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12화 : 자유를 찾아서 – 1
자유를 찾아서 – 1
“끄으응…….”
마치 온몸에 납덩이를 달아놓은 것 같은 힘겨움에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온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보면 이번에도 살아남은 것 같기는 한데, 몸을 거의 움직이기 힘든 것을 보면 살아있는 것 같지도 않다. 라이는 이를 악물고 기를 쓰며 손을 움직여 입고 있던 갑옷을 더듬었다.
역시,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이빨들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지금껏 배운 온갖 재주를 다 부려봤지만,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샌드웜에게 집어삼켜질 때 이번에는 재수가 없었는지 몸에 두 군데나 구멍이 뚫려야만 했다. 그때의 끔찍스러웠던 통증은 떠올리기도 싫다. 갑옷에 난 구멍 안쪽을 더듬어 보니 탄탄한 몸이 만져진다.
언제나 그렇듯 신기하게도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재생되어 있었다.
“또다시 살아난 건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깨어날 때마다 신기한 것도 사실이다.
문득 절망에 빠져 쓰러져 있던 자신을 향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던 클리프 바그룩의 경악한 표정이 떠오른다.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겠지. 하필이면 나를 막 잡으려고 할 때 샌드웜이 튀어나올 줄이야 상상도 못 했으리라.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샌드웜이라 생각하고 필사의 도박을 건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덕분에 놈의 추격에서 이렇게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킥킥킥…….”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샌드 웜에게 잡아먹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돌아가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보고할 것이다. 아마 죽었을 거라 판단할 테니, 자신을 잡으러 클리프 같은 기사를 두 번 다시 보내지 않을 걸 생각하면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클리프는 싸워볼 엄두조차 나지 않던 절대적인 강자였으니까.
라이가 클리프를 그렇게 높이 평가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그의 실력이 상승한 덕분이었다.
클리프에 비해 월터나 올란도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의 강자들이었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당시 라이는 그들이 그렇게 강하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다.
“아, 목말라 죽겠네. 그러고 보니 밤새 도망치느라 물 한 방울도 못 마셨잖아.”
물만 못 마셨겠는가. 지금은 회복됐지만 샌드웜의 이빨이 몸에 박힐 때 엄청난 피까지 쏟아졌으리라. 당연히 온몸이 수분 부족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케이론, 나와라.”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공간을 열고 나오는 케이론을 보며, 라이는 몇 번이나 봤으면서도 볼 때마다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저 커다란 타이탄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공간 속을 마치 집에 드나들 듯 들락거리는 게 신기할 뿐이다.
타이탄이 사는 공간 속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지만, 생명체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타이탄에 탑승한 채 그 안으로 들어갔었을 것이다.
위험한 상황일 때 케이론에 탑승한 채 공간을 열고 그 안에 숨어버리면 모든 게 해결되었을 테니 말이다.
라이는 케이론이 나오자 조종실 밑에 숨겨두었던 물통을 집어 들고 딱 다섯 모금만 마셨다.
목이 마르다고 양껏 마셨다가는 자칫 큰 탈이 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을 마신 뒤 바짝 말라 이빨도 잘 들어가지 않는 육포 조각에 침을 듬뿍 묻혀 부드럽게 만들었다. 짠맛과 함께 고기 맛이 느껴진다. 공들여 천천히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소금을 듬뿍 쳐서 바짝 말린 육포기는 했지만, 이렇게 천천히 씹으니 그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다. 정말 살 것 같다.
갈증과 허기를 달래 겨우 정신을 차린 라이는 급히 허리춤에 손을 댔다.
황급히 도망치느라 검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다행히 허리춤에 검이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도망치는 순간부터 샌드 웜의 뱃속으로 들어갈 작정이었기에 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끈으로 단단히 묶어뒀었다. 전에 샌드웜에게 먹혔을 때는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검을 잃어버렸었다.
검을 쓰는 기사가 검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게다가 이젠 또다시 보급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라이는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타이탄을 조종해 샌드 웜의 꽁무니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샌드 웜의 뱃속은 칠흑과도 같이 어두웠지만, 타이탄에 탄 상태에서는 주위가 환하게 보인다. 타이탄의 시야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라이는 기대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언제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예전에 먹혔을 때 샌드 웜의 뱃속에 들어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샌드웜이 웬 타이탄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번에도 어쩌면 그렇게 빨리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물론 더 오래 있게 될지도 모르지만, 라이는 그런 절망적인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말이 씨가 될 수도 있으니까. 조종실 밑에 미리 꼬불쳐 둔 물과 식량의 양이, 특히 물의 양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게 라이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바짝 말린 납작한 육포는 숨겨서 가져오기가 용이했지만, 물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물통을 구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일주일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 이상 길어진다면 목숨이 위험하다.
“케이론, 몬스터와 싸워봤어?”
『여러 번 싸웠다. 너무 약했다.』
“네가 싸워봤던 몬스터 중에서 가장 강했던 건 뭐였어?”
잠시 궁리하는 듯하던 케이론이 말했다.
