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10부 : 약속된 휴식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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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5권 – 제10부 : 약속된 휴식 3화

3

우리는 잠시 앉은 채로 고개를 넘어오는 소떼를 바라보았다. 꽤나 큰 행렬인지 숲 전체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약 30분쯤 기다리자 마침내 그 선두의 소가 보였 다.

그리고 소들 사이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남자는 우리들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다. 우리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잠시 후 다른 남자 하나가 선두의 그 남자를 추격하듯이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두의 남자는 무슨 동물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야만스럽게 보이는 털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는 20대 초반의 남자였다. 그슬린 얼굴과 거세게 생긴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허리에는 큼직하게 생긴 대거를 동물의 힘줄 같은 것으로 묶고 있고 등엔 상당히 세게 생긴 컴포짓 보를 메고 있었으며 손엔 쇠테를 두른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장화도 무슨 가죽인지 모르겠지만 웬만한 뱀이 물어선 이빨도 안 들어가게 생겼다. 남자가 타고 있는 말의 마구도 희한하게 생겼는데 주로 털가죽이나 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커다란 밧줄 사리가 잠시 눈을 끌었다. 남자는 꽤 좋은 솜씨로 말을 다루어 우리에게로 달려오더니 가벼운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렸 다. 그리고 그 뒤에 거의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남자 하나도 달려오더니 역시 멋진 동작으로 뛰어내렸다. 샌슨이 부지불식간에 감탄을 토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선두의 남자는 호의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반갑습니다. 모험가이십니까?”

어라? 저거 방언이라는 건가?

남자의 억양은 일스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거센 억양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에는 외국어인 줄 알았다. 우리는 놀란 눈으로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바이서스어였다. 그때까지도 고개에서는 계속해서 꾸역꾸역 소떼들이 내려오고 있었고 그 중간중간에 드문드문 다른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들은 모두 일어섰고 이루릴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남자는 이루릴의 모습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칼은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 다.

“아, 그저 여행자들입니다. 세피아파인 고개를 넘기 위해 잠시 쉬고 있던 참입니다.”

그러자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실 거라고 짐작되어 달려왔습니다. 제 이름은 리츄입니다. 두 가지 용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권고이고 하나는 요청입니다.”

“지혜로운 자라면 요청과 권고 모두에 귀를 활짝 열 줄 알아야겠지요. 제 이름은 칼 헬턴트입니다.”

리츄는 말하기 전에 잠시 자신의 뒤를 따라온 그의 동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료는 별로 대화에 끼이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딴곳을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리츄는 다시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저희들의 권고는 저 고개를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개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고개에 괴물이 나타납니다.”

“예에?”

우리는 모두 놀란 눈으로 리츄라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리츄는 우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먼저 말씀드리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린 목동들입니다. 납품 계약에 따라 저 소들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군부와의 계약으로 전선에서 사용될 식용 소를 운송하고 있지요.”

아, 이 사람들이 노스 그레이드의 목동들인가? 칼이 이런 사람으로 변장했던 적이 있지. 난 그때를 떠올리고는 피식피식 웃었다. 칼은 내 웃음의 연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리츄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우리는 엊그제 고개를 넘다가 상인 무리를 만났습니다. 상인들도 지금의 우리들처럼 황급히 고개를 되짚어 내려오는 중이었지요. 이유를 물어보니 고개에 괴물이 나타나서 지나가는 자들은 모두 죽인다는 겁니다. 사람을 덮쳐서는 뼈만 남을 때까지 그 생명을 빨아먹는다는 겁니다.”

생명을 빨아먹어? 우리는 놀란 얼굴로 리츄를 바라보았다. 리츄는 약간 쾌활한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표정 변화가 다양한 사람이로군.

“뭐, 우리의 명성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목동들은 그런 괴물 이야기 따위 별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소떼를 데리고 방랑할 때는 별 괴상한 몬스터들을 다 만나거든요.”

“그러십니까. 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 명궁 우타크도 목동 출신이었지요.”

우타크의 이름이 나오자 리츄의 얼굴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남자도 미소를 떠올렸다. 리츄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하. 예. 그래서 우리는 코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고개를 계속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저께 밤 기습을 당했습니다.”

“기습이오?”

“예. 한밤중이었는데 갑자기 괴상한 고함소리와 함께 불덩어리가 날아들더군요.”

“불덩어리요?”

“예. 저희들은 괴물이라고 하기에 그저 몬스터 나부랭이인 줄 알았습니다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저와 다른 목동 몇이서 그놈에게 덤벼들려고 해보았습니다만 어둠

속에서 정말 잽싸게도 움직이더군요. 재수 없게도 친구 하나는 불에 맞아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소들도 한 20여 마리 죽었고. 그러자 소떼가 발광을 시작했습 니다. 자칫했다간 소떼를 모조리 잃을 뻔했습니다. 소라는 것들은 한번 혼란에 빠지면 다시 진정시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허어. 산속에서 그런 일을. 정말 고생하셨겠군요.”

