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18화 – 악몽(惡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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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18화 – 악몽(惡夢)

악몽(惡夢)

한 노인이 꿈을 꾼다.

덥다! 덥다! 덥다!

한 노인이 생각한다.

땀이 흐른다. 비가 오듯이.

갈증이 난다. 입 안이 뜨겁다. 목구멍이 타는 듯.

사방에서 그를 삼켜버릴 듯 이글거리는 뜨거운 열기가 다가온다.

뚱뚱한 몸을 돌려 도망간다.

넘실거리는 붉은 불꽃의 파도가 그를 덮친다. 삼켜버린다. 불태우려 한다.

뜨거워! 뜨거워! 뜨거워!

외친다. 울부짖는다.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성대가 불에 타버렸는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달구어진 석탄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 안이 뜨겁다.

몸을 돌린다. 달린다. 도망간다.

불꽃이 뒤에서 쫓아온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그는 계속해서 달린다.

화르르르륵!

갑자기 눈앞에서 붉은 불꽃이 타오른다. 불꽃의 벽이 높게 치솟아 오르며 자신의 갈 길을 막는다.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다. 다시 달린다. 도망간다.

화르르르륵!

또 다시 자신의 앞길에 불꽃의 기둥이 솟아오른다. 뜨거운 열기가 자신의 영혼마저 불태울 것 같다.

뜨겁다. 뜨겁다.

다시 뒤로 돌아 달린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열기 때문에 질식할 것만 같다.

또다시 자신의 진로를 가로 막으며 불꽃의 장벽이 솟아오른다.

다급하게 사방을 둘러본다.

전후좌우!

사방이 모두 불꽃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불꽃의 감옥에 갇혀버렸다. 도망쳐야 한다.

무한한 열기가 그에게로 다가온다. 질식할 것만 같다. 뜨겁다. 영혼마저 불타버릴 것만 같다.

그때 불꽃을 헤치며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점점 다가온다.

그것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니다. 타오르는 불꽃의 머리칼을 지닌 그것은 전신에 이글거리는 화염의 옷을 두르고 있다. 그것은 불꽃 귀신이다.

도망가야 한다. 그러나 다리가 바닥에 달라붙은 듯 움직일 수 없다.

불꽃의 귀신이 씨익 하고 웃는다. 전신에 두른 화염이 더욱더 세차게 타오른다. 붉은 귀신이 손가락을 들어 그의 왼팔을 가리킨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불타고 있다. 활활 불타고 있다. 그의 왼팔이 새빨간 불꽃에 휩싸여 타고 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흥건하게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노인의 왼팔이 불꽃에 재가 되어버린 꿈이 현실화된 듯했다.

뚱뚱한 노인의 왼팔 소매는 텅 비어 있었다.

다른 한 노인이 꿈을 꾼다.

붉은 혈광을 발하는 두 눈이 피에 절은 보석처럼 빛난다.

보석의 주인. 산발 괴인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진다. 두 개의 도가 괴인의 손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말도 안 돼! 하고 외치고 싶다. 괴인은 저토록 간단히 쓰러질 존재가 아니다.

산발 괴인을 쓰러뜨린 사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젊다.

20대 중반도 채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앞머리가 발처럼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말도 안 된다. 겨우 저런 애송이 따위에게 공포심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문득 손을 내려다본다. 손이 자기 혼자서 세차게 떨리고 있다.

사내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다. 사내의 손이 서서히 올라간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서서히 펴진다.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무척이나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지금이 기회다.

도망가야 해! 도망가야 해!

필사적으로 외쳐보지만 소용이 없다.

몸이 가위에라도 눌린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저 손가락이 완전히 펴진다. 그러면 정말 죽는다.

그러나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흠칫 놀라 자신의 발 아래를 내려다 본다.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림자가 꿈틀꿈틀 요동치며 땅속으로부터 검은 손이 튀어나온다. 검은 손이 그의 다리를 잡는다. 손은 한둘이 아니다. 모두가 다 자신의 손에 죽어간 자들의 원념 이 서린 손이다. 그 중 가장 크고 가장 억센 손이 하나 있다. 일렁이는 암흑의 심연 속에서 팔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핏빛처럼 붉은 안광이 빛을 발한다. 방금 전 사내의 손에 쓰러진 산발 괴인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핏빛 안광으로 빛나는 그 두 눈에서 원한 서린 피눈물이 흐른다. 입에서는 저주의 말이 흘러나온다.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자 앞머리로 눈을 가린 사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내가 웃고 있다. 미소 짓고 있다.

