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10부 : 약속된 휴식 7화 (5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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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5권 – 제10부 : 약속된 휴식 7화 (5권 끝)

7

“달아나아앗! 네드발 군! 세레니얼 양을 붙잡아!”

칼은 웜링을 떨어뜨리고는 부리나케 몸을 돌렸고 난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야이야이야아압!”

이루릴의 왼쪽으로 달려들어가서! 그녀의 앞을 돌아!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서! 오른팔로 이루릴의 허리를 감아당긴다. 그녀의 가벼운 몸은 아무 저항 없이 공중으 로 떠올랐고 난 오른팔에 그녀의 허리를 걸친 채 목숨을 걸다시피 달려갔다. 아니, 진짜 목숨을 걸었다.

“파이어볼!”

아프나이델의 고함소리. 그의 파이어볼이 길을 막고 있는 바위 덩어리에 작열했다. 하지만 흙먼지와 돌멩이들이 조금 튀어올랐을 뿐 바위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낭패다! 샌슨은 그 위로 뛰어넘을 생각을 한 모양이지만 말들이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다. 그때 난 눈앞이 캄캄해지는 광경을 보았다.

레니가 일행들과 떨어져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젠장! 팔이 하나 남아 있지! 레니는 왼팔로 잡아내야겠군! 난 여전히 오른팔 안쪽에 이루릴을 걸친 채 레니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레니가 손을 들었다.

“후치. 괜찮아. 멈춰.”

응? 뭐지? 난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이루릴은 두 손으로 내 팔을 짚고는 가볍게 공중을 돌아 땅에 내려섰다. 그녀는 레니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일행들 역시 모두 입을 벌린 채 내 등 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뭐지?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우…… 우우…… 우…….”

블루드래곤은 땅에 팽개쳐진 웜링 앞에 서 있었다. 그(그녀? 드래곤은 부모가 모두 새끼에 대해 각별하다고 한다. 어미인지 아비인지 알 수가 없지만, 음. 아무래도 여성대명사로 불러 줄 엄두는 나지 않는걸.)는 하늘로 길게 목을 뻗어올린 채 울고 있었다.

그것은 가냘프고도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늑대나 다른 맹수들의 울음소리와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그 소리는 맑고도 잘 울리는 소리였다.

“우루루루루……..”

“우루루루루……”

샌슨도, 길시언도 멈춰 섰다. 아프나이델은 캐스팅을 위해 모아올린 두 팔을 천천히 내렸다. 긁힌 정도의 상처도 주기 힘들 화살이나마 쏘아보기 위해 활을 당기고 있던 칼도 시위를 놓았다. 어느새 고개를 든 네리아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렸고 제레인트는 멈춰 선 채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모습이 되었다. 운차이는 냉엄한 눈 을 조금 내리깐 채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도끼를 허리에 꽂아넣는 동작을 상당히 과장되게 실행하고 있었다. 거기에 신경 씀으로써 드래곤을 보지 않으려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루릴은 평온한 얼굴로 드래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레니를 보았다.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레니의 눈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 가득 맺힌 눈물은 바라보고 있기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또르륵. 마침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 렸다. 눈물은 쉼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드래곤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는 계속되었다.

“우루루루루…..”

“우루루루루……”

레니의 입술이 조금씩 열렸다.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난 그녀의 입 가까이로 귀를 가져갔다. 레니는 말했다.

“……아파.”

“응? 뭐라고, 레니?”

“가슴이 아파.”

“가슴이 아프다니?”

“드래곤이………… 드래곤이 슬퍼하고 있어. 그걸 보니 가슴이 아파..

난 잠시 겁먹은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 자체는 무표정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그녀는 그렇게 무표정하게 울고 있었다. 순간 나는 한 가지 잊었던 사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느끼지는 못하던 사실을 깨달았다.

레니는 드래곤 라자다.

음? 울음소리가 멈췄어. 나는 고개를 돌려 블루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블루 드래곤은 고개를 숙여 웜링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주둥이로 시체를 건드렸다가 혀로 핥기도 했다. 하지만 시체는 시체일 뿐이다. 블루 드래곤은 갑자 기 입을 크게 벌렸다.

“카아아악! 카아아악! 카아아악! 카아아악! 카아아악!”

블루 드래곤은 목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라고 포효했다. 난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털썩, 털썩.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이루릴도 귀를 막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레니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크라라라라라락!”

산맥 전체가 울리는 것 같다. 온몸이 울린다. 귀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지만 머릿속에서 계속 불꽃이 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눈앞이 하얗게 바뀌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레니의 모습은 똑바로 보였다가 음영이 반전된 모습으로 보였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나 레니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울고 있었다.

“크라라라라라라…………..”

드래곤의 마지막 포효 소리가 거대한 산울림으로 사라져갈 때, 드래곤은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산울림이 사라지고 나자 우리 일행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난 무거운 머리를 휘저으며 다시 일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도대체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드래곤은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찌이이잉. 무슨 소리지? 블루 드래곤은 입을 꾹 다문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날카로운 진동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소리는 알아들 을 수 있는 소리로 바뀌었다.

“프리스트인가?”

드래곤이………… 말한 건가?

우리는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블루 드래곤은 꼼짝도 하지 않고서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난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말씀입니까, 드, 드래곤이여?”

“그렇다. 프리스트인가?”

“예. 테페리의 지, 지팡이인 제레인트 침버라고 하, 합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부활을 사용할 수 있는가?”

부활? 부활이라구? 제레인트는 황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 드, 드래곤이여. 제가 그렇게 느, 늙어보이십니까? 아, 아니. 그런, 그런 막강한 권능은 대단히 오랜 연륜을 가지신 프리스트들이나 사용할 사용할 수 있는 거, 것입니다.”

드래곤은 우울하게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외쳤다.

