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88화
동천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독서삼매(讀書三昧)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동천은 지금 거의 끝부분을 읽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제목에 걸맞게 복수(復)였다. 그리고 동천이 읽고 있는 부분은 끝부분인 복수가 이루어지는 장면이었다. 동천은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되는 양 흥분을 했다. 손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낀 동천은 소리쳤다.
“그래! 죽여라!”
책 속의 주씨는 상대편 마두(魔頭)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주씨가 그 와중에 팔에 상처를 입자 동천은 안타까워했으며 상대편 마두가 주씨의 장력에 격중되자 통쾌해하였다. 드디어 싸움은 주씨의 승리로 끝이 났다. 주씨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마두에게 다가갔다. 그는 허탈하게 말했다.
-왜.. 왜 나였소.
그 마두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자 허망한 듯 하늘을 보았다. 곧이어 마두의 시선이 하늘에서 주씨로 옮겨졌다. 마두는 힘이 부치는 듯 할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헉헉.. 어, 어쩔 수… 없었다.
주씨는 화를 냈다.
-왜! 왜, 어쩔 수 없었냐는 말이오!
마두는 히죽! 웃었다.
-클클.. 나도… 시주를 받았을 뿐이다..
주씨는 한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천하제일마에게 명령을 내릴 정도의 인물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신 수련이 뛰어났던 주씨는 곧이어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았다.
-당신이 명령을 받다니.. 그게 누구요.
주씨의 말에 마두는 착잡함을 금할 수 없었다. 천하제일마로 추앙받던 자신이 남에게 명령을 받고 죄 없는 여인을 죽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순간 죽어가던 마두의 혈색이 불그스름하게 되돌아왔다. 회광반조(廻光返照)였다. 그것을 본 주씨는 다급한 마음에 소리쳤다.
-말해주시오!
마두는 체념(諦念)한 듯 천천히 말했다.
-그는…. 그는 바로..”동천”…이다.
“엑-?”
한참 재미있게 책을 읽는데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동천은 황당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놀란 동천은 눈을 비빈 후, 다시 그 구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는 바로.. 천옹…이다.. 읍! 쿨럭!
“어? 내가 아니라 천옹인데? 왜 이 부분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던 거지?”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난데없이 들어온 인간을 쳐다본 동천은 의외의 인물에 놀라 했다. 수련이었던 것이다. 창백한 얼굴과 턱과 볼에 붉은 선들이 이리저리 나 있는 수련은 동천이 보이자 얼른 다가왔다.
“동천! 나 쥐 좀 잡아줘!”
다짜고짜 다가와서 뜬금없이 쥐를 잡아달라니…
“뭐시기?”
동천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화정이의 무릎에서 일어나자 수련은 그 심정을 이해했는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자신이 오줌을 싼 부분은 당연히 넘어가고 설명하고 있는데 동천이 중간에 수련의 말을 막았다. 동천은 수련의 뒷부분을 보았다.
“야! 들어오려면 빨리 들어와! 왜 대가리만 삐죽 내밀고 쳐다봐?”
동천의 말에 수련이 뒤를 돌아보니 소연 언니가 꾸중을 듣고 죄송하다는 얼굴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도연이 따라 들어왔다. 언니가 보이자 여지껏 잘 참았던 수련은 울먹이며 소연에게 달려가 안겼다.
“언니이… 잉잉!”
“그래, 쥐 때문에 많이 혼났나 보구나.”
수련은 언니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위로해주자 안심이 됐는지 더욱 크게 울어댔다. 그 소리에 귀를 막던 동천은 뒤에서 멀거니 서있는 도연에게 말했다.
“넌 또 왜 들어와?”
도연은 대답했다.
“소연과 같이 있었는데 들어오시라기에 들어왔습니다. 나갈까요?”
한 대 칠 듯한 시늉을 해본 동천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아.. 됐어. 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기분이 상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동천은 수련이 아직도 울고 있자 소연을 노려보았다. 너 때문에 울었으니 네가 알아서 울음을 그치게 하라는 무언의 표정이었다. 다행이 이를 얼른 눈치챈 소연은 자신의 동생을 토닥여주었다.
“자.. 수련아. 그만 울고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봐. 주인님이 기다리시잖아.”
수련은 눈물을 닦았다.
“칫.. 주인님은 무슨…”
“뭐야?”
동천이 열받아서 화를 냈지만 수련은 안중에도 없는 듯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하는 짓을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으으.. 저 년을 한 대 칠 수도 없고….’
주먹이 울었다. 하지만 사정화라는 든든한 배경이 도사리고 있는 수련을 함부로 어찌할 수 없었던 동천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야! 알았으니까, 어서 말해봐.”
동천이 물어오자 수련은 고개를 끄덕인 후 동천이 아닌 소연을 보며 말했다.
“그게요…”
“잉잉.. 살려줘요! 잉잉.. 살려줘요!”
수련은 한동안 쥐 때문에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다가 아무 일도 없이 잠잠해지자 마음 놓고 징징거렸다. 오줌도 시원하게 쌌겠다.. 이젠 꺼릴 것이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울먹였는지 수련의 두 눈두덩이는 부어 있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수련의 마음에는 먹장구름이 끼어 있었다. 심란해진 수련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찝찝해… 잉..!”