“예. 어쨌든 밤새도록 고생해서는 소떼를 다시 모으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우리 동료 두 명이 놈에게 당했습니다. 숲을 뒤져서 발견된 시체는 그 상 인들의 말대로 빼빼 말라서 뼈가 만져질 정도였습니다. 소지품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우리 친구라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요. 온몸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머리카락도 뭉텅이로 빠지더군요.”

레니는 지금 당장이라도 리츄가 그 괴물로 변하기라도 할 듯이 네리아의 등 뒤로 숨었다. 리츄는 여자들 쪽으로 미소를 지어주고는 말했다.

“우리는 친구의 복수를 위해 소들을 안전한 계곡에 모아두고 어제 낮에 그 괴물을 잡으러 나섰습니다.”

“흠.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놈의 자취를 추적하여 우리는 마침내 어느 산봉우리 아래에서 놈을 몰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숲 속의 추적이라는 것이 정말 신경 곤두서는 일이지요. 상대의 모습 은 보이지 않고 그 기척만 가지고 추적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퇴로를 봉쇄하고 놈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의 숲 속에서 뭔가 튀어나오더군요. 뭔지 알아볼 사이도 없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시커먼 모습과 붉은 눈뿐입니다. 전 놈을 베었지만 어찌나 잽싼지. 놈은 내 칼을 피하고는 내 손목을 덥석 쥐더군요.”

“손목을 쥐어요?”

리츄라는 남자는 씩 웃더니 곧 활달한 동작으로 재킷을 벗었다. 그 뒤에 점잖게 서 있던 남자는 리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리츄는 거리낄 것 없이 겉옷을 벗고는 소매를 걷어올려 팔을 내보여 주었다.

“히익?”

네리아가 숨막힌 소리를 질렀고 네리아의 등 뒤에서 고개만 내밀어 살펴보던 레니는 다시 파다닥 숨어버렸다.

드러난 팔은 가관이었다. 리츄의 건장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그 팔은 뼈처럼 가늘었다. 게다가 시커멓게 변해 있는 것이 마치 죽은 자의 팔처럼 보였다.

“이건 도대체……?”

리츄는 쓰게 웃으며 다시 소매를 걷어내렸다.

“독은 아닙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팔 하나를 완전히 잃게 되는 줄 알았지요. 놈에게 팔을 잡힌 순간 늑대가 팔을 물어뜯는 줄 알았습니다. 창피하게시리 여 자처럼 비명을 빽빽 질렀지요. 정신을 차려보니 놈은 이미 없어지고 이 팔은 이 지경이 되어 있더군요. 다른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오자 그놈 은 달아나 버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목숨이 날아가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새 소떼들은 이미 우리 옆에 당도했고 그들 중에 서 있던 목동들은 우리들을 흘끔흘끔 바라보다가 소떼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칼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리 츄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요청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리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모험가들은 다재다능하지요. 저, 우리 친구 중에 화상을 입은 자를 좀 돌보아주실 수 없는지…

그때였다. 등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짧게 외쳤다.

“리츄!”

그러나 리츄는 웃으면서 말할 뿐이었다.

“하하! 결국 입을 열고 말았지? 여러분, 여기 과묵한 친구의 이름은 하이츄입니다.”

우리는 인사를 못했다. 하이츄는 우리들에게 대충 목례만을 하고는 다시 리츄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 임마두와 이렇게 길게 잡담을 나누는 것은, 뭐 위험에 대한 경고의 의미였으니까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동료를 임마두에게 맡기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자 리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면서 우리들에게 말했다.

“자, 자. 하이츄. 안 되겠군. 여러분 죄송합니다. 잠깐 우리들끼리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 리츄는 하이츄의 어깨를 둘러안아서 끌고 갔다. 그 둘은 우리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눈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칼 아저씨. 임마두라니오? 무슨 말인지 혹시 아시겠어요?”

“아. 예. 북부의 목동들은 상당히 폐쇄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들이 목동이 아닌 자를 지칭하는 말이 임마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들끼리만 말을 나누고 꼭 필 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임마두, 그러니까 외부인과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제레인트가 당혹한 얼굴로 말했다.

“아, 치료도 거부한다는 말입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생그렐, 그러니까 영혼의 아버지 이외에 목동들의 몸을 책임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소. 그런 이야기 못 들어봤소? 방목중인 목동들이 혹시 도 시에 들렀다가 병에 걸리면 치료를 거부하고 죽는다는 이야기.”

“글쎄요. 목동들은 도시에 잘 들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정말 죽어도 치료를 안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뭐 저렇게 답답한 사람들이 다 있냐? 난 어이가 없어서 토론중인 두 목동을 바라보았다. 하이츄는 강직한 얼굴로 뭐라고 강변하고 있었고 리츄는 되도록 웃으면서, 하지만 가끔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침내 리츄는 뒤통수를 세차게 긁더니 외쳤다.

