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66화
“이봐, 강씨 늙은이들. 빨리 좀 못 걸어? 댁들 평소에 죽만 먹고살았어? 앙?”
“아, 아니오. 빨리 걷겠소. 헉헉!”
차라리 죽만 먹고살았다면 이렇게 억울하고 분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제부터 주는 식사라고는 한끼 당 고작 육포 다섯 조각이 다였는데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가 어떤 소녀(제갈연)도 그렇게 먹었으니 투덜대면 인간도 아니라고 그들을 윽박질렀던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랬지만 늙어서 한창 식탐을 할 나이에 지렁이 똥만큼 주고 하루종일 걷게 만들었으니 그들로서는 아주 죽을 맛일 수밖에 없었다. 부려먹어도 엔간히 부려먹어야 그들도 좀 숨을 쉬고 살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이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잡아서 복수를 하고야 말 것이다! 헉헉, 감히 우리 이명호월(異名晧月) 형제들을 이렇게 농락하다니!’
이명호월,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외호일 것이다. 그들은 동천이 잠깐 가출을 했을 때 장문, 화문의 사건과 같이 엮이었던 노고수들이었다. 그때 굴러 들어온 천마도해로 흑마궁에 의탁하여 단주의 자리를 꿰어찼던 것이었는데, 애초의 목적은 흑마궁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천마동이 발견되었을 시 따로 준비해두었던 사본으로 보물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었으나 일이 안 되려는지 엮이고 엮여서 이런 꼴이 되었던 것이다.
“에이! 부실의 극치를 달리는 늙은이들 같으니라고! 쳇, 인심 썼다. 좀 쉬기로 할 테니까 푹 쉬라구.”
“후우, 고맙네.”
그제야 살았다는 듯 제자리에 주저앉은 그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흑혈단주인 강비월(姜飛月)은 쳐다보기도 싫어서 동천을 외면했지만 계산적인 혈랑단주 강두월(姜逗月)은 씹어 죽이고 싶은 상대였음에도 일단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다. 잠시 숨을 돌리게 놔둔 동천은 형인 강두월에게 물었다.
“강형, 이제 얼마나 남았지?”
강씨 형제 중에 강두월이 형이니까 강형(姜兄). 강비월이 동생이니까 강제(姜弟). 그들의 입장에서는 싸가지 없게도 동천은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어제부터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들 형제들은 속이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용케 참았고 강두월은 동천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동남쪽으로 200여리 정도를 더 가야하니 이틀에서 사흘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외다.”
“음, 그 정도면 하루거리네?”
강비월은 이를 갈았다.
‘몸이 멀쩡한 네놈이나 하루거리지 이놈아!’
처음에 그들의 이름을 물어보았다가 정체를 알게된 동천과는 달리, 그들 형제는 그때의 동천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엮이긴 했지만 그들이 뭐 볼게 있다고 아부나 떨던 어린놈을 여태까지 기억하고 있겠는가. 또한 동천으로서도 딱히 옛날의 기억을 들춰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거론하지 않았고 말이다.
“뭐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남은 식량을 아낌없이 풀도록 해볼까? 자, 이건 강형 꺼. 이건 강제 꺼. 하하, 인심 좀 썼으니 맛있게들 먹자고 들.”
여섯 조각의 육포를 받아든 형제들은 이걸 감사하다고 먹어야 하는지 어린놈의 얼굴에 냅다 내던져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그들은 양이 적은 것보다는 한 조각 더 얹어준 것이 아낌없이 푼 것이라는 데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었다.
“자, 잘 먹겠소.”
그들은 참을 인(忍)을 뇌리에 박히도록 외우며 먹고살기 위해 마지못해 입에 쑤셔 넣었다. 그나마 이들이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동천에 대한 분노와 원한. 그리고 어투의 규제가 상당히 풀렸다는 것에 있었다.
대충 너를 윗분으로 봐준다는 식의 이야기면 꼭 극존칭이 아니더라도 무리 없이 넘어가 줬던 것이다.
“자아! 이제 푹 쉬었지?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힘들 내자고! 알았지?”
