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1화 – 끝나지 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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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1화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봉황은 삼백 년에 한 번 불꽃 속에

몸을 던져 잿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고 했던가?

영생의 불사조. 불꽃의 신조 또한 그러하거……….

지금의 강호는 너무나 낡았어!

이제 내가 너를 재생의 불꽃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

낡은 과거는 이곳 회색 잿속에서 흐트러지고,

새로운 역사가 새벽의 여명 속에서 태어난다.

이제 과거의 이야기는 모두 이곳에서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리라!

끝나지 않은 이야기

-계속되는 이야기

종쾌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천겁령(天劫) 그 자체이자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천겁혈신 위천무를 강호에서 소멸시키기 위한 책략이 정사공동연합무림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최종 승인되자 강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 가기 시작했다.

일단 승인된 계획은 더 이상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때 패천도(覇天刀) 갈중혁과 태극신군(太極神君) 혁월린은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대적인 인력이 한 장소에 과밀할 정도로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곧 ‘그’를 저지하기 위한 함정 파기 작업이 착수됐다. 현 강호에 존재하는 어떠한 기관장치(機 關裝置)로도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는 애석한 사실은 이미 뼈아픈 희생과 고통을 대가로 밝혀진 터였다. 고로 사람을 이용한, 아니 사람이 주(主)를 이루는 덫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관진식의 최고 달인이라 불렸던 천기장(天機匠) 도벽군 (천기수 도굴군의 아버지)의 평생 심력이 담긴, 백팔 귀신도 빠져 나오지 못한다 는 필살의 기관절진 백팔연환멸귀진(百八連環滅鬼陣)조차도 그는 생채기 정도만을 놀이 대가로 치른 채 치명상 하나 없이 비웃듯 유유하게 파훼(破毁)해버렸던 것 이다. 그 사건 이후, 자기 자신의 기술과 실력이 지닌 한계에 절망한 천기장 도벽군은 사지(四肢)의 연장(延長)이나 다름없던 망치와 끌을 떨림이 가시지 않는 손에 두 번 다시 쥐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강호에 그를 막을 만한, 희망만이라도 품어볼 수 있었던 기관기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희생은 어떻게든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모두들 그것을 각오했다. 어떠한 희생도 없는 기적 같은 상황타개를 바랄 만큼 정사연합은 뻔뻔스럽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았다. 분골쇄신(粉骨碎身)하는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희생을 그 대가로 치른다 해도 성공할 확률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그 리하여 마침내 세 개의 관문이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이 세 관문에 자신들의 바람과 소망을 담아 멸겁삼관(滅劫三關)이라 불렀다.

수십 명의 문장가들이 머리를 쥐어짜며 작성한 한 통의 서찰이 천겁령의 본진을 향했다. 도전장(戰狀)이자 도박장(賭博狀)이었다.

이 한 통의 서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땀 어린 노고가 용해되어 스며들었는지 감히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림 역사의 개벽 이래 흑백(黑白)과 정사(正 邪)가 소속과 이념과 사상을 떠나 이처럼 일치단결한 일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조함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가운데 운명의 날이 밝았다.

운명이 선택한 장소는 바로 중원오악 중 서악(西嶽)이라 불리는 화산(華山)의 다섯 봉우리 중 남쪽에 위치한 낙안봉(落雁峯)이었다.

일찍부터 화산파에 모인 수백 명에 이르는 정사 무림의 수뇌부들은 타는 듯한 갈증과 초조함 속에 안달하며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가 왔다.

보고를 받은 정사 무림의 종사들은 모두들 수치심과 모욕감에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자신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발톱에 낀 때 정도로만 여긴 것 인지 그는 단 한 명의 수행자도 없이 단신으로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때 첫 번째 관문을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노부일세.”

비공답운 종쾌의 자조 섞인 이 한마디가 천무학관 대표단들을 과거에서 단박에 현실의 물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지금 종쾌의 입 을 빌려 흘러나오는 이야기 전부를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빙검과 염도조차도 말이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지닌 종쾌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노인은 그때 일을 엊저녁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자원했다네. 솔직히 무력으로만 까놓고 보자면 자신 없었지만 발의 빠름으로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던 것일세. 자만…이었지. 후우…….”