『사막전갈이다.』
아마도 이전 주인과 사막에 왔을 때 싸웠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샌드 웜에게 이전 주인이 먹힐 때는, 급작스러운 기습을 당한 탓에 타이탄을 채 꺼내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케이론 혼자 샌드 웜의 뱃속에 있던 게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그때 봤던 또 다른 타이탄은 기사가 운전석에 죽어 있었다. 어찌어찌 타이탄을 꺼냈겠지만 놈에게 삼켜진 이상 탈출하지 못한다면 결국 남은 건 죽음뿐이다.
자신처럼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샌드 웜에게 먹히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다. 샌드 웜은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한 무적의 몬스터였다. 케이론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꽁무니 부분까지 왔다.
웜의 끝부분인 만큼 금속질 벽으로 막혀있다.
그런데 그 벽 아래쪽에 이질적인 모습을 한 특이한 게 보였다.
“저게 뭐지?”
『루사르다.』
“루사르?”
『전 주인의 동료와 계약을 맺은 타이탄이다.』
“뭐라고?”
허둥지둥 끝부분으로 가보니 과연 케이론과 똑같은 형태의 타이탄이 누워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타이탄 표면에는 무수한 흠집이 나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2차 장갑을 뚫고 숨겨져 있던 1차 장갑까지 드러나 있는 커다란 상처도 있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처참한 모습이다.
“설마・・・ 그때 그 샌드 웜의 뱃속인 거야?”
케이론이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라이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전에 자신이 탈출했던 그 샌드 웜이라는 것을.
뭐, 처음부터 자신이 샌드 웜에게 삼켜졌던 장소를 찾아서 도망쳐 온 것인 만큼, 같은 샌드 웜에게 또 잡아먹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제대로 잘 찾아온 셈이다.
라이는 한 번 탈출에 성공한 놈이니 두 번째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샌드 웜의 지능을 너무 얕잡아 본 거였다. 자신의 뱃속에 생명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느낀 샌드 웜은 이번에는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 본부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얼마 전 뱃속에 아직 생존해 있는 먹잇감을 항문으로 배출했다가 다시 짓씹어서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섭취하려고 했었지만, 원통하게도 실패했었다.
예상한 것보다 이 작은 생명체의 움직임이 너무 재빨랐던 탓이다.
샌드웜도 이제는 잘 안다. 어설프게 뒤로 배출했다가는 삼킬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놓쳐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항문 쪽을 아예 꽉
막아버렸다.
본부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자신의 주인이 있다. 그에게 인도하면 이런 녀석의 처리쯤이야 아주 간단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샌드 웜의 속셈을 라이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예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항문판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회는 뜻밖에도 아주 빨리 찾아왔다.
부드러우면서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던 샌드 웜의 뼈대들이 순간 폭발적으로 가속하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라이는 환호했다.
“얏호! 먹잇감을 찾은 모양이군.”
누가 샌드웜의 목표가 되었는지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이제 곧 있으면 밖으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라이는 물통을 집어 들고 몇 모금 마셨다.
이제 더 이상 물을 아낄 필요가 없다. 최소한 일주일에서 10일은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그야말로 신께서 자신을 도와 주는 듯했다.
수평 상태를 유지하던 샌드웜의 몸체가 위쪽으로 서서히 꺾이기 시작한다.
샌드웜이 먹잇감을 공격하기 위해 위쪽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걸 느낀 라이는 타이탄을 조종해 샌드 웜의 뼈대들 사이에 타이탄의 몸을 고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잡을 데가 별로 없는 데다가, 뼈대가 금속성으로 반질반질해 큰 충격이라도 받으면 곧바로 나뒹굴게 될 거라는 게 문제였다.
샌드웜의 마지막 공격 때, 웜의 몸은 거의 직각으로 치솟는다.
라이를 삼켰을 때쯤 샌드 웜은 그리 굶주려 있지 않았다. 오너급 기사 둘을 포식한 데다, 그래듀에이트급도 2명 포식했다. 그리고 본부에서 보급받은 식량도 넉넉했었다.
하지만 라이를 두 번째로 잡아먹었을 때쯤에는 상당량의 식량을 소모한 후였기에 배가 고파 있는 상태였다. 배가 고프면 의욕이 치솟을 수밖에 없고, 그건 포식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평소에는 상체만 조금 꺼내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지금은 거의 절반 이상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보다 확실히 사냥감을 포식하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지금 웜은 굉장히 짜증이 치솟아 있는 상태였다. 배도 고픈데 잡아먹은 먹잇감에서 죽음의 기운을 흡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확실히 포식하려 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라이에게로 전해졌다.
예전에는 없던 방해물, 즉 폐물 타이탄이 굴러다니며 라이의 타이탄을 두들겨 댔던 것이다. 80톤에 달하는 거대한 쇳덩어리인 만큼, 아무리 타이탄에 타고 있다고 해도 부딪치게 되면 그 충격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만약 그 폐물 타이탄이 예전에 봤을 때처럼 웜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면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았었겠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엉덩이 부분에 함께 위치해 있는 상태다.
