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2권 – 제3부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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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2권 – 제3부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3화

3

그렇지 않아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자넨 너무 흥분하는 것 같은데?”

“갚아줄 게 있으니까! 그 뱀파이어, 내게 번개를 날렸어, 갚아주겠어요!”

샌슨은 나에게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하지만 그 덕택에 아름다우신 프리스티스의 무릎에서 잠들 수 있지 않았냐?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세상에, 프리스티스의 그걸.

“죽일 거야!”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칼라일 영지로 들어가기로 했다.

에델린은 우리의 말에 대단히 고마워했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다. 칼에 의하면 저런 현상, 하나의 신이 가진 힘만이 지배하는 땅이 지상에 나타나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것이 질병의 신 게덴이라면 대륙 전체로 전염병이 퍼져나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 개인으로서 도 갚아줄 일이 있지. 그 벼락은 제법 뜨거웠어. 그리고 덕택에 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스캔들을 일으켰다고.

에델린은 오늘 구름을 부르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나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작열하는 태양빛이 그대로 내리쬐었다. 가 을볕에 살갗 타는 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맙소사, 이건 숫제 쏟아지는 폭포처럼 만물을 녹일 듯이 퍼붓는 햇빛이다.

“저거 아지랑이 같은데?”

“아지랑이 맞아.”

“…….”

이 가을 들판에 아지랑이라. 머리가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샌슨과 나는 갑옷 안에 받쳐 입던 두꺼운 셔츠도 벗어버리고 얇은 속옷 위에 가죽 갑옷을 입었다. 이루릴도 재킷을 벗어두고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올렸다. 새하얀 팔이 내 눈을 붙잡으며 다시 오늘 새벽의 꿈이 떠올랐다. 잊자! 빨리 잊어야 해! 하지만 나는 어느새 멍한 얼굴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세 개나 풀어버리는 이루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뽀얀 앙가슴이 내 시선을 붙잡아매었다. 이런, 내가 샌슨을 닮아가나? 이루릴은 단추를 풀다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황급히 말했다.

“더, 덥지요? 이루릴?”

“그렇군요.”

나와 샌슨이 정면에 섰다. 말들을 천천히 걷게 하며 밭을 가로질러 칼라일 영지의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샌슨은 말없이 밭에 피어 있는 작물을 가리 켰다. 말라 비틀어지고 썩어가는 작물들. 가을 들판의 풍요로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햇살. 무엇보다 끔찍스 러운 것은, 그림자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난 그림자가 없는 얼굴을 보는 것이 이렇게 이상한 줄 몰랐다. 샌슨이 마치 샌슨이 아닌 것처럼 보이잖아. 납작하고, 한결같은 색깔이다. 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괴로워 앞만 바라보았다.

영지 입구 양쪽에 가로수가 나타나다가 그 뒤로 차츰 마을의 건물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먼지가 지독하게 피어올랐고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에 그대 로 먼지가 달라붙었다.

“끔찍하게 덥군.”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샌슨이 투덜거렸다. 우리는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일행의 맨 뒤에서 걸어오던 에델린이 천천히 기도에 들어갔다. “프로텍션 프롬 디바인 파워.”

에델린이 기도를 끝내자 곧 우리 주위의 어떤 막 같은 것이 생겼다. 그것은 직경 약 20큐빗의 반구형 막으로, 비누 거품처럼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안 보였다가 어떻게 보면 그 표면을 흐르는 빛이 보였다.

에델린은 두 손을 다시 내리며 말했다.

“이제 다른 신의 힘은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당장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방어막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더위가 상당히 가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영이 전혀 없어 목과 얼굴 색깔이 똑같아서 괴이하게 보이던 샌슨의 얼굴이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칼은 침착하게 질문했다.

“그럼, 이 막을 벗어나면 우리는 위험해지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행동에 장애가 심할 테니 안 되겠지요. 이건 다른 기도를 위한 준비입니다.”

에델린은 다시 기도에 들어갔다. 그녀의 거대한 손이 빛으로 물들더니 그녀는 우리 각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흠, 땅에 선 채로 간단히 말 위에 있 는 내 머리에 손을 얹는군.

“에델브로이의 이름으로 그대를 축복합니다.”

흠, 뭐가 달라졌지?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샌슨은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축복을 받았고 칼은 경건하게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에델 린의 축복을 받았다. 에델린은 이루릴을 잠깐 바라보았을 뿐 이루릴은 축복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에델린은 말했다.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며 그랑엘베르의 총애를 받으시는 엘프께는 에델브로이의 축복이 필요없으시겠지요. 어쨌든 여러분은 이제 대략 세 시간 가 량은 게덴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병에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 네.”

“그럼, 수색을 시작해 보도록 하지요.”

다시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말이 걸을 때마다 풀썩거리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건물 색의 부조화는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 지경이다. 어디를 보 아도 똑같은 색깔. 게다가 오늘은 건물 벽이 마치 백열하여 불타오르는 듯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그저 하얀색으로만 보였다. 우선 우리는 고함을 지 르며 돌아다녔다.

