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96화
“그 횃불 꺼트리지 말고,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들이대서 곤란하게 하지마.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 화정이는 조그맣게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어 보였던지 그녀도 따라 소리 죽여 대답했다.
“응, 알았어. 안 꺼트릴게.”
“그래, 화정이 착하다.”
말을 잘 듣는 상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동천은 앞쪽의 사람들로 인해 그다지 어두워만 보이지 않는 시커먼 통로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가서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현재 그들이 지나가는 통로는 3인이 나란히 걸어갈 정도의 넓이였고, 위로는 성인 둘이 목마를 탔을 때 머리 하나 정도가 남는 정도의 높이였다.
어찌 보면 충분히 지나갈 공간은 마련되어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상태에서는 비상시에 턱없이 모자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고, 앞으로 전진하는 속도는 참으로 느리다고 할 수 있었다.
‘짜증나네.’
동천의 성격상 이따위로 지체되면 긴장감이 사라지고 짜증이 치솟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암흑마교의 일행은 제일 앞쪽의 오련이 함정을 파괴하며 지나가는 중이어서 그저 뒤따르기만 하면 되었지만 그것은 앞선 다른 문파들에게도 통용되는 문제였기에 나아가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동천의 심정을 대변하듯 냉현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흐음! 갈림길까지 도착하거나 통로가 넓어지지 않는 한 어쩔 수가 없는 일인가?”
옆에 있던 강소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주었다.
“아무래도 그럴 듯 싶어요. 이대로 상당부분 외길이 이어지다가 갈림길이 나타나는 만큼, 기다리는 일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을 듯 보여요.”
“음, 그렇겠지…….”
‘음, 그렇긴 뭐가 그래, 이 잡놈아. 너 성질 더러운 거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소홍이 앞이라고 꼭 그렇게까지 점잖을 떨어야겠냐? 너는 니 스스로 역겹지도 않아?’
동천은 자신의 심정을 대변해준 게 냉현이어서 기분이 좋아지려다 더 더러워졌지만 그나마 강소홍이 이어서 말문을 열어주었기에 치솟던 짜증이 약간이나마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자신이 냉현에게 성질을 냈던 그 부분을 그대로 재탕했다.
“어떻게 보면 잘 진행된 제비뽑기일 수도 있습니다. 기관진식에 관해서는 천하에서 둘째가라고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제갈세가인 만큼, 선두를 내어준 것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부드럽게 미소하며 점잖을 떨자 강소홍이 화답해주었다.
“그건 그래요. 어차피 승부처는 제일 처음 나타나는 갈림길. 그 때까지는 최대한 전력을 보전하는 것이 과제라고 할 수 있죠.”
‘캬아! 우리 소홍이 말도 참 조리 있고 예쁘게 한다. 흐흐, 그런 만큼 어서 빨리 냉가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할텐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게 문제란 말야? 뭐 알아서 죽길 기다리다가 정 안 되면 이 몸이 살수를 쓰는 수밖에!’
우뚝!
그때 갑자기 긴 행렬이 멈추었다.
잡념으로 인해 하마터면 앞사람과 부딪힐 뻔한 동천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뭐지?”
그 의문에 답해주기라도 하듯 저 멀리 제일 앞쪽에서 내력이 섞인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정이 발견되었소! 기관을 멈추게 하는 것이 최선책이나, 여의치 않는 경우가 8할 가량으로 예상되는 바! 우리측에서 먼저 건넌 후 방법을 일러 드릴 터이니 그대로 뒤따라오시길 바라오!”
오련과 바로 근접한 부근에서는 알겠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좀 떨어진 곳에서는 저희들끼리 두런대는 소리가 지배적이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이의만 제기하지 않으면 알아들었다는 무언의 의미였기에 예의 상 대답해준 근처의 문파들을 제외하곤 간단하게 대비책을 논의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암흑마교라고 다를 게 없었다.
“드디어 시작되었는가?”
“호호, 저들이 함정을 해제하다 알아서 죽어주면 좋겠지만 그래도 초반의 함정이니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겠군요. 흐응∼, 도해 내의 함정표식에도 없는 부분이니 우리는 그저 남들처럼 조용히 뒤따르는 것이 좋겠어요.”
“음, 그렇게들 합시다.”