까딱!

사내의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인다.

아무런 느낌도 없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그의 오른팔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우수가 사지의 일부였던 것은 옛날 이야기라는 것을. 씨익!

또다시 사내가 미소 짓는다.

이제 막 사내의 손가락이 모두 펴졌다.

시야가 붉게 변하며 온몸이 산산조각난다. 영혼이 갈가리 찢어발겨진다. 두렵다. 고통스럽다. 죽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죽을 수가 없다.

암흑 속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붉은 눈의 산발 괴인이 혈광을 빛낸다.

점점 더 빠져 들어간다. 어느새 목 이외의 모든 부분이 암흑의 늪에 잠겨 있다. 다시 그 손이 그의 얼굴을 움켜쥔다.

꿀꺽, 꿀꺽, 꿀꺽!

목구멍 안으로 암흑이 밀려 들어온다.

“끄아아아아아악!

노인은 두 눈을 번쩍 뜨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꿈!

꿈이다.

그러나 깡마른 노인의 오른팔은 꿈속에서 잘려나간 채 그냥 두고 왔는지 텅 비어 있었다.

저편에서 자신과 동시에 깨어난 동료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한 노인은 나뭇가지처럼 깡마르고 다른 한 노인은 돼지처럼 투실투실했다.

두 노인 모두 두 눈이 퀭하게 뚫려 있었다. 이마에서 뺨을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등줄기가 소나기라도 맞은 듯 축축하다.

두 노인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악몽에 시달린 탓인지 네 개의 눈동자 모두 피곤에 절은 채 안으로 움푹 꺼져 있었다. 자초지종 따위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늘상 반복되는 일….

“제기랄, 또 그 꿈인가…….”

두 노인이 동시에 내뱉었다.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잠자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날 이후 매일매일 반복되는 악몽, 악몽, 악몽.

이 악몽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크윽, 또… 또……..”

악몽에서 깨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비어 있는 어깻죽지의 고통,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익숙해질 만도 한 시간이 지났건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공포란 마음 속 심연의 어둠 깊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괴물이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증폭되어 가는 마음 속 두려움을 먹고 성장해 결국에는 사람 그 자체를 삼켜버리고 만다. 공포에 먹힌 사람은 곧 광인이나 백치, 혹은 폐인이 되어버린다. 이런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사고력과 판단력, 분별력을 기대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여기 술 가져와! 술! “

깡마른 노인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쨍그랑!

빈 술병 하나가 장지문을 뚫고 날아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술병 깨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밤공기를 울렸다. 술병을 던진 것은 뚱보 노인 쪽이었다. 이 편이 더 의사전달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문 밖에서 허둥지둥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우라질, 염병할…….”

요즘 들어 술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술이 없으면 잠도 없었다. 독한 화주를 물처럼 들이켜야만 겨우 눈을 붙였다.

두 노인의 침대 밑으로 빈 술병 수십 병이 질서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자정(正) 섬서성 화음현 화평장(和平) 30장 근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죠?”

나예린이 화평장의 정문을 주시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문은 지금 타오르는 화톳불들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아직도 발이 저린 모양이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비류연은 싱긋 웃었다.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군요.”

노학이 정말 냄새라도 나는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도합 네 개의 화톳불이 활활 어둠을 밝게 불살랐다. 그 뒤로 6명의 무사가 병장기를 쥔 채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간에 맞추어 2인 1조로 순 찰을 도는 무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생각 이상으로 삼엄한 경비였다.

“내가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지?’

그림자들 사이에 섞인 한 거지가 내심 투덜거렸다.

개방 서악 분타주 오개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안내역이었다. 그는 자신을 개 끌듯이 끌고 온 이 젊은이들의 놀라운 무공에 경악해야만 했 다. 과격하게 움직이는 데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바람처럼 빨랐다. 걸을 때마다 시끌벅적한 자신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이것이 화산규약지회에 선택받은 자들의 무력인가…….’