회한悔恨)의 그림자가 농밀하게 담긴 한숨이 노인의 주름진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종쾌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생존 확률이 그리 높은 임무는 아니었지. 하지만 난 그때 아직 혈기방장한 나이라 앞뒤 분간을 잘 못하던 처지였어. 일종의 명예욕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는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웠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난 나의 빠른 두 다리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네. 이 두 다리만은 아무리 ‘그’라 해도 결코 쫓아오지 못할 것 이라고 말일세. 그의 무공이 아무리 경천동지한다 해도 경공만은 내가 강호 최고다’라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네.” “그러니깐, 짧고 간단하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뒷덜미 잡히지 않고 날쌔게 도망칠 자신이 있었던 거군요! “

순간 좌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이 적나라한 요약의 작성자는 바로 비류연이었다.

여기저기 이쪽저쪽 그의 실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책망하는 소리가 분분히 터져 나왔지만 비류연은 태연자약(泰然自)을 넘어 당당하기까지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응?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아니면 누구들처럼 바른 소리라도 눈치보고 가려가면서 해야 하는 건가요?”

비류연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그에게 만성이 되어 면역력을 지니고 있던 주작단과 그의 친구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그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비류연이 저지른 생각 없는 무례에 대해 안절부절 못하며 당황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 지금의 어정쩡한 상황을 일소시킬 만한 시원스런 대소가 터져 나왔

다. 파안대소하며 시원스럽게 웃어젖힌 이는 바로 종쾌였다.

“허허허허허! 어린 친구가 말 한번 시원스럽게 하는구만. 자네 말이 맞네! 자네 말이 참으로 옳아! 바른 말을 하는데 비겁자처럼 쉬쉬거릴 필요는 없지. 암, 없고말 고!”

종쾌의 홍소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오직 비류연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봐라!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느냐! 그런데 웬 호들갑이냐?’라고 말하는 듯했다. 한참을 웃어젖힌 종쾌는 가슴 밑바닥에 퇴적되어 있던 탁기가 웃음을 통해 어느 정도 빠져나갔는지 약간 밝아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잘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네. 당시 강호에는 그 누구도 노부의 그림자를 따라올 만큼 빠른 사람이 없었으니깐 말일세! 그리하여 사람들은 노 부에게 하늘을 날아 구름을 밟고 논다는 의미에서 비공답운(飛空踏雲)이라는 별호를 지어주었지. 그 별호는 노부의 긍지이자 명예였다네. 그러나 ‘비공답운’이란 별호가 부질없는 허명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

어느새 그의 노안은 웃음의 잔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유쾌한 산들바람에 잠시 젖혀졌던 암울한 장막이 다시 노인의 얼굴 위에 그림자 를 드리웠다.

백 년의 시간이 덧없이 흘렀건만 아직도 그의 망막 속에 새겨진 그 공포는 시간과 망각의 모래바람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고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노인은 그날의 바람을, 피처럼 붉었던 하늘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백년전!

그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화산 낙안봉 앞에 펼쳐진 넓은 평원에서 유유자적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여유를 부리는 천겁혈신 위천무와 마치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에 임하는 것 같은 긴장감 을 보여주는 백팔 명의 정사연합 수뇌들.

무척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그 누구도 수행원을 데려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던 것이다.

백 장의 거리를 사이에 둔 일 대 백팔의 만남이었지만, 두려움과 불안에 몸을 떠는 쪽은 한 명이 아니라 백팔 명의 인간군집 쪽이었다.

일례로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와 눈을 맞추는 척하면서 코나 입에다가 시선을 맞추는 것은 오히려 귀엽다 할 만 했다. 일부는 아예 대놓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마른 땅바닥이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뒹굴고 있는 돌멩이, 혹은 뒤편의 이름 모를 나무에 시선을 메다꽂고 있었 던 것이다.