“이봐요! 누구 없어요!”

“여기 멋진 총각이 둘이나 있으니 고개를 내밀어…………,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칼! 할 수 없군. 여기 멋진 총각이 셋이나 있으니 고개를 내밀어 봐 요!”

“네드발 군………, 그만둬 주게.”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건물마다 들어가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 예상에 의하면 이곳 엔 질병이 판치고 있을 것이다. 아픈 사람들이 집을 떠날 수가 있을까? 칼은 잠시 고민하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 질병이라. 가능성이 높은 장소는 신전이나 성, 공회당 같은 건물이겠지. 그런 곳에서 병자들을 수용했을 거야.” 우리는 마을 중앙의 좀 커 보이는 건물들이 모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까아옥! 까르르, 깍!

까마귀 하나가 우리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나는 흠칫해서 그 까마귀를 보았으나 한 마리뿐이었다. 그놈은 건물 처마 위에 앉더니, 작열하는 태양빛 속에서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당당한 자세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훠이! 꺼져!”

고함을 질러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분 나쁜 시선을 한 번씩 보낸 다음 까마귀를 무시하며 걸어갔다. 건물들 중앙으로 공터가 보였고 거기에는 작은 가건물과 함께 우물이 있었다.

“음?”

샌슨이 뭔가를 발견했다.

“우물 뒤에, 꼬마인가?”

나도 그때 우물 뒤에서 머리를 빠꼼 내밀었다가 후다닥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왜 저러지? 나와 샌슨은 서로 마주보았다. 나는 앞을 향해 말했다. “이봐, 거기 누구니? 우린 널 해치지 않아.”

잠시 후, 다시 머리가 천천히 올라왔다. 원래는 금발이었을 듯한 머리가 퇴색한 채로 마구 흐트러져 흐르고 있는 계집아이였다. 나이는 대여섯 살이 나 되었을까. 원래 귀여웠을 얼굴이지만, 음영이 하나도 없는 그 얼굴은 하얀 가면 같았다. 소녀는 쭈뼛거리며 우물 옆으로 돌아나왔지만 우리 쪽으 로 걸어온 것은 아니다. 그 소녀는 여차하면 옆의 골목으로 뛰어들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얘야, 안심하렴. 이 마을에 병이 돌고 있지? 우리는 그것을 고치러 온 사람이야.”

그 말을 듣자 골목길과의 거리를 재던 소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칼은 말에서 내리더니 천천히 그 소녀에게 걸어가려고 했으나 칼이 다가가자 소녀는 물러났다.

그때 나는 우물 옆에 놓인 두레박을 보았다. 두레박에는 물이 반도 안 되게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역시 물이 반도 안 되게 담긴 물통이 보였다. 아 마 저 소녀의 힘으로는 이 정도밖에 끌어올리지 못했겠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두레박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소녀는 마치 나와 검투 시합이라도 벌이듯이 내 움직임에 따라 둥글게 움직였다. 나는 느린 동작으로 잘 보라는 듯이 두레박을 들어올려 우물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우물물을 길어 물 통에 쏟아 보여주었다.

소녀의 얼굴에 불안이 조금 가시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우물물을 길어올려 유쾌하게 물을 쏟았다. 물통은 단번에 찼다.

“내가 들어다줄게. 어디로 가면 되지?”

“신전.”

“알았어. 난 후치야. 넌?”

“슈.”

“슈? 좋은 이름이야. 예쁘구나. 예절도 밝고, 저기 잘 되지도 않는 미소를 짓느라 애쓰는 아저씨는 칼이야. 그리고 저기 먹성 좋게 생긴 입을 가진 아 저씨는 샌슨이야.”

칼과 샌슨은 허허 웃어버렸고 슈도 덩달아 간신히 미소 비슷한 것을 떠올렸다. 그 애의 눈이 칼과 샌슨을 따라 움직이다가 이윽고 이루릴에게 머물 렀다. 슈의 눈이 커졌다.

이루릴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루릴.”

슈의 얼굴이 대단히 환해졌다. 이루릴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다가왔지만 칼의 경우와는 다르게 슈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한두 발자국 걸 어갔다. 이루릴은 허리를 굽혀 슈의 눈과 눈높이를 맞추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슈? 내가 안아줄까?”

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루릴은 슈를 안아올렸다. 허, 아무리 낯을 가리지 않는 아이라도 조금 경계할 법한데. 슈는 전혀 불안감 없이 이루 릴의 목을 감았다.

그때 나는 갑자기 고민에 빠졌다. 일행의 맨 뒤, 앞으로 나서지 않고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는 에델린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이 아이, 트롤의 모습 을 보면 너무 놀라지 않을까? 아마 에델린도 그 때문에 앞에 나서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루릴은 슈를 안은 채 그대로 에델린에게 걸어갔다. 아이 고, 그건 안 돼!

“슈? 여기는 에델린.”

슈는 에델린의 엄청난 덩치를 보고 놀란 모양이다. 슈는 엄지손가락을 빨며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에델린은 후드를 그대로 눌러쓴 채 말했다.