차원이 틀리다는 말을 오늘만큼 지척에서 뼈저리게 실감한 적이 없었다. 저 틈에 당당(?)하게 끼어 있는 노학이 굉장히 새롭게 보였다.

“그럼 가볼까요?”

밤의 그늘 속에 숨어 있던 열네 개의 그림자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시말(子時末) 화평장 후원

“으으, 이보게, 자네, 봤나 봤어?”

2인 1조가 되어 순찰을 돌고 있던 두 명의 무사 중 키가 크고 인상이 험악한 사내가 옆의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묘한 흥분이 서려 있었다. 듣고 있던 쪽은 약간 키가 작은 편이었는데 기다렸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전 태어나서 그런 미인은 처음 봐. 그게 우물(尤物)이지 사람인가. 오금이 저려서 서 있을 수가 있어야지…….”

대답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왠지 질척거린다.

“나도 심장이 벌름거려서 혼났다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구! 코피를 쏟을 뻔했지!

다행히 그 일만은 막을 수 있었다고 사내는 지금 안도하는 듯했다.

“크으, 딱 한 번이라도 좋아. 그런 여자 평생 한 번만이라도 안아봤으면.

덩치 큰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욕망이 꿈틀거리는 어조였다. “자네 말대로일세. 정말 죽여주더구만.”

두 사내의 헤벌린 입에서 금방이라도 침이 줄줄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런 방자한 놈들!’

아름드리 나무 위에 동화된 그림자 하나가 부르르 떨렸다. 몰래 잠입한 후 은신하고 있던 모용휘였다. 그는 은신잠행술 수업에서도 항상 만점을 놓친 적이 없었 다.

이름을 듣지 않아도 그 대상이 누군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숨어서 듣고 있던 그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갑고 냉정한 마음이 화로 안처럼 뜨거워졌다.

‘감히 네놈들 따위의 세 치 혀 위에서 놀려질 분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충동적으로 일을 해결하려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항상 모든 상황에 대처할 때 냉정 침착을 신조로 삼던, 그리고 항상 그렇게 하기 위해 노 력하던 자신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끄아아아아악!

쨍그랑!

어디선가 밤공기를 울리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끔찍한 비명의 이중창과 뭔가 자기류가 심하게 산산조각나는 소리였다.

정숙하던 밤의 침묵이 한순간에 걸레가 되어버렸다.

그 소리에 순간 놀랐는지 이 두 명의 무사도 경계의 표정을 가득 띠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용휘와 그 근처에 숨어 있던 동료들 모두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가장 동작이 늦은 것은 이진설이었다. 그녀는 몸을 숨긴 후에도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심장의 고 동 소리를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독고령이 눈으로 주의를 주자 이진설은 찔끔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사방을 경계하던 두 사내의 행동이 곧 원상태로 돌아갔다. 소란의 원인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안 모양이다.

‘또야? 제기랄!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등의 불평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처음은 아니지만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일인 듯싶었다.

휴우.

초대받지 않은 밤의 월담자 열네 개의 그림자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그때 바로 아래에 은신해 있던 비류연이 신호를 보냈다. 손가락이 무례한 두 놈을 콕콕 가리켰다. 시간이 아까우니 저 두 놈을 잡아 심문해 보자는 의미였다. 모용휘가 기다렸다는 듯 바람처럼 움직였다. 아까부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를 비류연이 따랐다.

그들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 스며들듯 스르륵 사라졌다.

축시초(丑時初 : 약 0100시경) 화평장 후원 심처

“저기로군! “

장원 건물 한쪽 모퉁이의 그림자 속에 숨어 밖을 내다보며 비류연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 두 놈의 증언에 거짓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 두 무사의 입을 통해 토해져 나온 사실대로 두 명의 경비가 문을 호위하듯 지키고 있었다. 피납자에 대한 대우치고는 상당히 호사스러웠다.

경험은 하면 할수록 는다고 했던가? 이미 한 번의 귀중한 경험이 있는 염도는 이번 심문, 협박에서 더욱 능숙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명부(冥府)의 염라대왕을 방불

케 하는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비류연과 모용휘가 잡아온 – 두 사람은 이 일을 정말 감쪽같이 해냈다 – 두 무사는 거짓을 토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확실하겠죠?”

그래도 남궁상은 돌다리를 두들겨보고 건너고 싶은 모양이다.

