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발생
사고! 그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주최 측으로서도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누가 언제, 어디서 그것을 일으키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와와!
쿠당탕탕!
밖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시끄럽군!”
아침식사도 아직인 이른 시각이었다. 평상시라면 열심히 숙면을 취하고 있을 시간이라 비류연의 신경은 조금 예민해진 상태였다.
“싸움이 붙었다.”
누군가가 달려와 외쳤다. 얼굴이 눈에 익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마천각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 남자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자 쪽이다!”
“크게 붙었어!”
나누어진 정보들이 각기 다른 사람의 입을 타고 속속 전해졌다.
‘드디어인가!”
그러면 그렇지. 비류연은 전혀 놀랄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정말 지극히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던 것이다. 조용히 지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문제는 남자와 여자, 어느 쪽이 먼저 사고를 치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어!’
진지한 얼굴로 비류연이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예측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흥미본위가 아니라 일종의 사명감 때문이다, 라고 비류연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훌륭 한 자기합리화인가!
그러면서 싸움과 불구경은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행동강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비류연이었다.
싸움은 생각 이상으로 공수교환이 현란했다. 그녀들은 무림의 촉망받는 기재들다운 역량을 선보이고 있었다.
찍고, 차고, 때리고, 내뻗고, 끌어당기고……. 여러 가지 수법이 공중에서 쉴새없이 교환되었다.
그러나 비류연이 보기에 싸움은 상당히 일방적이었다. 화려한 녹색 경장을 입은 여인이 내뻗는 수장에 푸른 경장의 여인이 연신 뒤로 밀려나고 있었던 것이다. 간 간히 반격을 시도하는 듯했지만 번번이 상대의 손짓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장 일장을 막을 때마다 푸른색 경장을 입은 여인의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씩 더 늘 어났다. 역부족임이 역력했다.
펑펑펑펑!
녹색 경장을 입은 여인의 수장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가죽북 터지는 듯한 소리가 대기를 찢었다. 여인의 일장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거력이 담긴 장력에 구경하 던 사람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쯧쯧, 상대를 잘못 골랐군!”
옆에서 함께 구경하던 장홍이 혀를 차며 말했다. ‘와와! 싸움이다! 구경 가자!’ 하며 요란스럽게 비류연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다른 한 손에 효룡까지 잡아끌고. “확실히 그럴지도!”
장홍의 말에는 비류연도 동의했다. 저 여인이 얼마나 성질머리가 나쁜지는 그도 겪어봐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야 코웃음치고 흘려보냈지만 그건 아무 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비류연의 시선이 다시 한번 쉴 새 없는 수영(影)의 파도를 일으키며 상대를 휩쓸어 들어가고 있는 여인을 향했다.
‘철옥잠 마하령!’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의 딸이자 군웅팔가회의 회주인 철의 여인이다. 구정회와 함께 천무학관 관도 세력의 반을 가르는 군웅회의 회주는 출신과 지위만으로 얻 어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천무학관의 또 다른 세력인 구정회의 회주 용천명은 어릴 때부터 모든 백도 무림의 기대와 전 흑도 무림의 견제를 받아오던 실력자였다. 현 소림사 장문인 이 주책도 무릅쓰고 직접 그를 일컬어 ‘소림지보(少林之寶)’라고 표현했을 정도의 자타공인 고수.
군웅회를 짊어진다는 것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실력을 겨룬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3년 가까이 나 해냈다. 그러니 일신상에 지닌 실력이 평범할 리 없다.
“상대는 누구지?”
마천각 사람이 분명했다. 아마 그녀가 누군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시비를 건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성깔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천무학관 여성들이 괜한 풍파를 애꿎게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저 푸른 경장과 가슴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흑천십이가의 하나인 ‘창궁문’의 제자로군. 그 중에서 이번 화산규약지회에 참가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창궁비연자 문숙경이 분명할거야. 저 표독스런 눈빛과 관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성질 하는 소저지!”
