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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9화


역천은 실실거리는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며, 혼자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은 너무 작아서 동천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참자.. 지금 내 제자는 방금 전까지 미쳤다가 돌아온 상태다. 이럴 때 두들겨 팬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잠시 생각을 마친 역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천과 화정이를 데리고 나가서 여러 하인들을 불러 모아 각자가 화정이에게 명령을 내려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모여든 하인들이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화정이가 꼼짝달싹도 안 하자 역천은 아무래도 제자와 강시 사이에 소연이 어떠한 이유로 끼어들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방으로 다시 돌아온 역천은 의자(椅子)에 앉아서 동천에게 강시를 깨울 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보라고 했다. 아무래도 거기에서 해결안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동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세히 말해주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얘기를 다 듣고 난 역천은 어이없어했다.

“허허…. 나참, 우선순위법칙(優先順位法則)이로군….”

“예? 우선.. 순… 뭐요?”

역천은 제자가 못 알아듣자 부연 설명을 곁들여 다시 말해주었다.

“제자야.. 우선순위법칙(優先順位法則)이란… 한 사람 이상이 강시를 깨울 때, 깨어난 강시가 자신을 깨워준 사람을 따르는 정도를 말한다. 즉, 자신을 깨워줄 때, 자신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충성의 정도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따르는 순서는 첫째, 피를 뿌려준 자. 둘째,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 자. 셋째, 얼굴을 보여준 자.. 이렇게 순위가 매겨지는 법칙을 말하는 거란다.”

사부의 말을 다 듣고 난 동천은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겨버렸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확인해서 손해 볼 것은 없기에 얼른 물어보았다.

“그럼, 소연이가….”

“그렇다. 강시를 깨울 때, 소연이는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충족(充足)시켜줬으므로 소연의 말도 듣게 된 거란다. 너한테는 안 됐지만서도… 그래도, 강시는 그 어떠한 말도 네 말을 우선적으로 듣기 때문에 네가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을 거다. 그걸로 만족해라. 그렇게 된 데에는 네 잘못도 크니까..”

동천은 사부의 앞이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이 애써 참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소연을 찾아내서 족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으으… 열 받아! 이 계집애. 오기만 해봐라.. 으득!’

동천이 그러고 있을 때, 그런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 역천은 말없이 조용히 일어서서 나갔다. 그러나 동천은 사부가 나간 줄 모르고 계속 분노(忿怒)의 불길을 삭이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돌아오는 길에 역천을 만나서 인사를 했던 소연은 불쌍하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지나쳐간 전주의 눈길에 의아해하며, 동천의 방 앞에 도착했다. 전주님이 왔다가서 주인님의 화가 풀렸을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하는 마음에 소연은 최대한으로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방에 들어갔다.

“주인니~임! 화가 다 풀…..”

‘.. 리시지 않으셨네? 어,, 어떻하지?’

소연이 불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할 때, 동천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리 오라는 것이었다. 안 갈 수가 없었던 소연은 삐끗! 거리며 마지못해 다가갔다.

“왜… 그러세요?”

따-악!!

“아야!”

경쾌한 소리가 방안을 울려 퍼지며 아울러 소연의 아픔에 섞인 목소리도 울려 퍼졌다. 그러나 동천의 목소리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동천은 소연의 말 때문에 쓰지 않으려 했던, 근엄한 목소리를 다시 흉내 냈다.

“나는… 너를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

동천에게 맞은 머리가 얼마나 아팠던지 소연의 눈에선 눈물이 다 고였다.

“흑.. 벌써, 때리셨잖아요…..”

“이!!.. 년아.. 너무 따지려 들지 마라. 너는 모르겠지만 사부님의 말씀으로는 며칠 전에 내가 화정이를 깨울 때, 네가 들어오는 바람에 화정이가 네 말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연은 겨우 울음을 그친 후,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빠-악!

“꺄-악!! 흑흑… 살려줘요….!”

맞은 곳을 또 맞는 것이 어떠한 고통일지 잘 알고 있었던 동천은 소연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그 눈빛이 진실일지는 동천 외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차마, 너를 때릴 수가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융통성(融通性)이 없었던 소연은 곧이곧대로 밀고 나갔다.

“엉엉~엉..! 그러면서 왜 때려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때리면 소연이 까무러칠까 봐, 동천이 손을 멈췄다는 것이었다.

“내가 전에 나에 대해 읊어보라고 한 적이 있을 거다. 네가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말은 점잖게 하고 있지만 손은 꿀밤을 때릴 것처럼 위아래로 내려치는 시늉을 하자 소연은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얼른 기억을 더듬었다.

다행히도 소연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예… 기.. 기억나요. 그게, 주인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나는 그 어떠한 주인님의 행동에도 오해를 해서는 안된다. 주인님의 취향은 내가 아니니, 나는 안심해도 된다.. 주인님은 위대한 분이시며, 그런고로, 여색(女色)을 탐하지 않는 인자하신 분이시다.. 주인님은 머리가 뛰어나시고, 인재 중의 인재 시기 때문에.. 앞으로 암흑마교를 이끌어나가실 분이시다…..까지인 걸로 알고 있어요.”