“그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놈들이 아닌가!”

히이익! 큰일이다! 드래곤이 화났어. 블루 드래곤은 간단히 목소리만으로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때 무릎을 꿇고 있던 이루릴이 일어나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루릴은 레니의 등 뒤에 섰다. 그녀는 레니의 어깨를 짚더니 조심스럽게 가슴 쪽으로 잡아당겨 안았다. 레니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측은한 얼굴로 레니를 껴안았다.

이루릴은 위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블루 드래곤과는 전혀 달리 이루릴의 목소리는 산들바람처럼 약했다. 하지만 블루 드래곤의 목소리처럼 똑똑하게 들렸다.

“드래곤이여. 당신의 슬픔을 어떻게 위로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닥쳐랏!”

“드래곤이여……”

“누구냐!”

“네?”

“누구냐! 감히 드래곤의 자식을 죽인 놈이 누구냔 말이다! 너는 아니겠지! 엘프가 드래곤의 자식을 죽일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 시체가 이곳에 있으니 너희들은 그 살해자의 모습을 보았겠지. 너희들의 눈과 입에 고마워해라! 너희들이 아직 죽지 않은 까닭은 너희들에게 그 살해자를 확인한 눈과, 그것을 말해 줄 수 있는 입이 있 기 때문이다! 말해라, 누구냐!”

분노에 젖어 반쯤 미쳐버린 것 같은 모습임에도, 저 위대한 종족은 역시 현명하다. 드래곤은 드래곤인 것이다. 블루 드래곤은 계속해서 미친 듯이 외쳤다.

“부활을 시킬 수 없는 데다가 그것마저 대답할 수 없다면 너희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당장 죽여도 상관없는 버러지들! 그러니 너희들의 입으로 너희들의 목숨을 보존하라! 어서!”

칼은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럼 그걸 말씀드리면 저희들은…………….”

“닥쳐라, 인간!”

조금 전부터 목소리에 맞아 멍이 든다는 말이 실감나게 되는걸. 블루 드래곤의 고함소리는 정말 우리들의 몸을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블루 드래곤은 계곡이 무너져 라 고함질렀다.

“네놈들이 간특한 줄은 이미 알고 있지만, 감히 드래곤에게 흥정을 하는 것이냐!”

칼은 두말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네놈들이 감히 드래곤에게 무엇을 요구하겠다는 거냐! 묻는 말에 대답할 뿐이다. 말해라! 너희들 모두 말을 할 수 있겠지! 말할 때까지 한 놈씩 죽여야겠느냐!”

그리고 블루 드래곤은 곧장 우리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히이익? 설마 누구부터 죽일 것인지 고르는 거야?

그때 레니가 이루릴의 팔을 풀어내더니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레니, 맙소사. 레니? 뭘 할 생각이야! 나서면 곧장 죽는단 말이야!

우리는 모두 굳어버렸다. 그리고 블루 드래곤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니는 우리들과 블루 드래곤 사이의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를 한평생처럼 걸어갔다. 레니가 우리

와 드래곤의 중간까지 가는 동안 나는 몇 번 숨을 쉬었지?

레니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블루 드래곤은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시야 양쪽으로 쭉 펼쳐진 절벽, 그리고 그 사이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그가 숨만 좀 거세게 쉬면 당장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가냘픈 소녀를 묵묵히 내려다보는 거대한 푸른 드래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블루 드래곤은 말했다.

“드래곤 라자인가…………….”

블루드래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혼잣말이 띄엄띄엄 이어졌다.

“왜 여기에, 왜 여기에 드래곤 라자가…………. 도대체 어떻게? 300년의 약속의 기한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레니는 블루 드래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그저 흐느끼면서 말했다.

“슬퍼하지 말아요. 제발, 제발 울부짖지 말아요. 가슴 아프게 하지 말아요. 하늘을 울리게 하지 말아요…….”

블루 드래곤은 레니를 가만히 굽어보았다.

“내 감정에 대해 지배하려 들지 마라. 드래곤 라자의 운명을 가진 소녀여.”

레니는 입을 다물고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드래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지골레이드.”

지골레이드? 이상하다. 어디서 들었던 이름인 것 같다? 길시언이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생각에 잠길 여유가 없었다. 그 블루 드래곤은 복받치는 슬픔을 참듯 이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고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은 수명이 짧아지는 느낌이 대단한 현실감으로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이윽고 지골레이드는 입을 열었다.

“드래곤 라자의 운명을 가진 소녀여. 말하라. 이것은 드래곤에게 숙명으로 짐지워진 언약이며 난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날 받아들이겠는가?”

지독히 혼란된 머리 때문에 잠시 나는 드래곤 지골레이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받아들인다? 받아들인다고? 뭘 말이지? 그때 아프나이델이 잔뜩 쉰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드래곤 라자의 계약!”

그러자 곧 나도 지골레이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골레이드는 지금 레니에게 그것을 묻고 있다. 레니가 자신의 라자가 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피붙이 의 죽음으로 가슴을 저미는 슬픔에 빠졌음에도, 숙명의 부름을 무시하지 못하는 저 드래곤 지골레이드가, 지금 레니에게 자신의 드래곤 라자가 될 것인지를 묻고 있 는 것이다.

레니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의아한 얼굴이 되어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전, 전 레니예요. 그런데 뭘 받아들인다는 말씀이세요?”

지골레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레니를 바라보았다. 마치 고개를 숙여 레니를 관찰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난 순간적으로 그가 야식 생각이 난 것인가 생각하고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지골레이드는 레니를 관찰하다가 다시 죽어 있는 웜링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말없이 웜링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 모습은 마치 슬픔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지골레이드는 그런 대로 침착함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 라자의 운명을 가진 소녀 레니여. 그대는 드래곤 라자가 되어 나를 저 인간들과 연결지어 줄 수 있다. 그대는 정당한 죽음이 너와 나를 갈라놓을 때까지, 혹 은 너와 나 양자의 요구에 의해서 우리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 때까지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나 또한 그대에게 충실하며 그대가 연결지어준 인간들에게 충 실한 친구로 남을 것이다. 그 임무를 받아들이겠는가?”