몸을 움직이자 젖은 속곳과 치마는 허벅지에 착 달라붙어서 기분 나쁜 끈적임을 보였다.
서러워진 수련은 다시 울먹였다.
“잉잉.. 살려줘요…”
부어있는 눈으로 울던 수련은 무엇을 결심했는지 한순간 눈을 번뜩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청목 할머니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기에 다시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해보려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무턱대고 고개만 잡아 빼는 것이 아닌, 천천히 분석하면서 빠져나가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굳게 다짐하던 수련은 갑자기 코를 벌름거렸다.
“윽! 찌린내…”
공기의 흐름이 멈추자 찌린내가 솔솔 구멍 사이로 올라왔던 것이다. 자기가 싼 거지만 아무리 참으려 해도 고역(苦役)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찌린내는 더했다. 냄새가 심해서 입으로만 헥헥.. 거리던 수련은 다시 바람이 불어오자 그제서야 상쾌한 바람을 콧속으로 흡입했다.
“후아..! 살 것 같다.”
다시 원기를 되찾은 수련은 조심스럽게 목을 잡아 뺐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수련의 턱은 벽면에 부딪혔다.
턱….
수련은 마침내 일차 관문에 도착하자 긴장했다. 숨을 길게 들이켰다가 내쉰 다음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후 목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효과가 있는지 부스스스…, 라는 소리와 함께 작고 미세한 부스러기가 벽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흩어져 내렸다. 한 줄기 희망(希望)의 빛을 본 수련은 기쁜 마음에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삭! 부스스….
아까보다 큰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기뻐서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에 고개를 있는 대로 돌려대며 목을 잡아 뺐다. 한쪽이 한계에 부딪히면 반대쪽으로 목을 돌려 작은 알갱이들이 떨어져 내리길 간절히 바랬다.
“헉.. 헉…! 에구구구.. 힘들다. 헉헉..”
지랄을 했으니 힘이 안 들래야 안 들 수 없었다. 턱의 밑부분은 하도 부딪혀서 시큰거렸고, 뒷골은 당겼지만 어느 정도 구멍이 넓어졌다는 생각에 그녀는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그런 미소를 지웠다. 구멍이 넓어지긴 했지만 그 차이는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드디어 결전(決戰)의 때가 왔다.
“후우.. 잘 될 거야.”
수련은 자기 스스로 위로를 했다. 수련은 아까 목아지를 돌리다가 빠져나가기에 가장 적합한 오른쪽 사십오도 각도를 알아내고는 조심스레 그 부분에다 턱을 맞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턱에 힘을 주며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비비고, 다시 왼쪽으로 비비며 벽을 문질러댔다. 벽면에 올려놓은 두 손에는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돌려대자 턱이 따가워 죽을 지경이었다.
“읍..! 읍!”
절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기에 이를 악다문 수련은 턱 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수련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턱 밑부분이 빠져나왔다. 그 순간 기쁨의 환호를 터뜨리려던 수련은 다 빠지지 못하고 중간에 입이 걸리자 입술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하도 거세게 잡아 빼다 보니 힘 조절을 할 새가 없어서 입을 벽면에 부딪힌 것이었다. 수련은 당연히 아픔의 소리를 질렀다.
“아야! 쓰으읍…”
얼마나 아팠던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엄청난 아픔에 두 손으로 입을 감싸 쥐고 싶었지만 손이 벽에 가로막혀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애먼 바닥만 쳐댔다. 한동안 몸을 배배 꼬던 수련은 시간이 흘러 고통이 어느 정도 물러나자 입안을 혀로 살살 굴려보았다. 찝찔한 게 아무래도 어딘가가 터진 모양이었다.
“히잉.. 이 나쁜 놈의 쥐새끼. 내가 나가기만 해봐라..”
수련은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은 자신의 잘못도 있으면서 이 모든 영광(?)을 쥐에게 돌렸다. 쥐를 잡는 건 나중의 일이고.. 어디까지나 빠져나가는 게 중요했던 수련은 일차 관문에 성공했으니 이제 이차 관문에 도전하기로 했다. 긴장이 되자 온몸에 진땀이 솟아났다. 오줌을 싼 지 오래됐는지 새삼스레 하체가 따끔거렸다. 수련은 이를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턱을 중심으로 돌렸지만 이번에는 볼따구를 중심으로 고개를 돌리며 두 손을 벽에 집고 힘껏 밀어쳤다.
“아으으-윽.. 힘줘….! 히..임!”
수련의 볼은 신음 소리에 맞춰서 점점 빠져나왔다. 빠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하자 고통 따위는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마침내 수련의 머리는 끼인지 장장 두 시진만에 빠져나왔다.
뿅! 철푸-덕!
자기 마개를 따는 소리와 물에 빠지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아마 소변의 양이 생각 외로 많았던 모양이다. 자신이 빠져나왔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던 수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있다가 잠시 후에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아야!”
당연히 아팠다. 그러나 기분은 엄청 좋았다. 이것이 현실인 것을 깨달은 수련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와아! 자유다!”
수련은 기쁨의 소리를 지른 후 뭉그적대며 몸을 뒤로 내뺐다. 그 바람에 상의와 두 손이 오줌물로 범벅되었지만 그 부분에는 그리 큰 비중(比重)을 두지 않았다. 다만 얼른 가서 목욕을 하고픈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