“만일 거짓이라면 그 둘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되겠지!”

낮고 으스스한 목소리의 염도였다.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 있으면요!”

비류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전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 둘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겠군!”

그 두 무사는 지금 현재 떠오른 염도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저길 들어가려면 일단.

염도의 말을 비류연이 미소지으며 이었다.

“열쇠가 있어야겠죠.”

“이런!”

남궁상과 노학의 입에서 낭패한 목소리가 조그맣게 새어나왔다. 그들의 앞에는 은설란이 납치, 감금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을 지키는 두 명의 무사가 서 있 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승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의 목에 박힌 가느다란 은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독고령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수장 밖에서 비침을 날려 정확하게 두 사람의 혈도를 찔렀던 것이다.

‘저것이 검후 그분의 제자 솜씨인가?’

놀라운 솜씨라고 석류하는 몰래 감탄했다. 검후 이옥상은 그녀가 정사를 떠나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방문에는 버젓하게 큼지막한 검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 둘의 몸 어디에도 열쇠는 존재하지 않았다. 샅샅이 구석구석 뒤져봤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죠?’

나예린이 다급한 시선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민중에 있었다. 문은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가루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시끄러워져버린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비켜보게!”

모용휘였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방문에서 물러나자 모용휘가 다가와 자물쇠 앞에 섰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검을 빼어들었다. 이까짓 것 때문에! 모용휘의 시선이 자물쇠를 향 했다.

‘지체할 수는 없어!’

순간 어둠 속에서 은빛 곡선이 그어졌다.

기합도 없었다. 소리도 없었다.

차가운 검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은빛 궤적이 분명히 자물쇠 위를 깨끗하게 지나갔건만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리쳐진 일격은 조용하고 깨끗하게 자물쇠를 반 토막으로 만들었다. 무언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멋진 한 수!

자물쇠의 구속력은 사라졌다.

“들어가지!”

문이 열리고 모용휘가 앞장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는 모용휘를 보며 비류연이 한마디했다.

“저 친구, 급하긴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호철은 하급무사였다.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것밖에 모르는 하급무사였다.

게다가 같이 당직을 서는 사람 중에서도 지위가 제일 낮았다. 그는 내심 투덜투덜거렸지만 그 불손한 불만을 결코 겉으로 표출시킬 수는 없었다.

그때 자신이 번을 서고 있던 방의 장지문이 부서지며 뭔가가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나며 화려하게 비산했다. ‘또냐! ’라고 그는 내심 투덜거렸다.

저 방 안쪽에서 ‘술 가져와!’라는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에서 그의 지위는 가장 낮았다. 몇 개의 짜증스런 시선이 그에게 박혔다.

호철은 하급무사였다. 그래서는 그는 열심히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호철은 지위가 낮았다. 그래서 언제나 이런 일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런데 차질이 생겼다. 주방에 술이 다 떨어진 것이다. 범인은 누군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쳇!”

그는 소리를 내서 투덜거렸다. 여기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떠들어도 상관없었다.

몸이 성하려면 되도록 최단시간 내에 술을 대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경험과 정보를 통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주방 한 구석에 저장되어 있는 육포를 한 움큼 잡아 품속에 쑤셔넣었다. 그러고는 식은 만두 하나를 입 안에 집어넣고는 술 저장고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술 저장고는 후원 깊숙한 곳에 있었다.

방안은 상당히 호사스러웠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기묘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무슨 냄새지?’

휘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넓다. 그리고 화려하다.

피납자를 감금해두기에는 무척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한 명의 여인을 가둬두기 위해 이렇게까지 호화스런 장소가 필요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용휘가 오른쪽 한 편에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다.

꿀꺽!

긴장된 손길로 휘장을 걷었다.

“흡!”

모용휘가 다급하게 숨을 멈췄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있었다.

여인은 눈을 감고 호흡을 새근거리며 누워 있었다. 백옥을 조각해 놓은 것같이 미려한 미모. 검은 비단실을 풀어헤쳐 놓은 듯한 풍성한 머리칼. 그리고 우아하고 단아한 하얀 목선. 모용휘의 시선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갑자기 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은설란이 확실했다. 그녀는 마치 영겁의 수면에 든 것처럼 조용했다.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든 모용휘는 얼른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그러고는 목의 경동맥에도 손가락을 갖다대 보았다. 부드럽고 힘찬 생명의 약동이 손가 락 끝을 통해 느껴졌다.

