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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75화


“휘유! 저기가 범정산인가벼?”

마차를 타다가 산세(山勢) 때문에 중간에서 내리게 된 동천은 그때부터 걷거나 뛰어가야 했지만 직접적인 불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의 상전인 사정화도 뛰어가는데 자신이 거기에서 투덜거린다면 누가 그를 곱게 봐주겠는가 말이다.

“힘드시죠? 여기 물이요.”

정작 힘든 것은 소연이었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수통의 마개를 열어 주인님에게 건네주었다. 동천은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받아서 단숨에 비웠다.

“캬아, 역시 사람은 물이 최고라니까? 응? 화정이 너도 먹고 싶냐?”

“응, 동천!”

옆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지켜보던 화정이는 주인님이 수통을 건네주자 좋아라 했다. 하지만 이내 그 안이 텅텅 비워졌다는 절망감에 울음 반 원망 반으로 동천을 노려보았다. 그것을 눈치챈 동천은 지랄발광을 했고 그녀는 징징거리며 사정화에게로 도망쳤다.

“차, 참으세요! 쟤가 아직 잘 모르잖아요!”

“에잇! 이거 놔! 씩씩, 저놈의 계집애. 아가씨에게 도망가면 이 몸도 어쩔 수 없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아 가지고.”

저 멀리에서 사정화의 가슴에 폭 안긴 화정이는 주인에게 구박받은 강아지처럼 오고는 싶은데 오지를 못하자 처량한 눈빛으로 동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정아, 이리 와.”

보다못한 소연이 부르자 본능적으로 신형을 움찔한 화정이는 이내 별로 내켜하지 않는 얼굴로 버텼다. 그녀에게 가봤자 동천에게 혼나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와아! 쟤 머리 돌아가는 거 봐라. 야, 너 도대체 애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볼 때마다 잔머리만 늘어가냐?”

소연은 억울한 눈빛으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잔머리만큼은 저한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다 아시면서 저한테 떠넘기시다니……. 섭섭해요!”

동천은 벌컥 화를 냈다.

“뭐? 그럼 저 잔머리가 이 몸의 영향을 받았단 말야?”

소연은 생각해 보니 자신이 주인님을 깎아 내린 것 같아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그게 아니라요, 제 탓은 아니라고요.”

바로 그때 소연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약소전주, 아가씨가 계신 앞에서 그 무슨 행동인가!”

질책 어린 혈각주 초무강의 목소리이자 동천은 찔끔했다. 어렸을 적부터 친분이 있는 상대라 그를 귀엽게 봐주긴 했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예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인원이 모여서 가니까 이런 게 또 불편하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과 함께 가면 불편한 점이 많다는 말이었다. 동천은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흥분하여 저도 모르게 그만…….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해요, 혈각주님. 주인님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으세요. 다 제가 잘못 한 거예요.”

주인의 허물을 덮어주려는 소연의 행동에 기분이 좋아진 초무강은 언제 안색을 굳혔냐는 듯 부드럽게 풀었다.

“그래, 알겠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 염려 말거라.”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혈각주님!”

연신 고개를 숙이는 소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 동천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치, 자식의 잘못을 부모가 덮어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천은 초무강이 원래의 앞자리로 돌아가자 소연의 팔을 툭 치고 말했다.

“야, 굽실거리지마. 니가 그렇게까지 안 해도 이 주인님 어디 끌려간다거나 매맞아 죽지 않아.”

당황한 그녀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저는 그런 게 아니라요. 그저 주인님의 부담을 줄여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너 같으면 남 같지 않은 애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굽실거리면 기분 좋겠냐?”

그제야 주인님의 말뜻을 이해한 소연은 감격했는지 대뜸 눈물을 글썽였다. 표현방법이 조금 서툴렀지만 자신을 생각해주고 아껴주는 마음만큼은 여과 없이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주인님…….”

동천은 자신이 말하고도 닭살이자 재빨리 넘어가기로 했다.

“뭐 그렇다는 거니까 감동할 거 없고, 야 화정아! 거기서 괜히 아가씨 힘 들게 하지말고 빨리 이리와! 셋 셀 때까지 안 오면 오늘 점심 굶긴다?”

그 주인에 그 강시 아니랄까봐 밥 안 준다니까 냅다 달려왔다.

“왔어, 왔어 동천! 에헤헤!”

이제와 때릴 마음도 없어진 동천은 시선을 돌려 적어도 150여장에 근접한 높이로 우뚝 치솟은 범정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부터 나왔다.

“저거 또 구석구석 찾아다닐라치면 시간 좀 잡아 먹겠구먼?”

소연은 그런 것보다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저는 자꾸 무림인들이 몰려들어서 불안해요. 이러다가 싸움이라도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도 있잖아요.”

“얘가 재수 없게!”

“죄, 죄송해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실언을 했다는 것을 그녀도 깨달았는지 금세 말을 돌렸다. 동천은 눈치 볼 사람들이 많아서 큰소리로 꾸짖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따름이었다. 별걸 다 한으로 남기는 동천이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다!”

초무강의 외침에 모두들 눈을 빛냈다.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쉰다는 말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 중에 제일 좋아했을 사람은 동천이리라. 실제로도 그랬고 말이다.

“얏호! 드디어 쉰다!”

“와아! 화정이도 쉰다!”

“야옹~! 야옹~!”

일남일녀일묘(一男一女一猫)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본 소연은 저렇게 닮기도 힘든데 참 잘들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도 주인님과 닮은 성격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 그녀는 한참 후 그냥 편하게 살자고 결론을 내렸다.