장홍이 무척이나 소상하게 대답해주었다. 그 풍부한 지식에 비류연이 잠시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식도 지식이지만 그것을 한순간에, 보고 있는 대상에게 접목시킬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창궁문이 흑도를 뒤흔들 정도로 위세가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대를 잘못 골랐군!”
“그 말엔 동감이야!”
천무학관에서는 이번 화산규약지회를 대비하여 그녀에게 용천명과 함께 폐관수련까지 강행시켰다. 두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 례라 할 수 있다. 아마 천무학관에서 우승자가 나온다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분명하다고 학관에서는 예상하고 있으리라.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거지만.
지금 빙 둘러진 인의 장막 저쪽 편에서 그 동거(?) 폐관수련의 장본인인 용천명이 관자놀이를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모아진 미간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어른 거리고 있었다. 함께 힘을 합쳐 화산지회의 우승을 노려도 모자랄 판에 가장 힘이 돼주어야 할 상대가 벌써부터 앞장서서 사고나 치고 있으니 골머리가 꽤나 지끈거 릴 터였다. 그러나 마하령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여전히 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죽어!”
쾅!
다시 한번 마하령의 쾌속한 일장이 내뻗어졌다. 문숙경은 이 거력을 감당치 못하고 이장이나 뒷걸음질친 다음에야 신형을 간신히 바로잡을 수 있었다. 기식이 엄 중한 것을 보니 내상까지 입은 모양이다. 그녀의 축 처진 팔뚝에는 수십 개의 손도장이 찍혀 있었는데, 팔은 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계속적으로 충격 이 쌓인 탓이리라.
“아프겠군!”
비류연이 간단하게 평했다.
저 일장에 담긴 비밀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게는 곧 힘이 된다. 그것을 누구보다 확실히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이가 바로 저 마하령이었다. ‘하긴 그 덩치면…….’
현상의 이면을 알고 있는 비류연으로서는 상대를 애도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펑펑펑펑!
가죽포대가 연신 두들겨 맞는 소리가 거창하게 허공을 울렸다.
천축유가공을 극성까지 익힌 마하령의 쌍장에 실린 거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숨겨진 질량까지 더해진다면 더없이 흉맹한 일장으로 변한다. “죽어!!!”
외치는 소리도 새침하기보다는 맹수의 포효를 상기시킨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눈매에 서린 핏발선 살기는 서리가 켜켜이 쌓인 듯 매섭다.
“그런데 싸우는 이유가 뭐지?”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나고 피보라가 일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저만한 증오심이라면 지독한 은원 관계가 얽혀 있음이 틀림없다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가족이라도 살해당한 걸까?”
그때 관전하고 있던 참가자 중 한 명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지금 저기서 무시무시한 거력이 담긴 쌍장을 마구 내지르고 있는 마하령의 가족은 살해당하 기에는 너무나 대단하고 엄청난 위인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혹시라도 그런 불상사를 당했다면 그건 곧 일개인의 차원을 벗어나 전 무림의 일이 될 터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아, 난 궁금한 거 있으면 알아낼 때까지 잠을 못 잔다고.”
장홍이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린아이처럼 보챘다.
“여자 쪽에서 일어난 일은 여자 쪽에 물어야지 남자들한테 물어본다고 알 리가 있겠어?”
비류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구에게?”
효룡이 물었다. 그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역시 호기심 충족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였다.
“마침 저기 알맞은 사람이 있네!”
비류연이 검지를 들어 관람석 한쪽을 가리켰다.
“어디, 어디?”
효룡의 눈이 비류연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마침 저쪽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순간 이진설과 효룡의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한쪽에서 얼굴을 굳힌 채 두 여인의 대결을 관전하고 있던 이진설에게 다가간 효룡이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효룡의 질문에 이진설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굳어진 안색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거울 때문이에요.”
이진설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울?”
효룡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월음관에는 거울이 세 개밖에 없거든요!”
이진설의 목소리는 마치 한 문파의 멸문지화 소식을 전하기라도 하듯 비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효룡은 일순간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싸움의 발단은 매우 소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대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면에 있어 그녀들의 생활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
이 나이 또래의 여인들이면 누구 할 것 없이 화장을 하며 자신을 가꾼다. 물론 미숙해서, 아니면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괴기스런 분장을 화장인 줄 알고 해대는 사 람도 있지만 역시 여인에게 있어서 화장이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인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척이나 클 수밖에 없었다.