“안, 안 되오!”

칼이 갑자기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나가며 외쳤다. 레니를 바라보는 지골레이드의 부드러운 눈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간신히 억제된 분노가 다시 폭발하는 모양 이다.

“감히 어디서 떠드느냐!”

부우우웅! 으아! 제기랄! 지골레이드의 거대한 앞발이 위에서 내리꽂혔다. 칼은 그 무서운 기세에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는 제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 이런, 안 돼! 콰아아앙!

난 원래 이런 체질은 아니야. 음.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역시 이렇게 행동해 버리는군.

난 달려가서 칼을 걷어차면서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지골레이드의 앞발을 엇갈려 든 두 팔로 막아내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서 불꽃이 튕기며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내 몸에 달린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멀게 느껴지는 무릎에서 관절이 박살나는 느낌이 아련하게 전해져 왔다. 아마 도 한쪽 무릎을 꿇은 것 같다. 입안이 찝찔하군. 이런…………, 입술 사이로 피가 흐르는 건가?

화끈거리는 관자놀이 때문에 눈이 불타오르는 기분이다. 난 힘들게 머리를 들었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드래곤의 앞발을 두 팔로 막아낸 것이다. 아래 를 보니 꿇어버린 무릎이 땅 속으로 손가락 한 마디쯤 들어가 있었다. 어쩐지 무릎이 깨지는 느낌이 들더라.

저 멀리 나동그라진 칼이 힘겹게 몸을 돌리며 외쳤다.

“네드바알 군!”

내 이름의 두 번째 음절은 그렇게 길지 않은데요, 칼. 강세는 첫 번째 음절에 두고.

“임마아, 후치, 이 미친 자식아!”

샌슨의 고함소리. 흐음. 유니크한 호칭이라고는 부를 수 없군. 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에서 지골레이드의 앞발이 내리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몸 중에서 움 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머리에 붙어 있는 몇 가지, 그러니까 눈이라든가 입, 목 등이 고작이었다.

갑자기 지골레이드가 발을 들어올렸다. 내가 지금껏 쓰러지지 않은 이유는 위에서 지골레이드가 누르고 있었기 때문인데 지골레이드가 발을 들어올리면? 세상이 옆 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어라? 왜 저러는 거지? 세상이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후치잇! 아아악! 후치잇!”

자꾸 내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는군. 난 옆으로 쓰러진 채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으고는 덜덜 떨고 있었다. 끝내주는 기분이 드는군. 팔은 무감각했고 고통은 주로 어깨 에서 전해져 왔다. 난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달려오는 발소리, 그리고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혼란스러운 여러 가지 비명과 고함소리. 날 끌어올리는 것은, 음. 거친 손놀림으로 미루어보아 샌슨임에 분명하 다. 난 샌슨에게 안긴 채 떨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제레인트의 얼굴은 자꾸 빙빙 돌고 있었다. 제레인트. 어지럽지 않아요? 킥, 키긱.

“어라? 이놈 웃고 있네? 정신이 나갔나 보군.”

엑셀핸드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프나이델의 모습도 보였다.

“이봐, 후치! 괜찮아? 내가 보여? 내가 누구야?”

“아, 아아. 당신은………….. 오래간만이에요,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아프나이델은 얼빠진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샌슨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괜찮은 모양이군.”

목이 부러지는 것 같았지만 간신히 고개를 조금 돌리자 사람들 틈 사이로 칼을 부축하는 길시언과 네리아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지골레이드는? 레니는? 지골레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감한 소년이로군. 경의를 표하지.”

오우, 좋았어! 경의를 표한다고? 끝내주는군. 하지만 그 전에 박살난 것 같은 내 팔이나 허리에 대해 경의를 표해 주면 더 좋겠는데. 샌슨이 지골레이드 대신 경의를 표했다.

“어디 보자, 팔 괜찮은 건지.”

“꾸으으……윽!”

으아 으아앗! 이 망할 오거야! 너무 아파서 비명도 못 지르겠다. 제레인트가 기도에 들어가는 모습이 아련하게 보였다. 졸도할 것 같아. 여러분. 잠시 졸도할 테니 내 가 깨어나거든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말해 줘요. 아니, 다 집어치우지. 나 이대로 잠들었다가 일어날 테니까 그때는 내 옆에서 아버지가 날 내려다보고 있어야 돼. 그리고 집 밖에서는 새들의 아침 노래 사이로 제미니의 외침이 들려와야지.

‘후치야, 벌집 따러 가자!’

‘벌집을 딴다? 똑바로 말하시지.’

‘응응. 넌 벌집 따고, 난 벌꿀 먹고. 이힛히히히!’

아무렴. 그게 정상이지. 그게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 후치 네드발의 아침의 눈뜸이야. 거어럼! 그럼 이제 졸도해 보실까……………

아쉽게도 졸도하지는 않았다. 제레인트의 기도가 끝나고 잠시 후 몸의 고통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몸속을 씻어내리는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든다.

“괜찮아?”

“그런 대로.”

난 주위의 환호를 받으며 일어났다. 엑셀핸드는 내 등을 철썩 쳤고 네리아는 날 껴안았다. 하지만 앞에 서 있는 지골레이드 때문에 주위의 환호는 별로 높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겁먹은 얼굴로 지골레이드를 바라보았다.

푸른 드래곤 지골레이드는 칼을 노려보며 험하게 말했다.