“안녕, 슈. 반갑구나.”

슈는 그 목소리에 더 놀라는 표정이었다. 입을 갑자기 벌리느라 기다란 침이 입술과 엄지손가락을 이었다. 갑자기 슈는 고개를 돌리더니 후드 아래 의 얼굴을 보았다. 하긴 이루릴에게 안겼어도 여전히 에델린보다는 한참 아래니까 간단히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트롤?”

슈의 얼굴이 허옇게 바뀌며 당장 비명을 지를 듯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때 에델린이 천천히 후드를 뒤로 당겼다. 슈는 겁에 질린 얼굴로 에델린과 마주보고 있었고 에델린은 무표정하게 슈를 마주보았다.

차츰, 슈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이윽고 미소마저 떠올랐다. 그때 에델린이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루릴은 에델린에게 슈를 내밀었고, 슈는 에델린 에게 안기자 아래를 보더니 황당한 눈이 되었다. 너무 높으니까. 슈는 에델린의 목을 꼭 껴안더니 그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에델린이 입모양만으로 이루릴에게 물었다.

‘왜 그런 거죠?’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말소리를 직접 내어 말했다.

“뭐가요?”

“이 아이, 절 보면 겁먹었을 거예요. 간신히 감화력을 사용해서 친숙해지긴 했지만, 왜 그러신 거죠?”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이 우리의 동료라는 것은 저 아이도 보면 알 수 있을 텐데요?”

에델린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숨을 쉬었다. 이루릴은 자신이 침착하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모두 이성적인 줄 아는군. 하긴, 어제 이루 릴은 처음 보자마자 에델린에게 아무런 불안도 없이 다가갔지. 상대가 프리스티스이니 뭐가 겁나랴 하는 태도지만, 인간이라면 그렇게 아무 불안 없 이 행동할 수 있을까? 불안이라는 것은 결국 경계, 자기 보존 감각 중 하나이다. 엘프는 자기 보존의 감각이 없는 걸까? 엘프는 필요하다면 아무 불안 도 없이 자살할까?

나는 골치아픈 생각을 관두고는 물통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슈? 안내해야지. 어디로 가지?”

슈는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

주위의 건물보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언덕 위로 조금 큰 건물이 보였다. 누구의 신전일까? 에델린은 신전의 벽에 붙은 문양을 살피더니 말했 다.

“그랑엘베르의 신전이군요.”

우리는 신전 쪽으로 걸어가며 슈에게 이곳 사정을 묻기로 했다. 주로 에델린이 가슴에 안긴 슈에게 질문했고 우리는 모두 말에서 내린 채 말을 끌고 가며 옆에서 들었다.

“슈? 어른들이 저기 있니?”

“응. 어른들 모두 아파. 슈가 물을 가져다 머리를 닦아줘도 계속 열이 나.”

“슈가 계속 여기서 물을 날랐니?”

“응. 나 빵도 나르고 물도 날라.”

눈물이 흐를 것 같군. 이 조그만 아이가 병자들의 간호사라고? 저 조그만 손으로 어떻게 병자들의 음식을 날랐단 말인가?

“어제 신전의 음식이 다 떨어졌어. 그래서 나 물만 나르다가 오늘 아침에 빵도 날라. 나 빵을 들고 달려가다가 넘어졌어. 무릎이 아파도 슈는 참았 어. 어른들이 너무 많아. 나 손가락 세 번이나 날랐어.”

손가락 세 번? 아, 열 번씩 세 번이란 말이군. 이 아이가 저 신전에서 마을까지 서른 번이나 왔다갔다 했단 말이지? 에델린도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 했다.

“착하구나, 어딜 다쳤니?”

슈는 치마를 걷어올려 다친 무릎을 보여주었다. 에델린은 조용히 그 커다란 손으로 상처를 쓰다듬었고, 그러자 상처는 곧 없어졌다. 슈는 환한 표정 이 되었다.

“아프지 않은 어른은 없니?”

“검은 언니는 아프지 않아. 오늘은 안 보여.”

검은 언니? 혹시 그 뱀파이어인가? 에델린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검은 언니는 누구지?”

“몰라. 검은 언니야. 매일 까마귀랑 놀아. 슈를 도와주지도 않아.”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어?”

“아이들이 다 없어졌어.”

“응?”

“아이들은 모두 없어졌어. 그리고 어른들은 모두 아파. 아이들이 없어져서 그런가 봐.”

멋진 삼단 논법이긴 한데. 에델린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들이 없어지다니. 왜 없어졌다는 말인가? 에델린은 말했다.

“신전에 가서 어른들에게 물어보죠.”

그러자 칼이 말했다.

“에델린 양은 좀 뒤에 오시지요. 다른 사람들이…

“알겠어요.”

“”

“네드발 군, 퍼시발 군. 먼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살펴보도록.”

