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비뢰도 14권 2화 – 시야

시야

– 대공자 비 대비류연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넌 이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느냐?”

사부가 말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보는 것이다! 너의 시야는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담으며

어느 것을 간파할 수 있느냐?”

그때는 사부의 말에 막상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붕(大鵬)의 눈을 가져라!”

사부가 그렇게 말했던 것만은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선수교체를 해도 될까요?”

상대의 의향을 떠보는 아주 예의바른 말과 함께 비류연은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용휘 앞으로 걸어왔다. 의향을 떠본 것까지는 좋으나 그 대 답을 듣기 전에 움직인 것이 조금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류연…, 자네…….?”

팔목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모용휘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기숙사 동거인을 쳐다보았다. 절박함과 초조함에 심장이 비틀어질 것만 같은 자신과는 다르게 비류연은 차분한 태도로 미소 짓고 있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순간 모용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비류연이 저 어둠 속의 괴인을 물리쳐줄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비록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취미는 없지만 자신을 이 정도 궁지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정체불명의 괴고수를 ‘그’ 비류연이 감당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네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네!”

모용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건 자네의 판단이지!”

비류연의 대답은 간결했다.

물론 모용휘도 비류연이 주변의 싸늘하고 냉소적인 평가처럼 단지 운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눈과 귀가 있다면 결코 그렇 게 단순하고 간단하게 판단할 수는 없으리라. 물론 출신성분도 알 수 없는 비천한(그들이 주장하기로는) 자에게 순번이 밀려났으니 그런 식으로 비하하고 폄하하고 비아냥거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고 입을 다문다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알 수 없는 잠재력을 지닌 이 친구라 해도 이번 일 만큼은 감당하기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그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 금 죽음을 각오하고 괴인을 막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 해도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동안 피땀 어린 훈련과 뼈를 깎는 수련의 결과가 겨우 이 정도였나 생각하니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모용휘야! 모용휘야! 그동안 너는 너무 자만했구나!’

뭐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무재요, 검성(劍聖)의 후계자란 말인가? 칠절신검(七絶神劍)이란 별호가 낯부끄러워졌다. 오늘 해가 뜨기 전에 육신이 남아 있 으리라고 보장하지는 못하는 처지였지만 말이다.

“죽을 목숨이 하나 더 늘었군!”

밤을 은은히 비추는 별빛마저 얼려버릴 만한 기세가 담긴 지독한 냉기. 차가운 어둠의 결정 같은 그림자 속의 그림자는 ‘냉정 침착이란 언어를 형태로 빚어놓은 존재처럼 동요를 모르는 듯했다.

“사람 같지 않은 놈이시군요!”

비류연이 이내 이죽거렸다.

“흐흠…, 흐흠…, 흠…, 헤에…….”

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모용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의 동거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비류연은 문제의 괴인이 있는 곳을 향해 시 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묻는 것이 아닌가.

“이봐! 휘! 자네는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나?”

느닷없는 질문에 모용휘는 어안이 벙벙했다. 금세라도 피와 살이 튈 듯한 격전장의 한복판에서 나올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류연은 태평하기만 했다. “모르네.”

할 수 없이 모용휘가 대답한다. 이런 한담이나 나눌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상대를 봐야만 해. 자신의 시야에 상대방을 포착해야 하는 거지. 상대를 인식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그에 대한 힘도 행사할 수 있거든!”

비류연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가볍고 생기발랄한 것이었다. 그럴 때가 아님에도.

“그…, 그건…….”

“당연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모용휘의 반문에 비류연이 선수를 쳤다. 갑자기 말이 끊긴 그는 할 수 없이 입을 다문 채 불만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 전혀 모르는 듯 행동한다네. 아마 진짜 모르겠지. 이런 간단한 기본 중의 기본조차 말이야.”

“…..”