“저 소녀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녀는 나의 드래곤 라자가 아니다. 감히 드래곤의 대화에 끼어들다니, 산산이 조각내어 죽일 놈! 저 소년의 용기에 감사해 라. 저 소년의 용기에 대한 경의로서 널 용서하겠다!”

칼은 길시언의 부축을 조용히 물리치며 힘겹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하지만 저 소녀에게 한 마디만 조언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이놈!”

칼은 간신히 주저앉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히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이 건방진 녀석! 조언이라구? 이것은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대화이다. 제삼자의 조언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 비천한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냐? 죽여야 입을 다물겠느냐?”

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때 레니가 말했다.

“지골레이드 님. 제발 칼 아저씨의 말을 듣게 해주세요. 제발요.”

그러자 지골레이드는 묵묵히 레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칼도 다시 힘을 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드래곤이여, 제발. 당신의 현명함으로 어리석은 우리들을 판단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어리석음을 돌보아주기 위 해서라도 서로에게 조언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지골레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우리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칼은 그것이 무언의 승낙이라고 생각했는지 레니에게 조심스럽게 다 가섰다. 그 동안에도 그는 몇 번이나 지골레이드의 눈치를 살폈지만 지골레이드는 여전히 외면한 채였다. 칼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레니 양.”

“예. 칼 아저씨.”

“승낙하지 말아요.”

“예? 하지만……………”

“당신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왔고 다시 달려가려는 것입니다.”

“아? 아. 그, 그렇군요.”

그때 아프나이델이 재빨리 끼어들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칼. 만일 레니 양이 거절하면 저 지골레이드는 우리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분노 때문에 우리를 단숨에 죽여버릴지도 모 릅니다. 저 드래곤에게는 우리가 언제 죽여도 상관없는 미물입니다. 게다가 난폭한 블루 드래곤, 거기다가 웜링의 시체까지 앞에 둔 블루 드래곤 아닙니까?”

“이런……!”

칼은 낭패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골치 아픈 경우가 다 있나. 샌슨이 눈에서 불똥을 튀기면서 말했다.

“모두 얻거나, 모두 잃거나입니다. 레니 양. 걱정하지 말고 거절해요. 제가 목숨을 걸고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그러자 칼은 곧 혀를 차다.

“이건 드래곤 슬레이어가 나오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네, 퍼시발 군!”

칼은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레니는 어쩔 줄을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뭔가 결심을 굳힌 얼굴이 되었다. 레니는 고개를 휙 돌려 지골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저, 지골레이드 님.”

웜링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던 지골레이드는 한숨처럼 말했다.

“말하라.”

“제가 거절하면, 우리들을 다 죽이실 건가요?”

우리는 바짝 긴장해서 지골레이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골레이드는 쌀쌀맞게 말했다.

“네가 거절한다면 난 여전히 자유로운 드래곤이다. 너희들과의 우정의 의무가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저놈, 우릴 죽일 모양이군!

그때 어디선가 바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것은 길시언의 입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길시언, 희한한 소리를 내시는군요? 길시언은 목청껏 외쳤 다.

“네가 어떻게 자유로운 드래곤인가!”

어라? 길시언, 무슨 말을 하는 것이지? 지골레이드는 그 커다란 목을 길시언에게 휘었다. 저 커다란 목이 휙휙 움직이는 것을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걸.

“지골레이드라는 이름이 널 가리킨다면, 넌 바이서스 왕가의 드래곤이다! 캇셀프라임이 그러하듯이 넌 왕의 드래곤이란 말이다!”

뭐라구?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로 지골레이드를 곧장 겨냥하면서 말했다.

“너! 넌 분명 돌맨 할슈타일을 너의 라자로 가질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자유로운 드래곤인가! 어찌하여 네가 자이펀과의 전선이 아닌 이곳에 있다는 말이냐!” 돌맨 할슈타일? 할슈타일…………. 지골레이드?

잠깐, 잠깐만. 생각을 좀 정리해 보자구. 그랜드스톰에서, 그래. 그렇다. 할슈타일 가의 돌맨, 분명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이펀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지? 돌맨은 역사상 최약의 드래곤 라자라지? 어, 어쨌든 그렇다면 저 지골레이드는 드래곤 라자를 가진 드래곤이다.

그런데 저 드래곤이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지?

지골레이드는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넌…………,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누구지?”

“네가 날 보았을 때는 내가 아주 어릴 때였지. 지금과는 모습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어릴 때의 모습이 조금 남아 있나 보군.”

지골레이드는 다시 그 거대한 목을 숙여 길시언에게 향했다. 길시언은 놀란 얼굴이 되어 프림 블레이드를 거세게 들어올렸지만 지골레이드는 괘념치 않았다. 묵묵히 길시언을 바라보던 지골레이드는 말했다.

“그렇군. 누구인지 대충 짐작하겠군. 그 망나니 왕자로군? 너희 인간들은 너무 빨리 자라는군.”

지금은 웃으면 안 되겠지. 하지만 웃고 싶은걸. 길시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날 기억한다면 내 말에 대해 대답해서 바이서스 왕가의 적손인 날 설득해라! 왕의 드래곤이여!”

지골레이드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그게 꼭 웃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인가!”

휘이익! 갑자기 시야 오른쪽에서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우리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뽑혀 나갈 것 같다. 위이 이잉!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간 지골레이드의 꼬리는 절벽에 부딪쳤고 거대한 진동음이 울려퍼졌다. 콰아아앙!

오늘은 정말 가만히 서 있는다는 지극히 간단한 동작을 취하는 것이 힘든 날이군. 난 엎드린 채 땅에 부딪힌 코를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옆에서는 네리아가 나와 비슷한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좌르르르르. 지골레이드의 꼬리에 강타당한 절벽에서 돌멩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내렸다.