나와 샌슨은 말에 오른 다음 신전 쪽으로 달려갔다. 신전은 불타오르는 백색이었다. 번쩍거려서 금도금을 한 것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그것은 저요 괴스러운 햇빛의 장난이다.

신전을 두른 낮은 담에 도착했다. 신전 뒤쪽은 그대로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신전의 정문은 간단한 나무문이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눈길을 끄는 것 을 발견했다. 낮은 담장 주위로 얕은 구덩이가 빙 둘러 파여져 있고 거기엔 액체가 고여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둥둥 떠다니는 쥐의 시체도 보였다. 말에서 내려 바라보니 그 액체는 기름이었다. 기름 표면에는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샌슨. 이건?”

“격리시킨 것 같은데. 방역 조치야. 잠깐, 그럼 우리도 들어가면 안 되는 것 아닐까?”

“흠. 우린 상관없을 거야. 아까 에델린이 우릴 축복했잖아. 그리고 사실 여기는 신의 장난이 펼쳐져서 이렇게 된 것이잖아. 이런 방역이 통할 만한 곳이 아니지. 어차피 슈도 계속 들락거렸을 거야.”

“흠, 알겠어. 그러니까 저렇게 해봤다가, 소용이 없어서 기름을 그대로 방치해 버린 것이군.”

결정을 내린 우리는 정문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넓은 뜰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안쪽으로 몇 개의 건물이 보였다. 말에서 내린 우리는 제일 큰 건물 쪽 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정지……………. 물러가라! 쿨럭, 쿨럭쿨럭!”

고함소리. 피를 토하는 듯한 쿨럭거림이 이어졌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손바닥을 눈썹에 붙이고서야 앞의 정문 기둥에 기대앉은 사나이가 보였다. 끔찍한데. 건물 안쪽과 바깥이 똑같은 색깔이었으며, 그래서 기둥에 기대어 앉은 그 사나이의 모습도 전혀 그늘이 없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사나이 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독하게 상해 있었다. 곳곳에 칼자국과 찢어진 자국이 보였다. 땅에 늘어뜨린 손에는 핼버드가 들려 있었지만, 그 사 나이에게 핼버드를 들어올릴 힘은 도저히 없어 보였다.

샌슨은 되도록 정중하게 말했다.

“칼라일의 경비병이십니까?”

“쿨럭, 쿨럭쿨럭, 다, 당신? 당신, 사람인가?”

“여행자입니다. 도시의 모습이 하도 이상해서………….”

“그, 그럼 당신도 조만간 쓰러질 거야. 쿨럭, 멍청하긴. 이, 이상하면 그대로 달아났어야지, 쿨럭, 멍청하게 왜 들어와? 허, 세상에는 바보가 너무 마, 많아.”

“예?”

“보라구, 나, 나도 모험가요. 이곳이 어떤 땅인지 아시…………… 쿨럭! 카악!”

남자는 갑자기 앞으로 허리를 숙이더니 땅에 얼굴을 박고 미친 듯이 기침을 토했다. 핏덩이가 그대로 튀어나와 남자 앞의 땅을 붉게 물들였다. 우리 는 달려가서 그 남자를 부축했다. 그 남자를 다시 기둥에 기대게 하자 그 남자는 졸도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다, 당신들, 곧 내 꼴이 돼. 허, 허허, 아마 꿈도 못 꿀걸. 여, 여기는…….”

“세이크리드 랜드죠.”

남자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남자는 갑자기 샌슨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다, 당신 그걸 알고 들어왔나? 그럼 바, 방법이 있단 말이지?”

머리 회전이 빠른 사내인걸. 샌슨은 웃으며 대꾸했다.

“저희 동료들 중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티스가 계십니다. 그분이 저희를 축복해서 여기 들어올 수 있었죠.”

“프, 프리스티스? 아하! 성직자! 그, 그거 다행이시군, 크하!”

남자는 비웃는 태도였다. 그는 딸꾹질까지 해가며 웃었다. 그는 갑자기 몸에서 힘을 쭉 빼더니 이젠 좀 침착하게 말했다.

“나, 모험가라고 하지 않았소. 내 동료 중엔 성직자, 마법사도 있소. 우리, 나흘 전에 이곳에 왔소. 우리 마법사는 이곳이 세이크리드 랜드라고 말해 주었고 뭔지도 설명해 주었소. 크험, 쿨럭! 아마 당신네 성직자도 그랬겠지? 하, 우리도 방어막을 친 다음 들어왔소. 제기랄. 그냥 떠났어야 했는데,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결국 우리, 병에 걸려버렸어. 우리 동료들도 다 쓰러져버렸어. 저 안에 있는 이 빌어먹을 영지의 시민들과 함께.”

“시민들도 여기에 있습니까?”

“그렇소. 최소한 살아 있는 사람은 우리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시체는 모두 치워버리고 산 사람은 여기로 옮겼소. 쿨럭, 아마도 그 와중에 우리 들도 병에 걸린 모양이야.”

