

자신의 행동과 생각들을 자책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성보다 감성이 앞섰던지 이제와 멈출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 공자를 바라보자 때마침 그도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것을 본 동천은 귀여워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참았다.

‘아유, 귀여운 것! 지금이라도 이 몸의 여자로 만들 수는 있지만 적어도 정화가 교주위에 올라설 때까지는 참아야겠지? 그때가 되면 감히 그놈들도 정화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이 몸에게 딴지를 걸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까, 정화만 잘 구슬리면 내부적으로는 분쟁이 사라진다는 말씀? 그런 뒤에 장인어른을 찾아뵙고, 그리고 단칼에 해결을 하고. 에 또, 안 되면 보쌈 해오고. 그것도 안 되면 일단 저지르고 보고. 그것도 안 되면……. 이씨, 누가 이 몸을 자꾸 건드리는 거야?’

“공자님. 동 공자님, 괜찮으세요?”

깜짝 놀란 동천은 퍼득 정신을 차렸다.

“예? 제가 무슨 이상한 행동이라도?”

제갈연은 차마 입을 헤 벌리고 음흉하게 키득거렸다고는 말해줄 수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사실 그녀도 순간적으로 본 표정이어서 긴가 민가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 아뇨. 그저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시는 듯 해서요.”

동천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아, 그랬군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제 곧 연 소저와 헤어진다고 하니 며칠 간의 즐거웠던 순간들이 떠올라서요. 하하, 우습죠?”

주르륵!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가 자상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 왜 우십니까?”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충분히 당황하고 어색할만한 상황이었건만 동천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녀와의 대화 중에서 갑자기 옛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황룡세가에서의 일이었는데 마른빨래를 한아름 들고 온 추연이 동천에게 개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당연히 동천은

‘너 나 알어?’

라고 말한 뒤에 옆에서 띵가띵가 뒹굴면서 놀았고, 삐친 추연은 혼자서 빨래를 다 갠 뒤에 나중에 두고 보자면서 그것들을 한꺼번에 들어올렸다.

그런데 그만 힘을 너무 주었던지 방귀를 뿡~! 뀌게 되었고, 때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던 황룡세가의 셋째 아들인 황룡창이 그 소리를 듣게 되자 울상이 된 그녀가 그때 했던 말이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동천이 이 상황에서 웃음보가 터지지 않고 배겨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크크크크큭! 그때가 여름이었나? 캬캬캬하! 아이고, 배꼽 빠지겠다!’

이런 상황에서 웃는다면 그야말로 오해를 살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일어나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바닥을 치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나 사정을 몰랐던 제갈연은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슬퍼하는 줄 알았다. 그도 눈물을 보여주지 않고자 잠시 자리를 피했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착각해버린 것이다.

‘아! 너무도 착하고 자상하신 분……. 흑흑, 이제 매일 저 분의 생각에 그리워져서 미치면 어쩌지?’

서로 상반되는 생각을 품고 눈물을 찔끔거리던 그들은 잠시 후에 동천이 진정이 되어 되돌아오자 부드러운 미소로서 상대방을 맞이했다. 동천은 동천대로 제갈연은 제갈연 대로 본심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자 상대를 배려한 것이었다.

“험험, 이제 다시 갈까요?”

“네, 공자님.”

“업히세요.”

“네에.”

이제는 수줍어하면서도 쉽게 업히는 그녀를 느끼며 동천은 바람처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에, 또……. 이쪽 방향으로만 쭉 가면 석낙 고개로 갈 수 있다는 말이지?”

제갈연과 헤어진 동천은 그녀가 가르쳐준 방향 쪽으로 위태위태하게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물론,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운 좋게 거의 도착해서 순찰 중이던 오련의 무사들과 조우했고 그들에게 그녀를 인계해주었다.

그녀는 울먹이는 얼굴로 헤어지지 않으려고 했으나 도집에 매달려 있는 붉은 연꽃무늬의 장식품을 떼어 건네 준 동천이 전음으로 어떠한 내용을 흘려보내 주자 그 이야기를 듣고는 순순히 그를 놓아주었다.

그때 해주었던 말은 지금 생각해도 닭살이 돋아났는데, 그는 그녀에게 장식품을 건네주며

‘예전에 제가 읽어본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을 때 같이 있고 싶다면 집착이고, 같이 있다고 느껴지면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하하, 연 소저는 과연 절 어떻게 생각하며 지내실 지 사뭇 궁금하군요? 하하하!’

이렇게 말해주었다. 과연 닭살이 돋아날 만했다.

“으그그그! 예전에 이 바람둥이가 사는 법이란 삼류 연애소설을 읽어봐서 그 때 홀랑 다 해쳐먹은 바람둥이 새끼가 상대편 여인에게 해주었던 말을 그대로 인용했던 것인데, 막상 이 몸이 사용해보니까 온몸이 아주 닭살로 도배가 되었잖아? 아, 근지러!”

벅벅 긁으며 한참을 가다보니, 어쩐지 원래 자신이 가고자 했던 지형지물과는 다른 곳에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자 그것이 더 확실해졌다.

“컥? 어디에서 이런 소연이 질질 짜다가 졸도해버리는 개 같은 일이!”

잠시 닭살을 긁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치고는 대가가 너무 비쌌다. 한참을 주위를 서성거리며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고민하던 그는 생각보다 방향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 뒤 자신의 감을 믿고 약간 좌측으로 틀어서 힘차게 몸을 움직였다.

“하하, 잘 가고 있을 거야! 어느 분이 방향을 정했는데 틀리겠어? 그래! 불안해하지 말자!”