화장을 하려면 필요한 물건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가 바로 화장품과 거울이었다. 화장품이야 개개인이 따로 휴대하고 다니겠지만 거울의 경우는 그렇 지 못했다. 크기도 크거니와 이 시대 거울들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유리로 된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무척이나 고가의 제품이었고, 취급도 어려워 이런 곳에까지 휴대하고 올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성 참가자 일동은 율령자들의 안이한 대회 운영에 증오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화산규약지회 참가자는 여성만 정사를 합쳐 사십여 명 가까이 되는데 거울이 세 개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작 세 개의 거울.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대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싸움의 불씨는 성대하게 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겨우 그 정도 일로 저렇게까지 심각하게 싸운단 말이에요?”
효룡은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응징은 즉각적으로 가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겨우… ‘그 정도 일’이라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한기가 풀풀 날리고, 째려보는 두 눈에는 서릿발 같은 냉기가 번뜩인다. 그녀의 이런 무서운 모습을 처음 접해보는 효룡은 두려움에 오 들오들 떨 수밖에 없었다.
“거울은 여자에게 있어 생존의 문제예요!”
이진설의 단호한 외침에 효룡은 무조건 지당하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들에게 있어 면경(面鏡)은 필수품이다. 화장뿐만이 아니다. 차라리 화장을 위해 필요했다면 이 정도까지 사태가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림의 여인들은 화 장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아침연례행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머리빗기다.
화장을 하지는 않아도 머리는 빗어야 한다. 눈곱을 떼지 못하더라도 머리는 빗어야 한다. 게다가 정식 궁장머리가 아니라 해도 기본적으로 길기 때문에 빗고 땋고 다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거울은 필수라 할 수 있었다. 약 사십 명의 여성들이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곳 월음관에 준비된 거울은 고작 세 개뿐이었다.
세 개의 거울.
그것은 피바람의 분쟁을 예고하는 재앙의 씨앗이었다.
차라리 두 개였으면 나았을 것이다. 하나는 백도, 하나는 흑도. 깔끔하게 이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수인 세 개라면 이야기가 아주 복잡해진다. 하나가 남아버
리는 것이다.
그럼 이 하나를 어떻게 해야 하나? 선착순인가? 차례차례 번갈아가면서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분위기가 화기애매했던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소유권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나설 것인가. 그것이 관건이었다.
싸움의 불씨를 당긴 것은 마천각 쪽의 여인 창궁비연자 문숙경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화살은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세 번째 면경을 차지하고 사용하는 마하령을 향했다.
“흥, 뚱땡이가 꽃단장한다고 해봤자 돼지목에 진주목걸이지!”
문숙경은 범해서는 안 될 금기를 범했다. 그것만으로 사생결단 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너무 역부족인 상대를 골랐다.
“쯧쯧, 여자들이란!”
이번 사태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몇몇 남자들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역시 저래서 여자들은 안 된다고 그들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저리도 처절하게 싸운단 말인가?
그러니 여자들이 속이 좁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그 다음날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내릴 수 있었던 판단이었다.
그 다음날!
그러면 그렇지! 기다렸다는 듯이 태양관에서도 싸움이 터졌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고 단순했다. 누군가가 중앙에 그어놓은 분계선을 넘어왔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주 범우주적일 정도로 심오(?)했다.
“크아아악! 감히! 이 붉은 선을 넘어오다니! 죽고 싶은 게냐?”
“해보겠다는 거냐?”
“당연하지!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이건 흑도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쿠당당탕탕탕! 챙챙챙!
검기와 도기의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며 주위를 휩쓸었다. 어제 월음관에서 있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 분쟁이었다. 이 일로 인해 네 명이 경 상을 입고 의무실을 방문해야만 했다.