그래서 집들이 모두 비어 있었구나. 샌슨은 감탄한 어조로 칭찬했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할 것 없소. 어쨌든 웬일인지 그 다음날부터 계속해서 구름이 꼈어. 우리 마법사가 말하길 구름이 끼는 동안은 질병이 더 확산되지 않을 거라 더군. 헬카네스의 기운이 어쩌니 하면서 말이오. 하지만 그것도 글러버렸어. 오늘 드디어 그 고맙던 구름도 사라졌소. 사람들은 급속도로 악화되었 지. 제기랄, 오늘 해 뜨고 반나절 만에 열네 명이 죽었단 말이오! 쿨럭! 나도 어제까진 어느 정도 돌아다닐 기운이 있었지만 오늘은 이런 꼴이오. 제기 랄, 난 폐병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비참하게도 꼬마에게 부탁해 물을 길어오게 했소.”

“슈 말씀이군요.”

내 말에 그 모험자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애를 만났어? 이상한 일이지. 쿨럭, 애들은 질병에 걸리지 않아. 하지만 그 애 이외에 다른 애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애만 남았어. 이 안에 있는 90여 명의 사람들을 그 애가 먹여살리게 됐어. 어쩌면 90명의 장례식의 상주 노릇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

“애들이 사라졌다고요?”

“그래. 이상해. 언제 어느새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르게 사라져. 잠시 눈에 안 들어온다 싶다가, 찾아보면 없는 거야. 쿨럭, 우리는 환자를 옮기느라 너무 바빠서 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들은 별로 신경쓰지 못했어. 그러고는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아이들을 주의해 보게 되었을 때는 이미 저 슈라는 아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그래서 우린 그때부터 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 슈는 사라지지 않더군. 하지만, 우리 마법사가 말하길, 하아, 하아, 이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면, 질병의 힘이 약해지는 흐린 날씨에는 아이들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더군. 하지만 이제 날이 맑아졌으니………….” 샌슨은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들이 말씀드린 프리스티스가 바로 그 구름을 불러들인 분입니다. 대단한 권능을 지니신 분입니다.”

모험자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뭐, 뭐요?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아니, 그럼 왜 이제껏 구름만 불러들인 거요! 왜, 왜 들어오지 않고?”

“그분과는 어제 저녁에 만났습니다. 그분은 혼자라서 들어오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만나서 오늘 들어오시게 된 것이죠.”

그 남자는 다시 희망을 되찾았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분은?”

“슈를 데리고 곧 도착하실 겁니다. 잠시 후면…….”

그때 남자의 얼굴이 우리 뒤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루릴과 칼, 그리고 그 뒤로 슈를 안아든 키 큰 에델린의 모습이 보였 다. 남자의 얼굴이 급변했다. 이런, 미리 트롤이라고 설명해 주었어야 했는데. 남자는 고함질렀다.

“트, 트롤? 그럼 미드 그레이드의 ‘치료하는 손’에델린이오? 오! 감사합니다! 테페리여, 감사합니다!”

샌슨과 나는 또 멍청하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에델린은 미드 그레이드에서 상상 외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하긴 트롤 프리스티스라니, 도저히 소문이 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겠지. 하지만 알고 보니 에델린은 그 특이한 개성뿐만 아니라 놀라운 편력을 통해서도 명성이 높았던 모양이다.

“살았어! 우린 살았어! 에델린, 에델브로이의 따님이!”

터커 올햄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에델린이 그를 치료했던 것이다. 그 남자는 펄펄 날아다닐 정도로 기운을 되찾았다. 터 커의 안내로 우린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숨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으음…….”

무거운 공기. 뜨겁고, 묵직하다. 마치 갑자기 목욕물 속에 들어온 듯한 답답함과 뜨거움이 신전 안의 공기에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바깥과 똑같은 밝기 때문에 천장이 없나 살펴보게 되었다. 하지만 천장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바깥과 밝기가 똑같다.

넓은 공간은 아무래도 원래 예배당이었던 모양이다. 원래 열을 지어 놓여 있었을 긴 의자는 모두 벽으로 치워져 있었다. 의자를 다 치우고 병자들을 눕힌 것은 터커와 그 동료들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넓은 공간에 지금 병자들이 가득 누워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병자들, 빼빼 마른 사람은 아마 영양 실조나 그 비슷한 무엇, 그 옆 의 팅팅 부어버린 사람은 콩팥이나 간이 안 좋은 것이겠지. 온몸에 붉은 반점이 가득 나서 신음하고 있는 천연두 환자. 검은 반점을 가진 사람은 페스 트 환자인가? 진물을 흘리며 썩어가는 팔다리를 부여잡은 채 몸을 뒤틀고 있는 피부병 환자의 모습도 보인다. 피부병에 걸린 처녀는 수치심 같은 것 은 예전에 버렸는지 옷을 거의 벗어버린 채 몸을 긁고 있다. 엉덩이에 말라붙은 피똥이 가득한 저런 처녀에 유혹을 느끼는 사람은 없겠지. “허억…….’

나는 신음을 토하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예배당 입구의 기둥을 붙잡았다.