“이 자식아! 우린 생그렐에게 돌아가려면 몇 달이나 남았단 말이다. 그 동안 골고츄가 버틸 거 같아? 제기, 몇 달은커녕 오늘도 숨 넘길 지경이야. 여기서 모험가들을

만난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구! 입좀 닥치고 나 하는 대로 내버려둬. 누가 지휘자냐고 꼭 말해야 돼?”

그러자 하이츄는 쓴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리츄를 바라보았다. 리츄는 넌더리를 내더니 다시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먼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녀석이 고집이 심해서…………. 다시 한번 부탁을 드리는데, 저희 동료를 좀 돌봐주시겠습니까?”

칼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리츄의 안내를 받아 목동들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우리들이 다가가자 소떼들 사이에 서 있던 목동들은 당장 험악한 표정, 혹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서는 리츄에게 달려들 듯 으르렁거리는 표정 을 지어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집단에 다가가는 것은 참 신경 쓰이는 일이군, 그래.

리츄는 별말 하지 않고는 한 목동에게 다가갔다. 목동은 극히 불쾌하다는 시선으로 우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곧 하늘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 목동이 타고 있는 말의 안장에는 기다란 나무 막대가 두 개 연결되어 뒤로 끌리게 되어 있었고 그 막대의 뒷부분에는 들것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들것은 밧줄과 덩굴, 털가죽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지금 그 안에는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남자는 언뜻 보기에도 환자처럼 보였다. 파리한 얼굴에 힘없이 늘어진 몸 은 털가죽으로 꽁꽁 묶이다시피 되어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제레인트는 당장 혀를 찼다.

“이렇게 환자를 끌고 다니다니. 먼지를 얼마나 먹인 거야?”

그러자 말 위에 앉아 있던 목동은 헛기침을 뱉었다. 제레인트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는 털가죽을 들추었다.

드러누워 있던 남자는 약한 신음을 뱉더니 눈을 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다. 제레인트가 털가죽을 들추자 곧 화상을 입은 상체가 드러난 것이 다. 몹시 타버린 피부의 상처들 사이로 진물이 흐르고 피가 말라붙은데다가 몹시 지저분해서 끔찍스럽게 보였다. 제레인트는 다시 혀를 찼다.

“차라리 관에 넣어 끌고 다니는 것이 낫지, 화상 환자를 털가죽으로 꽁꽁 묶어? 참 골치 아프군.”

리츄는 뒤통수를 긁적였고 하이츄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레인트는 혀를 차면서 기도에 들어갔다. 그러자 누워 있던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 다.

“우……, 우우우! 저리 가!”

끔찍한 비명소리였다. 제레인트는 놀라서 기도를 멈추고 물러났다. 그러자 리츄는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누운 남자에게 몸을 굽혔다.

“이봐, 골고츄! 닥치고 가만히 있어. 제발. 널 살리려고 이러는 거야.”

“아, 안 돼…………. 생그렐이 아닌 자…………, 물러나! 나에게 손을 대, 댈 순 없어!”

리츄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우리들도 갑자기 그림자가 지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는 어느 새 목동들이 몰려서 있었다. 목동들은 험악한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검집에 그대로 있었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막대기뿐이었지만 아무 래도 꼭 무기를 겨누고 있는 느낌이 든다. 리츄는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뭐 할말 있나?”

그러자 목동들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리츄. 지금 뭘 하려는 거지? 설마 골고츄의 치료를 부탁한 것은 아니겠지?”

리츄는 잠깐 움찔하더니 다시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러면 안 되나?”

그러자 입을 열었던 남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리츄를 바라보았다.

“생그렐만이 우리를 보살필 수 있다. 넌 골고츄를 살리는 것이 아니야! 제길, 혹시 저자들이 골고츄를 치료할 수 있을진 몰라. 하지만 그런다고 골고츄가 행복할 것 같아?”

그러자 리츄는 턱을 쓱 들어올렸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살아 있어야 행복할지 아닐지 알 수 있는 거야, 멍청아! 덜 여문 머리로 멋대로 말하지 마.”

그러자 말 위의 목동의 얼굴도 험악해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리츄는 재빨리 치고들어갔다.

“네가 생그렐이냐? 출세했군. 언제부터 우리의 스마락츄가 생그렐이 되었지? 언제 그 머리띠를 만지고 나무패를 던지게 되었지? 좋아. 그렇다면 위대하신 생그렐 스 마락츄가 판단하고 지시해 보시지?”

“……난 내가 생그렐이라고 말한 적 없다.”

그러자 리츄는 곧장 말했다.

“그렇다면 내 말을 따라! 여기 지휘자가 누구야? 내가 생그렐의 징표를 가진 지휘자라는 것을 무시할 셈이냐! 목동들이 생그렐의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지휘권은 누 구에게 있지? 그리고 그 지휘권에 대한 거부가 있을 수 있는가?”

스마락츄라는 그 목동은 할말이 없는 모양이다. 흠. 사실 저런 식으로 말해 버리면 할말이 없겠지, 뭐. 스마락츄는 씹듯이 말했다.