이 친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과연 뭘까? 그리고 이런 긴장감 없는 대화를 계속 나눠도 되는 걸까? 다행히 어둠의 건너편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럼 역(逆)으로 상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

잠시 생각하던 모용휘가 그 답을 내놓았다.

“상대의 시야 밖으로 나가면 되겠군.”

그러자 비류연이 느닷없이 박수를 쳤다.

“바로 그렇다네. 역시 2년차 관도 중 최우수 성적을 자랑하는 나의 동거인답구먼. 난 그걸 ‘시야 벗어나기’ 혹은 ‘인지회피(認知回避)’라고 부르지. 미안하지만 이 번 답안은 점수에 반영되지 않는다네. 그 점에 대해서는 날 원망 말게!”

“상관없네.”

지금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일부러 그러는 건지 비류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네의 대답대로 상대의 인지와 지각에서 자신의 몸을 빼내는 일이 바로 상대의 실력행사에서 자신의 몸을 지키고 피하는 길이라네. 그렇다면 상대를 이기기 위 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나?”

비류연은 이런 문답이 무척이나 재미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모용휘는 어느새 싸움에 대한 강론을 처음 듣는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지! 그래, 상대를 이기려면 자신은 상대의 인지영역에서 몸을 빼고 상대를 자신의 인지영역 안에 들여놓으면 되는 거라네. 이것이 바로 ‘인지 (認知)의 간격(間隔)’이라는 녀석이지. 그리고 적을 이기기 위한 일 단계이기도 하고!”

모용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것은 그가 알아오던 거리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매일같이 실없이 놀기만 하던 저 친구의 머리에 이런 통찰력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주의 신비도 이보다 더 경이롭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이제 더 들어줄 시간은 없었다. 기다리기가 지겨워졌는지 어둠 저편에서 풍겨나오는 살기가 더욱더 증폭되었던 것이다.

“이곳은 내가 책임지겠네! 류연, 자네는 어서 은 소저를 모시고 이 자리를 피하게!”

어둠을 향해 애검 성휘(星輝)를 겨누며 모용휘가 외쳤다. 비장하고 장중(?)해야 마땅할 장면이었지만 비류연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자세하 게 설명해줬는데도 모르다니…….

“억지 부리기는! 지금이 알량한 자존심이나 내세울 때인가, 바른생활 청년?”

“뭐, 뭐라고!”

그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매서운 눈빛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이 사나운 눈빛에도 긴 앞머리 청년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자네는 왜 아직까지도 여기에 서 있는 건가?”

갑자기 비류연이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무슨 말인가? 느닷없이?”

비류연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참 답답한 친구로구먼. 내가 그렇게까지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는데 아직까지도 이해를 못했나?”

“난 자네가 해준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네!”

그러자 딱하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쯧쯧, 자네 정말 이해력이 떨어지는군그래. 그렇게 머리 나쁜 녀석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자랑은 아니지만 여태껏 머리가 나쁘다거나 이해력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은 역사가 없었다. 반면 지나치게 머리가 좋고 이해력이 뛰어난 바람에 주위의 시샘을 받은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비류연에게는 그의 그런 과거 전적 따위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모용휘가 약간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서 있자 비류연은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자네, 지금 저기 저 어둠 속에 틀어박혀 있는 상대를 볼 수 있나?”

비류연이 말하는 ‘본다’가 단순히 사물을 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모용휘도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없…네!”

정직하게 모용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자네도 저자의 시야를 벗어나 있나?”

순간 모용휘의 표정이 급속도로 경직되며 안색 또한 시커멓게 변했다.

“것 보라고! 전혀 이해를 못했잖아! 내 이야기는 왜 자네는 상대를 자신의 인지영역 안에 확보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상대의 인지영역에 완전히 사로잡혔는데도 아 직까지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냐는 뜻이었어!”