진땀을 흘려가며 겨우겨우 읊어낸 소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연이 기특하게도 그 내용을 지금까지 외우고 있자 더 때릴 수 없었던 동천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다니, 참으로 기특하구나. 이제 거기에다 몇 가지를 더 추가시키겠다. 잘 들어라…”

소연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예..”

“첫째, 너는 나의 방안에 들어올 때,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기척을 보내고 들어온다. 둘째, 화정이가 너를 따르게 된 것도 다 인연(因緣)이니.. 네가 앞으로 화정이를 가르치는 걸 담당해라. 참고로 지금 화정이의 지적 수준은 유아에 비견된다. 셋째,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뒤에다 토를 달지 말아라.. 이게, 새로 추가된 규칙이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소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동천은 실눈을 뜨고 지그시 소연을 쳐다봤다. 그런 시선에 어색함이 감돌자 소연은 헤~! 하고, 입을 벌려 웃었다. 동천은 한 대 칠까? 하다가 애써 참았다. 그 대신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그래.. 내가 지금, 무지하게 참고 있으니까 이만 네 할 일이나 해라. 화정이를 가르치는 것은… 잠깐만….”

뭔가 생각난 동천은 아무런 대책 없이 소연이 혼자 화정이를 가르치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책 더미를 뒤지더니 항광의 용독경을 찾아서 소연에게 주었다.

“411쪽부터 보면, 강시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아주 자세히 나와있을 것이다. 애들 불러서 여기 청소(淸掃)하라고 하고, 너는 지금부터 네 방으로 가서 화정이를 어떻게 교육(敎育)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봐라. 준비 도구들은 알아서 네가 챙기고, 그걸 구하는 데 누가 뭐라고 하면 내 명령이라고 해라. 알았느냐?”

“예. 알겠어요..”

고분고분히 말하고 나가려는 소연을 동천이 다시 불렀다.

“아참… 소연아 며칠 내로 계획표(計劃表)를 세워서 가져오너라. 내가 그걸 읽어보고 허락을 하겠노라.”

소연은 정말로 주인의 그런 어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또 맞을까 봐 그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동천은 이만 나가보라고 손을 휘저었다. 소연이 인사를 하고 나간 후, 동천은 사악(邪惡)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이년아. 생각 같아서는 도연이 자식처럼 쥐어패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네가 죽을 것 같기에 참았다. 히히히! 그 대신 화정이를 가르치는 게 얼마나~나 고역(苦役)인지 몸소 체험해보거라.. 킬킬킬킬…! 기대된다..”

한참을 좋아라… 혼자 웃어젖히던 동천은 도연 얘기가 나온 김에 도연이 누워있던 요양실로 하인 하나를 딸려서 걸어갔다.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찾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냐?”

요양실(療養室)이라고 간판이 걸려 있었지만 동천은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데려온 하인에게 물어보았다. 그 하인은 얼른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예예.. 맞습니다요. 약왕전에서 전주님의 개인 요양실 빼고는 보통 사람들이 머무는 곳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들어가시면, 찾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동천은 알았다는 듯이 만족의 웃음을 띠며 요양실로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약초를 달이는 냄새가 싸아.. 하게 동천의 콧속으로 들어와 안색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 냄새가 싫어서가 아니고, 강렬한 향기를 갑작스레 맡아서 저절로 생긴 반사 행동일 뿐이었다. 안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는데, 그중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사내를 불렀다.

“웃! 냄새.. 야, 이리 와봐.”

동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환자에게 침을 놓아주던 사람을 부르자, 그 사람은 동천을 알아보고 얼른 일어나 동천에게 다가왔다. 그 사내는 싹싹한 표정으로 얼른 다가왔다.

“앗? 어떻게 오셨습니까? 소전주님께서 이곳으로 친히 오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아부 기가 다분히 보이는 사내의 말투에 찌푸려졌던 동천의 얼굴에는 함박꽃이 피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처음 보는 사나이를 많이 만나본 사람처럼 다정하게 대했다.

“하하하! 역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었구만? 그래.. 내가 왔으니 너에게는 영광일 거야.. 히히! 암.. 그렇고말고!”

동천이 좋아서 실실거리자 사내는 그걸 말없이 지켜보다가 공손히 물어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응? 아… 잠시 잊어버렸군.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아까 전에 기절해서 데려온 도연이라는 아이를 만나려 온 거야. 걔 어디 있지?”

그 말에 잠시 생각해보던 사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 아이 말이군요? 그 아이라면 벌써 나갔습니다.”

“뭐? 나가?”

갑자기 동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전주의 인상이 험악해지자 겁이 난 사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이제, 다 나았습니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보내주었습니다.”

나갔다면, 도연이가 갈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제길.. 그 새끼 진짜로 독한 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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