백팔 명 중 대표로 선출된 소림사 장문방장 혜원 대사가 무척 강하고 단단해 보이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 앞에서 상자 를 열었다. 상자는 전체가 한철로 만들어져 있어 어떠한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상자에 걸린 자물쇠는 무려 열여덟 개나 되었다. 게다가 모두 가 통쇠로 만들어진 듯 크고 강해 보였다. 그동안 이 상자가 얼마나 엄중한 관리 하에 놓여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쓸 모가 있을지 없을지 보장할 수 없지만 화산파와 무당파의 장문인이 호법으로 함께 걸어 나왔다.

엄중하게 봉인된 한철상자가 열리고 ‘그’의 시선이 그 안을 향했다. 내용물의 진위 확인이 끝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가지러 가지!”

짧지만 단호한 선언! 이미 정해진 미래에 대해 확인하는 듯한 어조.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올 듯한 나지막하고 으스스한 목소리였다.

“아-미-타-불! 그, 그렇게는 되게 하지 않을 것이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꿈틀거리는 어둠의 그림자를 번뇌와 함께 내쫓기라도 하듯 불호를 외우며 간신히 용기를 낸 혜원 대사가 대꾸했다. 이 짧은 한마디를 하기 위해 많은 심력이 소모되었다. 그만큼 상대가 지닌 위압감은 굉장한 것이었다.

다행히 그가 돌발적인 악의를 내보여 문제의 상자를 강탈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무당, 화산의 두 장문인은 동료들 옆에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검 과 검집에 아교라도 붙였는지 검병(劍柄 : 검손잡이) 위에 올려진 손을 떼어내지 못했다. 아직 그들의 등줄기와 팔뚝에 오돌토돌봄풀처럼 요란스럽게 돋아난 소름 은 여전히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되돌아 온 한철상자에는 다시 열여덟 개의 자물쇠가 채워졌고 다시 열여덟 명이 그 열쇠를 나누었다. 이 중 특히 세 개의 자물쇠는 직접 상자 안에 상자와 한몸으 로(일명 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철상자에는 비밀스런 특수기폭장치가 달려 있어 열쇠 없이 함부로 열면 폭발이 일어나 내용물을 모두 불태워 녹여버리 도록 되어 있었다.

강호 무림의 운명을 담은 검은 상자는 다시 엄중하게 봉인되어 정사 수뇌 수십 명의 호위를 받는 호사를 누리며 낙안봉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무림 역사상 이보다 성대하고 화려한 고부가가치의 미끼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약속된 정오.

정체된 시간 속에 버려진 석상처럼 우두커니 멈춰 서 있던 ‘그’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무봉의 멸겁삼관(滅劫三關) 중 제1관을 맡고 있던 젊은 시절의 나는 그와 직접 마주치게 되었다네. 사실 그때까지 소문만 귀 따갑게 들었을 뿐 직접 대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자네는 그 당시 노부의 행동이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고 생각하나?”

갑작스런 질문에 남궁상은 순간 당황했다.

“저, 저 말입니까?”

대답할 말이 궁하면 사람은 당황하게 된다.

종쾌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 실력은 상당한데 때때로 우유부단하고, 여자에게 한없이 약하며, 고백할 일이 있어도 우물쭈물하고, 윗사람에게 잘 거역하지 못하며, 혼자 결정하기보다 남 의 의사결정에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즐겨할 것 같은 자네가 맞네.”

푹푹푹!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남궁상의 가슴에 비수를 틀어박는 것 같았다.

‘오오! 날카롭다!’

주위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인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긴 지적 중에 단 한 군데도 수정을 가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아무도 그에 대한 반론을 대신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동안 쌓아온 우정의 덧없음에 절망하며 남궁상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말했다.

“예…예! 물론입니다. 강호의 미래를 생각한 무척 용기 있고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릿한 가슴을 부여잡고 남궁상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자 종쾌는 두 목발로 땅을 짚은 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닐세! 그것은 참으로 무모한 우행(愚行)이었다네.”

“여기가 첫 번째인가?’

그가 묻자 나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네.

‘그, 그렇소. 여, 여기가 처, 첫 번째 관문이오.’