조금 앞쪽에 있던 길시언은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떨리는 턱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길시언은 흐르는 땀 때문에 달라붙은 머리

카락을 거칠게 떼어내었다.

지골레이드는 호통치듯 말했다. 그냥 말해도 호통치는 것 같다.

“감히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인가! 왕의 드래곤이라고? 허튼 소리! 난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무, 무슨 말인가? 설명해…………… 주시오.”

지골레이드는 날카롭게 말했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는 양자의 동의에 의해 서로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 덜 떨어진 녀석을 떠나고 싶었던 것은 녀석과 계약을 할 때부터였다! 숙명의 잔혹함 이 일신을 구속하게 된 그때부터! 그리고 나의 자식이 생겼을 때 이후로는 매일같이 떠나게 해달라고………….”

지골레이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구슬픈 눈빛으로 웜링을 바라보았다. 우리들도 잠시 숙연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골레이드는 다시 우리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여태껏 놈이 동의하지 않아서 떠날 수 없었지.”

칼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돌맨 할슈타일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떠나실 수 없었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지금은…………?”

지골레이드는 음울하게 말했다.

“녀석이 동의했다는 말이지. 그래서 난 나의 자식과 함께 어리석기 짝이 없는 그 인간들의 전쟁이라는 것을 등질 수 있게 되었다. 나 역시 넌더리가 났지만…………, 무엇 보다도 고귀한 내 자식이………… 인간들의 쓸모 없는 싸움박질을 보지 않게 된 것이 가장………… 즐거웠다.”

지골레이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포효했다.

“소중한 시간은 어찌 이리도 빨리 끝난다는 말이냐아!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딸 시간이여! 이것은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귀가 이상해질 것 같군. 목소리만으로 땅을 울리게 만드는 존재하고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했어. 지골레이드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우릴 내려다보았다.

“내 자식의 살해자도 틀림없이 인간이겠지!”

어? 어? 섬뜩한 기분이 드는데?

“너희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교만하게 두 다리로 서 감히 하늘을 쏘아보는 너희 간악한 놈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오! 저 소녀가 거절한다면!”

지골레이드는 무서운 눈으로 우릴 노려보며 다시 한번 외쳤다.

“저 소녀가 거절한다면!”

제길! 압력을 가하면 터지는 법이야! 난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속에서 악 쓰는 소리가 막을 수도 없이 튀어나왔다.

“레니가 거절하면! 나 역시 너에게 우정의 의무가 없다! 난 자유로운 인간으로 너 같은 이상 비만 도마뱀을 죽일 수 있다구!”

지골레이드는 날 내려다보았는데 저 표정은 아무래도 드래곤식으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일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결심을 굳힌 얼굴이 되었다. 네리아는 떨면서 트 라이던트를 들어올렸다.

“쓸쓸한 죽음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야.”

엑셀핸드 역시 배틀 액스를 꽉 움켜쥐었다.

“선조들께서는 지하의 곳곳에서 드래곤과 맞서 싸우며 아름다운 동굴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피는 불민한 후손인 나에게까지 흐르고 있다.”

“길지 않은 생. 화려하게라도 끝내면 좋겠지요.”

아프나이델은 만사 포기한 얼굴이 되어 그렇게 말했고 반대로 제레인트는 크게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신나는 표정으로, 오, 맙소사. 신나는 표정이라니. 아무리 언 제 죽어도 상관없는 테페리의 프리스트라지만…………. 어쨌든 그런 표정이 되어서는 말했다.

“세피아파인 고개, 제레인트의 파멸, 노래 하나 될 거야. 이런 제기랄! 안타깝게도 목격자가 없잖아?”

운차이는 우리를 쏘아보더니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미친 북부 놈들.”

하지만 그 역시 롱소드를 힘있게 들어올렸다.

칼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우리들을 돌아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여태껏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샌슨에게 말했을 때 난 웃고 말았다.

“퍼시발 군. 레니 양을 부탁한다. 우리가 혈로를 뚫겠다. 레니 양을 갈색 산맥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카, 칼!”

“반대는 용납하지 않아. 경비 대장 퍼시발! 나는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다. 레니 양이 갈색 산맥에 도착하지 못하면 대륙 전체가 끝장이다. 자네가 여기선 가 장 빠르니 자네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칼은 활을 들어올렸다. 샌슨은 이를 부드득부득 갈아대기 시작했다. 레니는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어쩔 줄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골레이드는 그야말로 할말이 없다는 듯이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불쌍하도록 작은 머리가 미치기까지 했군…….”

윽. 저 자식이 목숨 팽개치고 싸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지는 못할망정. 레니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갑자기 외쳤다. “아, 안 돼요!”

우리들은 지골레이드에게 무기를 겨눈 채 경악한 눈으로 레니를 바라보았다. 놀란 나머지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하는 가운데 레니는 서슴지 않고 외치기 시작했다.

“저, 전 당신을 받아………….”

“레니 양.”

레니를 말린 것은 지금껏 조용히 있던 이루릴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레니의 어깨를 짚었다. 레니는 말을 멈추고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말했다.

“저 사람들은 당신을 갈색 산맥으로 보내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걸었습니다. 당신이 거절하면 저 사람들은 주인 없는 드래곤을 만난 존재. 따라서 모두 죽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아요.”

“예…………에?”

“당신이 승낙하면 그것은 당신 속에 있는 저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전 대미궁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아니, 그 전부터 저들과 함께 하면서 배워온 사실이지요. 당신에게 기대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망을 뿌리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루릴 언니……”

“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일스까지 당신을 찾아가고, 그리고 영원의 숲으로, 대미궁으로 당신을 따라갔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어차피 목숨을 돌보면서 당신 을 추적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것 같지만,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대답은 오래 전에 이미 나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레니는 이루릴을 망연히 올려다보았고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다.