“란 언니!”

사람들을 헤치고 석류하가 달려와 은설란을 안았다. 그러고는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매우 진지했다. 도중에 몇 번인가 은설란의 이름을 부르며 흔들어 깨워보았지만 미녀는 잠에 취한 듯 깨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석류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체력과 기력이 상당히 고갈된 것 같아요. 다행히 외상은 없는 것 같고요. 무슨 봉변이나 수치를 당한 일도 없는 듯싶네요. 다만 잠이 든 것 같아요. 맥을 짚어본 결 과 혈도를 짚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짐작이지만 아무래도 어떤 약을 먹인 것 같군요. 일종의 안전장치였겠죠.”

그때서야 비로소 모용휘를 비롯한 좌중들은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탈출뿐이었다.

호철은 하급무사였다.

지위도 주변에서 제일 낮았다. 지위가 낮기 때문에 높은 지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위를 올리기 위해서는 공훈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마침내 호철에게 그 기회가 찾아왔다.

이 야심한 밤에 그곳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곳을 지키던 무사 두 명은 장승처럼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 두 명은 호철도 알던 사람들이었다. 자기보 다 지위가 훨씬 높은 선배들이었다.

실수는 곧 강등! 이 공식이 호철의 머리 속에 섬광처럼 떠올랐다.

위가 빈다. 빈 곳은 채워야 한다. 보통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채워나가게 된다. 즉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커진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전혀 망설일 필 요가 없었다.

그러나 호철은 잠시 망설였다. 품 안에 안고 있던 갓 꺼내온 네 개의 술병 때문이었다.

이 술병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때 그가 당할 봉변에 대해 잠시 상상해 보았다. 사실 그는 지금 이 술병을 내팽개치고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그 상상은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만일 이대로 저 일을 그냥 방치해 둔다면? 진급은커녕 즐거운(?) 참수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호철은 자신의 발치에 술병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하나아, 두우울, 세에엣……. 그리고 네에엣!

모든 일이 끝나자 호철은 한 장소를 향해 냅다 달려갔다. 그곳에 비상종이 있었다. 자신을 출세의 길로 이끌어줄 붉은 줄.

호철은 그 줄을 발작적으로 움켜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비상종 소리가 밤의 침묵을 잡아 찢고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그 소리는 자신의 출세를 알리는 합주곡처럼 기막히게 아름다웠다.

다음 순간 호철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외쳤다.

이 일의 공로가 하급무사 호철에게 있음을 알리는 우렁찬 일성이 차가운 밤공기를 흔들었다.

“침입자다아, 침입자다아아아아아아아!”

땡땡땡땡땡땡땡!

비상종 소리가 요란스럽게 밤하늘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구출대는 이 요란법적한 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들은 미처 방을 채 빠져 나가지도 못한 상태였다.

어떻게 발각되었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젠장!”

장홍이 짧게 욕을 내뱉었다. 독고령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진설 또한 이리저리 우왕좌왕 안절부절 못하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때 이진설의 가녀린 두 어깨를 살며시 잡아주는 손길이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효룡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만 믿어라, 내가 너를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완전히 제정신이 돌아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진설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그녀는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석류하는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녀는 무척이나 침착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석류하는 심법을 운용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예린도 저리 침착한데 오기로라도 당황할 수 없었다.

“이런이런! 좀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더니……. 주위 상황이 안 따라주네요.”

비류연이 태연스레 너스레를 떨었다. 왜 괜히 사람 번거롭게 만드냐는 그런 말투였다.

아직도 방문 밖에서는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제 충분히 그 의사가 전달됐을 텐데도 여전히 시끄러워 이제는 좀 그쳐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죠. 당당해지자구요. 올 때는 비겁하게 담을 넘었지만 갈 때는 정문으로 당당히 나가는 수밖에요.”

은설란을 납치한 놈들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쁜 놈들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사정 봐줄 필요가 없었다.

“그전에 일단 얼굴부터 가리는 게 좋겠죠?”

그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니 얼굴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얼굴이 알려져 봐야 좋을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말에 모두들 가져온 천이나 띠로 입가를 둘렀다.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땡땡땡땡땡!

