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4권 16화 – 화산지회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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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4권 16화 – 화산지회 일정

화산지회 일정

천겁령의 부활을 공식석상에서 입에 담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빙성이 높아졌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천겁혈세 이후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천겁령에 대한 이야기는 약효가 떨어지지 않는 확실한 처방이 었다.

“지금 당장 그것을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세. 그런 꿈 같은 일은 기대하고 있지도 않고!”

혁중의 말은 냉정했지만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평생 동안 쌓아온 가치 관념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어지간한 충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네.”

묘한 울림을 지닌 말. 우리들이 그 어지간한 충격을 만들어주겠으니 고맙게 여겨라 하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한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곧 자네들의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믿고 있네.”

그의 말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두고보게! 그렇게 되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니 말일세!”

혹시라도 그렇게 안 되더라도 걱정 마라. 우리가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주겠다. 거의 그런 식의 의미가 배경으로 잔잔하게 깔린 의미심장한 여운을 지닌 말이었다.

“그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도록 하겠네! 자네들은 일단 정해진 새로운 숙소에서 일주일 동안 생활하게 될 걸세. 그동안은 그저 자기 수련에 힘쓰면 서 서로서로 상대방과 대화를 하도록 노력해보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소리 없는 아우성이 울려퍼졌다. 꼭 소리로 튀어나와야만 그걸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보통 개발하지 않아서 그렇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민감한 감지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혁 노야 또한 이미 이들의 그런 집단의식을 훤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미~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라고 생각하고 있을 걸세!”

그 말은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것인지라 순간 좌중들은 집단의식이 부젓가락에라도 찔린 것처럼 움찔거렸다.

“대화란 좋은 것이네.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관계형성 도구지. 게다가 우정을 증진시키고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더 잘 알 아야 하지 않겠나?”

노인의 말은 무척이나 지당했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전혀 지당하지 못했다. 지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쾌하기까지 했다.

‘누가 저런 놈들과!’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며 성대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순간 보이지 않는 악의의 화살들이 사방을 날아다녔다. 백도든 흑도든 이런 경우 생각하는 건 비슷한 모양이 다.

혁중은 그것을 잠시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미 이 정도 반응쯤은 예상 범위 안이었기 때문에 전혀 위축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의 의지는 예전 보다 더욱더 강하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좀더 자신들의 상황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겠군.’

그런 친절한 생각을 품고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자네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걸세. 왜냐하면 그것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지.”

순간 노인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부분이 노인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안배해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정과 화합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을 강제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이번 화산규약지회의 주제이자 핵심이었던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주겠네. 자네들은 오늘부터 정식 숙소로 옮겨 일주일 동안 지내게 될 걸세. 좀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한 우 리의 따뜻한 배려라네. 왜냐하면 일주일 후에 자네들은 정사흑백의 출신 구분 없이 무작위로 십인 일조를 짜야 하기 때문일세. 원칙은 오직 하나. 오 대 오, 반반이 라는 것뿐이네.”

즉 백도 측 다섯 명, 흑도 측 다섯 명으로 조를 짜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백주년 기념 화산지회를 맞이하여 새로 구성된 규칙인 모양이었다.

이 갑작스런 이야기에 서로 의견을 나누는 탓인지 점점 웅성거림이 커졌다. 나름대로 돌발 상황이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처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것이리라. 노인은 이런 혼란한 상태를 또 놓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좀더 흔들어주는 게 효과가 배가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충고하자면 그러는 게 자네들의 신상에 이로울 걸세! 왜냐하면… 그렇게 대화에 힘쓰지 않으면 나중에 화산지회에서 우승하기가 매우매우 고단할 것 이기 때문일세.”

점점 더 혼란이 가중되어갔다. 혁중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네들은 십인 일조로 수화목금토 다섯 개의 주제를 가진 관문에 도전하게 될 걸세. 우리는 이 다섯 개의 관문을 오행관(五行關)이라고 칭하고 있네. 오행을 주제 로 잡은 것은 그것이 조화와 화합, 상생상극의 신비한 원리를 나타내는 우주의 오묘한 법칙이기 때문일세. 이 오행관에서는 각 조별로 단체 행동을 해야 하며 점수 또한 각 조별로 매겨지게 될 것일세.”

“헉!”

혁중의 폭탄선언에 사람들은 다들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혁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잘 이해한 것 같아 기쁘군. 바로 자네들 생각대로라네. 조별로 점수를 매기기 때문에 당연히 협동과 화합이 잘되는 조가 더 많은 점수를 딸 수 있네. 물론 자네들 에게 서로 손발이 맞지 않는 불협화음 상태에서도 잘 해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 굳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라고 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 다면 역시 서로서로 우정을 쌓아가며 화합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네.”

정말 악독한(?) 계략이 아닐 수 없었다. 혁중이 마지막으로 화룡점정(畵龍點睛),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한 가지 장담하자면 이 오행관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사람은 절대 화산규약지회에서 우승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일세. 자네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겠 “네.”

마침내 노인의 이야기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원상태로 복귀하기에는 받은 심적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이다. “그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비류연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확인해보는 듯한 말투였다.