레니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지골레이드를 올려다보았고 지골레이드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레니는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고는 간신히 말했다.

“저, 저, 전 다른 드래곤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나도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 그래서………….”

레니는 다시 말을 끊고는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난, 저, 죄송해요. 이런 이야기, 언짢으시겠지만……”

“말해라.”

“그러니까. 어, 전 그 동안 쭉 생각했어요. 밤에 모포에 누울 때, 아침에 눈을 뜰 때, 네리아 언니의 등 뒤에 앉아서 말을 달릴 때. 드래곤의 라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했어요.”

난 조용히 레니를 바라보며 놀람에 젖어드는 가슴을 달래었다. 그렇군. 레니는 당사자야. 난 그녀는 당연히 드래곤 라자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아 무런 의심이 없었다. 단지 어떻게 갈색 산맥에 도착하는가 하는 것이 나의 관심사였지. 하지만 레니는 다르겠군.

“이분들은 저를 데리고 가면서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들려주지 않았어요. 드래곤을 부리게 되면 큰 돈을 구하겠다느니, 나라를 세우겠다느니, 그런 말씀들이 전혀 없었어요. 마치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드래곤 라자가 된다는 것이 도대체 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레니는 잠시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분들은 그저 절 그곳에 데리고 가서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을 만나게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행동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구나, 시시하네.’,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골레이드는 말없이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레니는 점점 호흡이 힘들어지는지 가슴을 크게 들썩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전 지금 알게 되었어요. 아니, 한 가지는 알게 되었어요. 여기 이분들은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한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건 대단히 중요한 일일 거 예요. 그러니까 저 같은 계집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일 거예요.”

레니는 마지막으로 비명을 토하듯이 급하게 말했다.

“저, 그래서, 당신의 라자가 될 순, 그럴 순 없어요. 하지만 우릴 죽이지 말아요!”

좋았어! 레니, 허락한다면 키스해 주고 싶은데? 전투 준비! 이제 아무나 돌격 신호만 외치라구. 그럼 죽으러 달려갈 테니까. 긴장된 근육은 끊어져 나갈 듯한 느낌을 보내왔고 심장은 쾅쾅거렸다. 입안에서 단내 같은 것이 나며 머릿속은 윙윙거린다. 호흡을 고르자, 호흡을 난 바스타드를 가볍게 쥐기 위해 애썼다. 어느 부위를 노 리고 들어갈까. 흠. 덩치가 크니까 때릴 곳도 많군, 그래. 어떻게 쳐도 빗나갈 염려는 없는걸?

지골레이드는 말했다.

“그렇다면 내 차례인가.”

좋아, 시작할까? 세피아파인 고개. 후치의 파멸, 그 멋진 시작이다. “누가 나의 자식을 죽였는가. 말한다면 너희들을 고이 보내주겠다.”

이제 돌격! 아니아니, 정지! 정지! 잠깐, 뭐라구? 고이 보내준다고?

우리는 당황하여 지골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지금 드래곤이 우리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것인가? 우리를 찢어발겨서 진실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흥정을 시 작하는 것인가? 우리 같은 미물에게? 칼은 활을 내리며 말했다.

“그, 그렇게 말씀하신 뜻은…….”

칼은 말을 맺지 못했다. 팽팽해진 물주머니가 터지듯이 네리아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리치몬드요! 마법사요! 새까만 마법사요! 그러니까 리치몬드인 리치요! 아니, 리치인 리치몬드요! 에엑! 이름이 리치몬드니까 아마 애칭도 리치일 거예요! 그러니까 리치요! 리치인 리치요!”

모든 사람(엘프, 드워프, 그리고 드래곤도 포함해서)들의 시선이 네리아에게로 쏠렸다. 지골레이드는 호통을 쳤다.

“도대체 몇 명인가!”

네리아는 겁먹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리치몬드요오..

“그건 누구인가?”

“마법사인데요. 그 녀석이 갑자기 우리 앞에 저 웜링을 던지고 날아가 버렸어요. 우리에게 덮어씌우려고………….”

“어느 방향으로?”

“저어기, 저쪼옥…….”

“알았다. 이젠 너희들에게 용무가 없다.”

지골레이드의 고개가 휘익 움직였다. 그는 땅에 떨어져 있던 웜링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땅에 떨어져 있던 웜링의 시체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산들바람들이 몰려와 낙엽을 떠오르게 만들듯이, 그 시체는 부드럽게 떠올라 지골레이드의 머리 높이까지 떠올랐다. 웜링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떨어진 물방울 은…………. 한 가지는 분명하다. 드래곤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존재다. 크라드메서가 미드 그레이드를 황폐화시키다가 붉은 산맥으로 날아갈 때 눈물을 흘리며 날아갔다 는 이야기를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지골레이드의 날개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며 밤하늘을 가려가는 날개,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듯한 날개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마침내 지골레이드의 날개가 절 벽 위의 하늘을 거의 가려버렸다.

거센 광풍. 그리고 지골레이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래곤들은 말이야! 도대체! 시무니안은 얼마나 신경질이 날까. 저런 거대한 몸이 제멋대로 땅에서 떠오르다니. 어쨌든 지골레이드는 그렇게 말도 안 되도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떠오름에 따라 웜링의 시체 역시 똑같이 떠올랐고 우리는 바람에 흩날려 이리저리 비틀거렸 다. 말들은 다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골레이드는 계곡 위로 떠올랐다. 공중에서 잠시 멈춰 선 지골레이드는 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년. 나에 대한 호칭, 재미있더군.”

소름이 쫙 돋으면서 동시에 얼굴이 붉어지니까 기분이 정말 이상한걸. 지골레이드는 조용히 웃었다.

“하하하하…….”