가슴 속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잠재된 모든 용기를, 젊은 혈기로 인해 생산되는 모든 오기와 함께 몽땅 끄집어내고서야 간신히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었지. 차 마 부끄러워 내가 바로 이 첫 번째 관문의 관문지기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네.”

그를 직접 본 그 순간 이미 종쾌는 자신의 결정이 후회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소문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접 대하고 보니 오히려 축소된 경향이 있지 않은가. 아무런 위협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죽음이 곁에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맥동치고 숨이 턱 막혔다.

서늘한 바람이 종쾌의 목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정한 죽음의 공포가 무엇인지 나는 태어나서 그날 처음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네. 아마 죽을 때까지, 노부가 더욱 늙어 치매가 오고 노망이 든다 해도 그때의 공포를 잊을 수는 없을 걸세.

그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지.

‘무엇으로 날 즐겁게 해줄 텐가?’

그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태연했다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의 내면에 잠재된 원초적인 공포를 일깨우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지. 그 목소리를 들은 사 람은 누구나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네. 개중에는 그 불안과 공포를 떨치기 위해 그의 휘하에 복종을 맹세하며 고개를 숙이는 이들도 있었지. •정사연합회의는 귀하께서 전 무림을 굴복시킬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증명해 보이라고 했소. 이 관문은 귀하의 신법을 증명하는 곳이오.’

순간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지. 찰나지간이었지만 노부는 생생히 기억한다네.

“쓰잘데기 없는 서론이군. 본론은?’

그는 정말 광오했지. 이 세상 그 무엇도 그에게 위협을 줄 수 없을 것 같았어. 노부는 그가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가공할 신위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 에 없었다네. 그래도 난 내 할 일을 했어.

“이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떨어지기 전에 나를 잡고 저 절벽을 뛰어넘으면 되오.”

노부가 그때 꺼낸 것은 엄지 손가락만한 아주 작은 모래시계였다네. 나름대로 수를 낸 것이었지. 그리고 짐작했다시피 그때의 그 절벽이 바로 자네들의 눈앞에 있 는 저곳이라네!”

순간 대표단의 시선이 종쾌의 손가락 끝을 따라 지옥행 입구처럼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벼랑 끝 협곡을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저 어두운 밑바닥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한데 어우러져 마치 지옥의 문 틈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흉험한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그때였다.

“시시하군요!”

비류연의 입에서 또다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종쾌를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다들 골을 싸맸다. 이 무례한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또다시 전전긍긍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낙뢰곡의 싸움 이후 비류연의 위치는 그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애써 마음 속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그들이 보고(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듣고 (제대로 듣지도 못했지만), 그리고 느낀(확신할 수는 없지만)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음이 분명했다. (조금 긴가민가 하는 면이 없지 않았지만) 때문에 비류연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에 걸친 연이은 무례! 이번에야말로 불같이 진노하리라 생각했던 종쾌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며 땅바닥만을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으스러뜨릴 듯 목발을 움켜쥐었다. 쥐어짜는 듯한 미약한 목소리가 노인의 입가에서 간신히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자세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조차 힘들었다.

“그래…, 시시했지. 그것은 참으로 시시한 계획이었다네. 하지만 그렇게까지 무시당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 그도 그렇게 말했다네!”

아직도 그의 귀에는 백 년 전의 비웃음이 타종 소리처럼 윙윙 울리고 있었다.

“시시하군! 그 모래시계의 모래가 반으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주겠다. 재주를 한번 부려 봐라. 달아날 수 있는 데까지 능력껏 달아나는 게 좋을 터!’ 그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지. 나는 일종의 유희도구에 불과했던 것일세. 미치도록 분했지만 나에게는 그에게 반박할 만한 힘도 자격도 없었지. 운명의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뽑아 달리기 시작했네. 아직 절벽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그는 약속대로 움직이지 않았지. 물론 모래시계가 작은 만큼 그가 기다려주는 시간도 턱없이 적었다네.

그러나 나에게는 믿는 바가 있었어. 나는 전력을 다해 협곡을 뛰어넘기 위해 도약했다네. 물론 자살할 생각은 없었지. 나만의 특별한 비법을 지니고 있었기에 저 협곡을 뛰어넘을 자신이 있었다네. 오직 나만이 가능한 방법이었지.