심장을 잘 갈린 비수로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후두부가 둔기로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쯧쯧, 지금 자네의 꼬락서니를 보라고! 좋게 봐줘도 서 있는 게 고작, 나쁘게 보면 겉도 속도 사이좋게 엉망진창 와장창이라구!”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혹평. 하지만 한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는 충분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이날 받은 모욕과 이날 느낀 부끄러움은 모용휘의 심장 속 깊숙이 보이지 않는 언어로 새겨졌다. 그는 이때의 감각을 후일까지도 결코 잊지 못했다.

“…..”

비류연의 지적은 비록 폭언에 가까웠지만 너무도 정확했기에 이 바른생활 청년은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귀여운 녀석! 이런 데서 친구 목숨 따위(?)를 내던져서 살아나봤자 나중에 꿈자리만 뒤숭숭하고 남는 것도 없다고.”

손해 보는 짓은 ‘’죽여도’ 안 한다! 그것은 비류연의 심장에 새겨져 있는 만고불변의 의지 강인하고 초절한 신념이었다.

“가라!”

베어진 자상 사이에서 연신 흐르는 피로 백의를 붉게 물들이며 서 있는 모용휘를 쳐다보며 비류연이 말했다. 담담한 어조. 하지만 그 안에는 강인한 힘이 서려 있 었다.

“하지만..

자신의 싸움을 남에게 맡긴다는 게 여전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걱정 말라고! 이 빚은 추후에 이자까지 쳐서 듬뿍 받아낼 테니깐! 나중에 발뺌하지나 말라고!”

여유만만한 미소.

잠시 자신의 의지와 쓰러진 은설란 사이에서 고민하던 모용휘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고 있는 그녀를 부서질세라 조심스레 안아들어 등뒤 에 업었다.

비류연의 시선은 모용휘와 은설란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 잠긴 존재에 대한 경계를 한시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미안하네!”

은설란을 업은 직후 잠시 머뭇거리던 모용휘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사과했다. 자신의 피에 부끄럽지 않게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달려온 이 청년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은 이는 극히 드물다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약함이 불러온 죄! 지금 이 순간 청년은 그 어떤 때보다 극심하게, 그리고 맹렬하게 가시 돋친 채찍으로 자신을 세차게 매질하듯 스스로를 책망 하고 있는 것이다.

“사과보다는 금전이지! 나중에 결산할 때 도주하지나 말라구!”

역시나 태연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돈에 대한 자네의 집착에 대항할 허튼 생각 따위는 품고 있지 않으니 걱정 붙들어매게나!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무모한 행동은 취할 생각이 없으니 말일세. 왜 냐하면 나도 목숨이 아깝다는 것쯤은 알거든!”

모용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농담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마음 씀씀이라 할 수 있었다.

“농담을 할 때는 좀더 얼굴을 펴고 웃으라고!”

비류연이 그 미숙한 표현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도 금전문제에 관해서라면 그가 얼마나 철저한지 모용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가!”

비류연의 외침과 동시에 은설란을 등에 업은 그가 반대편으로 신형을 날렸다. 부상당한 몸이고 한 사람분의 무게를 더 얹고 있는 그였지만 그 움직임은 한 마리의

표범처럼 날렵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돌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어둠 속에서 흘러나온 저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살기가 뻗어나왔다.

하지만…, 그 행동은 계속해서 이어지지 못했다.

모용휘는 달렸다. 등뒤에 은설란을 업고.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그의 등을 압박했지만 그 감촉을 천천히 음미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담을 넘고 또 넘으며 진로를 가로막는 적을 베면서 달렸다. 친구들 이 있는 곳을 향해….

다행히 그곳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척이나 화려하고 소란스럽고 요란했던 것이다.

콰쾅! 쾅!

챙챙! 채채챙!

으아아아악! 으악! 악악! 으아악! 크헉! 켁! 꾸웨에에엑!

장원의 한쪽에서 야밤의 하늘을 요란스레 뒤흔드는 검격음과 함께 비명이 울리며 불꽃이 치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길 찾기 쉽게 해주는군!’