지골레이드는 그렇게 웃더니 곧 리치몬드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밤하늘을 붉게 물들일 것만 같은 불길이 쏟아졌다. 그리고 포 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단언한다! 리치몬드는 지골레이드에게 죽을 것이다! 유피넬과 헬카네스도 이를 막진 못할 것이다!”

잠시 후 그 거대한 몸은 절벽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 굉장한 날갯짓 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계곡을 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소리도 잦아들더니 이윽고 계곡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만 남게 되었다. 고요한 밤이다.

“갔네?”

제레인트의 말소리. 왠지 섭섭하다는 느낌이 스며 있다.

“갔군.”

이건 엑셀핸드의 말로서 허탈한 기분이 스며 있었다.

“갔어!”

이건 네리아다. 네리아는 곧장 샌슨의 손을 덥석 잡더니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갔어! 갔어! 살았어, 살았다구! 으핫하, 핫, 으하하하!”

나머지 일행들 모두의 고함소리. 모두들 정신없이 웃기 시작했다. 이루릴은 레니의 어깨를 그러안았고 레니는 이루릴을 껴안은 채 펑펑 울고 있었다.

“죽는 줄, 죽는 줄 알았어요! 으아아아앙!”

칼은 고개를 숙인 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길시언은 이마를 닦으며 검을 꽂아넣었고 아프나이델은 결국 주저앉아서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한숨을 쉬었 다.

“후우. 살았어. 후우우.”

갔어! 블루드래곤은 그냥 가버렸어! 이야호! 난 엑셀핸드의 손을 붙잡고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으싸으싸! 방아소리 요란한데! 우라차차!”

노래를 이상하게 바꿔 불렀지만 상관 없었다. 엑셀핸드 역시 시뻘건 얼굴로 전혀 알아듣지 못할 드워프의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내 노래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살았어!

엑셀핸드를 다시 말 뒤에 태워 출발하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드래곤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난 드워프는 반드시 노래 100곡을 불러야 되는 것 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으니까. 어쨌든 우리들은 간신히 진정하고는 다시 세피아파인 고개를 횡단할 준비를 갖추었다. 출발 직전, 말 위에서까지 노래를 불러대고 있던 엑셀핸드가 말이 갑자기 출발하자 그대로 굴러 떨어지는 사소한 사고가 있었지만 그런 대로 부드러운 출발이었다.

모두들 너무 웃고 나서 힘이 빠진 상태였지만 살아났다는 기쁨 하나만으로 힘차게 말을 출발시켰다. 샌슨은 심술궂은 얼굴로 말했다.

“리치몬드 녀석,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군. 블루 드래곤에게 쫓겨다니게 되었으니 따분할 틈은 없겠는걸?”

모두들 쾌활하게 웃었다. 말을 천천히 걸리면서 칼은 길시언에게 말했다.

“천만 다행한 일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드래곤이 우리 같은 미물에게까지, 뭐 그는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요. 어쨌든 논리로써 대해 준다는 것이 너무도 놀라웠습니다.”

“예. 그런데 말입니다. 지골레이드가 자유로운 드래곤이 되었다는 것, 신기한 일이군요.”

“그렇습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요. 돌맨이 왜 계약을 파기한 것일까요?”

“양자 모두의 동의가 아니면 그 계약은 불가침이라지요? 지골레이드의 경우는, 조금 전 나눠본 이야기로는 그 드래곤 라자로서의 권능이 약한 돌맨에게 매여 있는 것이 싫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식을 위해서도 자유로운 드래곤이 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맨은 왜 그것을 허락해 주었을까요? 자이펀과의 최전선에서 싸우 는 드래곤을 자의로 풀어줄 수는 없을 텐데요.”

“예. 그가 혹 지골레이드의 요청을 받아줄 마음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전선 지휘관들이 허락해 줄 까닭이 없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으음. 정말 이상한 일이군. 지골레이드는 최전선에 있어야 되는 드래곤인데 왜 자유로운 드래곤이 되어 여기서 얼쩡거리는 거지? 왜 돌맨은 그를 자유롭게 놓아준 것이지? 길시언은 갑자기 후미에서 걸어오던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이봐, 운차이. 자이펀 쪽에서는 지골레이드를 어떻게 평가하지?”

운차이는 음울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출격 정보는 1급 비상 사태였다. 하지만 자주 있지는 않았지.”

“자주 있지는 않았다고?”

“난 주로 바이서스 내부에서 활동해서 정확한 정보는 모른다. 하지만 듣기로 지골레이드는 그렇게 열성적으로 싸웠던 것 같지는 않다. 드래곤은 하늘을 날 수 있고 벼락을 뿜는다. 그 이동속도를 따라잡으면서 반격을 준비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하지만 아직껏 자이펀이 바이서스와 대등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본다면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흐음. 그도 그렇군. 지골레이드는 확실히 달갑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맨이 그를 자유롭게 놔줬다고? 이해하기 어렵군.”

“저…………, 몰래 놔준 것이 아닐까요?”

내 질문에 칼과 길시언은 날 바라보았다.

“저, 디트리히 할슈타일 말이에요. 캇셀프라임의 라자였던 소년. 그 소년은 캇셀프라임이 굶고 있으니까 밤중에 산 속을 돌아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던데요. 라자 는 드래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돌맨 할슈타일도 지골레이드가 측은해서 놔준 것이………….”

칼은 빙긋 웃었다.

“글쎄. 그럴듯한 추리로군, 네드발 군. 하지만 밤중에 산 속을 뒤지는 것과 지골레이드를 함부로 전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전쟁터에서? 아냐, 네드발 군. 아무래도 이상해. 옆에서는 많은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어. 그 상황에서 죽을 염려도 별로 없는 드래곤이, 단지 싸우기 싫어한다는 이 유만으로 물러나게 허락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해.”