내가 저 협곡의 끝자락에서 도약할 때가 모래시계의 모래가 반쯤 떨어졌을 때쯤이었지. 나는 비장의 수법을 사용해 낙사하지 않고 무사히 협곡 반대편으로 넘어갔 지.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네. 그 순간 나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하고 말았지. 어느새 그가 협곡의 반대편에서 도약을 하고 있었던 것일세.

그리고 그는 저 지옥문이 발밑에서 ‘어서옵쇼’ 환영인사를 하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세상 끝까지 이어져 있을 법한 협곡을 단숨에 뛰어넘었다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그, 그럴수가! 어떻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능력으로 그런 일이!”

‘절대적으로 불가능’이라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천무학관 대표단이 들은 종쾌의 과거 이야기는 쉽게 믿을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것은 그들이 지닌 상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이질적인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자 종쾌의 입가에 자조 섞인 웃음이 맺혔다.

“자네들은 아직도 그자를 자네들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종쾌는 그 말에 대해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그자는 인간이 아니야. 만일 여태껏 그자를 같은 인간의 범주로 놓고 생각했다면 자네들이 얼마나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었는지 곧 알게 될 걸세! 그리고 그 판단이 얼마나 엄청난 오판이었는지를 말일세!”

종쾌의 말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자가 그저 한 명의 비범한 인간이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그 이야기를 백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힘들여 숨기지는 않았을 걸세!

노인은 잠시 숨을 고른 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대편에 있던 우리가 그의 도약을 박수치고 환호성을 올리며 응원이나 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던 건 아니라네. 물론 시간 관계상 실패 기원의 저주도 퍼붓지 못했 지. 알다시피 제대로 된 저주는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 대신 우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던 강궁들로 무수한 화살들을 쏘아보냈지. 수십 대의 강철 화살이 바람을 가르 며 그를 향해 날아갔다네.

원래 사람의 몸이란 지면을 벗어나면 행동의 제약 때문에 그 운신의 폭이 무척이나 좁아지지. 우린 바로 그런 허점을 노렸던 것일세.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 그는 인간이 보일 수 없는 불가능한 동작으로 철판도 꿰뚫는 철전을 유유히 피하고 손으로 쳐내며 무사히, 그리 고 보란 듯이 반대편 벼랑의 기슭에 우아하게 착지했다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군.

‘정말 시시하군! ’

권태로움이 가득한 목소리였지. 나는 그때 그만 그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네.”

종쾌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노부가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나?”

천무학관 대표단들은 모두 침묵한 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종쾌는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자기 스스로를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였다.

“꽁지에 불붙은 말처럼 발바닥에 땀나도록 냅다 도망쳤어야 했겠지. 아마 그게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을 걸세! 그러나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할 수 없었지. 그가 천천히 다가와 나의 어깨를 잡을 때까지 나는 그저 두 눈을 부릅뜬 채 석상처럼, 인형처럼 멀뚱히 서 있었을 뿐이라네. 감히 도망간다는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지. 부끄럽지만 난 이미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어 있었던 것일세.”

종쾌의 목소리는 마치 백 년 전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그대로를 재현하는 듯 심하게 격앙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지금 현재보다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자 최후의 모래 한 알이 떨어지며 나 또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네. 마지막 모래가 떨어지면 신호가 올라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지. 부끄러운 추태였지. 하지만 나에겐 더 이상 서 있을 여력도, 용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네. 그러나 본능만은 아직 꺼지지 않고 남아 있었지. 바로 생존의 본능이었다네. 무의식적으로 그와 멀어져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

종쾌는 한껏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손을 발 삼아 땅바닥에 엉덩이를 끌며 연신 뒤로 물러났다네. 꼴사나운 추태였지만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 따위를 하고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

지. 생각해 보게나! 다리의 신속함이라면 강호의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큰 소리 떵떵 치던 사람이 힘이 빠져 풀려버린 다리 대신 손을 발 삼아 싸움에 진 개 처럼, 벌레처럼 두려움에 벌벌 떨며 목숨이 아까워 연신 뒷걸음치는 모습을 말일세! 얼마나 가관이었겠나! 인구에 회자될 만한 좋은 구경거리였었지!”