“우리는 이 방법이 아주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네!”

혁중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장담했다. 그 안에는 실패란 있을 수 없다는 그런 투철한 각오가 담겨져 있었다.

“우리는 지난 백 년 동안 수많은 방법들을 동원해보았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효과를 보지 못했지. 오히려 부작용만 크게 불거져 우리들의 골치를 썩였 다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사람들은 화합하지 못하는 부조화의 상태에 머무르며 악의 섞인 경쟁심을 불태웠지. 우리들은 그 부조화와 악의惡意)의 경쟁심이 발 생하는 원인이 뭘까 고민하기 시작했네. 백 년 동안의 고민이었으니 만만치 않게 긴 시간이었지. 하지만 지루할 만큼 긴 시간을 들여 사색한 결과, 성과가 있었지.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은 그 근원에 도달했네. 백 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얻어낸 소중한 결과물이지!”

“원인 하나 밝혀내는 데 백 년씩이나 걸리다니 상당히 비효율적인 운영방식이로군요.”

그는 여전히 예의(!)가 뭔지 아는 청년이었다.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원인을 발견해냄으로써 그 해결책까지 모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네! 결코 믿지는 장사가 아니지.”

“그 백 년 만의 소득은 무엇이었나요?”

이것 역시 묻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내용이다.

“사람들을 부조화와 비뚤어진 경쟁심으로 내모는 힘, 그것은 바로가장 추잡한 이기심의 결정체인 독 중의 독(毒中之毒 집단이기주의일세.”

혁중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결론에 의해 또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네. 집단과 집단, 단체와 단체, 조직과 조직처럼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이상 어떤 온건하고 훌륭 한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일세. 또한 심층 최면처럼 가슴 속 깊숙이 박혀 있는 잘못 형성된 가치관의 쇠말뚝은 어지간한 충격을 가하지 않고는 뽑아내 기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네.”

“그게 그렇게나 무서운 것입니까?”

모용휘가 물었다. 혁중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섭지! 아주 무섭고말고! 이 세상에 집단이기주의만큼 무서운 이기주의도 없다네. 그것은 자신 혼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조직을 위한다는 일종의 장엄한 희생정 신과 숭고한 사명감이란 환상을 개인에게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 순교자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사람은 조직에 들어가면 그 조직의 정의가 세상의 정 의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네. 좀더 대국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읽지 못하고 눈앞의, 조직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해지지.”

아주 정확하기 때문에 그것은 무척이나 신랄한 말이 되었다.

“불교나 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이 세상을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을 부정할 마음은 없네. 그것은 현실을 부 정하는 것이니깐.”

결벽증이 있는 모용휘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흑과 백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상, 주지하다시피 집단과 집단은 결집되면 결집될수록 큰 힘을 발휘한다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명확하게 타 집단을 적극적으로 배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네. 특히나 이런 승부를 가려야만 하는 일이라면 말일세. 승자가 둘이 될 수 없는 이상 이미 시작부터 패배자, 꼬리 내린 개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두 집단 중 한 집단은 반드시 이 패배자라는 이름이 적힌 멍멍이 집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지.”

“…..”

“게다가 자네들은 단지 오십 명이라는 소수의 집단이 아니네! 자네들은 각각의 등뒤에 흑도와 백도라는 무림의 반동강이를, 수천이나 되는 사람들의 신념과 의지 를 짊어지고 있는 것일세.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로 이야기할 수준이 아닌 거지.”

좌중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너무 경쟁에만 집중한 나머지 한 가지 커다란 문제를 간과하고 말았네. 강호무림 전체라는 큰 관점에서 상황을 보지 못한 것이지. 더 큰 위험이 우 리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면서까지 경쟁에 치중했네. 우리는 그 사실에 위기감을 느꼈지.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뇌가 퍼석퍼석해질 때까지 머리를 쥐 어짰다네. 물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네. 그리고 겨우겨우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었네!”

감개무량한 여운이 감도는 목소리였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궁금한가?”

“물론입니다.”

모용휘가 우아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아직 가르쳐줄 수 없네!”

“예?”

황당해진 모용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이제까지 계속해온 이야기들은 뭐였단 말인가? 단순한 희롱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안달할 것 없네. 자네들은 곧 그것을 경험해볼 수 있을 테니깐 말일세. 그것도 시간을 들여 아주 천천히, 아주 듬뿍 말일세.”

어린애처럼 장난기 가득했던 혁중의 얼굴이 순간 엄숙하게 변했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들어 선언했다.

“본인은 흑도와 백도로부터 본 대회의 운영을 전적으로 위임받은 총괄자의 자격으로 지금부터 제10차 화산규약지회의 개회를 하늘과 땅에 엄숙히 선포하오. 모 든 참가자들은 우정과 화합, 평화라는 본 대회의 대삼원칙 아래 공정하고 훌륭하게 시합에 임해주시오. 이상으로 개회선포를 마치겠소!”

명검보도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추상같은 빛을 발하며 번뜩이는 가운데 노인은 낮지만 강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제10차 화산규약지회의 개회를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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