조금 걸리적거리는 것 외에는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그리고 곧이어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 덕분에 이런 고난쯤이야 애교 정도로 느껴졌다. 웜의 움직임이 정점에 도달한 듯 상승을 멈췄다.
이제 곧이어 샌드웜의 몸체가 아래로 곤두박질칠 거다. 라이가 노리고 있는 탈출할 수 있는 최고의 적기가 바로 그때였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샌드 웜의 거체가 요동쳤다.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인 데다 폐물 타이탄까지 난동을 부려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라이는 폐물 타이탄을 재빨리 옆으로 치우며 항문판쪽으로 움직였다.
이때가 오기만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데, 이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웜이 땅속으로 파고들기 전에 탈출해야만 했다. 하지만 상황은 라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라?”
전에는 조금만 힘을 가해도 쉽게 활짝 열렸었는데 이번에는 항문판이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예전에 열고 나갔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다.
‘설마, 다른 걸 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주위를 둘러봤지만, 특이한 생김새의 항문판이 따로 하나 더 있을 리 없다.
“이게 왜 이래?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잖아!”
타이탄을 조종해 전력으로 항문 쪽을 밀어봤지만, 역시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간,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전에는 샌드웜이 라이를 배출하고 다시 삼키기 위해 일부러 항문판을 열어줬던 것이지만, 이번에는 본부로 끌고 갈 생각인 만큼 열어줄 리가 없다.
그걸 모르는 라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왔을 때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데 꼼짝도 안 하니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인생이 쉽게 넘어가는 게 하나도 없냐. 이런 망할!!”
타이탄의 손으로 두들겨도 보고, 결국 검까지 뽑아서 쳐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캉캉!
샌드 웜의 항문판은 엄청나게 튼튼했다.
몬스터의 금속성 뼈대의 강도는 강철을 상회하는 게 많다. 거기에다가 항문판의 두께는 타이탄 몸체의 절반 정도에 달할 정도로 두껍다. 강철 검으로 때려봐야 흠집도 나지 않는다.
“이런 젠장, 만약 검이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있었다면…………….”
라이의 푸념에 케이론이 대답했다.
형제 기체들 중 도끼를 표준무장으로 부여받은 것도 있지만, 나는 해외공작용으로 선택되었기에 검을 부여받았다.』
“무장이 검이 아닌 타이탄도 있다는 거야?”
『검보다는 도끼나 망치를 받은 쪽이 훨씬 많다.』
검술이 강한 코린트나 크라레스의 경우, 타이탄의 기본무장을 검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술에서 한수 뒤지는 신성 아르곤 제국은 검술에서의 취약성을 무기의 공격력으로 보충하려고 했다.
중장갑을 공격하는 데는 검보다는 중병기 쪽이 훨씬 화력이 높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성 아르곤 제국에 대형도끼나 전투망치와 같은 중무기를 장착한 타이탄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라이는 어떻게 해서든 항문판을 깨고 밖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샌드웜이 가만히 있지 않고 요동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렁이가 발버둥을 치듯 좌우로 미친 듯 움직였다.
샌드웜의 엉덩이 쪽에 위치해 있던 라이로서는 그 거친 움직임에 이리저리 날아가 부딪치며 난데없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더구나 80톤짜리 폐물 타이탄이 같이 날아다니며 부딪쳐 대는 통에 난리도 아니다. 타이탄에 탑승해 있지 않았다면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이놈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설마 나를 죽이려고……………?”
그건 아니었다. 샌드 웜의 갑작스런 거친 움직임에 이리저리 나뒹구느라 정신이 없어 미처 몰랐었는데, 간간이 폭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샌드웜은 지금 뭔가와 싸우고 있었다. 이런 엄청난 거체와 싸울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샌드 웜은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탈출하려면 지금밖에 없다.
하지만 굳건하게 닫혀있는 항문판도 문제였지만, 샌드 웜이 워낙에 요동을 쳐대고 있는 상황이라 타이탄을 제대로 서 있게 만들 수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분하게 검으로 항문판을 때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마음은 한없이 조급해지고 있었지만, 타이탄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있는 상황.
더군다나 샌드웜의 금속질 뼈대를, 마찬가지로 금속으로 만들어진 타이탄의 손으로 붙잡으려 하니 너무 미끄러워 전혀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80톤짜리 폐물 타이탄이 날아다니며 부딪혀 대고 있으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이때, 샌드 웜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어? 이게 어떻게 된………….”
왜 움직임이 멈췄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영원히 샌드 웜의 뱃속에서 탈출할 수 없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라이는 재빨리 타이탄을 일으켰다. 황급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을 움켜쥐고 힘껏 휘둘렀는데, 항문판이 마치 두부라도 자른 듯 쫙 갈라지는 것에 오히려 라이가 놀라버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그렇게 단단했었는데………….”
하지만 의문은 곧이어 풀렸다. 샌드 웜의 몸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라이는 이런 경우를 그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323 정찰조의 공격을 받은 언데드 거대전갈이 생명이 다 하자 마치 모래처럼 허물어지던 그때 그 광경을 놀랍게도 누군가가 샌드 웜의 언데드로서의 생명을 끝장내버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