“증세가 제각각이오. 아무래도 각자 다른 병에 걸리는 모양이야. 빌어먹을, 우리 마법사는 여자라고는 손목도 못 잡아본 순진한 녀석인데, 세상에 성병에 걸려버렸어. 믿을 수 있겠소?”

샌슨은 헛기침을 하며 눈으로 에델린과 이루릴을 가리켰다. 터커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어, 죄송합니다. 에델린. 워낙 황당한 일이라서.”

“괜찮습니다. 어디 보자…….”

에델린은 그 많은 병자들을 보자 좀 당황한 표정이었다. 칼이 말했다.

“원인을 찾아 퇴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의 증세가 갑자기 악화되고 있다고 하니 이들이 더 급하군요. 올햄 씨, 당신의 동료들을 가르쳐주시 오. 당신들은 모험가이니, 훨씬 도움이 될 거요. 그러니 먼저 당신 동료들부터 치료합시다.”

“아, 예!”

“그리고 네드발 군과 퍼시발 군은 식량 재고가 떨어졌다고 하니 일단 식량과 물을 좀 나르도록. 약초와 수건 등도 챙겨오게. 세레니얼 양께서는 저 와 함께 에델린 양을 도웁시다.”

“알겠습니다.”

나와 샌슨은 신전을 뒤져 곧 커다란 수레와 물통들을 찾아내었다. 나는 샌슨을 수레에 태우고 마을을 질주했다. 마을 한가운데에 수레를 세워두고, 우리는 주위의 집을 뒤졌다. 밀가루, 옥수수가루, 햄, 베이컨들. 신선한 야채를 못 구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어쨌든 수레를 가득 채웠다.

“그런데 이 음식들은 오염되지 않았을까?”

“칼의 설명대로라면 이 도시 공기 전체가 오염되었을 거야. 어떻게 끓여 먹이든가 해야겠지만, 별로 소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런데 우리는 왜 까딱 없지? 아, 참! 에델린에게 축복을 받았지.”

그리고 우리는 물통에 물도 채운 다음 다시 언덕을 내달려 올라갔다. 슈는 산더미 같은 짐을 실은 수레를 이끌며 달려가는 내 모습을 보더니 감탄했 고, 터커는 아예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너 혹시 하프 오거쯤 되나?”

크악! 하프 엘프나 하프 오크는 들어봤어도 하프 오거는 처음 들어보겠네. 그게 가능하냐! 나는 화난 표정으로 샌슨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거는 여기 있고! 난 순진무구한 17세 꿈 많은 소년!”

딱! 오래간만이군. 으음, 정수리야……………

신전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에델린과 칼, 이루릴은 악전고투중이었다. 에델린은 정신없이 큐어 디지즈를 써대고 있었고 칼과 이루릴은 우리가 가져간 약초들을 꼼꼼하게 검사해서 각양각색의 냄비에 끓이거나 졸이거나 했다. 칼의 말에 의하면 놀랍게도 치료하고 지나갔던 병자에게서 다른 병 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사병에 걸린 사람을 간신히 진정시켜 놓으니 곧 동상에 걸린다는 식이다. 그 말을 듣자니 웃음도 안 나온다. 결국 칼은 기진맥진한 어투로 말했다.

“일단 급한 환자는 다 봤으니, 에델린 양. 이 신전 전체에 게덴의 힘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그 동안 저는 꼼짝을 못합니다.”

“꼼짝을 못한다고요?”

“그렇습니다.”

“할 수 없지요. 그렇게라도 해주십시오. 격리 조치를 해서 이런 악순환은 막아야 되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저와 세레니얼 양이 어떻게 해보겠습니 다.”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신전 전체에서 중앙이 되는 위치를 찾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리를 잡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나와 눈 높이가 비슷하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에 들어갔다.

당장 느낄 수 있었다. 신전에 가득하던 열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병자들의 안색도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우리는 일단 신전 안을 돌아다니며 시체 들을 찾았다. 열네 구의 시체들. 터커의 말에 의하면 오늘 오전에 죽은 자들일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썩어가고 있나? 샌슨과 나는 시체가 부서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들어 날라야 했다. 속이 다 뒤집힐 것 같군.

터커의 동료들도 하나씩 일어났다. 터커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사만다!”

터커의 동료인 다갈색 머리의 프리스티스는 마구 갈라진 입술을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현기증이 도는지 주위를 한참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 다. 내가 물을 한 그릇 가져다주자 순식간에 비워버리고는 한 그릇 더 달라고 말했다.

“난 테페리를 모시는 사만다 크레틴이야. 넌 누구니?”

난 물을 다시 떠다주며 말했다.

“어, 전 후치 네드발. 여행자입니다.”

“그러니? 여기 우연히 들렸다가 우릴 돕게 된 모양이구나. 착한 아이야. 하지만 좀 어리석은 행동이었어. 여긴……

“세이크리드 랜드죠.”

사만다는 눈을 크게 뜨더니 날 바라보았다.

“너, 경력 있는 모험가니?”

“에엑? 천만에요.”