“무슨 일이냐?”

외팔이 노인 중 한 명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외쳤다.

악몽 때문에 잠을 설쳐 노인의 신경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가져오라는 술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아 더욱더 짜증이 만발해 있는 상태였다. “예, 아무래도 침입자인 모양입니다.”

부하 한 명이 얼른 뛰어와 보고했다.

“침입자?

이곳을 어떻게 알고?

그 실체야 차치하고라도 이곳은 겉보기에는 참으로 평범한 장원이었다. 원래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라면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이다.

“도둑이냐?”

그래도 꽤 큰 장원 축에 속하니 겁도 없이 재화무료이전전문가(財貨無料移轉專門家)님이 납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하의 보고는 그의 예상 중 하나를 물로 만들

었다.

“아무래도 어제 잡아온 여인을 노리고 온 듯합니다.”

“응?”

물론 노인도 그 여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인이라서 더욱 기억에 남았다. 특별히 잘 보살피라는 명도 받았었다. 그녀의 정체는 자신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명만 있었을 뿐이었다.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 그는 그 명령을 충실히 지켜야만 하는 종이었다.

“요즘 참 쥐새끼가 많군!”

어제도 한 명의 쥐새끼를 베었다. 주인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상당한 실력이었지……..

자신의 일 검을 피하고 살아나간 어제의 쥐새끼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의 애검 귀곡(鬼哭)에 묻은 그 피는 채 마르지 않고 있었다. 느낌은 있었지만 치명상은 피했다. 사냥이 실패한 것 같다는 보고도 들었다. 그렇다면 살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제 그 쥐새끼의 동료인가?

“이런, 그분이 아직 계시는데 침입자라니…….”

이 일은 조용하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는 그분을 뵐 면목이 없었다.

“알았다! 마침 잠도 오지 않는데 잘 됐군! 노부가 직접 나선다.”

“나도다!”

옆에서 뚱보 노인이 덩달아 외쳤다.

“예!”

한바탕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리고 나면 잠이 잘 올지도 모른다. 두 노인은 마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피가 좀 묻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씻으면 된다.

깡마른 노인이 자신의 애검 ‘요검妖劍) 귀곡(鬼哭)’을 집어 들었다. 전에 잃어버린 귀혼(鬼魂)의 쌍둥이 검이다. 뚱보 노인도 자신의 애병인 명부도(冥府刀)를 들 었다. 한때 잃어버릴 뻔했지만 다행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두 노인은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나섰다.

시끄러운 밤이었다.

축시정(丑時 : 약 0200시경) 화평장 후원 어느 방

“자네가 업어!”

“내, 내가?’

비류연의 지시에 모용휘가 당황했는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싫어? 그럼 다른 사람에게 맡길까?”

모용휘는 잠시 망설였다. 이 긴박한 순간에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이런 일을 여자에게 맡기는 것은 무척 비효율적이다. 물론 무림의 여인은 다르긴 하지만 상식이 방해를 한다. 왠지 안 될 듯한 느낌. 어릴 적부터 받은 일반상식이 라는 최면 반복 학습의 효과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일단 여성은 선택에서 배제된다.

반면 남자들은 누구에게 저 역할이 돌아올지 내심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오개는 역할의 탈환을 위해서라면 직위가 높은 노학과도 맞설 수 있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함부로 나서지는 못했다. 노학도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남궁상이 ‘저, 저는요…….’ 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자원했지만, 도끼날 같은 진령의 눈초리를 보고는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흑심(黑心)과 사심(邪心)과 변심(變 心)은 용서치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단단히 벼려진 눈빛은 남궁상을 주눅들게 하고 초혜충(짚신벌레)처럼 쪼그라들게 하는 데 충분했다.

장홍은 무척 구미가 담기는 유혹이긴 하지만 뭔가 후환이 두려워 애써 참는다는 기색이었다. 윤준호는 그 심약한 마음 때문에 이 치열한 경쟁에 끼어들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흑도사화 중 으뜸이라 불리는 사중화 은설란을 업어본다는 것은 금생에 다시 없을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경쟁률은 높다. 하지만 다들 모종의 이유로 함부로 나서 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기묘하고 미묘한 아슬아슬한 균형이 형성되었다.