“쯧쯧, 남자들이란! 평생 어린애라니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여자들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때만큼은 정사의 구분이 없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어제 저지른 일은 이미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천무봉 홍매곡 천율전(殿)중앙회의실
흑백포를 몸에 걸친 열 명의 율령자들이 동그란 자단목 원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이들 열 명은 화산규약지회를 총괄하는 최고위 인사들로 ‘천율령’이라 불 리는 이들이었다. 화산지회에 관련된 모든 사안은 이들의 재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원탁에는 이들 열 명 이외에 한 명이 더 앉아 있었다. 노야라고 자신을 불러 달라던 바로 그 혁중이었는데, 가장 상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그란 원탁에 도 상석은 있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천율십령(天律十令)’의 서열 일위부터 십위까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초설이 내린 듯 새하얀 백 발백염의 노인들이었다. 하지만 흰 눈이 쌓인 듯한 새하얀 머리카락이나 수염과는 다르게 어린애처럼 생기 넘치는 눈동자 때문에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가 다들 어려웠다.
이들 열 명은 화산규약지회가 시작된 때부터 십령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계속해서 이곳 홍매곡에서 화산규약지회를 관리, 운영하던 이들이었다. 즉, 다시 말해 이곳에 백수(白壽 : 99세)가 넘지 않은 이들은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화산지회의 역사를 몸에 새겨 넣은 산 증인이라 할 수 있었다.
불사약을 들이킨 것도 아닐진대 내공이 얼마나 깊기에 백 수십 살을 거뜬히 넘기고도 저리 정정할 수 있는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 다는 시간도 세월도 아직 그들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강호상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이들의 진짜 실력을 본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출신이나 신분까지도 일체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대회 운영에 공정을 기하기 위한 조치였다.
“부작용이 너무 심합니다.”
십인 중 서열 제팔위인 팔령 ‘고학림’이 일어나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화산규약지회의 참가자 관리의 총책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제 겨우 같은 숙소를 쓴 지 삼일째인데 벌써 충돌만 해도 남자가 다섯 건, 여자가 세 건입니다. 게다가 그 중 한 번은 자칫 잘못하면 피까지 볼 만큼 흉험했습니 다. 우리들의 이번 방법은 아이들에게 너무 충격이 지나쳤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로를 떨어뜨리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그건 이미 예상하던바 아니었습니까? 아직 포기할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구령이 대답했다. 그는 참가자 중 천무학관 쪽의 관리를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겉으로는 화해의 몸짓을 취했다 해도 서로가 각기 다른 꿍꿍이를 품고 백 년을 지내왔습니다. 겨우 이삼일 만에 풀릴 만한 갈등이 아니지요.”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상호존중의 의미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 십인 모두에게 말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너무 충돌이 빈번한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두 번의 충돌이 더 있었지요. 곡내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로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홍매곡의 규율을 담당하고 계시는 이령(二令)께서도 염려하시는 바겠지요.”
사령이 말했다. 그는 곡내의 안전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렇지요. 이 상태로 계속해서 충돌이 빈번해지면 곡내의 기강도 해이해질 수밖에 없지요. 현재는 경상자만이지만 언제 중상자가 나올지 모를 일입니다.”
강호문파의 집법장로격인 이령이 말했다.
“그래도 좀더 두고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지금 이 상태로는 조금 시일이 걸릴 듯합니다. 중간조정도 많이 필요할 듯싶고요.”
십령이 조용히 말했다. 그는 마천각 출신의 참가자들을 주로 관리담당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백 년의 세월 동안 얽히고설킨 복잡한 실타래 아니겠나? 하나하나 풀어갈 수밖에. 후우, 정말 반근착절(槃根錯節)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군 그래!”
원탁의 상석에 앉아 있는 혁중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근착절(盤根錯節). 구부러진 나무뿌리와 울퉁불퉁한 나무의 마디, 세상일에 난관이 많다는 뜻이다.
젊은 혈기 때문인지 참가자들을 제어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 아이들이 빨리 눈치 채줬으면 좋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빨리 알아채는 게 이득일 테지요.”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들이 빨리 알아채면 알아챌수록 좋을 걸세. 이미 시험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