난 머리를 긁적이다가 래셔널 셀렉션 위에 앉아 있는 이루릴을 돌아보았다.

이루릴은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살아난 것이 별로 기쁘지도 않은 것인가?

“이루릴, 왜 그런 얼굴이세요?”

“예? 아, 그자의 다른 이름을 듣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다른 이름이라구? 어,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는걸. 리치몬드가 과거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지를. 으으. 이거 고민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로 군.

“천천히 고민하지요. 음. 일단은 살아난 것을 기뻐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굳은 표정이 되었다.

계곡을 빠져나와 다시 숲 사이로 난 길을 지나게 되었을 때, 이루릴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저,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과 헤어져야겠습니다.”

“예?”

샌슨이 비명처럼 말했다. 어, 어? 무슨 말이야? 제레인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네리아는 입을 딱 벌렸다.

“이루릴 언니?”

“어, 세레니얼 양?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루릴은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그 리치몬드를 쫓아가고 싶습니다. 그가 과연 누군지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칼은 당장 이맛살을 찌푸렸다.

“리치몬드가 핸드레이크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프나이델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길시언과 엑셀핸드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어, 예? 핸드레이크라니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아프나이델의 질문에 칼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짧게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천천히 설명드리겠소. 그런데 세레니얼 양. 단지 그가 리치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핸드레이크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확인해야 합니다. 만일 시간이 늦어 리치몬드가 지골레이드에게 살해당한다면 영영 확인할 길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허어, 이런………….”

“만일 그가 핸드레이크가 아니라면, 곧 여러분들에게로 돌아오겠습니다.”

“저에겐 세레니얼 양의 자유를 간섭할 권한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껏 함께해 주시고 도움을 베풀어 주신 것에 고마워해야 마땅한 일이지요. 알겠습니다.”

네리아는 울상이 되어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 갈 거예요?”

“예. 네리아. 제가 여행을 시작한 목적이었으니까요.”

“알겠어요. 응………….., 하지만 저 못된 마법사가 핸드레이크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확인하지 않은 이상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하지만 헬카네스는 문제 옆에 열쇠를 숨기는 법이지요.”

“드래곤 로드의 말이오?”

“예.”

이루릴은 다른 사람들과도 모두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샌슨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그저 간단하게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엑셀핸드는 잘 가라 고 말했고 아프나이델은 만나자마자 헤어져서 섭섭하다고 말했으며 제레인트는 곧 다시 보자고 말했다.

나는 뭐라고 했냐고?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그러자 이루릴은 방긋 웃었다.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그리고 이루릴은 래셔널 셀렉션을 되돌렸다.

“갈까요, 래셔널 셀렉션.”

푸르르릉. 이힝힝! 래셔널 셀렉션은 전혀 밤새도록 걸어왔던 말답지 않았다. 래셔널 셀렉션은 앞발을 높이 구르더니 곧 힘차게 달려갔다. 이루릴은 그렇게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절벽 옆을 따라 난 숲 속으로 사라져갔다. 잠시 후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만이 들려오다가 그것마저 사라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나자 엑셀핸드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군.”

“다시 만날 테니까 떠날 때 시간을 끌 이유는 없습니다.”

길시언의 대답이었다. 엑셀핸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램프를 꺼내면서 다시 한번 이루릴이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주위와 똑같이 캄캄 한 숲이었지만, 왠지 다르게 보인다.

난 입맛을 다시면서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거 드워프제잖아! 300년 전의 디자인이야!”

엑셀핸드의 고함소리. 아, 이 램프 대미궁에서 가지고 나온거였지?

우리 등 뒤로 동쪽 하늘이 장밋빛으로 물들어 갈 무렵, 우리는 밤새도록 달려서 겨우 세피아파인 고개를 넘게 되었다.

주위는 약간 파르스름한 빛이 도는 아침 안개가 꿈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훤칠한 적송들이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살갗에 닿는 아침 공기는 촉촉했다.

안개 속을 걸어가는 우리 일행의 모습은 유령처럼 보였다. 뚜걱거리는 말발굽 소리도 안개 속으로 사라져 희미해져 갔다. 모두들 밤새도록 달려서 피로한 모습이었 다. 레니는 네리아의 등 뒤에서 졸고 있었고 네리아는 레니의 앞에서 졸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에보니 나이트호크마저도 졸음에 겨운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등 뒤로 뜨끈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가 지나온 세피아파인 고개 위로 아침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칼에게 말했다.

“음냐, 쩝. 그런데 그자는 왜 리치가 되었을까요?”

칼은 잠시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멀리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글쎄. 역시 죽음이 두려워서이지 않을까.”

“글쎄. 루트에리노 대왕의 말에 의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요,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때 졸고 있던 네리아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약간 부은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아, 그거. 어젯밤에도 들려주시려다가 말씀하지 못했지요. 으하아암, 냥냥, 대왕이 뭐라고 했는데요?”

“아, 예. 네리아 양. 대왕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칼은 웃으면서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 하지만 범죄에 속할 만큼 아름다운 나이트호크는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축제를 앞둔 농부는 몇 배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된 휴식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다. 따라서 몇 배로 맹렬하게 살 아갈 수 있다.”

“휴식이 약속되어…… 죽음이?”

“그렇지요.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지요.”

네리아는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거리다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럼 죽음이 축제라는 말이에요?”

네리아의 톡 튀는 듯한 질문 방식에 칼은 미소를 지었다.

“축제가 일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일상의 괴로움을 모두 잊고 자신마저도 잊을 수 있는 의미에서의 축제라면 죽음은 곧 축제인 셈이지요.” “…………너무 어려워요.”

엑셀핸드의 굵은 눈썹이 희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난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세피아파인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네리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약속된 휴식이라…………….”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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