눈과 귀가 있는 자라면 절대 길을 잃을 수 없도록 확실한 길잡이가 그의 몸을 이끌어주고 있었다.

슈욱! 슉! 슉슉슉슉슉!

그러나 방향은 확실하다 해서 그 길 사정까지 편한 것은 아닌 듯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열두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십이수라쇄성진(十二修羅碎星陣)

열둘의 수라가 별을 부순다는 거창한 이름을 지닌 진법이 순식간에 모용휘의 앞에 펼쳐졌다. 그들의 임무는 단 하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자를 산 채로 회수해오는 것이었다.

발동된 진법으로부터 거센 힘이 뿜어져나와 모용휘의 전신을 압박했다.

“여자를 내놔라!”

선두에 선 흑의복면인이 외쳤다. 그의 무기는 수백 명의 피를 머금은 듯 살기 넘치는 거치도(鋸齒刀)였다.

챠랑!

모용휘는 달리는 신형을 멈추지 않은 채 말없이 ‘성휘(별이 빛남)’라는 이름을 지닌 애검을 뽑아들었다.

‘휘야! 검이란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이 있을 때 더욱더 밝고 찬란한 빛을 뿜어낸단다. 너도 언젠가 너만의 소중한 것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너의 검이 더욱 찬란 하게 빛나기 위해서 말이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갑자기 뇌리 속에 떠오른다.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림자는 내가 아니어도 좋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그녀를 지킨다!”

순간 모든 망설임과 번뇌가 그의 마음속에서 씻은 듯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지극한 평온이 찾아들었다.

“비켜라! 앞을 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문답무용!

백색 투명한 모용휘의 검끝에서 별빛 같은 검기가 빗살처럼 뿜어져나왔다.

은하유성검법(銀河流星劍法)

검기(劍技) 오의(奧義)

성광만리(星光萬里)

파바바바밧!

유성우의 소나기가 적들을 휩쓸고 지나가며 길을 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선보였던 검기보다 한층 더 밝고 강한 빛을 지닌 검광이었다.

쇄성진은 그 이름값을 못한 채 밤의 어둠 속으로 산산이 부서져 먼지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괜찮겠어요?”

흠칫 어둠 속의 존재가 손을 멈추었다. 비류연은 모용휘에게 향했던 살기가 걷히는 대신 또 다른 살기의 다발이 얼음송곳 같은 시선과 함께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 꼈다.

“…자네인가? 나의 움직임을 끊은 자가?”

그는 도주하는 먹잇감을 공격하지 않은 게 아니라 공격하지 못했다. 그의 사냥은 저지당했다. 그것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애송이의 손에 의해.

그림자는 애당초 두 사람의 도피를 손놓고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모용휘는 어찌 되든 은설란만은 절대 놓아줄 수 없었다. 아직 처치(處置)’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도 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그림자 속의 괴인, 대공자 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지옥의 불길 속에서 수천 수만 번의 담금질을 견디며 단련된 그의 본능이 두 사람을 공격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뇌리를 강렬하게 울리는 경고. 그 경고의 실체를 파악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차갑게 식은 한광(光) 어린 두 눈이 비류연을 향한다.

비류연? 분명히 최근에야 겨우 보고서를 통해 들어본 이름이었다. 특이하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요주의 인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재미있고 특이할지는 모르지만 그저 어디에나 있는 그렇고 그런 별종 중 한 명일 뿐, 그가 자신의 행보에 걸림돌로 작용할 날이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설마 내가 저 두 사람을 공격하면서 생기는 빈틈을 경계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저자가 그 순간의 경계를 뚫고 들어올 만큼의 고수란 말인가?”

분명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본능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본능은 정직하다. 자신의 주관적이고 왜곡된 판단이 듬뿍 가미될 수 있는 상념의 파편보다 때로는 육감(六感)에 의해 발동되는 본능이 훨씬 더 정확할 때가 종종 있다.

‘저 인간이?’