“네가 지휘자고, 우린 거부할 수 없지. 굳건한 마음도 여린 몸도 너의 뜻대로. 하지만 생그렐의 울타리 안으로 돌아갔을 때………….”

“그때는 네 녀석의 입을 마음대로 놀려! 지금은 입 닥치고!”

제레인트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치료를 하게 되었다. 주위의 분위기뿐만이 아니라 치료를 받는 당사자까지도 험악한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정말 치료할 기분 안 나겠는걸. 들것 속에 누워 있던 골고츄는 지휘자인 리츄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수치를 참고 견딘다는 식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면 ‘황야 에서 죽어넘어지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라고 고함질러 버리고 말 텐데.

제레인트가 푸르게 빛나는 손으로 쓰다듬자 골고츄의 상처는 완전히 사라졌다. 목동들은 감탄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듯했다. 제레인트는 치료를 끝내고 나 서 우리 짐 속에서 붕대를 찾아내어 골고츄의 상처를 감아놓고는 물러났다.

“뭐, 상처는 이제 괜찮으니까 며칠 있으면 다시 원래의 살로 돌아갈 거요. 당신들 위생 관념에 대해 좀 떠들어주고 싶지만 들어먹힐 것 같지가 않으니 관두겠소.” 리츄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프리스트 님.”

“천만에요.”

리츄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다시 자신들의 목동들에게 험한 눈을 보내었다. 그러자 목동들은 우물거리다가 목례 비슷한 동작을 취했다. 몇 명은 진심으로 감사하는 듯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츄는 발칵 화를 내더니 그들의 이름을 주욱 소개해 주었다. 리츄, 네츄, 하이츄, 도츄, 스마락츄, 한탈 츄, 기츄, 빌츄, 파빌츄, 날라츄. 그리고 누워 있던 골고츄.

난 그들의 이름을 소개받는 동안 계속해서 침이 튈까봐 불안했다. 그들은 이름을 소개당하자 어쩔 수 없이 정중하게 인사해야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여기 멍청하게 생긴 눈을 가진 놈은 도츄라 하지요.”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골고츄를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천만에요.”

“그리고 여기 꺽다리는 한탈츄.”

“……고맙습니다. 프리스트.”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하.”

요런 식으로 해서 리츄는 그 많은 목동들에게서 모조리 감사의 말이 나오도록 만들었고 제레인트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겸양을 표시해야 되었다. 네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하아, 이상해요. 왜 모두들 감기 걸린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네리아의 말에 레니도 깔깔 웃었고 그러자 리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칼이 먼저 황급하게 말했다.

“아, 네리아 양. 이분들은 아마도 같은 영혼의 아들일 겁니다. 그러니까 형제인 셈이지요. 그렇지요?”

리츄는 놀란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예? 아니, 대단히 박식하신 분이군요.”

칼은 다시 리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천만에요. 저희 일행이 도움이 되어드려서 저 또한 기쁘군요.”

그러자 제레인트가 다시 말했다.

“도와주려면 완전히 도와야지요. 어디, 당신 팔 좀 다시 내밀어 보십시오, 리츄.”

그러자 리츄는 난색을 표시했고 주위의 목동들의 눈이 번쩍 빛났다. 특히 스마락츄라는 작자는 섬뜩한 눈으로 제레인트와 리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리츄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니오. 이미 베풀어주신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또다시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레인트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가 다시 뭐라고 하려고 할 때 칼이 그의 팔을 가볍게 잡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돌렸고 칼은 미세하게, 하지 만 분명한 몸짓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레인트는 의아한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뭐, 당신은 아마 죽지는 않을 거요. 그 팔은 아무래도 뱀파이어릭 터치 계통의 마법을 당한 모양이니 가만히 놔둬도 회복은 될 거란 말이오. 하지만 그 팔의 저항력 이 몹시 약해져 있고 또 다른 합병증이 생기기도 쉬울 텐데. 게다가 이런 날씨에 그런 팔을 아무렇게나 놔두는 것도 위험하고.”

‘츄’들은 제레인트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루릴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네. 정확하신 눈이에요. 제레인트.”

“확실하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리츄는 당황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 저 이방인들의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당신은 이게 무슨 마법인지 알겠다는 말입니까?”

“하하. 그거 별로 대단한 마법은 아닙니다. 접근해서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마법이라 마법사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마법이고. 마법사들은 보통 좀 느리거든. 엘프라면 간단히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어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가 그런 괴악한 짓을 할까요.”

이루릴은 다시 생긋 웃었다. 리츄는 완전히 당황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아니, 저, 그럼 그게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불덩어리라는 걸로 봐서도 그렇고, 음. 아마 마법사인 모양이군요.”

그러자 ‘츄’들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금 후 그들의 얼굴엔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한탈츄가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 그것이 사람이라면 겁먹을 필요 없어. 아라츄와 달츄의 복수를 해야 돼! 그리고 골고츄의 상처에 대해서도 빚을 받아내어야 돼!”

그러자 파빌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생그렐께서도 이방인의 전사는 건드려도 좋지만 마법사는 조심해야 된다고 항상 당부하셨다. 괜히 위험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이대로 중부 대로로 내려가면 된다.”