자신감에 묻어나는 목소리였으나 그의 표정이 목소리만큼 따라주지 못했다. 목적지의 근처에 눈에 확 뜨이는 암봉(巖峰)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온통 산들뿐이어서 여기를 봐도 산. 저리를 봐도 같은 산. 도통 구분을 해낼 수가 없었다.

“응? 무림인들이네?”

피하기에는 늦었다. 갑자기 근처 숲 속에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길 문제로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노인과 젊은 사내 둘 뿐이었고 험악한 자들이 아닌 듯 보여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동천의 뒤쪽에서 사내가 그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응? 이보게! 잠깐 멈춰 보겠는가?”

동천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묘하게도 서야만 할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그들이 알아서 동천에게 다가왔다. 동천은 만일을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며 물어보았다.

“왜 그러시죠?”

그의 경계 섞인 목소리에 노인과 사내 중 애초에 그를 불렀던 이십대 후반의 사내가 자못 흥미로운 눈길로 그에게 물었다.

“하하,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 경계할 필요가 없네. 그건 그렇고 자네 말일세. 어디에선가 나를 본 적이 없는가?”

그러고 보니 동천도 확실히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해서 눈이 달린 건지 눈꺼풀이 꿰매진 건지 도저히 구분을 할 수 없었던 실눈의 사내를 요리조리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요? 혹시 창원제일루라고 안휘성에서 그래도 알아주는 주루인데 거기에서 음식을 먹는 저를 보셨나요?”

“하하, 나도 그곳은 잘 안다네. 하지만 자네는 본 적이 없네.”

“그래요? 그럼 창원제일루 옆에 은섬 포목점이 있는데 거기에서 물건 흥정을 하던 저를 보셨나요?”

“하하, 그곳은 잘 모르지만 거기에서도 자네를 본 적이 없네.”

“흐음! 그럼 창원제일루 옆에 은섬 포목점을 지나서 과일가게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서 제철 과일을 사먹던 저를 보셨나요?”

“하하, 그곳도 잘 모르지만 거기에서도 자네를 본 적이 없네.”

“그럼 결론적으로 저를 보신 적이 없네요?”

“하하, 그렇지. 본 적이 없군.”

“에이~! 그럼 우리는 서로 안면이 없는 사이네요. 안녕히 가세요.”

“하하, 그래. 자네도 조심해서 살펴 가시게.”

동천은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떠났고, 그런 그를 친절하게 손까지 흔들어주며 배웅해준 조정인은 유쾌하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재미있는 친구로군.”

“뭐냐?”

가늘게 눈을 뜬 영산호의 물음에 조정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입니까?”

영산호는 빤히 물어보는 의도를 알면서도 모른 척 되물어 보는 정인을 가증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에라, 이놈아. 이 몸이 계속 물어볼 줄 아느냐? 절대 그럴 일은 없을걸? 흐흐, 꼽지? 물어봐서 마구마구 궁금해줘야 하는데 물어볼 생각을 안 하니까 입이 근질거리고 확 말해주고 싶지? 그치그치?”

그러자 정인은 정말 감탄했다는 얼굴을 했다.

“실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리도 잘 아십니까?”

“에헴! 이 몸이 네놈을 안지 하루 이틀이더냐? 이제 이 몸께서는 그 대처법도 다 마련되어 있느니라. 에헴헴! 에헤헤헴!”

한껏 의기양양해진 영산호를 바라보며 정인은 은근슬쩍 턱을 쓰다듬었다.

“아아, 그러셨군요? 으음, 그런데 이것은 실로…….”

“응? 실로 뭐?”

“하하, 아닙니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후우, 하지만 어쩌면…….”

“우이 씨! 뭐냐니까?”

아무래도 영산호가 대처법을 다시 한번 검토해봐야 할 듯 싶었던 그때, 거침없이 달려가던 중이었던 동천은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영 아닌 것 같았다. 가던 길도 어긋나 버렸고 이상한 실눈과 이상한 대화나 나누고 헤어졌으니 말이다.

‘그런데 진짜 어디에선가 본 것 같기는 한데, 이 몸이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천재인지라 사람의 얼굴은 잘 기억을 못해서 리…….’

거기까지 생각하던 동천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차차! 아까 헤어지기 전에 석낙 고개로 가는 길을 아는지 물어볼 걸! 으으, 다시 돌아가서 찾아볼까?”

잠깐 갈등을 했으나 이내 그만 두기로 했다. 첫째로 상대가 미친놈인 것 같았고, 둘째로 쫓아갔다가 찾지도 못하면 그야말로 쪽박을 차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 짜증나! 석낙 고개로 가는 방향을 물었을 때 거기는 암흑마교의 거점 중 하나인데 왜 그리로 가냐고 하기에 그 근처를 지나가야 해서 그렇다고 멋지게 둘러댔건만, 이거 이러다가 그것도 다 소용없게 되는 거 아냐?”

한참을 씩씩거리며 애꿎은 나무들만 걷어차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두 늙은이가 자신 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연찮게 그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그는 재빨리 주위의 나무들 사이에 숨으며 생각했다.

‘오늘따라 재수 없게 인간들 둘만 자꾸 만나네? 에이! 저 늙은이들도 재수가 없을 테니까 그냥 보내자.’

제법 아름드리 나무 뒤에 숨긴 했는데 어째 미진한 것 같았지만 그들이 지나칠 공간에서 5장 여를 떨어진 채 몰래 엿봤으므로 어지간해서는 들킬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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