자리에서 일어난 강두월은 동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은근슬쩍 자신들의 문제를 거론시켰다.
“물론이오. 가장 최단거리로 잡고 있으니 염려 놓으시구려. 그리고……, 우리 형제의 독을 풀어주는 것은 확실히 보장해주는 것이겠지요?”
동천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씨익 웃었다.
“신의하면 이 몸이고 이 몸 하면 신의이니 걱정들 푹 놓으시게. 독이 좀 위험하긴 하지만 이 몸이 누구인가? 바로 약왕전의 약소전주가 아니던가! 하하하!”
제법 콧대가 높아져서 떠드는 소리에 그들은 적이 마음이 놓였다. 신중함은 별로 없어 보였지만 자신의 성취도에 지극히 만족을 느끼는 성격이어서 자신들을 해독시켜주는 것 또한 하나의 즐거움으로 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동천이 그들의 단전 주위에 독을 잠복시켜놓기는 했어도 제대로 작용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독이 발작하여 내장이 녹아 내리지 않는 것만 해도 천지신명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할 판이었다. 이건 뭐 한번이라도 다른 이에게 시전한 적이 있어야 성공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몸께서 주입한 독이 저들의 내부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발작을 안 할지 잘 모르겠단 말야? 처음 해보는 것이어서 상황을 봐가며 나름대로 독을 빨아들여 조절은 했지만 서도……. 쓰읍! 이럴 줄 알았으면 한번쯤은 동물들로 실험을 해봤어야 하는 건데 말이지.’
동천은 근래에 들어서 자신이 배운 재주를 확실하게 써먹을 곳이 없을까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실험재료(?)에게는 재수 없게도 박심이 걸려들었던 것이었고, 초반에는 침술을 활용하다가 후반에 가서 독공을 실험해 보려고 했었는데 막상 며칠 간 침을 놔주다 보니까 이런 귀중한 재료도 구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꾹 참고 있었는데, 그만 출동을 하게 되어 시기를 놓쳤던 것일 따름이었다. 박심으로서는 부처의 미소가 햇살처럼 비춰든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더럽게 늦다는 동천의 타박 아닌 타박을 들으며 하루동안 강행군을 한 그들은 마침내 암흑마교의 영향권에 들어가 동천을 발견한 정찰조와의 조우로 석낙 고개에 무사히 도착할 수가 있었다.
“약소전주님! 도대체 그 동안 어디를 다녀오셨던 것입니까!”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마중 나온 아수전의 3당주 포석은 그동안 소식이 끊겨서 마음을 졸였던 기분이 한순간에 풀리는지 그답지 않게 필요 이상으로 흥분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천의 종적을 놓친 것은 같이 출동했던 모든 이들에게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 큰 뜻이 있어서 사천을 좀 주유하고 다녔을 따름인데 그게 자네들에게 큰 걱정이 되었을 줄은 미처 몰랐네. 미안하이.”
절대로 미안한 얼굴이 아니었지만 포석은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도 말로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가. 분을 삭힌 그는 약소전주의 뒤에서 헉헉거리기에 여념이 없는 두 늙은이들을 발견하곤 그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예에, 그런데 저들은…….”
“아? 이 형씨들? 혹시, 이명호월이라고 아는가?”
하도 행색이 구질구질하여 설마 명성 높은 이명호월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포석은 깜짝 놀랐다.
“네에? 이자들이 정말 그 이명호월이란 말씀입니까?”
동천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게 놔두려고 했는데, 이자들이 감히 금면마제님을 가볍게 보기에 냉큼 제압하고 데려오는 참일세. 험험!”
“아니, 어떻게……가 아니라 대단하십니다!”
제법 눈치가 있었던 포석이 급히 말을 돌렸다. 아부를 즐기는 인간형은 아니었지만 과정이 어떠하든 제압을 했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과가 눈앞에 있는데 괜히 따지고들 이유가 있겠는가?
“하하! 대단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그보다 금면마제님은 자리에 안 계신 모양이지?”
얼굴 안 비치고 뭐하냐는 질문에 포석이 약간 찌푸린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예, 아직도 약소전주님을 찾고 계시는 터라 자리에 안 계십니다. 이제 약소전주님도 오시고 했으니 속히 돌아오시라고 연락을 띄울 예정입니다.”