그러자 화상을 입었는지 팔에 붕대를 하고 있던 기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중부 대로를 이용하면 계약 날짜 안에 도착하기 어려워. 눈이 내리면 소를 끌고 가기 어렵단 말이다.”

‘츄’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예의 바르게 그들의 토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샌슨은 하늘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해가 높아. 이제 출발해야겠군.”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말을 불러들여 마구를 얹고 출발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자 리츄가 놀라서 말했다.

“아니, 어딜 가시는 겁니까?”

칼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물론 세피아파인 고개입니다.”

“예? 당신들은 그 마법사를 겁내지 않으십니까?”

“겁내지 않습니다. 듣자하니 그자는 밤에 기습하곤 하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우리들은 저기서 밤을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리츄는 이제 더 놀랐다.

“예? 밤을 보내지 않으시다니, 밤새도록 달리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오. 오늘 해 안에 고개를 넘을 생각입니다.”

그러자 목동들은 모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중 한 둘은 고개를 돌리며 피식피식 웃기까지 했다. 리츄는 웃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혹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제정신입니까? 세피아파인 고개를 말로 반나절 만에 넘을 수는 없습니다. 고갯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길단 말입니다. 직선 거리로도 5펜큐빗은 되는 데 평지의 5펜큐빗과 산속의 5펜큐빗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러니 빨리 출발해야겠지요. 하하하.”

“허어, 이런 참…….”

리츄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시 말하려 할 때 칼이 먼저 말했다.

“그런데 저 고갯길에 대해서 다시 질문 좀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아, 얼마든지.”

“여러분들이 추격하던 그 괴인은 여러 무리였습니까?”

“아니오. 한 놈이었습니다. 최소한 저희들이 본 것은 하나뿐입니다.”

“음. 그렇다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겠군요.”

리츄는 당황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다가 다시 우리 일행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될진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은 ‘이런 조무래기들이 겁도 없이.. ·.’, 뭐 그렇 게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리츄는 샌슨을 흘긋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러분들은 세피아파인 고갯길에 대해서도 무모하더니 생명의 위험에 대해서도 무모하군요. 싸울 수 있는 전사는 이분뿐이군요. 음, 뭐 무용이 대단하실 것을 의심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열두 명이었지만 놈에게 당했습니다.”

샌슨은 무용이 대단한 남자의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으윽. 그런데 여기 칼을 든 남자가 하나뿐이지는 않을 텐데. 난 리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후치 네드발이고 당신이 아직 확인하지 못했을까 봐 설명해 드리는데 싸울 줄은 압니다.”

리츄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이봐, 꼬마. 어떻게 이분들을 따라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이분들이 아직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하하. 북부의 목동들 앞에서 함부로 잘난 척을 하다간 큰일난 다.”

갈수록…………, 못 참겠군. 이 작자에게 내가 대미궁의 침범자라는 사실을 설명해 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왠지 내가 제레인트가 되는 느낌이라서 잠시 대답을 보류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네리아와 레니가 앉아 있던 바위가 보였다.

난 리츄를 향해 말했다.

“저게 뭐지요?”

“뭐라구?”

“저게 뭐로 보입니까?”

리츄는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바위 아니냐?”

“틀렸어요.”

난 바위 옆으로 다가가 잠시 숨을 골랐다가 주먹으로 힘껏 내려찍었다. 콰쾅!

“음메에에!”

“움메에에!”

소들이 질겁했다. 소들 중 바깥쪽, 그러니까 내 쪽 가까이에 있던 몇 마리의 소들은 발광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목동들은 그렇게 소 몇 마리가 놀라 달아나는데도 내버려둔 채로 날 바라보았는데 모두들 질린 얼굴이었다.

쾅! 콰광! 몇 번 그렇게 쥐어박자 곧 바위는 산산 조각이 나면서 흩어졌다. 네리아와 레니는 환호를 지르면서 나에게 박수를 보내었고 칼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

다. 리츄를 바라보자 그는 북부의 목동들이 크게 놀랐을 때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난 되도록 여유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아 이고, 주먹이야! 눈물이 찔끔 나려고 하네. 하지만 난 차분하게 말했다.

“이건 보통 자갈이라고 부르지요.”

리츄는 턱을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내 눈빛이 어때? 북부의 목동 친구. 난 그때 이루릴이 날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루릴, 왜 그래요?”

이루릴은 날 지그시 바라보다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후치. 당신이 질문하던 시점에서는 그것은 바위가 맞아요. 대답이 나오고 나서 문제의 형태를 바꾸는 것은 공정하지 못해요.”

으윽. 난 이루릴에게 사과하고 또한 리츄에게도 사과했다. 문제를 바꿔서 죄송합니다.

목동들이 크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는 출발 준비를 갖추었다. 리츄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들을 말리려 했지만 우리들은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자 리츄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대단히 급한 용무가 있는 모양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허어. 이런 감사의 표시로 소라도 몇 마리 드리려고 했는데. 그것 외에는 드릴 것이 없거든요.”