혈각주 초무강과 요림주 금요랑이 대화를 나누자 아직은 초반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으므로 모두들 수긍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콧소리가 섞인 금요랑의 말처럼 천마도해 내의 길목에는 일정한 지점마다 함정인 듯한 푸른 점이 찍혀져 있었는데, 아직 그곳에 당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 젠장! 제비뽑기에서 오련의 바로 다음에만 걸렸어도 그나마 지루하진 않았을 텐데, 이거야 원 지겨워서 못 기다리겠네? 어휴, 정화 걔는 뭔 일을 이따위로 진행시킨 건지 원!’
평소 같았으면 벌써 폭발했었겠지만 몇몇을 빼곤 누구 하나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지금은 그저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각 정도를 기다리자 그들은 천천히 전진할 수 있었고, 선두로 인접해있던 혈사교는 사람을 시켜 암흑마교에 건너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비밀도 아니어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초무강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는 듯 진중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사람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상황이 어떻게 악화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모두 조심해서 바닥의 흔적에 따라 이동하시오. 그리고 자네는 후미에서 대기 중인 백의무검 일행을 기다린 뒤 건너는 방법을 일러주도록 하고.”
“예, 각주님.”
“알겠습니다.”
제각기 말이나 행동으로 대답을 해주자 고개를 끄덕인 초무강은 일행들 중 제일 처음으로 함정을 건너뛰었다.
휙! 휘릭, 탁!
“허허, 별 것도 아니구려. 어서들 건너오시오.”
위험을 강조하며 주의를 준 것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건넌 셈이자 초무강은 분위기를 완화시키고자 부드럽게 웃으며 다음 차례의 사람들을 독려했다.
그것을 본 동천은 생각했다.
‘에그, 쪽팔리면 쪽팔리다고 말하지. 나이 처먹고 그렇게 아닌 척하면 뭐가 나아지나? 에잉! 하여간 늙은 족속들은 권위주의가 너무 팽배하다니까?’
사실 혈사교에서 전해준 방법은 간단했다.
직사각형으로 된 바닥의 석판들 중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곳만 골라 건너뛰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화정아, 저기 바닥에 누가 발자국을 찍어 놓은 듯한 흔적들이 보이지? 어, 보인다고? 그래그래. 그러니까 네가 이 주인님 다음으로 건널 때 저곳들을 밟으며 지나가면 되는 거야. 어때, 쉽지?”
동천의 차례가 되어 다음으로 뒤따라올 화정이에게 개인교습(?)을 해주자 화정이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에∼! 저곳들만 밟으면 된다고? 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
자신만만한 대답이었으나 동천이 보기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았다.
물론, 지금이 평소였다면 그녀가 물 속에 빠지든 그 물을 다 마셔버리든 죽지만 않으면 혀만 차고 말았을 테지만, 지금은 화정이의 실수가 곧 자신의 실수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신경을 쓰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너 정말 자신 있어?”
“응, 자신 있어!”
“진짜야?”
“진짜!”
“진짜?”
“응!”
“진짜지?”
“험험!”
화정이의 대답 차례에 묵직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만독문의 당주 숭의겸이었는데, 가만히 놔두면 종일 저러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용감하게 나서준 것이었다.
그러자 효과가 있었던지(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잠시 고민하던 동천은 화정이를 업고 무사히 반대편으로 건너뛰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업혀도 시원치 않을 판에 업어주기까지 하면서 떠받들어야 하다니……. 으으, 이거 이러다가 천마동이 끝나는 순간까지 업어주고 다녀야 하는 거 아냐?’
화정이를 업어서 엉덩이를 받치던 손과 등뒤의 감촉이 좋았던 것도 있었지만 그런 것쯤이야 소연의 눈을 피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문제였다.
이건 체면상의 문제였던 것이다.
“하하, 아무리 자네의 강시라지만 너무 곱게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이거, 모르는 누가 본다면 그 강시가 자네의 상전인 줄 알겠구먼. 하하하!”
누가 냉현 아니랄까봐 동천이 고민하던 부분을 냉큼 집어서 비꼬았다.
덕분에 동천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냉정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화정이가 호기심이 활달하여 가끔 튀는 행동을 했었기에 안전을 기하고자 추태를 부렸습니다. 부디, 관대한 시선을 부탁드립니다.”