“주인님, 다른 분들은 회의에 들어가는 것 같은데 안 따라가 보세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자 사정화를 중심으로 혈각주 초무강과 어느새 남쪽으로 내려온 요림주 금요랑이 차후에 관련된 회의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천은 사정화가 따라 들어오라는 명령도 없었는데 굳이 한 자리 차지해서 시간을 때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거기 가봤자 심각한 이야기들만 오고갈 것이 분명하니까, 이 몸은 여기에서 그냥 이러고 계시련다. 어차피 필요한 이야기면 언놈이 와서 다 알려줄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몸은 약왕전의 소전주야. 의원은 의술만 잘하면 되는 거라고.”

참 한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연은 말하지 않았다. 해봤자 전혀 득 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주인님의 옆에서 사람들이 짐을 내려놓고 천막을 치고 불을 지피는 모습들을 한가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일을 마쳐갈 때 옆에 앉아서 호연화의 배꼽을 손으로 쿡쿡 찌르며 놀던 화정이가 입을 열었다.

“동천, 그런데 나 밥 안 줘?”

“윽! 이게 뱃속에 걸귀가 들었나.”

동천이 째려보자 화정이가 바로 말을 바꾸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우리 연화가 배가 고픈 것 같아서. 헤헤!”

하는 짓이 빤히 보였던 동천은 은근슬쩍 동조하는 척을 해주었다.

“그랬구나. 넌 배 안 고프고?”

“우웅~, 물론 나도 배고프지. 왜? 나 밥 주려고?”

그 한결 같은 정성에 포기한 동천은 소연에게 말했다.

“저기 숙수(熟手: 요리사)에게 가서 얘 좀 먹을 거하고 이 몸이 드실 것으로 푸짐하게 만들어 달라고 해서 가져와.”

소연은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요? 아직 짐도 다 풀지 못해서 시간이 걸릴 텐데요?”

동천은 그녀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그 인간이 그렇게 말하면 이 몸이 좀 보잔다고 그래. 요리하느라 어깨가 결릴 테니 침을 놔주고 싶다고.”

“아, 네에…….”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소연은 숙수에게 찾아가서 확실한 효과를 경험한 후 일꾼들이 날라다준 음식을 가져와 맛있게 점심을 해결했다.

“꺼윽! 아, 배부르다!”

“꺼윽! 아, 나도 배부르다. 히이!”

동천이 하는 것을 잘 따라했던 화정이가 트림까지 따라하자 두 눈에 불을 켠 소연이 제제를 가하고 나섰다.

“화정아, 못써! 여자가 트림을 하다니! 너 또 그러면 식사 량을 절반으로 줄인다?”

화정이의 안색은 대번에 창백해졌다. 먹는다는 즐거움을 알게 된 뒤부터 식사 때만 기다리는 그녀였는데 그 먹는 양을 줄인다고 하자 기겁을 했던 것이다.

“아, 알았어! 다신 안 그럴 게! 한번만 봐줘, 소연! 응? 응?”

“에휴! 알았으니까 그만 응응거려.”

소연은 차마 잘 먹고 배를 두드리는 중인 주인님께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조를 짜 정찰을 나갔던 사내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응?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글쎄요?”

“에그, 너한테 물어본 이 몸이 잘못이지. 여기에 있어봐. 내가 가서 알아 보고 올 테니까.”

회의장에는 안 간다고 빈둥거리던 동천은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자 자청해서 그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말이 회의장이지 그저 가볍게 천막을 치고 그 안에 의자와 탁자만 딸랑 있는 곳에서 회의를 주관하던 사람들은 정찰조에 이어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자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지만 이내 약소전주라는 것을 깨닫고 바로 거두었다. 정찰조의 보고는 때마침 시작 중이었다.

“지금 본교의 뒤쪽에서 혈사교의 무리들이 빠른 속도로 진입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정화가 물었다.

“인원은?”

“대략 4, 500명 정도입니다!”

초무강은 중얼거렸다.

“다 끌고 왔는가? 역시 그 놈들도 소식을 접한 모양이로군.”

그러자 늙은 노파가 쇠를 긁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앞에는 무림맹 뒤에는 혈사교란 말인가? 켈켈켈!”

저런 웃음은 청목신장 정원 밖에 없었다. 그녀의 웃음 뒤로 사정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보가 너무 쉽게 퍼지고 있어. 무림맹이 그토록 허술한 곳도 아닐진대, 다른 세력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몰려들고 있다니. 역시, 특정 세력의 개입이 있는 것이 분명해.”

‘응? 혈사교 뿐만 아니라 다른 세력들도 오고 있나벼?’

궁금해서 물어볼까도 했지만 이들이 한창 회의에 임하고 있을 때 자신은 밥 먹고 배를 두드리다가 들어온 상황이었다. 지금 그런 걸 물어 봤다간 차후에 사정화에게 얻어맞을지도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림맹이야 본교가 여기에서 더 이상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가만히 있겠지만 뒤쪽에서 오는 중인 혈사교와 여기에서 하루거리의 오련은 확실히 대비를 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초무강이 의견을 묻자 사정화는 일단 정찰조의 사내에게 물었다.

“이곳까지 도착 예정 시각은?”

사내가 대답했다.

“대략 1각입니다!”

급박했다. 1각의 시간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기 때문이다. 눈빛을 착 가라앉힌 그녀는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아수부전주는 비스듬히 저지선을 마련하고, 굳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막지 마!”

귀홍마(鬼紅魔) 조찬(曺贊)은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존명!”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사정화의 명령은 계속 이어졌다.

“살각의 살수들은 우측 산 위에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매복하고!”

“존명!”

섬살대주 을목평 또한 밖으로 사라졌다. 동천은 이러다가 다 사라져서 자신과 정화만 남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를 배반하기라도 하듯 명령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다시 차분해진 사정화는 말했다.

“좋아.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으니 의견을 제시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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