“하하.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도움이 되어드렸으니 그것이 기쁠 뿐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리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리를 보더니 말했다.

“예. 여러분들이 모두 무사히 저 고갯길을 넘게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들을 떠나왔다. 목동들은 움직이지 않은 채 우리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들에게서 충분히 떨어지고 나자 제레인트는 칼에게 질문했다. “저, 칼. 왜 리츄를 치료하는 것을 말린 겁니까?”

“저 목동들은 자신들의 가치관과 윤리를 퍽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수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르지요. 골고츄가 죽을지언정 치료를 받지는 않겠 다고 말하는 것은 잘 보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우두머리인 리츄는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자입니다. 물론 합리적이니까 자기들의 윤리나 관습을 마구 무시하고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아까의 경우 와 같이 필요할 경우 윽박질러서 그들의 관습을 무시하게 만들 수도 있지요.”

“예. 그렇게 보이더군요.”

“하지만 그는 리더이기 때문에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골고츄는 리더가 아니라 그저 일행이므로 침버 씨에게 치료를 받는 것이 큰 허물이 안 되지만 리더인 리츄의 경우엔 큰 허물이 될 수도 있지요. 어쩌면 리더 자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을 테고. 그렇다면 그의 독단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큰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요.”

“음…………,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습니다.”

“리츄라는 저 사람도 만일 무리의 다른 사람들이 없는 장소에서라면 얼마든지 당신에게 치료를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는 안 되지요.”

거 참. 생각할수록 답답한 사람들이군. 우리들은 모두 칼의 말에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한 사람은 도저히 수긍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이루릴을 바라보니 그녀는 과연 너무나도 복잡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난 킥킥 웃으며 말했다.

“자! 골치 아픈 이야기는 관둬요. 저 사람들도 자신들의 관습이 그런 대로 참아줄 만하니까,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마음에 만족을 주니까 지켜나가는 거겠지요. 만일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답답한 관습이라고 생각되면 그걸 깨뜨리겠지요.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칼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네드발 군. 정말 좋은 말일세.”

“그럼 이만 달려볼까요? 리츄 씨는 우리가 이 고개를 오늘 안에 못 넘을 거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세나. 이랴! 해가 지기 전까지!”

우리는 고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옆을 지나가는 나무들의 모습은 도저히 분간되지 않았고 모든 것들이 그저 녹색과 회색, 갈색의 흐름으로 보였다. 우리는 구덩이를 뛰어넘고 급한 경사로를 치달아 올랐으며 좁은 오솔길을 갈랐다. 두두두두두! 우리는 절벽 위를 맹렬히 달렸고 산바람을 앞서 달렸다. 제레인트는 목청껏 말들을 축 복했다.

“임마들아! 테페리의 이름으로, 너희들의 다리를 축복한다! 다리가 떨어져 나가라고 달려라!”

그리고 이루릴은 역시 끝없이 말들을 독려했다.

“달려요! 그대 주인들의 마음을 받아들여요! 쾌속의 다리를 가지고, 무한한 속도에 도취되는! 정열적인 영혼을 가진 바람의 아들들이여, 달려요!”

말을 탄 것이 아니라 정말 산바람을 탄 것 같다. 산의 지독한 경사로와 구불구불한 길 위로 우리들은 바람이 되어 날았다. 길을 가로지른 개울물을 건너뛰고 굽은 길 을 맹렬하게 돌았다. 말들의 발굽 소리가 온 산을 울리게 만들었고 말들이 뿜는 콧김에 안개가 서릴 것 같았다.

“이힝힝힝힝!”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포효하면서 달려나갔다. 네리아는 몸을 말등에 딱 붙인 상태였고 레니는 네리아의 등에 딱 붙어 있었다. 슈팅스타는 추월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추적했다. 샌슨의 등 뒤에 있는 제레인트는 거칠게 휘날리는 로브 때문에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트레일은 도저히 발을 끄 는 버릇이 있는 말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힝힝힝!”

오! 제미니! 약속하마.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지더라도 절대로 말고기에 대한 꿈은 꾸지 않겠다! 제미니는 다른 말들의 질주에 고무된 것인지 흥분하여 달려갔다. 한 쪽으로 까마득한 절벽이 보일 때조차도 제미니는 끄떡도 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런 무서운 질주 끝에 차츰 고개가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 고원과 구릉을 넘어서고 절벽길을 따라 달렸다. 어느새 구름이 휘감아 도는 절벽길 로 들어섰다. 말들은 미친 듯이 질주했다.

투투투투투!

절벽의 좁은 길을 따라 달리며 허공으로 돌멩이를 튕겼다. 길을 가로질러 쓰러진 나무 등걸을 뛰어넘을 땐 몸의 중량감이 다 사라졌다. 머리 위로 무섭게 지나가는 나뭇가지들은 내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칼날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멈춰요!”