어둠과 밤의 저편에서 한 남자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유유히 서 있다. 하지만 그 얼굴은 긴 앞머리에 가려 자세히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험해주지!’

과연 자신을 놀라게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 결심을 대변하듯 기광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모용휘는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뇌탄에 의해 요란스레 날아간 듯한 세 개의 그을려진 문과 두 개의 무너진 담장을 지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곳에는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무척이나 뜨거웠을 순간들을 지난 채 시꺼먼 숯덩이가 되어 사방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설란 언니!”

그와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석류하(石榴霞)였다. 그녀는 잠시 이 요란스럽고 황당한 사건에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중이었다. 석류하는 방금 전 자신이 목격했던 굉폭(轟暴)한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마치 지옥의 나찰(羅刹)과도 같은 광폭포악(狂暴暴惡)함을 보여준 사 람이 자신과 같은 붉은색을 좋아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할까?

이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지금 자신이 불행의 별들에 감싸여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 리가 없는 그녀였다.

“언니는 괜찮은가요?”

모용휘의 상처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오늘 만난 잘생긴 미장부보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언니의 안부가 더 중요했다.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았을 뿐 괜찮습니다.”

근심어린 시선을 받은 모용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해주었다. 그제야 석류하는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미녀에게 참혹한 일이 생기는 것은 전 무림의 손실이라 할 수 있지.”

괜스레 끼어든 장홍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한다.

“악!”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동조하던 남궁상은 진령에게 호된 꼬집힘을 당하고 말았다.

자업자득(自業自得)!

“그 자식은?”

물론 모용휘는 염도가 말한 ‘그 자식’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비류연이 만일 여기 있었다면 사부 보고 그 자식이라니! 참으로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제자로구 만!’ 하며 한탄했을 것이다.

“아직 뒤에 남아 있습니다!”

나예린의 얼굴에 순간 동요가 떠올랐다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입을 굳게 다문 그녀에게서 봉오리를 꼭 닫은 얼음꽃 같은 차가운 한기가 풍겨나왔다. 섬 섬옥수가 조심스럽게 이변을 느끼고 있는 가슴 부위로 다가간다.

두근두근!

표정은 이성이 바라는 방향대로 움직여도 심장은 그렇게 잘 조절되지 않는 모양이다. 불꽃 위에 얼음을 덮어놓는다 해서 그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지지는 않는다. 염도의 시선이 모용휘의 전신을 단숨에 훑고 지나갔다. 피를 머금은 예리한 상처들이 그의 부리부리한 눈에 들어온다. 하나하나가 모두 범상치 않은 작품들이었 다.

“상대는 강하냐?”

“강합니다.”

모용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긴 널 그 정도까지 곤란하게 만든 상대일 테니깐!”

“죄송합니다!”

그것은 동료를 두고 온 비겁함에 대한 사죄였다.

“괜찮다! 그 괴물·자·식’이라면!”

염도가 단언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자네인가?”

그림자가 물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곳에 나 이외의 다른 자가 없다면요.”

마치 자기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언급하는 듯한 말투. 딴청을 피우는 것이다.

“혹시 모르잖아요? 이곳에 나 이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그 위에 조금만 의심의 조미료를 쳐서 들으면 나 이외의 다른 이가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묘한 울림을 지닌 말이기도 했다. 애매모호한, 어찌 보면 깔 보고 농락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러나 대공자 비는 불쾌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동요를 모르는 한기 어린 시선은 여전히 비류연의 볼을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다.

“너 말고 다른 자는 이곳에 없다!”

단호한 대답. 그의 낮고 차가운 말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모용휘가 공격당하지 않은 게 아쉽군! ‘

비류연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내 친구 놈을 향한 살기를 거두었죠? 충분히 출초할 수 있었을 텐데.”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몸짓을 하며 비류연이 애석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태도였다.

“불만…인가?”

