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75화


야채 저장고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수련동이 나온다는 것을 정원에게 얼핏 들은 것 같기에 동천은 벽면을 따라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동천이 듣기는 제대로 들었는지 얼마 안 가 또 다른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이에 기뻐하던 동천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는 얼른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니 세 갈래의 길이 동천을 반겼다. 이에 어디로 들어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동천은 그냥, 무턱대고 소리를 쳐보기로 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잠시 후, 수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빨리 와!”

‘이거, 어디서 들리는 거야?’

수련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서 회답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동굴의 특성 때문에 소리가 울려 퍼져 어디서 들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야! 소리가 울려서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지금, 동굴 앞인데 어느 쪽 길로 가야 돼?”

다시 수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왼쪽이야.. 맨 왼쪽!”

대답을 듣고 난 동천은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는데 또다시 수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참! 동천아! 내가 볼 때는 왼쪽이고, 네가 볼 때는 오른쪽 길이야! 벌써 갔으면 다시 돌아와!”

윽! 하고, 걸음을 멈췄던 동천은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고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으으… 저런, 싸가지없는 년을 봤나..?”

그러나 소릴 내서 욕을 할 순 없었다. 저 안에는 분명히 사정화가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동천은 속으로 분을 삭히고는 투덜대며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뛸 생각도 안 했다. 천천히 걸어간 동천은 곧이어 무표정한 사정화와 은근히 웃음기가 감돌고 있는 수련을 볼 수 있었다.

“헤헤.. 아가씨. 그간 안녕하셨어요? 제가 좀 늦었죠?”

사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늦었어. 그것도 많이….”

마치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듯한 사정화의 심연한 눈빛에 동천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

‘사정화는 무섭다. 그런 년이 나보고 늦었다고 했다. 사정화는 성질이 더럽다. 그런 년이 나보고 많이 늦었다고 했다. 사정화가 나를 때릴까? 설마.. 명색(名色)이 약왕전 소전주인데… 그러기까지 하겠어? 그래! 그럴 순 없을…’

짜악!

“윽!”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정화의 손길에 동천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정화는 단호했다. 당연히 그만큼에 비례해서 동천의 볼때기는 아픔을 더해갔다.

“그 버릇.. 여전하구나.”

그동안 간덩이가 커져서 어디 갔는지 몰랐던 동천의 간은 방금 맞은 따귀 한 방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한 번만 봐주세요.”

그 비굴함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는지 사정화의 안색은 미미하게 풀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수련의 안색은 서서히 굳어져갔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좀 더 맞아야 하는데 생각 외로 아가씨가 한 대만 때리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불씨를 더 지펴보려던 수련은 은근히 말리는 척하면서 아가씨의 신경을 건드리기로 마음먹고 동천을 비호했다.

“그래요. 비록, 동천이 늦게 왔기는 했지만.. 그리고 방금 들어올 때도 천천히 걸어왔지만, 지금 이렇게 잘못했다고 하니까 이만하시고요. 우선 자리에 앉으라고 해요. 뭐, 빈둥거리다 와서 피곤하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오기는 왔잖아요. 그리고…”

사정화는 내심 지겨웠는지 수련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됐어. 알았으니까, 그만할게. 동천.. 앉아.”

“예.. 헤헤.”

그제서야 조마조마하던 동천은 살았다는 듯이 사정화가 권해준 자리에 재빠르게 앉았다. 반대로 수련의 얼굴은 더욱더 찌푸려졌다.

“그게.. 아니고….”

“할 말 더 있어?”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쉰 수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수련의 이상한 행동에 잠시 수련을 쳐다보던 사정화는 곧이어 관심을 동천에게로 옮겼다. 사정화는 동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연회가 있었다지? 재미있었어?”

“예.. 헤헤! 하지만 아가씨가 안 오시니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요.”

이제는 맞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동천이 좋아라 아부까지 하는 모습에 아까부터 자신의 의도대로 되질 않았던 수련은 지금 동천이 하는 짓이 못마땅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마디 쏘아붙였다.

“흥! 아가씨, 거짓말이에요. 제가 갔을 때는요.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어대서 그 입을 귀에 걸어도 될 정도였다고요.”