계속해서 말들을 고무하고 있던 이루릴이 갑자기 외쳤다. 그리고 느닷없이 옆의 숲 속에서 빛의 화살들이 튀어나왔다. 파파파파팟!

“그으으악!”

빛의 화살들은 모조리 샌슨을 명중시켰다. 샌슨은 슈팅스타 위에서 나가떨어지며 관성에 의해 앞으로 몇 바퀴 더 굴러갔다. 제레인트는 느닷없이 말을 책임지게 되 자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고삐를 당기긴 했지만 슈팅스타가 갑자기 멈춰 서자 곧 제레인트도 굴러 떨어졌다. 당황한 우리들은 거의 오륙십 큐빗은 더 달려가고 나서 야 간신히 멈추었다.

“그 목동들이 말하던!”

칼은 고함을 질렀고 이루릴은 말 위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공중에서 에스터크를 뽑아들더니 땅에 내려서자마자 덤불을 찔렀다. 파파밧! 덤불이 급격하게 움직였다. 난 말을 돌려 그 움직임쪽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말 위에서 바스타드를 내리쳤다.

푸스석! 덤불들이 잘려나갔지만 다른 뭔가가 맞은 느낌은 없었다. 난 말에서 내려 다시 덤불을 몇 번 후려치고는 그 속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 고 주위는 고요해졌다.

“이런, 제기랄. 숨어버렸어!”

그때였다.

“후치, 뒤를 봐!”

네리아의 고함소리가 들려온 순간 난 뒤로 돌면서 그대로 바스타드를 후려쳤다. 완전히 도는 순간 뒤로 펄쩍 뛰면서 내 바스타드를 피하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 나 그의 윤곽을 보는 것이 어려웠다. 놈은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도대체 눈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이루릴이 외쳤다.

“헤이스트 스펠이야!”

슈슈슈슛!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자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움직였다. 발톱 아니면 나이프다. 그런데 무슨 나이프를 저렇게 빨리 휘둘러! 난 죽어라고 뒷걸음질 치며 바스타드를 휘둘렀지만 그자는 간단히 피했다. 너무나 빨리 움직여서 그런지 검은 윤곽밖에 보이질 않아 사람인지 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자는 마치 검 옆 으로 일어나는 바람처럼 내 바스타드 옆으로 스며들어오더니 곧장 내 팔을 붙잡으려 했다. 이런! 잡히면 당한다!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쉬익! 네리아가 트라이던트를 찔러들어왔고 그러자 그 검은 윤곽은 내 팔을 잡으려던 손을 당기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네리아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트라이던 트로 그 그림자를 찔러대었지만 그자는 물러나는 것이 너무도 빨랐다. 정말 바람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그때 칼이 외쳤다.

“이것도 피할까!”

씨융! 칼이 화살을 쏘아붙였다. 피했다! 놈은 우습다는 듯이 화살을 피해낸 것이다. 그러나 칼의 활은 멈추지 않았다.

쓩쓩쓩! 연거푸 발사된 화살들은 그 그림자를 향해 무섭게 날아갔다.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서 화살들은 모두 그놈의 뒤로 지나쳤다. 나와 네리아가 찔러들어갔 지만 화살마저 피해 버리는 놈의 바람 같은 움직임을 잡는다는 것은 어려웠다. 네리아는 악에 받쳐서 트라이던트를 크게 휘저었다. 풀잎과 몇 개의 나뭇가지를 잘라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놈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야아앗! 너무 빨라앗!”

네리아는 급격히 달려가다가 트라이던트를 찔렀으나 놈은 땅 위 2큐빗 정도의 높이로 날아서 피했다. 그러자 네리아는 곧장 그 뒤의 나무를 걷어차면서 몸을 뒤집어 트라이던트를 찔러넣었다.

“타아앗!”

공중에서 완전히 펼쳐진 네리아의 몸길이와 트라이던트의 길이가 합쳐져서 네리아의 공격은 무섭도록 길어졌고 그 길이는 놈과 네리아의 거리를 단숨에 지워버렸 다. 피윴! 치직!

그러나 네리아의 그 무서운 공격은 놈의 옷자락을 찢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놈은 곧바로 뒤로 날며 나이프를 집어던졌다. 쉬익!

네리아는 기겁하면서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이루릴의 팔이 매섭게 움직였다. 타탕! 이루릴의 에스터크가 네리아에게 날아들던 나이프를 쳐내었다. 좋아! 저 녀석은 이제 빈손이야! 난 놈의 이동 방향을 막아서며 바스타드를 찔러넣었다. 그러나 놈의 몸은 도대체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았다. 이루릴은 입술을 꾹 다 문 채 허리를 낮게 두고는 바람처럼 놈의 다리를 찔러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놈의 상체 방향을 향해 마구잡이로 공격을 퍼부었고 네리아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놈 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찔러들어왔다. 잠깐 동안 무기 휘두르는 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치면서 먼지가 일어날 정도였다. 우리들이 모든 방향을 공격했지만 놈은 그것 을 모조리 피했다. 게다가 우리 공격권에서 빠져나가지도 않은 채로! 좋아.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샌슨, 잘 보라구!