그는 아직도 그때의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듯했다. 백 년도 더 된 기억의 파편이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그의 심신을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노인은 누군가가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한껏 비웃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백 년 동안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추태를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다가왔을 때 노부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나?”

다시 침묵. 누가 감히 그것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지금 그들이 듣고 있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신화, 혹은 전설이나 진배없는 이야기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네. 나는 경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그저 멍하니 그의 접근을 지켜보고 있었다네. 아무런 저항도, 아니 도망칠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지. 다리뿐만 아니라 까져서 피가 배어나오는 손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거든. 그만큼 그의 존재감이 내게 주는 공포는 거대했다네. 마침내 내 앞에 선 그는 시선을 아 래로 깔고 나를 굽어보며 무척 지루하고 권태로운 목소리로 내뱉었지! ‘겨우 여기까지였나? 쓸모없는 다리로군!’하고.”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아픔이 순간 종쾌의 노회한 얼굴에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이 부분이 그의 회상 중 가장 떠올리기 괴로운 대목이었을 것이 다.

“판결이 끝나자 곧 처벌(處罰)이 집행되었지. 그때 나의 시계(視界) 앞에 검은 섬광이 번쩍였다네. 이윽고 불에 덴 듯한 화끈한 통증과 혼백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큼 끔찍한 고통이 벼락처럼 나의 전신을 후려갈겼지. 그리고…, 그리고…, 나는 두 눈 멀쩡히 뜬 채 무력하게 두 다리를 그에게 상납했다네.”

꿀꺽!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보다 더 크게 울려퍼지는 것만 같았다. 천무학관 대표단들은 모두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먹을 불끈 쥔 채 한없이 진지한 자세로 종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인의 목소리에 담긴 잔잔하지만 진실된 공포가 이야기에 생생한 현장감을 부여하며 그들을 백 년 전 이 장소로 끌고 들어 갔던 것이다.

다시 종쾌가 말을 이었다.

“두 다리를 잃고 핏구덩이에 누워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노부에게 그가 무심한 눈빛을 던지며 이렇게 말하더군. ‘네 자만의 대가로 이 다리를 받아간다! 앞으 로 너는 두 번 다시 사람들 앞에서 신속을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아직도 그의 심장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공포란 이름의 얼음송곳이 아직도 녹지 않았는지 종쾌의 목소리가 더욱더 심하게 떨렸다. 그로 인해 그때 그가 느낀 절망 과 공포와 두려움이 더욱더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노부는 여태껏 그렇게 차갑고 끔찍하고 공포스런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네. 그리고 그날 비공답운 종쾌는 죽었다네. 여기 남은 건 단지 그 껍데기일 뿐이 야. 다리가 없는 비공답운이 어찌 비공답운일 수 있으며 어찌 감히 천하제일경공이라 불릴 수 있겠는가! 물론 두 다리가 멀쩡하다 해도 두 번 다시 천하제일경공이 라 자처할 수 없는 패배자였지만 말일세. 그리하여 나의 운명은 작은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 한 알과 함께 그 종언을 고했지. 늙은이의 청승맞은 옛날 이야기는 여 기서 끝이라네.”

종쾌는 씁쓸한 목소리로 회한과 고통으로 점철된 지난 이야기를 끝마쳤다. 되돌려 돌이켜보는 간단한 이 일조차도 그에게는 무척이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

침묵이 모든 말을 삼켜버렸다.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아직도 이야기 속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한 대표단들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후우…….”

종쾌의 폐부로부터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끔찍한 악몽에서 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네. 아마 그의 죽음이 확인될 때까지 이 절망의 검은 석주(石柱)들로 이루어진 악몽의 탑에서 감금된 채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네.”

그는 얼마나 기나긴 탄식의 세월을 인고(忍苦)와 함께 보내왔을까?

본인 이외의 사람은 절대 그 누구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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