높낮이 없는 나직한 저음이 어둠 저편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저래 봬도 강호에서 아주아주 잘나가는 녀석이라구요. 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융통성은 한참이나 부족한 데다가 먼지 한 올, 터럭 한 가닥 용서치 않는 결벽증 까지 달고 살지만 말이에요. 미리미리 제거해뒀으면 나중에 행사하는 데 이득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안 그런가요?”

마치 모용휘가 그의 손에 공격당하지 않은 게 불만인 듯한 모습이다.

“……”

대공자 비는 어이가 없는지 잠시 침묵했다.

“…그렇게 아쉽나, 내가 그를 공격하지 않은 것이?”

“뭐, 쪼끔.”

다시 한번 잠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침묵은 금세 깨어지고 대공자의 입에서 여전히 낮고 차갑고 냉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러자 이번엔 비류연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 알아챘어요? 제법인데요!”

이런 식의 어린애들에게나 쓰는 입 발린 칭찬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지라 대공자에게는 나름대로 신선한 감탄이었다. 속을 사정없이 긁고 분노를 자아낸다는 소소한 점만 뺀다면 말이다.

“내가 만약 출수했으면 그 간격을 틈타 충분히 날 죽일 수 있었다는 건가?”

“수고는 훨~씬 덜 수 있었겠죠.”

지금이라고 해서 죽이지 못할 건 없다는 자신감의 표출인지 비류연의 얼굴은 여전히 생글생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재미있군!”

처음으로 그림자의 목소리에서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미약하나마 떠올랐다.

“너의 실력이 과연 너의 자신감을 뒷받침해줄 만큼 대단한지 궁금하군.”

“아, 내가 좀 겸손하긴 하죠.”

비는 비류연에 대한 가장 현명한 행동을 취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말을 무시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강렬한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약속했다! 나의 일초를 피한다면 살려주겠다고!”

“오만한 약속을 내뱉는 사람을 난 꽤 좋아하죠.”

“그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가 선언하듯 말했다.

“호오?”

굉장한 자기과신에 소심한(?) 비류연은 놀라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그는 상대방이 매우 염려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친절해지는 것을 선택했다.

“재미있군요! 그러나 금방 후회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상책일 텐데요?”

“난 여태껏 일구이언을 한 적이 없다.”

순간 대공자의 그림자가 묻혀 있는 공간으로부터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그것은 마을도 도시도 단번에 삼켜버리는 해일과도 같은 기세의 순도 높은 살 의였다.

“자, 받아봐라! 그럼 살려주마.”

동일한 조건, 동일한 약속, 그 변치 않는 절대적인 자신감. 그 말은 한 청년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일게 만들었다.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군요.”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하고 적당적당을 모르는 사람들은 혐오스럽다며 비류연은 궁시렁거렸다.

죽음을 향한 길을 열 것만 같은 어둡고 무거운 기세는 점점 더 중첩되고 있었다. 어두운 기운이 하늘까지 미쳤는지 검은 구름이 밤하늘에 떠 있는 북두칠성과 그 중심인 북극성의 휘광을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이거, 이거……. 나도 좀 진지해져야겠는걸!’

보통이 아닌 존재가 지금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비류연도 인정해야만 했다.

이젠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슬슬 눈을 뜰 때인가…….”

여전히 느긋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뇌까렸다.

미소저 구출대들과 함께 과격한 돌파를 서슴지 않던 염도의 질풍신뢰(疾風神) 같은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별이 뿌려진 묵빛 비단포로 향했다. 이미 몇 개의 대문과 얼마만큼의 적들이 그의 도파(刀波) 아래 분쇄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글거리던 시선이 차갑게 식으며 한 곳을 향한다. 그곳은 그들이 있는 곳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밤이 동요하고 있다!”

불길한 기운이 염도의 전신을 엄습했다.

“노사님!”

약간 다급한 목소리 하나가 그를 부른다. 장홍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염도는 약간 놀란 시선으로 장홍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녀석이 나랑 같은 걸 느꼈다는 건가??