“에라, 이거 먹어봐! 샌슨화!”

네리아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킥킥거리는 가운데 난 샌슨에게 배운 모든 기술을 딱 3초만에 다 시도했다.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어깨 위에서 앞으로 검을 뿜어내

자 놈은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곧 좌우로 두 번 베는 공격에 의해 놈의 동선(線)은 뒤로 몰렸다. 야? 이거 신기하네. 그 다음은 올려쳐서 확실히 뒤로 밀어붙였다가 다시 앞으로 뛰어 치고 발을 빼며 검을 어깨 위로 올려 상단 막기, 어라? 막은 보람이 없는걸? 놈은 공격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놈은 멍하니 날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저 바보 녀석 공격도 안하는데 왜 막고 있냐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배워 익힌 공격은 그대로 튀어나갔다.

“반대로 돌며 뒤로 베기!”

“크어억!”

우와! 우와, 신기해라! 반대로 돌 때만 해도 바보짓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놈은 마치 빨려 들어오듯이 내 검의 궤도에 들어왔다. 분명히 검을 통해 느낌이 온다!

“맞았어! 이젠 기름 젓기!”

끝까지 샌슨화로 밀고 갈걸! 놈은 팔을 움켜쥐며 뒤로 피했던 것이다. 그러곤 그대로 풀숲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이 자식, 어딜 도망가!”

“추적하지 말게, 네드발 군!”

젠장! 난 혀를 차며 멈춰 섰다. 망할 놈, 도대체 뭐가 저렇게 빨라? 벌써 풀숲의 움직임은 없어졌고 주위는 고요해졌다. 이루릴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에스터크 를 다시 꽂아넣었다.

일행들은 일단 낙마하여 땅에 처박힌 채 끙끙거리는 샌슨에게 달려갔다. 나는 가까이 있던 제레인트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제레인트는 힘들게 미소를 지었지만 다리 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단단히 쥔 채 겁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이거 낮에도 기습을 하네?”

“샌슨 오빠, 샌슨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요?”

레니는 당황해서 샌슨을 일으키려 했지만 레니의 힘으로 일으킬 수 있는 샌슨이 아니다. 제레인트는 헉헉거리며 기도를 시작했다.

제레인트가 치료를 시작하자 샌슨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매직 미사일이었어…………. 마법사다.”

“그래. 맞아. 마법사야. 젠장. 그것도 무지무지하게 빠른 마법사야. 마법사가 느리다는 말은 못하겠군. 그런데 그 마법사 녀석, 왜 산적 흉내를 내는 거지?”

제레인트가 샌슨을 치료하고 자기 자신도 치료하는 동안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법사가 단독으로 산속에 숨어서 여행객을 기습한다라…………. 그래가지고 뭘 얻을 수 있지? 돈? 마법사들은 돈에 대해서라면 안전하고도 좋은 방법이 훨씬 많은데.”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제자리에 서서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그대가 듣는 것을 나에게도 들려줘요.”

우리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가만히 선 채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잠시 후 그녀는 눈을 뜨고는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약하군요…… 흔적을 잘 감추고 있는 것인지…………. 어쨌든 지금 가장 가까이서 들리는 숨소리는 약 천 큐빗 정도 떨어져 있군요.”

“예? 천 큐빗이라니오. 그 새 그렇게 멀리까지 달아났다는 말입니까?”

“네. 그 빠른 속도를 보셨지요?”

“허어, 이런. 그렇다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식간이겠군요.”

마법사란 역시 무섭군. 으으. 어쨌든 잠시 후 샌슨은 다시 원기 왕성하게 일어났다. 그는 아직 고통이 남아 있는 모양인지 간혹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전 이제 괜찮습니다. 추적하고 싶지만 우리 용무가 급하니까 놔두고 가지요.”

“하지만 달려가다가 또 사고를 당할 수는 없네. 곤란한 문제로군. 게다가 자넬 노렸다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계획성 있게 움직이는 놈이야.”

“예?”

“우리 일행 중에서 얼핏 보기에 전사처럼 보이는 자는 자네뿐이지. 그렇다면 놈은 우리들을 잘 관찰한 다음 가장 어려울 듯한 상대인 자네를 먼저 공격한 것이겠지.” “아,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다시 공격할 수도 있겠지. 이 작자가 뭐하는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대비 없이 그냥 달려갈 수는 없군 그래.”

“말이 없으니 더 따라오진 못할 텐데요.”

“글쎄………”

순식간에 천 큐빗을 달아나는 놈인걸.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

할 수 없이 우리들은 대형을 갖추고 주위를 경계하면서 나아가게 되었다. 칼은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걸. 늦게 걸어가니 해가 더 빨리 지는 것 같아. 오후 늦도록 더이상의 습격은 없었다. 그래서 칼의 얼굴은 어느 누구도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할 표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고개를 넘지 못하고 고 갯길에서 약간 떨어진 계곡으로 내려가서 야영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계곡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졸졸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 물이 얼어붙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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