‘뭘 연락까지야. 그냥 평생 그 지랄로 살다가 뒈지라고 하지.’
속으로 입맛을 다신 동천은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께도 한번 가봐야겠지?”
그러자 포석은 깜빡했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아! 속히 찾아가 보셔야할 듯 싶습니다. 이번 일로 사천의 모든 교도들에게 수색명령까지 내려주실 정도로 근심이 깊으셨습니다.”
동천 정도의 지위에 있는 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면 그가 아니더라도 똑같은 명령이 내려졌을 테지만 포석은 배운 사람답게 듣기에 좋으라고 말을 잘 꾸며주었다. 동천은 그것도 모르고 입이 활짝 벌어졌다.
‘오호라! 그랬단 말이지? 하하, 정화가 어지간히도 몸이 좀 달았었나 보군. 하긴, 이 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평생 수절할 몸인데 지가 안달이 나지 않고 배기겠어? 크크크큭!’
포석은 낄낄거리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동천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기, 괜찮으십니까?”
“응? 뭘 말인가?”
시치미 뚝 떼고 되려 반문하는 약소전주의 모습에 포석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마차를 준비하겠으니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말은 안 했어도 상당히 피곤한 몸이었던 동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흔쾌히 허락했다.
“오오, 그래주겠는가? 그럼 내 여기에서 기다림세.”
“알겠습니다. 속히 차비를 갖추고 다녀오겠습니다.”
“음, 그래그래.”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려도 될 것을 그는 솔선수범을 보이며 자리를 떠났다. 이번 일의 책임논란에 대비하여 사건의 중심자인 동천에게 가능한 좋은 모습을 남겨주려는 속셈이 묻어 있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동천의 머릿속에는 부려먹기에 딱 좋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잡혀있었으니 절반 정도는 포석의 의도가 먹힌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리라.
“이보시게, 약소전주. 이제 처음의 약속대로 우리의 금제를 풀어주고 독도 해소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조바심이 난 강두월이 묻자 동천이 사뭇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 문제라면 방금 들었다시피 본교의 차기 교주님께 이 몸이 급히 가봐야 해서 조금 늦춰질 것 같소. 알다시피 당신들의 몸 안의 독은 장기간 주입된 상태여서 단기간에 해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오.”
안 하던 예의를 갖춰서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전혀 억지를 부리는 것 같진 않았다. 여기에서 당장 해소시켜 줄 수 있다는 진실을 알았다면 죽이네 살리네 난리를 피웠겠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고 쓸데없는 지식이 그들의 머릿속에 희안한 독인 만큼, 해독도 어려울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강두월은 동생이 욱하려는 것을 가만히 제지시킨 후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언제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오?”
동천은 생각하는 척하면서 정화가 어떠한 모습으로 자신을 마중 나올까 상상하다가 대답해주었다.
“오늘은 아가씨를 뵙고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것 같아 안 될 것 같고, 아마도 돌아오는 내일 저녁이나 그 다음날인 모레 정도에 치료를 해주도록 하겠소이다. 사정상 더 늦을 수도 있지만 설마하니 금면마제님께서 돌아오신 후에나 치료를 해주겠소이까? 하하하!”
금면마제와 싸웠다기에 슬쩍 떠봤더니 역시나 강씨 형제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극히 미미한 떨림이었으나 동천의 예리한 시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알겠소. 그럼 우리 형제는 이곳에 남아 기다릴 터이니 빨리 와주시길 바라오.”
‘봐서 오던가 말던가 하지 뭐.’
속마음과는 달리 동천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는 일다경 후 마차를 인솔하고 온 포석에게 전음으로 이명호월 형제를 골방에 가둬두라고 명했다.
자신이 시켰다는 흔적은 내비치지 말고 말이다. 그러자 떠나가는 그의 뒤로 “놔라, 이놈들!” 또는 “감히! 이럴 순 없다! 약소전주우우!” 라는 절규 어린 외침이 들려왔지만 동천은 싹 무시하고 제 갈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