터커가 웃으며 에델린을 가리켰다. 사만다는 기도하고 있는 트롤을 보더니 흠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간을 모으고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드 그레이드의 치료하는 손이시구나. 그럼 그 먹구름도 설명되는군.”

사만다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주위에 있는 병자들과 그들을 돌보고 있는 칼과 이루릴의 모습도 보았다. “어머나………… 저분들도 네 동료니?”

“예.”

“고마운 일이야. 흠, 나도 일어나서 좀 도와…………..”

사만다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려다가 휘청거렸다. 터커와 나는 꼼짝하지 말라고 일렀지만 사만다는 기어이 일어나서 병자들에게 다가갔다.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이군.

터커의 동료 중엔 거대한 팔치온을 껴안고 끙끙거리는, 무식하게 생긴 크라일이라는 전사도 있었다. 그는 심하게 열을 내면서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그를 살피던 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증상은 꼭 산욕열 같은데?”

환자의 팔에서 고름을 짜내기 위해 달군 대거를 가져가던 내가 질문했다.

“산욕열이 뭐지요?”

“임산부가 산후에 걸리는 병………”

“푸헤헥!”

나는 웃느라 자칫 환부를 절개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팔을 날려버릴 뻔했다. 어쨌든 간신히 진정해서 환자의 팔을 찢고 피고름을 짜내었다. 역한 냄새와 함께 엄청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피고름을 다 짜내고 나자 환자의 팔에는 커다란 구멍이 보일 지경이었다. 사만다는 날 보며 미소지었다. “참 착한 아이네. 보통 아이라면 달아나버릴 텐데.”

“보통 아이라도 우리 고향에서 17년 정도 살고 나면 나처럼 될 거예요.”

사만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별로 설명하지 않았다. 사만다는 약초 달인 물을 가져다가 크라일에게 먹였다. 산욕열에 시달리던 크라일 부 인(?)은 머리를 휘휘 저으며 간신히 좀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여자 손목도 못 잡아본 주제에 엄청난 병에 걸렸다는 그 마법사는 선량해 뵈는 눈을 가진 펠레일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픈 부위를 보이 고 싶지 않다고 발악을 하다시피 했지만(나라도 그러겠다.), 칼은 당당히 그의 로브를 걷어올렸고 펠레일은 죽고 싶은 표정을 지으며 눈을 꽉 감았다. 그 리고 이루릴은 약초를 졸여서 고약처럼 만들더니 그것을 펠레일의 거기에 바르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우리는 모두 얼굴이 벌겋게 되어버렸다. 치료

이긴 하지만, 너무 선정적인걸.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펠레일도 뭔가 이상한 감각을 느낀 모양이다. 그는 눈을 떴고, 그러자 이루릴은 그의 얼굴을 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펠레일은 곧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이루릴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보고 웃느라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푸하하하하!”

펠레일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그만 혼절해 버렸다. 좋으면 좋은 거지 그걸 가지고 혼절씩이나 하나? 터커의 표현대로 정말 이런 병에 걸렸다는 것이 우스울 만큼 순진한 청년이군. 샌슨이나 나, 그리고 터커는 펠레일을 치료하는 이루릴의 모습을 보고 있기가 낯뜨거워 재빨리 흩어졌다.

어쨌든 끔찍하게 많은 환자였다.

에델린이라면 단번에 치료할 테지만 그녀는 지금 병의 재발을 막기 위해 신전을 봉쇄하고 있었고 그래서 칼과 이루릴, 터커, 나, 샌슨, 사만다 여섯 명이서 그 많은 환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칼은 원래 그런 부분에 박학하고 샌슨은 응급 치료에 대해서도 배웠고 이루릴이나 터커, 사만다의 솜씨도 썩 훌륭한 것이어서 난 주로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일만 열심히 했다. 환자 환부에서 고름 짜기, 이마에 물수건 갈기, 씻기기, 음식 만들어 먹이기, 깨 끗한 옷이나 시트, 붕대 마련하기 등등.

정신없는 반나절이었다. 신전의 부엌에 자리잡고는 입과 오른손으로는 신전의 커튼을 찢어 솥에 집어넣고 왼손으로는 환자에게 먹일 수프를 휘젓고 오른발로는 두 개의 커다란 솥에 들어갈 장작을 만들기 위해 예배당의 긴의자를 박살내고 왼발로는 박살난 그 장작들을 아궁이에 차넣는 내 모습을 보며 샌슨은 문어 같은 놈이라고 말했다. 난 문어가 뭔지 몰라서 샌슨에게 다시 질문해야 되었다.

발이 여덟 개 달린 물고기라고? 난 머릿속으로 청어의 허리에 네 개씩의 다리를 붙여봤다. ・나라면 그건 거미고기라고 이름붙이겠어. 문어가 뭐 야?