냉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야 충분히 이해해줄 수는 있으나, 주인의 명령을 불이행하는 강시라면 폐기처분 하는 것이 나을까 싶은데……. 자네의 의견은 어떠한가?”
동천은 속으로 대답했다.
‘그 전에 너부터 폐기해주랴? 이 잡놈이 감히 누굴 보고 폐기하라 마라 지랄이야?’
어처구니가 없는 김에 눈깔을 뽑아버리려다가 가까스로 인내한 동천은 말했다.
“만일의 사태를 위해 주의를 했을 뿐입니다. 설마, 그 정도까지 결함이 있는 강시를 아가씨께서 선발하셨겠습니까? 음, 혹시 소교주님께서는 아가씨의 안목을…….”
“그 무슨 소린가.”
싸늘해진 냉현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박혀오자 동천은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하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 가벼운 농담 한번 해보았습니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사죄를 드립니다.”
‘으윽, 이 쳐죽일 놈이 감히?’
차갑게 변해버린 얼굴로 눈가를 실룩거리던 냉현은 문득 자신의 팔을 지그시 잡아오는 손길에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바로 강소홍이 진정하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벼운 심호흡 후에 다시금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해를 살 만한 농담은 아무리 자네일지라도 조심해야 함을 잊지 말게나. 후후, 어쨌든 재미있는 농이었네.”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동천의 공손한 대답에 냉현은 들릴 듯 말 듯한 코웃음을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동천은 한껏 긴장했던 근육들이 이완되는 것을 느끼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살았다. 하마터면 별로 한 것도 없이 이곳 천마동에서 뼈를 묻을 뻔했잖아? 음, 이번에는 소홍이 덕분에 어떻게 넘어갔다지만 앞으론 진짜 조심해야겠는걸? 뭐 그래봤자 이 몸의 천재적인 유연함으로 대처해 낼 수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거야 없겠지!’
방금 전의 동천은 확실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사정화의 자질을 의심하는 중이 아니냐는 질문 자체가 냉현에게는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이 소문이 그녀의 귀에 들어갔을 시, 그녀가 어떠한 생각을 하겠는지를 말이다.
냉현으로서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곧 교주가 될 그녀에게 확실히 눈밖에 나는 것이었으니, 만일에 그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간질의 죄를 물어 동천을 몰아 부쳤다면 그로서는 꼼짝도 못하고 당하는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냉현은 사정화의 심복이 확실한 동천을 섣불리 건드릴 생각이 없었고, 때맞춰 강소홍이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실제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십 배나 큰 위기를 넘겼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던 동천은 아까 냉현의 비아냥거림을 들었기 때문인지 함정을 지나칠 때마다 화정이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고, 다행히 그녀는 동천의 고민을 가볍게 비웃듯이 명령에 잘 따르며 무사히 함정을 건넜다.
“이제 드디어 갈림길이오. 그런데 진짜 위험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는 이때에 한가지 문제점이 생겼소.”
인솔자인 초무강은 상당히 넓어진 갈림길의 한쪽에 일행들을 대기시킨 후 잠시 침묵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우리는 왼쪽으로 가고자 했으나, 오련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자 거의 모든 문파가 오른쪽을 택했다는 것이오.”
냉현이 물었다.
“그럼, 우리도 오른쪽으로 가자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선발대인 우리는 왼쪽으로 가기로 했고, 후발대는 오른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계획한 대로 가자니 피해가 상당할 듯 보입니다. 함정을 파괴할 때 우리 앞의 누군가가 피해를 감수해주어야 하는데, 이곳까지 오면서 발견한 6개의 함정들을 오련이 말끔하게 해결하자 이자들이 확실한 믿음이 생겼는지 오련을 따라 오른쪽 통로로 방향을 잡았다고 하니 말입니다.”
함정을 직접 제작하고 만든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완전한 해제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아무리 수십 개의 함정을 무사히 해결했다고 해도 마지막 1개의 함정에서 그 설치 의도를 잘못 파악하면 그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암흑마교는 최소한 셋 이상의 문파를 뒤따르며 그들이 피해를 입고 전진한 다음에야 뒤따르는 다소 얌체 적인 작전을 계획했었다.
누가 봐도 소인배 적인 작전이었지만 그래야 최후의 쟁탈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 초무강은 고작 3개의 문파도 확보하지 못하여 왼쪽으로 방향을 잡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으니 확실히 난감할 만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