당연히 이 말을 듣는 동천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야, 그건 예의상 웃어주는 거야. 그래도 오는 사람의 성의가 있는데 어떻게 인상을 쓸 수가 있냐?”

수련은 질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웃기지 마. 네가 그렇게 속이 깊다면 내가 가져다준 책을 내팽개치지도 않았을 게 분명하잖아. 어디, 이거에 대해 할 말 있어?”

“으읏!”

순간적으로 동천은 말문이 막혔다. 그때, 그 일로 자신도 한동안 찜찜했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얘기가 거론되자 자연히 동천의 눈동자는 사정화에게로 향했다. 사정화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자신에게 아픔이 오느냐.. 안 오느냐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사정화의 표정은 어서 대답해 보라는 것 같았다. 동천의 눈동자는 불안한 빛을 발하며 흔들렸다.

‘저 계집애.. 아예 작정을 했어. 작정을.. 쪼잔한 년 같으니라고… 에이씨. 그건 그렇고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난다냐.. 생각나라… 제발…..’

하늘님이 도우셨는지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던 동천에게 불현듯 희망의 빛이 비춰왔다. 그리고, 실행은 빠를수록 좋았다.

“으응.. 그거? 그때도 말했듯이… 아차? 아가씨, 이것 좀 보실래요?”

동천은 얘기해줄 듯.. 하다가 할 말이 없으니까, 갑자기 생각이 난 듯한 표정으로 너스레를 떤 다음 품속에 들어있던 옥피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질문을 했던 수련도 대답을 원했던 사정화도 동천이 꺼내 든 것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수련은 아름답게 세공된 옥피리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후아… 굉장히 아름답다.. 동천아! 그거, 어디서 난 거야?”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가자 동천은 신이 났다.

“히히! 예쁘지? 아가씨. 보실래요?”

사정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천은 얼른 건네줬다. 잠시, 만져보고 돌려보던 사정화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방금 전의 화제가 더 이상 안 나오게 쐐기를 박을 시기가 다가오자 동천은 은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세요?”

“그래.. 마음에 들어. 어디서 난 거지?”

“헤헤! 소교주님이 주신 건데요. 마음에 드시면 가지세요.”

소교주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사정화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고는 인상을 험악하게 바꾸었다. 사정화는 옥피리를 쥐고 있는 양손에 점점 힘을 가했다. 부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교주가 쉽게 부러질 것을 줄 리가 없었다. 여기서 그만두면 쪽팔리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사정화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동천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 아가씨. 왜 그러세요..?”

사정화는 힘을 가하는 것을 늦추지 않으며 동천을 째려보았다. 당연히 무서워진 동천은 사정화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살며시 옆으로 돌렸다. 그래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사라지지 않자 동천은 수련에게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련은 동천의 눈치를 알아챘지만 아가씨가 화나있기 때문에 아까처럼 큰 소리로 떠들진 않았다.

“이 바보야.. 아가씨는 소교주를 싫어하신단 말야…”

“뭐…?”

깜짝 놀란 동천은 사정화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쩌-적… 쩌저저.. 적!!

그 순간 사정화가 쥐고 있던 옥피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으-윽! 저 년이.. 저, 아까운 것을… 아이고.. 돈이 얼마인데…..’

사부에게 돈으로 치면 값어치가 굉장하다고 들었기에 금이 가는 옥피리를 바라보고 있는 동천의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 대 후려치고, 옥피리를 가로채고 싶었지만 동천은 눈물을 삼키며 참았다. 제가 참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쩌저.. 파삭!

결국에는 아름답던 옥피리가 중간쯤에 보기 흉하게 부러지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사정화는 바닥에 떨어뜨린 옥피리를 무심한 눈길로 잠시 쳐다보더니 곧이어 동천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바뀌었어. 마음에 안 들어.”

사정화다운 말투였다. 상대가 사정화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으면 조그마한 항의(抗議)라도 해봤겠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동천은 금세 단념했다.

“그러세요.. 그러시다면야….”

“불만있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사정화의 물음에 동천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 있나요. 어떤 놈이야? 감히, 어떤 인간이 그런 소릴 해? 나와! 수련, 너야? 응? 너냐구!”

수련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너, 빼곤 없어..”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