뭔가 하나쯤 속에 숨기고 있는 능구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하튼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단기간에 돌파한다!”

차갑게 식었던 그의 눈동자가 그의 애도 홍염과 함께 또다시 세차게 불타올랐다.

나예린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한 채 앞만을 바라보며 달렸다. 도저히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그녀를 수호하듯 뒤따르는 그녀의 사저이자 보호자 격인 독고 령으로서도 감히 말 한마디 붙일 수가 없었다.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검을 쉬지 않고 휘두르며 달려가던 독안(獨眼)의 여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뇌까렸다.

“저거 화난 거예요?”

자신은 아무리 훑어봐도 알 수가 없었기에 이진설은 아직도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두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반문했다. 그녀가 보기에 나예린의 얼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달처럼 고아했으며 그 위에는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응, 저건 분명 화내고 있는 거야. 틀림없어! 저런 표정을 지을 때 옆에 있다면 너도 충분히 조심하도록 해라!”

어디가 어떻기에 화내고 있다고 하는 걸까? 이진설로서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 천무제일화(天武第一花)의 수호역을 자처하는 이의 시각은 보통 사람 과는 한참이나 다른 모양이었다.

“사매…, 화났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독고령이 물었다. 흠칫 나예린의 몸이 순간 굳어지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아니요! 화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예린이 성큼 무리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섰다. 말릴 새도 없었다. 이미 그녀의 애검 ‘한상옥령’에는 차가운 서리가 구름처럼 감돌고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한기가 나선이 되어 춤추듯이 검을 타고 뿜어져나왔다.

한상옥령신검(寒霜玉靈神劍)

비전(秘傳) 오의(義)

빙접난몽(蝶亂夢)

허공에서 얼음으로 된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무리를 지어 화려하면서도 싸늘한 춤을 추었다. 마치 순백의 나비들로 세상이 가득 채워진 꿈의 한 부분을 잘라놓은 듯한 몽환적인 광경夢幻境)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지만 한 마리 한 마리가 치명적인 위력을 품고 있었다.

천상선녀의 섬섬옥수 끝에서 펼쳐지는 오채극광(五彩極光)에 휩싸인 신기루 같은 나비들의 춤에 혼백이 홀린 적들이 가차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녀가 뿜어낸 검파의 여파로 주위에 자욱한 안개가 감돌았다. 운무가 그녀의 전신을 백색 비단처럼 휘감는 가운데 그녀는 밤하늘 같은 눈동자를 반개한 채 조용 히 말했다.

“전…, 화나지 않았어요!”

이진설은 그 환상 같은 광경을 넋 놓은 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게 더 무섭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예린에게서 무섭다는 감정을 느 끼기는 그녀로서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걱정마라!”

다가가기조차 힘든 그녀의 장벽을 허물고 말을 건 이는 염도였다.

‘걱정. ..? 얼굴에 감정이 드러난다??’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뺨과 입가를 만져보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종류(타인에 대한 ‘염려’라는 것)의 감정을 느꼈다는 것조차도 놀라운데 그것이 마음속에서 떠올라 표면으로 나타나기까지 했다니……. 나예린으로서는 충 분히 경악해도 손해 보지 않을 만큼 희귀한 체험이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염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일랑 접어둬라! 헛수고다. 고작 이 정도로 죽을 녀석이었으면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고생하지도 않았어!”

정말 그 말대로였다. 염도에게는 오히려 너무 끈질기다는 게 문제였다.

‘그곳에서 뒈지길 원한다고 해도 그래 주지는 않겠지??

찝찝한 얼굴로 적발의 도객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그의 이런 복잡미묘 뒤숭숭한 생각들을 이해해줄 만한 유일한 존재가 웬수이자 견원지간인 빙검이라는 게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여린(?) 가슴을 가장 참혹 하게 난도질하는 슬픔과 절망의 쌍검합벽이었다.

랜덤 이미지