이상하게 다들 비류연의 눈치를 봤다. 결정권이 그의 손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묘한 긴장감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왜 저리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거지?’

지켜보기가 답답해진 석류하가 차라리 자신이 나서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왠지 그랬다가는 주위에서 가만 놔두지 않을 듯한 분위기가느껴져 그만 포기했다. 가슴 한구석을 자극하는 이 기묘한 죄책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모용휘는 사춘기 소년처럼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지금은 결단이 필요할 때

였다. 또한 약간의 용기도.

“조, 좋네! 내가 업겠네!

가까스로 쥐어짠 용기를 한데 모아 모용휘가 말했다.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끝났다. 여기저기서 낙담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귀하신 몸이니깐 상처 하나 없이 잘 모시라구. 호위가 부실하면 공주님이 고생하시니깐. 지금부터 자네가 지키는 거야!’

비류연의 마지막 목소리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나의 검과 명예와 생명을 걸고 반드시!

결연한 의지에 빛나는 눈으로 모용휘가 대답했다.

화끈!

부드럽고 따스하고 폭신폭신한 가슴이 물컹 그의 등을 누르자 모용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의 널따란 등을 통해 여인의 굴곡이 고스란히 전 해져 왔다. 감미로운 체향에 뒤섞인 동백꽃 향기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좋은 향기…….

이렇게 부드럽고 편안한 냄새는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것이었다. 마치 자연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 되지, 안 돼! 정신집중! 정신집중!’

모용휘는 세차게 도리질하며 급히 자신을 추슬렀다.

아직 작전은 끝나지 않았다. 방심은 금물! 엉뚱한 곳에 한눈 팔다가는 뒤통수에 칼을 맞는 수가 있었다.

자신의 검은 지금 두 개의 생명을 담보로 맡고 있었다. 실수란 용납되지 않았다.

축시정(丑時正 : 약 0200시) 화평장 귀빈실

“무슨 일인가?

가히 절세라 할 만큼 수려한 용모를 지닌 젊은 사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용히 다향을 음미하며 밤의 고요를 즐기고 있을 때 장원 한쪽에서 요란한 경보가 울리더니 장원 전체가 떠들썩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의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침입자가 있는 듯합니다.”

한 중년인이 사내 앞에 깊이 부복해 있었다. 일단 화평장 장주라는 게 그의 현 신분이었다. 당연해서 하면 입만 아픈 이야기지만 장주(莊主)라면 장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중년인은 청년을 향해 가장 극진하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침입자?”

사내는 잠시 그 말에 내재된 의미를 음미해 보았다.

‘설마……!’

그의 생각이 한 여인에게 미쳤다. 그러자 또 하나의 생각이 연이어 달려 나왔다.

“어떻게 이곳을 알았지? 꼬리가 밟힌 건가?’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달라붙은 그림자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곳을 찾아 냈다는 이야기인가?

‘아무래도 꽤 하는 녀석이 있는 것 같군.’

그 능력만은 칭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꽃은 돌려줄 수 없었다. 그 꽃의 얼굴이 잠시 사내의 뇌리 속에 떠올랐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차라리 행복할 텐데.. 왜 굳이 진실을 알려 하는가.’

사내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대단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확인되었다. 노인의 초혼섭령술(招魂攝靈術)은 그런 부분에서도 무척이나 유용한 능력이었다. 은설란은 상당히 저 항했지만 노인의 두 눈빛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심문은 완료된 상태였지만 방심은 금물. 보내줄 수 없었다.

“그래서 상황은 어찌 되었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다시 주워담는 거야 어차피 물 건너간 이야기지만 뒷정리는 충분히 신경 써야 했다. “예! 두 장로가 나섰습니다.”

두 장로의 신분은 그보다 높았지만 청년보다는 훨씬 아래였기에 경어는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믿어도 되겠군.”

장로들이 나섰으니 곧 상황은 정리될 것이다. 만일 그 두 사람이 패한다면?

사내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화산파 수뇌부가 전부 쳐들어온다면 비로소 그런 일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슴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이 껄끄러운 불안감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운명의 예감이 사내의 육감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그래, 만일을 위해…….’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리고 다분히 헛수고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자신의 행동은 다만 만일을 위한 것일 뿐이라며 사내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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