어쨌든 원래 신전의 커튼이었던 우아한 천은 잘게 찢어져 삶긴 다음 붕대가 되거나 물수건이 되었다. 한참 그 짓을 하고 났더니 커튼을 잡아당긴 턱 이 얼얼했다. 게다가 요리라면 자신 있는 나로서도 수프의 맛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결국 펠레일이 비척거리며 부엌으로 들어와 도와주겠다고 말 했을 때는 나 역시 기절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펠레일은 참 기괴한 걸음걸이로 걸어와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후치 군이라고 했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걸음걸이를 보면서 아픈 데는 괜찮냐고 물어보기는 민망스러웠다.

“아, 고맙습니다. 그럼 저기 냄비에 부어둔 밀가루 반죽 좀 해주세요. 부어놓고는 틈이 안 나서 반죽도 못하고 있어요.”

“뭘 만드시려고요?”

“팬케이크.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말씀하지 마세요. 저 어려요.”

“아, 예.”

펠레일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씻기 시작했다. 난 그제야 한숨 돌리고는 삶은 천조각들을 다시 예배당으로 날라갔다.

예배당에 들어가보니 칼은 입술을 꽉 다물고 급성 설사 환자의 속옷을 갈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성격인걸. 그 옆에서 보고 있던 터커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칼은 날 보더니 지친 음색으로 말했다.

“네드발 군. 장작 좀 부탁하네. 퍼시발 군이 나갔지만 자네가 더 빠르겠지?”

그러고 보니 뜨거운 물을 쓰기 위해 예배당 한쪽에 걸어두었던 솥에 불이 꺼져 있었다. 난 삶은 천을 터커에게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쾅! 쾅! 샌슨은 어디서 도끼를 주워와 미친 듯이 신전의 나무를 찍어대고 있었다.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샌슨! 내가 할게. 들어가 물이나 좀 마셔.”

“헉, 헉, 아이고, 살았다.”

난 샌슨이 흠집을 내놓은 나무에 달려가 어깨로 들이받아서 나무를 쓰러뜨렸다. 샌슨은 헉헉거리며 말했다.

“곰 같은 놈.”

“아깐 문어 같다고 말하더니.”

도끼를 받아든 나는 나무를 쪼개었다. 대충 한두 방씩 후려치면 쫙쫙 쪼개져나갔다. 입맛이 썼다.

“이거, 나무까지 병이군. 안쪽이 다 썩었는데?”

“그래? 어디 봐………… 정말이네. 보다보다 이렇게 엉망인 나무는 처음 보겠군. 겉은 멀쩡하더니 속은 다 썩어버렸는걸.”

“뭐, 태우기만 하면 되니까.”

난 다시 다른 나무 몇 개도 들이받아서 쓰러뜨렸다. 그때 예배당 정문에서 슈가 걸어나왔다. 슈는 굉장한 소리가 어디서 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 정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내 모습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힘 세네?”

“위험하니까 가까이 오지 마.”

슈는 얼씬거렸다. 그러니까 물러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은 채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샌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애 에 대해서 모르나?

“슈, 심심하니?”

“어, 응. 애들이 없어서.”

“저기 샌슨 아저씨가 너랑 놀아주실 거야.”

샌슨은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후치! 피곤하지 않냐? 내가 교대할게! 어서 쉬어! 명령이다, 쉬지 않겠다면 내 너를………….”

“관둬, 관둬. 알았으니까.”

샌슨은 장남인데도 희한하게 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려워한다고 해야 되겠지. 그래. 샌슨은 애를 어려워한다. 저런 모습 을 보면, 정말 장가를 빨리 보내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야.

나는 슈에게 다가가서 번쩍 안아올렸고 슈는 까르륵거리며 내 목에 안겼다. 그러더니 그 작은 손으로 내 목에서 목걸이를 찾아내었다.

“와아…………. 예쁘네?”

윽! 예쁘다고? 난 슈의 손에 쥐어진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레너스 시의 그, 꿈이 너무 왕성해서 현실 감각을 조금 잃어버린 귀여운 아가씨 유스네의 선물이다. 누구에게 들킬까 싶어 갑옷 속으로 깊이 넣어두 었던 것이 어떻게 슈의 손에 잡힌 모양이다. 알록달록하고 그야말로 예쁘장한 목걸이. 17세 소년이 걸고 다녔다간 눈총에 맞아 죽을 만한 목걸이지 만, 괜히 유스네에게 미안해서 꼬박꼬박 걸고 다니던 것이다.

“마음에 들어?”

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목걸이를 풀어서 슈에게 건네주었다. 슬슬 잘라둔 장작개비를 안으로 옮겨야 되겠는데.

“있다가 돌려줘야 해?”

옆에서 샌슨이 씨부렁거렸다.

“그럼! 돌려줘야 되고 말고. 그 목걸이에는 한 순결한 소녀의……….”

“그만!”

나는 목걸이에 정신이 팔린 슈를 내려놓았고 슈는 그것을 목에 걸어보고는 헤헤거렸다. 나는 샌슨이 잘라둔 장작을 안으로 옮겼다. 잠깐의 휴식은 지나가고, 다시 전쟁 시작이다. 나는 장작을 모아 기침을 해가며 불길을 다시 살려내고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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